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 해서 서로 만날 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살고 있다면 서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같은 장소에 늘 함께 있던 여자를 잃었다
잃은 후에 얻은것이 있다면 산자와 죽은자의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배가 고프다"
"오늘은 당신이 참 이쁘다"
"I love you so much more than ever"
산자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어도
죽은자는 듣는지 아니 듣는지 대답이 없다
성경은 두개의 시간을 아야기 한다
하나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로 시작한
크로노스 (chronos) 이고
다른 하나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시작하는 카이로스 (kyros) 이다
창세기는 크로노스의 시작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카이로스의 시작이다
창세기는 흙에 비추이는 태양을 따라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로 크로노스가 흘러간다
요한복음은 세상 (사람)을 비추이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을 따라서 카이로스가 흘러간다
창세기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가 여섯개 반복하다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가 빠진 일곱째의 날
안식일이 등장하고
요한복음에는
첫날이 지난 "이튿날(요1:29)"
"또 이튿날 (요1:35)" 그리고 다시 "이튿날 (요 1:43)" 로
나흘을 흐른다음 "사흘째 되던 날 (요 2:1)" 이라고 하는
가나의 혼인식이 등장한다
흙에서 나온 첫째 아담에게 주어진 날짜 (크로노스)와
하늘에서 내려온 둘째 아담에게 주어진 날짜 (카이로스)는
각각 안식일과 가나의 혼인잔치로 매듭이 지어진다
참 이상하게도
참 안타깝게도
유대인과 율법은 크로노스에 속하고 안식일이 종착역이고
이방인과 은혜는 카이로스에 속하여 가나의 혼인잔치가 종착역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의 법을 섬기고
마음으로는 은혜의 법을 섬긴다고 암시하던 사도 바울의 기록들
내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로마서 7장 23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아!
홍매화 앞세우고 화개의 봄은 찬란하게 찾아 오는데
나는 아직도 크로노스의 사랑을 잊지 못하여 옛님에 대한
그리움에 얽메여 살고 있다
옛님은 이미 떠나 갔어도
아직도 옛날에 얽메여 사는 초로의 인생을 손잡고
가나의 혼인잔치로 데불고 가 줄 그 누가 없겠는가?
적어도 새 신랑을 만나러 올 때는
옛 신랑인 율법과는 헤어지고 오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간음이라고 하는데...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로마서 7장 전문)
아직도 옛것에 얽메인 내가 새여인에게 갈찌라도
간음은 불가피한 나의 죄목이란 말인가?
"귀있는자는 들을찌어다"
산자(카이로스)가 죽은자(크로노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크로노스에 속한 죽은자들이 하늘나라에까지
이고 지고 가고 싶은 율법은 산자의 만나인가
죽은자의 양식인가?
광야의 만나도 먹고 가나안의 양식도 함께 먹는 이상한 동네
그러나
어김없이 크로노스의
봄은 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