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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1

(나성 교회 조병서 목사의 후임으로 두 명의 이름이 대회에 제출이 되었다고

했다. 후보자가 두 명이나 되어서 그런지, 대회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를 못하고 자꾸 시간만 지나갔다. 연재#30 끝부분)

3. 나성 교회- 제 2 부


하루는 집으로 전화가 왔는데 Los Angeles 비행장이라 한다.

그 당시 한국에서 나성으로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나에게 온다는

연락을 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우들이나 나의

자녀들에게 부탁을 하여 차편을 마련하여 편리를 보아 드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연락도 미리 없다가 비행장에서 전화가 왔는데

이영린목사의 가족이었다. 조병서 목사도 이미 일을 그만두신

후인지라 연락을 해도 잘 되지가 않는데 마침 태국이가

“비행장에 나갈 수가 있다.”해서 그리하라 했다. 그런데 비행장에 나간

태국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비행장에 나와 보니 이영린목사 가족 외에

저의 선배인 김영환 씨 가족도 왔다.”는 것이었다.

김영환 씨는 한국에서 위에 혹인지, 암인지가 생겼었는데 특별한

기도를 통해 극적으로 회복이 되어 한동안 교회 내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전화로 알아보니 김상용 장로와

그 외 한 분이 더 차를 가지고 갈 수가 있어서 세 명이 비행장에 가서

모두 모시고 우리 집으로 왔다. 모든 분들에게 점심을 대접한 후에

몇 사람이 여기 저기 알아보아 두 가족의 거처를 정하고 갔다.

당시에는 빈 아파트들이 있어서 그날로 들어 갈 수가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누가 나에게 “목사님, 교회의 새로운 뉴스를

아십니까?”하기에 “그 뉴스가 대체 무엇이오?”하고 물었더니

“저, 이영린 목사도 나성교회 담임목사가 되겠다고 대회에

신청서를 제출했답니다.”라고 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대회에는 이근화 박사와 최희만 형제,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어서 처리를 못하고 있다는데 이제

세 명이 되면 일은 점점 더 힘들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살고 계신 이 영린 목사를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대회에

신청서를 낸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사실이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 생각에 현재 대회에 목사의 자리를 놓고

이근화 박사와 최희만 형제가 신청을 한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또 한 명이 신청을 하여 세 명이나 되면 대회에서 처리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하니 이왕 신청한 것인데

대회의 답을 기다려 보지요 하기에 더 이상 더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매우 착잡했다. 세 명 모두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오,

나와 절친했던 사람들의 자제 분들이었다. 또 아직 정식교회도 아닌데

얼마 전까지는 구하기도 힘들었던 목사자리에 세 명이나 신청을 했으니

대회에서도 참 힘이 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만약 이 영린 목사가

미리 대회에 신청을 했는데 후에 이근화 박사가 신청을 했다면

이근화 박사에게도 꼭 같은 권면을 했을 것이다.

 

여하간 이 세 분들이 그 후에 대회와 어떤 연락들을 취했는지,

또 대회에서 개인적으로나 또는 세분 모두를 함께 불러서

어떤 의논들을 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얼마 후에 대회에서

나를 보자고 했다.

당시 교회내의 분위기로는 대회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오해받을 여지(餘地)가 많았지만 나를 믿고 부르는 대회의 요청을

마다고만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통역이 필요한 나로서는

세 사람 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분들이었지만 대회에서 나를

부른 것은 이 세분에 관한 것이라 생각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통역을 부탁할 수가 없어 아들 태중의사와 함께 대회로 갔다.

그동안 대회와 최희만 형제 사이에 무슨 의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날 대회에서는 나에게 이근화 박사와 이 영린 목사에 관해서만 물었고

최희만 형제에 관한 것은 한 마디도 묻는 것이 없었다.

“정 목사, 이근화 목사를 잘 아십니까?”

“네, 잘 아는 사이입니다.”

“이근화 목사를 안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으니 수 십 년이 되었고 내 친구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이 영린 목사도 아십니까?”

“네, 이 영린 목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나와 친구사이이며

이 영린 목사는 갓난 아이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근화 목사가 서울위생병원의

원장으로 있었다는 것과 이 영린 목사가 삼육대학의

교수로 있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네, 그 모든 것이 다 사실입니다.”

“그러면 정 목사께서 이 두 분에 대해 아시는 대로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이근화 목사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근화 목사는 이 영린 목사 보다 나이가 좀 많습니다.

이근화 씨는 잘 믿는 신실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신학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의학방면에 뛰어나 의학박사가 되어

우리교회병원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서울위생병원 원장으로

오래 일했고 병원을 대표해서 여러 해 동안 연합회행정위원으로도

일을 했기 때문에 저와 같이 여러 가지 교회 일을 의논하곤 했습니다.

신학은 하지 않았지만 선교열도 있어서, 매해 여름이 되면

간호원들을 데리고 지방으로 다니면서 순회 진료와 선교에도

많은 힘을 쓰신 분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 영린 목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 영린 목사도 신실한 우리교회 가정에서 출생했고 우리

삼육학교를 졸업하고 삼육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필리핀에 있는

우리대학에 유학하여 졸업을 하고 다시 삼육신학교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교수 일을 잘 하던 분입니다. 이 영린목사도 역시

선교열이 많아서 매 안식일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인근지역과

또 지방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선교한 분입니다.”

 

대회에서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감사하다고 하여 나는 태중이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교회 일을 시작 할 때부터 교회기관에서

정한일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살아왔다. 이 때에 대회에서 세 사람 중에

누구를 교회 지도자로 정하던지 나는 교우들에게 대회의 뜻에

순종하도록 권면(勸勉)하였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세분과,

모든 교인들이 누가 지도자로 선정되던지 대회의 뜻에 따르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드렸다.

대회에서는 두 분에 대해 한국연합회, 삼육대학, 위생병원 등

각 부처에 조회를 해 본 후에 이근화 박사를 나성교회의 담임목사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했다. 그러나 이근화 목사가 지도자로 선정이 되자,

내 생각과 내 소원과 내 기도와는 달리, 몇 분들과 그의 가족들이

이근화 박사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도를 지나치고도 남았다.

이 영린 목사는 매우 말을 삼가는 눈치였지만 그 외의 분들은

이 근화 박사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이 도를 넘었다.

얼마 후에 들으니 이근화 씨에 대해 별의별 험한 말들과

인격적인 험담(險談)들이 대회에 접수가 되어 할 수없이 대회는

결정을 다시 보류하고 그 일들에 대해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급기야(及其也)는 서울 위생병원 원장 닥터 루에게 까지

이근화 박사에 대한 조회를 한 결과 닥터 루에게서

그런 일들이 없다는 회답이 오고 나서 대회는 다시

이근화 박사를 나성 교회 지도자로 확정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회의 결정과 교회내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대회에서 나와서 이근화 박사를 나성교회 목사로 통고하는

과정도 몹시 힘이 들었다.

이근화 목사가 나성교회 정식목사로 임명이 되어 교회 앞에 통고가

된 후에도 그분은 교회지도자의 일을 시작도 할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 되거나 끝나는 시간에는 이근화 목사에게

삿대질이요, 고성으로 다툼이 계속 되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나 같은

사람은 듣기에 거북하다 못해 창피하기가 말 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에 이근화 목사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순진한 교인들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금요일 저녁예배는 물론이요, 안식일 설교예배가

끝나면 이제는 나에게까지 듣기 힘든 말들은 물론 고성에 삿대질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어른에 대한 말과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회고해 보면, 내가 대회의 결정에 따르자고 교회에서

권면한 것이 원인이거나, 아니면 대회가 나를 불러서 들어갔었다는

말이 나가면서 마치 내가 대회에 제안이라도 해서 이 근화 목사가

결정이 되고, 다른 후보자가 목사로 결정이 되지 않았든가, 또는

후보명단에서 제외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리스도인다운 면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중 한 가지는, 몇 명 되지도 않는 나성 교회의

사역자 문제로 감정을 가지고, 순교하신 최태현 목사의 일을,

있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나와 관계가 있는 듯이

말을 만들어 거론하며 나에게 삿대질과 고성으로 대들었던 일이다.

순교하신 최태현 목사의 일을 이런 슬픈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내게

대들던 이유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바 있으나 좀 더 상세하게 말하고 싶다.

 

당시에 우리 나성교회에 다니는 자매 가운데 배선명 이라는 분이 계셨다.

김 방앗간을 하시는 김명한 씨의 아내로, 이 집도 많은 자녀들이

도미하여 가족들이 나성에 살았다. 나의 아내는 배선명 씨와

절친한 사이로 지냈고 나도 부군(夫君)되시는 김명한 옹과 가까이

지났는데 그 사위되는 분은 장모님을 위하여 가끔 우리 교인들을

식사에 초대하곤 하였다.

한 번은 그 사위되시는 분이 저녁 초대를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에

이승일 목사, 황승일 장노(최희만 씨의 장인), 최옥만 씨

(최희만 씨의 맏형), 정진걸 씨 등이 거의 다 부부 동반하여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다가 순교하신 최태현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최태현 목사께서 종로 경찰서에

잡혀가 계실 때에 누가 주었는지는 모르나 다니엘서의 묵시 그림을

가지고 취조를 당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서슴없이

“그 때 그 그림들은 내게서 가져간 것일 꺼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의 그 말을 듣는 분들의 눈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이 되었으나 내가 한 말에 대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터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아마 최희만 씨나

최 옥만 씨 중 한 사람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그림을

목사님이 갔다 주셨습니까? 아니면 누구를 통해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주셨습니까?”하고 묻는데 무엇인가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느낌에 그렇게 따져서 묻는

말들에 대해 간단히 대답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준 것이라”고만 대답을 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내가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 그림을 내게서 가져간 분은 임종회 목사인데 그분은 나의

큰 아들 태혁이의 장인 되시는 양반이니, 나의 사돈이 되시는

목사님이다. 이 때, 소식에 의하면 임종회 목사가 지금 사경을

헤 메일 정도로 심하게 앓고 계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니엘

묵시에 관한 그림에 대하여 묻는 분위기로 보아 내가 만약

그 그림을 임종회 목사님이 나에게서 가지고 가셨다고

쉽게 대답을 하면 전후 사정은 모른 채 곧 임 목사에게 편지나 전화,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 직접 ”정 목사가 그러는데 당신이 그 그림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왜 종로 경찰서에

가지고 갔는가?”하면서 심문하듯이 이야기가 된다면 그분의 병 회복에

조금도 도움이 아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누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나만 말을 삼가고 참고 있다가

그분이 회복되면 자세한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최 목사님이 종로 경찰서에 계실 때에 정 목사가

다니엘 그림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풀려나지 못하시고 혹독한

취조를 받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조금 지나자 “최 목사를 고통 받도록 하려고 그림을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라는 더 심한 소문도 들려오기 시작을 했다.

도저히 그 소문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정동심이라는

사람이 최태현 목사님으로 하여금 그런 고통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서의 그림을 내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최 목사님이 순교를 당하신 것이 아니라 모함을 당해 돌아 가셨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 더욱 마음 아픈 일이었다.

 

또 임종회 목사가 최 목사를 그렇게 혹독하게 형벌을 받으라고

그림을 가져다주었을 리는 더욱 만무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렇게 되어서는 나 자신과 임 목사는 물론

최태현 목사님을 위해서는 더더구나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살고 있는 몬트레이 파크 딸네 집으로 최희만 형제를

오라고 했다. 최희만 형제가 그의 집안을 대표해서 말하곤 하기에

그를 불러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에 배선명 씨 사위 댁에 초대를 받았을 때,

부친 이야기가 나와 그 그림을 내가 주었다고 할 때에

당신들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제 정 목사가

그 그림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최 목사님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나와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리니 그것이 될 말인가?”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그 그림을 내어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 아버지가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으라고 내어

주셨을 것은 물론 아니실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해서 내어 주셨다면

그 그림을 나에게서 가져갔는데 라는 말씀은 꺼내지도 않으셨을 것이

자명하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최희만 군의 말을 듣고는 안심이 되었고 “이런 저런 소문이

들려와도 조금 지나면 없어지겠지” 하면서 지내었고 감사하게도

그 후로는 조용했다. 그런데 이제 이근화 목사가 나성 교회의

지도자로 선정을 받고 나자 이근화 목사에 대한 비난은 물론이요,

“대회의 결정을 받아드리자.”라고 말한 나에게까지 “왜 그림을

내어 주어서 우리아버지 (또는 우리 할아버지)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했는가?”하며 교회 예배만 끝나면 삿대질이요,

고성(高聲)이 들릴 때에는 정말 섭섭하기가 그지없었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옛 글에 “세 번 장마당에 범이 내려왔다.”는 거짓말을 전하니

사람들은 “정말 범이 내려 왔구나!”하고 믿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정동심이가 그 그림을 종로경찰서에 내어 주어서

최 목사님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자꾸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면서 가감이 되어 그것이 마치 정말인양 만들어

질 수 도 있겠다.”라고 생각이 되고 “그것은 순교하신 최 목사님은 물론,

그 가족과 또 순교자를 모시고 있는 우리교회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에 그 다니엘 그림을 종로경찰서로 가져가게 된

동기와 형편을 한 번 더 얘기 하고자 한다. 우리의 가족, 자녀들도

앞뒤의 경우를 잘 알고 있다가 행여 이 다음에 그런 소문이 혹 들린다

할지라도 귓가의 바람처럼 생각을 하고 그 소문에 대해 한 점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 다시 언급 하고자 한다.

 

1943년 1월,

합회총회가 열렸는데 무슨 연유인지 예상과는 달리 합회장 선거에서

최태현 목사님이 낙선을 하고 오영섭 목사가 선출이 되었다.

나는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전과자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이라 하여 아무 책임도 맡을 수가 없었고, 또 시대가 험악하여

누가 나에게 와서 교회의 돌아가는 형편도 알려주지를 않았다.

그저 총회 때 제일 뒷 구석에 앉아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총회선거위원회에서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아직도

나는 모른다. 새로 선출된 오영섭 목사는 신임합회장 인사를 통해

말씀을 하면서 “일본나라가 소위 ”대 동아 전쟁”이라는 것을

일으켜 놓아 시국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이때에 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할 각오가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험한 전쟁시기에 저렇게 이야기를 하면 일본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총회 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안식일교회 핵심목사와

간사들이 모두 종로 경찰서로 검거당하여 구속이 되었다.

신임 합회장 오영섭 목사, 최태현 목사, 김상칠 선생, 박창욱 선생,

이성희 목사, 김예준 목사 등이 다 검거되었다.

이 때에 최태현 목사님이 연합회장직에서 낙선이 되리라고는

생각들을 안 해서 그랬는지, 그 분에게 아무런 보직도 주지 않은 채로

총회가 끝나게 되었는데, 다행히 평양지역 대표자들이 평양교회

담임목사로 모셔가겠다고 해서 최 목사님도 승낙을 하셨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한 달이 다 되도록 평양으로

가시지 않으셨다가 검거 되셨다. 평양으로 조금 일찍 가셨으면

검거대상에서 빠졌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이같이 안식일교회 핵심목사와 간사들이 검거되고 나니 전국적으로

우리교회의 형편은 말할 수 없이 나빠졌다. 다만 검거되신 분들이

속히 나오시기를 바라며 한두 달 기다리다가 나오시지를 않자

“합회대행위원을 조직하자.”하여 대행위원을 만들었는데

임종회 목사가 대행위원장이 되고 김명길 목사, 고두칠 선생,

이근팔 선생, 곽종수 선생 같은 분들이 대행위원이 되어서

교회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1943년 4월 하순인지, 5월 초순인지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나의 사돈되시는 합회대행위원장이신

임종회 목사가 우리 집에 모처럼 인사차 찾아와서 교회 일을

걱정하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다니엘그림만 구할 수 있다면

최 목사님이 속히 나오실 수가 있는데 그 다니엘그림이

어디 있어야지요.”라고 했다. 당시에 교회에 관계된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 검거된 분들을 나오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대화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다니엘그림을

가지고 가면 분명히 나오시게 되느냐?”하고 물었다.

임종회 목사는 “그렇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셨다.

당시의 다니엘과 묵시록의 예언그림은 넓은 광목 같은 천에

천연색으로 찍혀 있는 것이었는데 그 그림은 아주 귀중한 자료로써

누구나 갖고 싶어 하던 그림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그 그림을 갖고 있었다.

그 그림은 내가 순안 의명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내 은사인

김봉걸 선생이 가지고 계셨는데 정말 귀한 자료였다.

김봉걸 선생님은 김선억 목사의 부친이 되시는 분이시다.

나는 김봉걸 선생님께 “여름방학 동안에 그 그림을 다른 천에

그릴 맘이 있는데 선생님의 그림을 제게 좀 빌려주시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 자네가 그것을 빌려 달라고 하는데

안 빌려 줄 수가 있겠느냐?”하시면서 쾌히 내어 주셨다.

그런데 그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잘 그려지지가 안아 죄송하게도 몇 해가 지나도록 돌려

드리지를 못했다. 또 김봉걸 선생께서도 그것이 그렇게

필요치 않으셨는지 독촉도 아니 하시기에 “내가 꼭 그리겠다.”는

욕심에 집에 두고 있었는데 몇 해후에 김봉걸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김봉걸 선생님께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 그림을 은사님의 유품이라 생각하고 장롱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귀중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아 오셨던

나의 사돈되시며 합회대행위원장이신 임종회 목사가

그 그림이 있으면 최 목사가 검거에서 풀려나실 수가 있다는데

다니엘 그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라 한들

어찌 아니 내어 드리겠는가?

 

더구나 임종회 목사는 최태현 목사와는 정말 막역한 사이였다.

임종회 목사가 만주에서 상처를 했을 때에 최태현 목사님은

임종회 목사를 한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주고

신학교를 가게 하여 목사가 되게 하신 분이시다.

나 역시 최 목사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내가 나의 아내를 여의고

재혼을 할 때에는 주례까지 해주셨고 이국 땅 간도에서부터

특별히 최 목사님의 자당과 최 목사님의 사모님에게서 얼마나

큰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런 가정에 가장되시고 교회의

제일 웃어른 되시는 최 목사님이 검거되어 갇혀 계신데,

전과자의 낙인이 찍힌 나로서는 어찌 도울 길도 없이 지나던

때였는데, 최 목사님의 사랑을 받던 나의 사돈되는 임종회 목사가

그 그림을 찾고 있으니 정말 기쁜 마음으로 내어 드렸다.

최 태현 목사님이 취조를 당하실 때 사용된 그림은 틀림없이

임 종회 목사가 내게서 가져간 그 그림일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 그림이 있으면 최 목사를 풀어 주겠다는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의 말을 믿고 구하러 다니던 순진한 임종회 목사나

그 그림을 내어준 나 자신이나, 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그림이

필요하다고 임 목사에게 알려준 사람이나 모두가 최태현 목사가

하루라도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일이 지난 지 수십 년 후에, 다른 일도 아니고

아주 조그만 나성교회 지도자 문제로 의견들이 갈라지면서

“최 목사님을 고생하게 하려고 그 그림을 경찰서에 들여보냈다.”는

식의 상상도 못했던,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섭섭했던

마음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모두 최 목사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소리를 듣는데, 만약 그 당시에

그 그림을 아니 내어 주어서 돌아 가셨다면 어떤 비난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곤 한다. 그러니 이 테이프를 듣는 우리

자녀 손들은 앞 뒤 사정을 잘 알고 최 목사님과 부모 되는

나에 대한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올바른 생각을 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정작 새로 합회장이 되신 오영섭 목사가

신임인사에서 일본정부의 미움을 살만한 말을 했는데,

오히려 최태현 목사님이 그렇게 고생 한 것은 최 목사님이

무슨 악한 일을 남에게 했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하고 소문도 냈지만, 그것은 당시의 주위 사정을 모르는

말이라 사려 된다. 오영섭 목사가 새로운 합회장으로 선출이

되셨고 젊고 성격이 급한 분이시라 비록 그런 신임 인사를 하셨지만,

그 동안 최 목사님이 한국 교회를 지혜롭게 지도하고 인도하신

분이시니 일본당국의 미움을 샀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된다.

다만 일본정부는 그동안 지혜롭게 행동하신 최태현 목사를

괴롭힐 핑계가 없었든 것뿐이었는데 마침 오영섭 목사의

신임사를 기회로 최 목사님이하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괴롭힌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니 당시의 사정을

지혜롭게 생각하여 어떤 오해가 될 소문에 현혹되지 말기 바란다.

또 내게 대한 헛소문이나 오해를 불식시킨다는 이유로라도 나와 교회,

그리고 최태현 목사의 명예를 실추(失墜)할 말을 삼가기 바란다.

아마 최 목사님의 자유 손들도 어떤 오해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혜롭고 올바르게 생각하리라 믿고 기도를 드린다.

 

나성교회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성교회의 어떤 목사님 생각이 나며

나의 뼈아픈 실수를 잊을 길이 없다. 이분은 심성(心性)이 너무 고와서

누구에게 싫은 말 한마디 하기 힘들어하는 분이었다.

그 고운 심성은 나이가 많은 나도 본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교회 일과 관련해서 이분에 대해 조금씩 말들이 들려오는데

이 분이 너무 심성이 좋아 지도자로서 할 말은 하지 않는 다는 말이었다.

암 모두 다 이 분께서 좀 더 강력하게 교회를 이끌어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 드릴 기회도 별로 없었고

하기 쉬운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분이 나에게 설교를 부탁해 왔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도무지 설교할만한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가정의 어려운 일로

정신적으로 교회도 가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믿음이 없는 연약한 나의 인간 상태였다.

그러나 이분은 사양하는 나에게 계속 설교를 부탁 하시기에 너무

거절하기가 어려워 설교단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랬는지, 아니면 중간에 그랬는지는 모르나 원래 설교 내용에

있지도 않은, 내가 평소 생각하던 바를 교인들 앞에서 말해 버린 것이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군대로 말하면 육해공군 참모총장이나 마찬가지요,

잘하던 못하던 모든 부서의 책임은 참모총장이 지는 것이니 이 교회의

참모총장격인 목사는 소신 있게 할 말을 하면서, 잘 못된 것들을

이야기 해주고 시정해 나가면서 이 교회에서 책임 질줄 아는 강한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적절하지 못한 말을 설교에서 하고 만 것이었다.

그날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내가 아무리 목사를 위해서

말했다하더라도 교인들 앞에서 그리한 것은 정말 목사에게

잘못한 것이며 듣기에 매우 거북 하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일찍이 교회 목사사무실로 찾아가

사과를 하기 위해 “어제 내가 설교하면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분은 내게 거칠게 항의를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정 목사님이 나를 오랫동안 좋아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내가 목사가 되고부터 싫어하신 것이 아닙니까?”

 

나는 이분이 “얼마나 내 설교가 듣기에 거북했으면 이렇게

야단을 하겠는가?”라고 생각이 되어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지만 이분이 목사가 되고 나서부터 내가 이 분을 싫어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목사님, 그게 무슨 말이오?”

“아, 정 목사님은 으레 목사님의 가족이 교회 목사가 될 줄로

기대하시고 계시다가 제가 목사가 되니까 그 때부터 저를

좋지 않게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의 사위되는 김성래 목사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은데

나는 김성래 목사가 한국에서 올 때부터 “미국에 와서는 목사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분의 말은 정말 생각도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분이 속으로만 그런 오해를 하고

있기보다는 비록 이런 기회에라도 속내를 이렇게 이야기 하게 된 것이

오히려 고맙고 잘 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어제 나의 설교한 일로 워낙 흥분된 상태인지라

“목사님, 내가 어제 정말 실례가 많았소! 후에 내가 가서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또 설명도하고 싶소!”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제 이야기로 제 말은 다 끝났습니다.”

대단히 마음이 상하셨던 것 같아 매우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장문의 편지를 썼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과, 한 번도 당신을 싫어 한 적이 없다는 말,

또 김 성래 목사는 미국에 올 때부터 미국에서 목회를 할 생각을

말라고 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니 오해를 풀라”고 했다.

이 편지를 읽고 마음을 풀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이라도 다시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이 분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내가 얼마나 이 과정에서 잘 못했는지를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마 18:15)

“형제에게 잘못이 있다면 가서 너는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할 것이오.”라고 한 말을, 남에게는 내가 권면 하면서도 나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미련하고, 교만하게도 교회설교시간에 모든

교우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여 이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지금 생각을 해도 이분에게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고 이 일을 통해

성경 말씀에 들어있는 지혜를 다시 한번 알게 된 것이 감사하다.

교만하게 한 말은 평생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을 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 말을 듣는 나의 자녀들은 나의 이 미련했던 경험을 통해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되고 또 나의 말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랄 뿐”이다.

*(제가 좀 쉬기 위해 내일 새벽에 집을 떠나 한 6주간 지내고 올 계획입니다.

제가 가는 곳에 인터넷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이 않된다면 갔다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샬롬!)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2


(교만하게 한 말은 평생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을 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 말을 듣는 나의 자녀들은 나의 이 미련했던 경험을 통해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되고 또 나의 말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랄 뿐”이다. 연재 #31 끝부분)


4. 미국 영주


내 일생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일 밖에는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도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것을 감사드린다.

미국 영주문제만 해고 그렇다. 미국에 들어올 때 반드시 한국으로

나간다고 했던 결심은 딸네 집에 와서 잠시 지나면서 나이도 많아진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1965년 11월 미국에 들어올 때 나는 6개월 비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할 수없이 66년 4월경에 비자를 연기하러 이민국에 갔다. 이때는

태목이와 함께 갔는데, 안내책상에 흑인여자가 있다가 친절하게

태목이를 불러서 무슨 이유로 비자를 연기하는가 하고 물었다.

태목이는 “옆에 있는 나이 많은 분이 나의 아버지인데 어머니만 두고

먼저 한국으로 나가기가 그래서 비자를 연기하려고 한다.”고 했다.

흑인 여자는 “너희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 분이냐”고 물었다.

태목이는 “나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40여 년간 목사를 했다”고 말하자

“그러면 영주권을 신청하지 왜 비자를 연장하려 하느냐?”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태목이는 미국에 온지가 얼마 되지가 않아서

이민국과 관련된 일은 잘 모르고 더구나 전직 목사가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영주권을

얻을 수가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 흑인 여자는 영주권을 신청하는데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챙겨 주면서 영주권을 신청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 우선 비자를 연기하라”면서 수수료는 단 $10.00이라고

알려 주었다. 정말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도 매우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고 감사한 마음이 절로 났다. 태목이와 딸 경실이,

사위되는 광석 군 등이 앉아서 영주권신청서를 연구한 후에

서류를 구비하여 6월경에 나와 내 아내가 함께 영주권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조사하는 것은 매우 철저했다. 나의 많은 이력을 적었더니

기록된 대로 모든 증명을 한국에서 받아 오라고 했다. 또 미국에서는

무엇을 했는가 하기에 월급 없이 한국교회를 지도한다 했더니

그것도 증명을 해 오라 해서 대회와 화잇 메모리얼 병원

레너드 목사에게 부탁하여 제출했다. 6개월이 지난 12월에

영주권이 나왔다. 우리보다 먼저 미국에 온 자녀들도

영주권이 되지 않았는데 나는 교회에서 일을 했다는 경력 하나로

영어도 못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영주권이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 확실함을 다시 한번 알고 감사했다.


영주권을 받고나니 영주권을 가진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자녀를

초청하여 이민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다섯째 아들 태국이와 막내 태경이는 아직 불암동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을 빨리 미국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한국적인 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내가 영주권을 받고 너무 일찍

아이들의 수속을 시작하면 우리 영주권에 무슨 문제나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영주권이 나오고도 5개월이 지난 1967년

4월에 가서야 아이들의 수속을 시작했다. 태국이가 자기의

약혼녀인 문자와 같이 도미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기에

문자의 수속도 함께 했다. 문자는 학생신분으로만 가능할 것

같아서 마침 로마린다 대학에 있는 넬슨이라는 학장이 필리핀

우리 대학학장으로 있을 때 태중이가 필리핀에 유학 가서

그 분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적이 있어서 부탁하여 입학허가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태국이와 태경이의 이민 수속과 함께 문자의 수속도

함께 끝이 나서 1967년 8월 30일에 출국을 한다는 연락이 와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자는 한국을 떠난다고

잔치를 해서 음식을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췌장에 이상이 생겨

위생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연락이 와서 모두 문자를 위해서

기도를 드렸다. 다행이 병이 예상외로 속히 회복되어 세 아이가

67년 8월 31일에 나성 비행장에 도착을 하였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세 아이들이 도착하고 나서 두 아들보다는

문자가 더 일찍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일본 사람이 감독으로 있는

보석 가공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속히 일자리를 얻은 것에

흐뭇해하기에 기뻤다. 태국이와 문자는 결혼을 준비하여 9월 중순에

결혼을 했다. 그 후 태국이도 직업을 얻어 두 아이의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5. 가지 많은 나무- 제 1 부


문제는 막내아들 태경이었다. 나는 태경이에게 미국에서 살려면

꼭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신용이 있는 사람이 되던가,

아니면 학벌이 있던가, 그도 아니면 돈이 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태경이는 “공부는 하기가 싫다.”고 말하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좀 바보스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미 나이가 20세가 지났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고

취직이라도 되기를 기도드렸다.

다행히 태목이가 자기가 일하던 회사사장에게 부탁하여

취직이 되었다. 당시에 막일이 $1.65인데 태경이에게 시간당

$2.80을 주는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그래서 세 아이가 다

취직 문제가 해결되어 마음을 놓게 되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태경이는 한국에서부터 태경이를 데리고 있던 태국이 부부에게

의논을 하니 신혼이지만 함께 데리고 살겠다고 해서 1 베드룸

아파트 리빙룸에서 태경이를 데리고 살았다. 한 반년 이상 데리고

살았지만 새로 결혼을 한 태국이네가 태경이의 변하지 않는

생활 습관에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은 태경이가

놀러왔을 때 “네가 태국이 형 집에 있는 것보다는 우리와

함께 나가서 사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찬성을 했다.

그래서 태경이에게 책임감도 심어 주기 위해서 우리가 수입이 없으니

집세만은 네가 버는 돈에서 내라고 했다.

1968년 6월 11일, 태국이네가 세든 아파트와 같은 건물 아래층에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태경이의 직장과 집 문제가 해결되는 듯싶어

마음이 놓였다. 낮 시간에는 무료했으나 송기섭 씨 부부가

아이를 좀 보아주면 좋겠다고 하기에 그 부모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던 터라 아기를 보아주었더니 매주 돈까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태경이는 한 1년 동안 회사에도 잘 다니며 “일도 잘 한다”는

칭찬도 받는다기에 “이제 철이 드는가?”했으나 차츰 차츰

한국에서 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탈선되는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경이에게

이제는 회사에서 막일을 그만두고 기계부서(機械部署)에서 일을

해 보라고 한 모양이다. 알고 보니 태경이가 회사 내에서

막일을 하는 한은 더 이상 월급도 올려 줄 수가 없어서 기술도

배우게 할 겸 임금도 올려주기 위해서 크게 배려를 해 준 것인데

무슨 생각인지 그 제안을 거절을 한 것이다. 그런 결정이야

본인의 자유의사이지만 회사는 물론 친구들이나 형제와 부모도

“왜 그 좋은 기회를 거절하는가?”하며 타일렀더니 그 일로 오히려

더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생겼는지 점점 더 탈선되는 생활을 했다.

거기다 한국에서 친구로 사귀었던 아이들까지 미국에 들어와

함께 다니며 직장도 자꾸 빠져 신용까지 잃기 시작을 했다.

점점 걱정이 되고 이 아이의 교육을 내가 제대로 시키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가끔 몹시 심한 통증이 오곤 해서 닥터 루와

다른 의사에게 진단을 받아 보았으나 담석증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가끔 그 고통이 오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참기가 힘 들곤 했고 심지어는 땅에 구르기까지 할 정도로

고통이 심하곤 했다. 미국에 와서 의사들의 진단을 받으니

수술을 하면 될 수 있지만 꽤 큰 수술이라 했다.

또 이왕 큰 수술을 하는 김에 맹장수술도 함께 하자고 해서

겁도 없이 그리 하자고 했다.

막내딸인 경실이가 화잇부인 기념병원(White Memorial Hospital)에서

일하고 있던 관계로 모든 수속을 해 주었다.

의사들은 내가 나이가 많아 수술을 하다가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며

“수술 중에 죽어도 의사에게는 책임이 없다.”라는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하니 그러니 않아도 걱정을 했는데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근화 박사에게 수술을 받을 때에

입회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69년 9월 29일에 수술을 받도록 시간이 결정이 되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술 전에 가족이 아닌

누구를 만날까 생각을 하니 “내가 간도에서 사역을 할 때

정말 친절하게 해 주신 고 최태현 목사의 사모님을 만나

뵙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9월 27일에 찾아갔다.

찾아가 뵈니 최 목사의 사모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아들 댁에서

대소변을 받아 내다시피 하면서 계셨다. 그래서 내가 수술을

받기 전에 잠깐 뵙고 싶어 왔다고 인사를 드리고 사모님의 건강이

속히 회복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고 나왔다.

수술 후에 알게 되었지만 수술 중 내가 잠시 죽었다 살아 날 정도로

힘든 수술이었다고 한다. 수술 후에 입원실에 있으면서 티비(모니터)에

내 심장 뛰는 것을 보면서 아무 때고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교우들의 기도와 가족들의 보살핌과 하나님의 은혜로

완쾌되어 퇴원을 했다. 수술 후에 이근화 목사에게 내 수술을

참관했던 소감을 물었다.

“이 목사, 임자가 보니 내 수술이 잘 된 것 같소?”

“예,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 그간 고생이 많았겠습디다.

쓸개 한 쪽 부분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말라서 꼬인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지난 이십여 년 간 가끔 이 증세가 심해 질 때에 받은

고통은 얼마나 심했는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의 아내만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알고 있다.

이제 수술을 마치고 생각 된 것은 20여 년 동안 무슨 병인지도

모르던 것을 성경 말씀대로 말세가 되어 지식이 더하여 가면서,

특히 의학지식이 발달하면서 이렇게 나의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알아내고

수술을 하여 이제는 아무런 고통이 없게 된 것이 감사했다.

그러나 수술을 해본 경험이 없는지라, 퇴원한 후에

“수술 후의 몸 관리”에 내가 좀 실수를 한 것 같다.

좀 쉬어야 하는 데도 운동 삼아 지팡이를 짚고 장을 보러 다니면서

좀 무거운 장 봉지를 어께에 메기도 하고 들기도 하면서 무리를

했는지 수술 후 2주쯤 지나서 열이 나고 수술한 부분에 통증이 왔다.

의사를 만나 진찰을 하니 수술한 부분 안쪽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간단한 재수술을 하면 된다고 해서 입원을 하여

옆구리에 구멍을 내어 고름을 뽑아내고 봉합을 하여 약 2주 만에

퇴원을 했다. 이번에는 수술 후에 매우 조심을 하여 무사히 회복이

되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문제가 없다.

20여 년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얼마 후,

나의 맏딸 진실이가 편지에 "아버지, 우리도 이민을 가고 싶은데요."

라고 썼다. 나는 큰사위 되는 김성래 목사가 미국에 올 마음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딸에게 편지를 하기를 “김 목사도 미국에 오고

싶다고 하던가?" 하고 물었다. 내 물음에는 별다른 대답이 없이

큰딸은 계속 “이민을 오고 싶다.”고만 편지를 나에게 했다.

그래서 다시 “너희의 가장이 되는 김 목사의 의견도 잘 알아서

회답을 하라.”고 했더니 사위 되는 김성래 목사는 미국에

오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편지를 보내 왔다.

할 수 없이 나는 중한 대회장으로 계시는 김이열 목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내 딸 진실이는 미국에 올 마음이 있어서

계속 수속을 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는데 가장되는 김성래 목사는

절대로 미국에 올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김이열 목사의 객관적인

의견으로 내 딸의 가족이 미국에 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면

김이열 목사가 한번 내 딸의 가족을 만나서 부모 된

나의 심정도 전하고 또 만나 본 후에 결과도 알려 달라고”했다.

얼마 후에 큰 사위되는 김성래 목사는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오겠다.”라는 연락을 해 왔다. 수속을 시작하자 남들은

그리 어렵다는 이민 수속이 별 어려움이 없이 4개월 여 만에 끝나

진실 네 식구 다섯이 미국에 왔다. 김이열 목사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김성래 목사는 미국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이 힘들다고 하며

다시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부모 된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두 아들과 딸, 세 자녀를 위해서라도 좀 참고 지내보자고 권면을 했다.

얼마 후에 진실이는 간호원으로 일을 시작하고 우선 김성래 목사도

옷을 만드는 곳에 취직을 하여 일을 시작했다. 성래 목사도 손재간이

좋은지라 일을 열심히 하며 점점 미국생활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점점 안정을 해 나가고 후에 김성래 목사는 몇 몇

한국인 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며 미국 생활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둘째 딸 충실 네 문제가 잘 풀리지를 않아서

걱정이 많이 되었다. 둘째 사위 윤수는 서울 삼육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교육시찰 명목으로 미국에 왔다가 “미국에 있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하여 남아 있게 되었다. 여러 방면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려고 애를 썼으나 용이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그대로

귀국을 하라.”고 권유도 해 보았으나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겠다.”

고 해서 할 수 없이 변호사에게 수속을 의뢰하였는데 하루는

변호사가 서류에 싸인을 하라고 해서 별로 서류를 살펴보지도 않고

싸인을 해 주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얼마 후에 법정으로

출두하라는 통보가 왔다. 법정에 출두를 해 보니 변호사가 일을

어떻게 했는지, 판사는 윤수에게 “지금 불법체류자이니 빨리

이 나라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가 찰 일이었다.

그런데 판사가 윤수에게 “수중에 돈은 얼마나 있는가?”하고 물었다.

윤수는 무슨 생각에 “수중에 돈이 좀 있다.”라고 판사에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판사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지도않고

그 돈을 다 사용할 때까지는 미국에 거주해도 좋다고 했다.

아마 미국 돈을 해외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정책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도 되자만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가? 아니면 얼마동안

더 체류할 수 있다는 기간도 정하지 않은 채로 돈을 다 쓸 때까지

있어도 된다는 것은 정말 윤수를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장 발등에 불은 해결했으나 언제 나가라는 추방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그야말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먼저 미국에 들어온 막내딸 경실이가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면서 어려웠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당시는 시민권자의

가족이민이 많지 않은 때인지라 몇 달 후에 윤수의 아내 충실이와

딸 보경이가 미국으로 들어왔고 자연히 수녀동안 고생하던 윤수의

영주권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참으로 가족 중에 누구보다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그 기쁨은 훨씬 더 컸다.

거기다가 제후네 식구까지 미국으로 오게 된 것 역시 하나님께

크게 감사를 드렸다. 그럭저럭 나의 직계 가족이 거의 다

미국에 왔는데 약 40여명이 넘었다.

다른 부모들도 다 한 마음이겠지만 많은 가족이 모이고 보니

“모두가 다 신앙 안에서 잘되어야 하겠는데”하는 걱정과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잘 날이 없다”라는

옛말처럼 막내아들 태경이가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태목이 부부는 둘 다 유학생신분으로 미국에 와서 결혼을 하여

영주권이 없이 아들을 낳고 공부를 계속했다. 공부하는 동안

영주권이 없이 직장을 얻어서 일을 해서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몰랐고 너무 어리석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모든 식구가 도미했고 영주권을 얻었으니

태목이도 영주권을 미리 신청했더라면 그렇게 까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안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USC 약대를 다닌 후에 약사가 되어

드디어 영주권을 얻게 되었으나 그간 태목이네 부부가 겪은 마음고생은

윤수 못지않았다. 이제 태목이네도 좀 자리가 잡힌 생활을 한다고

생각 했는데 하루는 태목이가 집으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며칠만 지나면

동부 펜실바니아 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잠잠히 있다가

갑자기 미국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를 간다니 너무도 천만 뜻밖의

일이었기에 마음을 추수를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하도 섭섭하여 생각다 못해 우리도 따라 가겠다고

했더니 태목이도 “사실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고 싶었으나 너무

먼 길이 되어 말씀을 못 드렸었는데 부모님이 원하신다니

잘되었다.”하며 함께 떠나자 했다. 그러나 막상 함께 가자 해 놓고도

나는 내 안사람이 차를 타면 종종 멀미를 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을 하곤 했기에 먼 길을 차로 가는 것이 내심 크게 걱정이 되었다.

하룻길도 아니고 장장 열흘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첫날, 약 아홉 시간 여행을 했는데도 나의 아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모님을 위해 태목이는 그다지 빠르지 않게

운전을 하여 펜실바니아주까지 열흘을 여행을 했다. 내 아내는 그 긴

여행 동안 한번도 멀미를 하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끝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너는 두려워 말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오.”하신

이사야 43장 말씀을 다시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 모두 다 처음으로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무사히 인도하신 것을 감사 드렸다. 1975년 2월이었다.

태목이 가족과 함께 동부로 가서 그래도 한 서너 달 함께 지날

생각을 하고 떠났는데, 도착한지 이삼일 만에 내 아내는

나성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을 했다. 내가 가자고 재촉을 해도

더 있다가 가자고 할 내 아내가 집으로 가자고 재촉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고 뉴욕에 있는 딸, 제후 집에

이 삼일 들른 후에 나성으로 돌아왔다.

나성에 오자 방례두 장로가 우리를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

나는 이 식사초대에 응하면서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하면서

좀 미안했다. 다름 아니라 방 장로가 얼마 전 경상도 자부를

맞아들이기에 농담으로 “평안도 가정에 경상도 며느리를 보았으니

우리에게 경상도 요리를 한 번 맛 보여야 하지 않겠소?”했더니

방 장로도 흔쾌히 “아, 그래야지오”라고 대답을 했었다.

방 장로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우리가 동부에서 돌아오자

곧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한 것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방 장로님은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 이층에 살고 계셨다.

저녁 초대를 받고 나는 아내와 그 댁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 때 마침 밖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자 내 앞에서

층계를 올라가던 나의 아내가 “당신, 저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요?”

하고 묻기에 “아, 들린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내 아내는

“저 헬리콥터가 나를 잡으러 온 것이오, 아시오?” 라고 말을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지금 뭐라고 그랬소?”하고 묻자

“저 헬리콥터가 나를 잡으러 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내 아내는

대답을 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먼 길을 가서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가자!”고 야단을 하던 내 아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저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화잇부인 기념병원(White Memorial Hospital)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헬리콥터나 앰불랜스의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그날부터 내 아내는 헬리콥터 소리나 앰불랜스의 소리,

또는 순찰을 도는 경찰차를 보면 “저것은 나를 잡으러 온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대면서 겁을 먹곤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증상이

점점 더 심해갔다. 할 수없이 자녀들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다섯째 아들 태국이가 찾아와 어머니를 붙들고 간곡하게 설명을 하면

“나도 안다”고 해 놓고는 또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전에 이런 경험을 당해 본적이 없으니 어떤 대책도 없이

고통의 시간만 보내게 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얼마 지나서

내 아내는 발이 아파서 걷는 것도 불편해졌다. 나는, 내가 수술 후에

친구의 권면으로 걷는 것이 얼마나 건강 회복에 좋은지를 알게 되었기에,

내 아내의 손을 잡고 매일 아침 한 시간 가량 걷게 했다.

한 두어 달 걷자 내 아내는 걷는데 아무 불편한 점이 없어져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길을

예비해 두셨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조금 지나자, 나의 아내는 느닷없이 동부로 이사 간 “태목이네 집으로

다시 가자.”고 독촉을 해 대었다. 그래서 그러면 “이번에는 당신 혼자서

가라”고 했더니 “그리 하겠다”고 해서 내 아내만 항공편으로 보냈다.

아내가 아들집으로 떠나고 나자 그간 내가 긴장하고 있다가 풀렸는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해서 입원을 했더니 열병에 걸렸다 했다.

상당히 고생을 했다. 퇴원을 하자 자녀들은 아내가 있는 동부로

가라해서 다시 동부에 가서 두 달 있다가 이번에는 내가 돌아가자고

해서 왔다. 내 아내의 정신 문제는 그대로 계속 되었다.

더 심해지지는 않는 것 같기에 그냥 몇 달을 지냈다.

76년 초, 아내의 정신 상태 더 나빠진 것인지, 내 아내는 또 동부로

가겠다고 떼를 쓰다 시피 하기에 혼자 가게 했다. 자녀들이 다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나 나름대로 아내를 혼자 보내고 나서 아내의

정신질환의 상태를 좀 알고 싶어서 다른 때 같으면 자주 편지를

써서 보냈을 터이나 이번에는 편지도 쓰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 뉴욕에 있는 딸, 제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어머님이 아버지가 편지도 한 장 안 보내신다 하시며

노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럴 것이다. 내가 일부러 편지를 쓰지 않고 있다.”

“일부러 쓰지 않고 계시다니 무슨 말씀이신 가요?”

“어머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질 않느냐? 어느 정도로 심한지

알고 싶었는데 내가 편지 쓰지 않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라면

그리 심한 것이 아니니 마음이 좀 놓인다.”

그래서 약 5개월 계시다가 다시 나성으로 돌아왔다.

아내를 마중하기 위해 막내아들 태경이차로 비행장에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태경이가 운전을 하며 어머니에게 얼마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지 어머니의 건강보다도 태경이가 철이

든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한 말들은 어머니를 위한 것일 뿐, 태경이의 생활은 변하는 것이

보이지를 아니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동부에 갔다가 돌아온 후에 태경이는 점점 더 우리를 힘들게 했다.

용돈이 딸렸는지 심지어 우리가 사준 차까지 팔아서 돈을 써 버렸다.

이제라도 태경이 혼자 독립을 해서 살게 하려면 우리가 어디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생겨 나와 아내는 다시 태목이가 사는

필라델피아 근교 레딩으로 갔다. 79년 5월경이었다.

동부로 와서 8개월을 지내며 소식을 들으니 태경이의 생활은

나아지는 것이 없다했다. 우리가 하도 걱정을 하자, 태목이와

뉴욕에 사는 제후는 의논하기를 “차라리 태경이를 동부로 오게 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해 보는 것이 좋겠다.”하여 태경이에게

권해 보니 태경이가 80년 1월초에 뉴욕으로 왔다.

태경이가 우리를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80년 1월 16일인가 나성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에 태경이는

태목이가 사는 레딩에서 취직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나의 아내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하나님께 감사했다. 얼마 후에 태경이는

어머니 생일이라고 적은 돈을 보냈는데 이 돈을 받고 나의 아내는

생전 처음으로 막둥이에게서 생일 선물을 다 받았다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부모는 자식에게 큰 선물을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자식이 올바른

생각을 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주면 그 이상의 선물이나 기쁨이 없다.

그러나 이 기쁨도 오래가지를 못했다. 80년 6월 어느 날,

한 마디 소식도 없이 태경이가 나성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때 어머니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소식도 없이 이렇게 돌아오니

이유를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고 내 자식이니 할 수 없이

힘든 생활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화잇 부인의 예언의 신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직장을 나갈 생각이나 교회를 나갈 생각도 아니 했다.

30세도 훨씬 지난 자식에게 무엇을 어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는 길

외에는 달리 할 길이 없었다.

내 나이 90을 바라보고 내 아내가 80을 바라보면서 마음고생

하는 것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부모의

장수함을 감사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모든 자녀들이 다 모여서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다른 집안의 자녀들은 부모의 환갑이다,

진갑이다, 결혼 수 십 주년 기념이다 해서 사람들을 청하여

각종 식(式)들과 연(宴)을 갖는데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다른 사람들을 청하여 한번도 크게 대접해 본적이 없으니

한번 해 보자”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그런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도 될 뿐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이 되어

그 동안 거절을 해 왔다. 환갑식도 안한 나는 이번에도

“우리가 살아 온대로 그냥 지내자”라고 거절을 했다.

그러나 자녀들은 “그 동안 수많은 초대를 받아 참석을 했는데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남에게 욕을 먹습니다.”하며

계속 나를 재촉해 댔다.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나와,

막내 태경이와 맏사위 김성래 목사 뿐 이었다.

다른 모든 자녀들은 “그만큼 대접을 받았으면 한 번쯤 대접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하면서 졸라대기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장수(長壽)했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는

”년년익수 축하회“라고 해서 장수 감사의 모임을 갖고

연로한 분들을 청하라고 허락을 했다.

내 생애 처음 가져 보는 잔치인데 날자는 1981년 6월 14일

(일요일)로 정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에게 통지를 하면서

돈을 쓰는 것을 보니 잔치를 허락한 것이 후회되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뉴욕에서, 오레곤 등지에서 다 참석을 하고 또 많은 교우들을

초청하여 대접을 하니 ”대접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우연이도 이 일을 반대한 막내

태경이와 맏사위 김성래 목사가 참석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 특히 가족들이 함께 사진을 찍을 때에

이 두 식구가 빠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나의 아내의 정신건강은 점점 악화되는 것 같았고 또 태경이도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지를 않았다. 아내의 전지치료(轉地治療)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멀리 간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내키지를 않아 로마린다에서 혼자 살고 있는 딸, 정실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어머니와 함께 당분간 좀 가서 있겠다.”고

하니 쾌히 승낙을 했다. 다만 자기가 간호원으로 밤일을 하고

낮에 잠을 자니 미안하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서 아내는

며칠은 잘 있더니, 다시 나성으로 가자고 매일 졸라댔다.

그래서 "곧 가도록 하자"라고 이야기하며 2주정도 지났는데

하루는 아침 일찍이 아내가 보이지를 않았다.

현관을 보니 문이 휑하니 열려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밖으로 나가 사방을 뛰어 다녀도 찾을 길이 없어서

할 수가 없이 밤일을 하고 잠을 자는 정실이를 깨웠다.

차를 타고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집에서 걸어서 가기에는

꽤나 먼 로마린다 병원 앞에 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아침 일찍이 큰 개들이 많이 나다니는데 개에게 물리지도

아니하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교통사고도 없이

병원 앞에서 찾은 것은 정말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아내는 태목이가 사는 레딩으로 가자고

다시 졸라대었다. 하루는 내 아내가 태국이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당장 나를 데리러 이리로 오너라. 나 여기서 더 못 있겠다!”

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태국이는 무슨 일인가 해서

한 시간이나 되는 이곳까지 급히 운전을 해서 왔다.

그런데 내 아내는 막상 태국이를 보더니 "네가 여기까지

웬 일로 왔느냐?" 하고 이야기를 해서 모두를 혼란케 만들었다.

이때 나는 내 아내의 상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한

치매증세임을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나성집이나 이 곳

딸의 집이나 다 병원 근처가 되어서 헬리콥터와 구조대 차량이

싸이렌 소리를 내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 때마다 아내는

“나를 잡으러 왔다!”고 하면서 공포에 떨곤 하니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성 우리 집 근처에 살고

계시는 처형이 되시는 김 병숙 씨도 그 의견에 동감을 했다.

마침 동부에 있는 제후와 태목이가 다시 와 계시라는 연락이

오기에 82년 9월 14일에 나성을 떠나서 먼저 제후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왔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저녁식사를 한 다음부터

밤새 설사를 하면서 화장실을 갔다가는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다가 사위 되는 석범이가 자는 방까지 들어가니

미안하기가 그지없었다. 뉴욕에 온지 3일 째 되던 날,

제후의 아들 영태의 장모 되는 이가 저녁 식사에 초청을 하기에

너무 감사해서 아내가 설사를 해도 그 집에 갔다.

내 아내의 상태를 보더니 영태의 장모는 집에서 키우던

양귀비 줄기를 꺾어서 즙을 받아 삶아서 그 물을 약으로

만들어서 아내에게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날 아내의

설사가 많이 진정이 되어 9월 18일에 우리 부부는

레딩에 사는 태목이 집으로 왔다. 레딩에 와서도

내 아내는 정신상태가 진정이 되지 않았다. 특히 밤잠을

자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 대니 낮에 일을 하고 와서는

잠들을 잘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도무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석 달이 되어오는 82년 12월 9일 오후 3-4시쯤, 아내는

지하실에서 위층으로 올라오다가 층계에서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집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전화도 어디로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영어도 모르니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어머니를 혼자서 끌어 올려 한 층은 올라 왔는데

도저히 더 이상은 끌어서 올릴 수가 없었다.

마침 며느리 인숙이에게서 전화가 와서 속히 오라고 하여

둘이서 겨우 아내를 침실로 옮겼으나 하루 밤이 지나도록

계속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니 뇌진탕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고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침이 되자 교인 중에 김 정식 의사가 친절하게도 급히 와서

아내를 진단하더니 병원으로 속히 가보라고 했다.

다음날 인숙이와 함께 아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방사선 검사를 해보니 손 목 뼈가 많이 상했다고 하면서

회 붕대를 해 주면서 5-6개월은 잘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계속 며칠동안 더 병원을 찾아 와야 한다고 했다.

늙은 나와 며느리가 팔목이 부러진 할머니를 승용차에

태우느라고 고생하는 것을 보더니 병원 측에서 하는 말이

“비용을 병원이 부담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친절하게도 앰뷸런스를 제공해서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용하게 편리를 보아주었다. 이 나라가 왜 복을 받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회 붕대가 갑갑했는지 아내는 그 회 붕대를

밤사이에 손목에서 뽑아 버렸다. 병원에서는 회 붕대를

두 번이나 다시 해 주었는데도 아내가 계속 뽑아 버리자

의사도 화가 났는지 이번에는 팔목까지 회 붕대를 해 버렸다.

여자들이 나이가 많아지면 뼈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하니 변소나 목욕을

시킬 때마다 며느리와 둘이서 아내를 업어서 움직여야 하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년 여 동안 나성으로 간다는 일은

제쳐놓고 그 힘든 일들을 나와 태목이 가족은 해 내었다.

이렇게 집안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자 목사인 내가

고개가 숙여지고 설교를 부탁받는 것도 귀찮았다.

그러나 목사인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은 몇 명 안 되는

교우들의 배려와 사랑이었다. 내 아내가 조금 움직일 수가

있게 되어 안식일에 교회를 가면 내 아내가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일이 가장 어려웠는데 교우들은 한 번도 우리가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아내가 변소 가는 일을 돌보아 주고 우리가 쉴 수 있도록

내 아내를 자기 네 집으로 모시고 가서 하루 또는 이틀

모시고 있다가 다시 그 먼 우리 집까지 모시고 왔다.

정말 힘 들 때에 한 가족처럼 돌보아주었고 그 사랑이

나에게 용기를 주곤 했다. 목사들도 외롭고, 힘들고,

용기가 꺾일 때가 많으나 교우들의 사랑이 목사에게

용기와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내 아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 나는 나성으로 갈 수도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자 태목이 부부는 나에게 녹음기를

사다 주면서 회고담이라도 녹음을 해 보시라고 해서 이렇게

시작을 해서 진행 중이었다. 사실 나성에서 수술을 하고 나서

내가 얼마 살지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는지 모든 자녀들이

“아버지, 뭐 간단하게라도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서 남기시죠!”해서

자녀들에게라도 회고담을 남겨 주려고 몇 자 정리하던 것을

가정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서 제쳐놓았었다가 지금 글을

쓰기가 힘이 드니 녹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3(마지막 회)


(나성에서 수술을 한 후 모든 자녀들이 “아버지, 뭐 간단하게라도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서 남기시죠!”해서 자녀들에게라도

회고담을 남겨 주려고 몇 자 정리하던 것을 가정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서 제쳐놓았었다가 지금 글을 쓰기가 힘이 드니

녹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연재 #32 끝 부분)

5. 가지 많은 나무- 제 2 부

1983년 3월 말.

어머니가 누워 계시면서도 정신이 들면 가끔 우리가 돌보아 주던

태국이네 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태국이네

온 가족이 레딩에 들려 며칠을 지났다. 며칠 후에 뉴욕

제후 집에 들렀다가 나성으로 간다고 하며 떠났다.

태국이네가 떠난 지 이 삼일 후인 4월 9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다른 때 같으면 전화를 끊고 나서

“누구한테서 온 전화였습니다.”라고 묻지를 않아도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편지나 전화가 와도 “누구에게서 온 것이냐?”하고

묻는 사람이 아닌지라 가만히 있었다. 한참 뜸을 들이더니

자부되는 인숙이가 말을 했다.

“아버지, 근도가 사고가 생겼대요.”

“응, 그래?”

나는 속으로 “자동차 사고인가? 차 사고라면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이 되어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 같다.

족히 몇 분은 지난 것 같다. 인숙이가 다시 말을 했다.

“아버지, 그게 아니라, 근도가 죽었답니다.”

“!!..................”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안았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한참을 있다가 속으로 “뭐, 근도가 죽어?”하는 생각만 하며

멍하니 있었다. 갑자기 “나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다 미국으로 와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태경이 문제에다

어머니까지 정신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뼈까지 부러져

이 고생을 하기도 힘이 드는데 이제는 장손 되는 근도가

죽다니?!! 근도가 이제 나이 40을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갑자기 가족들을 미국으로 인도한 것에 대한 통탄과 후회가

밀려오면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받은 은혜와

축복은 생각나지 않고 그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고개만

점점 숙여지고 말았다. 마음속에는 그저 “가봐야 할 터인데!

내가 가봐야 할 터인데!”라는 생각만 떠오르다가, 조금 지나자

“지금은 어머니 오줌똥을 받아 내야 하는 형편인데 어디

갈 수가 있겠나?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만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누가 가야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뉴욕으로 떠난 태국이 삼촌한테 전화해서 나성으로

가도록 했다.”고 한다. 내 아내가 움직일 수가 없으니

나성으로 갈 수가 없어 마음에 얼마나 유감스러웠는지

지금도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제 와서 후회한 들 아무 소용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근도의 사고 소식을 들이니 마치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왜냐하면 내가 매번 운동 삼아 아침에 걸으면서 큰 아들네

집에 들르면, 언제나 밤늦게 일하고 돌아온 근도의 여동생에게

“근숙아, 너 지금 비록 병원 가까이에서 살고 있지만

밤늦게 집에 올 때는 혼자 오지 말고 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도록 해라!”하고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면 근숙이는 늘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전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근도는 동네도 꽤 안전한 곳에 살고 있기에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는데 이 화잇부인기념병원 근처,

자기 아버지의 집 가까이에서 좋지 않은 불량배들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나니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아 죽은 것 같은 생각이 들고 후회가 될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이 점점 악해가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 가고 있는지를 꼭 말해 주었어야 하는 것인데!!!

장손인 근도가 이렇게 어이없이 40대에 가는 것을 보니 우리

집안 기둥이 뽑혀지고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생각만 든다.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여기다 두고 갈 수가 없으니 “근도의

장례식은 어찌 되는가?”하고 걱정만 될 뿐이었다.

근도의 아비나 에미, 근도의 아내 귀자, 근도의 어린 자녀

광호와 광은이를 누가 어떻게 수습을 해 나가고 있는지

마음이 아프고 갑갑할 뿐이다. 아무도 소식조차 전해 주지를

아니하니 너무 힘들기만 하다.

“아마 내가 소식을 들으면 너무 힘 들것이라 생각들을 하는

것이겠지,”하면서도 너무 답답했다. 모두들 하나님의 자녀답게

수습들을 하고 뒷일들을 감당하기 바라는 기도만 드렸다.

4월 15일인가,

글렌데일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선억 목사가

내게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근도의 소식은 알고 계시지요?”

“김 목사, 알고는 있는데 아무도 그 후에 전화가 없어서

답답해 못 견딜 지경이오.”

“목사님, 저도 미리 전화를 드릴까 했는데 너무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서 지금껏 기다리다가 이제야 전화를 드립니다.

소식을 들으셨다니 조금 안심은 됩니다, 힘내십시오.”

“그러지 안아도 근도가 그리되고 나서 장례식은 어찌되었고,

어려운 일을 당한 가족에게 누가 용기를 주고 보살펴 주는지

마음에 걱정뿐인데 김 목사가 이렇게 전화를 주시니 너무 고맙소,

김 목사가 좀 앞장서서 모든 일을 잘 도와주시기 바라오!”

“예, 목사님, 교우 여러분과 하나님께서 잘 도와주시고 있으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전화라도 받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후에 들려오는 소식은 여러 가지 사정상 장례식은 일주일 후에나

하게 되었는데 여러분의 도움으로 잘 치렀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또 근도의 처되는 귀자가 도리어 용기를 내어 장례식 동안에

시부모를 위로하며 자신은 눈물을 자제했다하니 기특하다는

생각과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근도의 아들 광호와 딸 광은이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면 어머니까지 울게 되니

울지 말라”고 했다니 내심 감사했다. 이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에게 용기와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교우들과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드렸다. 이번 일을 통해

이런 일들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잠깐 기도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칠십 여 년 전에 그 산중에서

불러주시고 오늘날까지 우리 모든 가족들을 보호하사

믿음 안에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함을 드립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있어 우리 많은 가족들이 이 나라에 와서

고락을 같이 하면서 살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함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시고 인도하셨지만 내가 가족을

잘 인도하지 못함인지 우리 근도가 이런 불의의 참변을

당했습니다. 우리 모든 가족이 다 애통하는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뒤처리를 잘하고, 지금은 용기를 얻어

서로 위로하며 지날 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함을 드립니다.

특히 근도의 부모 되는 큰아들 태혁이와 명신이, 근도의 가족

귀자와 광호, 광은이가 이 어려움 속에서도 다 믿음 안에서

용기를 얻어 잘 지난다하니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이제 간절히 기도 하는 바는 우리가 주의 은혜 속에서 더욱

잘 믿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에 더 가까이 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더욱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하사 이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며 지나다가 주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다 구원을

받도록 준비하게 하옵소서. 그 중에도 우리 귀자, 광호,

광은이에게 더욱 하나님께서 지켜 주사 남편과 아버지를

잃었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더욱 주님을 굳세게 붙잡고

나가게 하사 힘을 얻어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든 식구가 어디에 있든지 서로 권면하여

모두 하나님의 자녀 된 책임을 다하도록 서로 돕고 힘쓰는

우리들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주께 맡기고 최후의 승리하는 가족들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인도하여 주심을 바라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나의 자녀들아,

진리의 교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란다.

내가 1910년경에 이 교회에 들어온 후에 80여 년간

참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 교회 안에서 생활하며 받은

축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처음 이 교회에 들어와서

얼마 지나고 나서는 내가 진정 참 교회를 선택했는가를

알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다. 심지어는 장

감리교회에서 만드는 기독신문도 십여 년 이상

구독을 하며 우리 교회와 비교를 해 보았으며 또 개신교

가운데 성결교회가 순수하다고 해서 성결교회가 만드는

공식적인 출판물들을 오랫동안 진지하게 연구도 해 보았다.

그러나 성경대로 말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과 지식과

주장들을 말하는 것을 보고 내가 찾은 이 교회가 성경,

오직 성경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내 평생을 살아왔다.

지금도 내가 찾은 이 교회,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성경대로 따르는 진리의 교회라고 너희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가족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진리를 따라

순종하기만 하면 신명기 28장에 있는 대로 “너희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으며 우리 자손도 다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진리를 받고 겉으로만 믿는 것처럼 보이나 그 진리에

순종하지 않아 수 천 년 간 유리방황하던 유대인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주님의 말씀, 성경에 가까이 하며

기도를 계속하여 하나님과 가까이 알고 지내기를 바란다.

지금 내 나이 90을 바라보고 내아내의 나이 80을

바라보고 있다. 나로서 우리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이라면

잘 순종하고 우리 늙은 부모 대접해 주기를 각근히 해 주는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를 한다. 이제는 주안에서 잠들었다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겠다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보면 “우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했고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우리가 그러한 희망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겠다.”는

말씀도 있다. 우리 모든 가족들은 참 도리 안에서 말씀을 보고,

믿고, 기다리며 살아가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 한 대로 가족들

사이에 지금까지 살아 온 것처럼 평화를 간직하며 살기를 바란다.

내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가운데 참 교회를 찾아 살면서

우리 식구들이 다 교회에 들어와 있게 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헤아릴 수가 없다.

내 고향에 교회가 선지 한 6년 후에 내가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작은 교회에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교역자가

아홉 사람이나 나왔다. 내 집안에서 나 정동심, 정동성 씨, 정동석 씨,

정OO 씨, 박지순 씨, 박원철 씨, 박원철 씨의 사촌동생 박영세 씨,

정희창씨, 이렇게 아홉 명의 교역자가 나왔는데 그 모두가 다

잘되었다. 내가 제일 늦게 교회에 나간 후, 순안의명학교에 가서

제 5회로 졸업했는데 졸업생으로써 교회직분 중에 대회장과

원동 지회 부회장까지 되어보았으니 거듭 감사하다.

자랑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너희가 들을 때에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한 생활을 하며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해 주었구나!” 하는 감사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떠나지 않고 끝까지 축복받는 생애를 하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다.

너희들은, 먼저 잘 믿고 성경을 계속 읽기 바란다. 언제든지

기도생활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 모든 가족들이 성경연구하고 믿고 기도드리면서 화평 속에서

모두 승리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나의 소원일 뿐이다.

모쪼록 깊이 생각해서 이 늙으신 부모가 어려서부터 믿어 내려온

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이 교회 안에서 잘 준비해서 디모데후서

4장 7-8절 말씀대로 “나의 믿음을 잘 지키고 잘 달려왔으니

이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는 상급을 모든 가족들이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한 세상 살아가기를 바란다.

근도의 사고를 보면서 할말이 많지만 다 그만두고 “가정에

대들보 되는 근도의 일이 화가 아니라 도리어 복이 되는 일로

삼아서 모두 자기를 돌아보며 살기를 바란다. 세상나라보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모든 의무를 감당하고 화평 속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칭찬을 받고 살게 되기를 바란다.


“이 녹음테이프를 카피해서 가족들에게 주면 좋겠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들은 태목이의 작은 아들 앤디가 교회에서 쓰는

카피머신을 얻어서 이렇게 카피해서 가족들에게 전하게 되어

감사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촬리, 앤디가 병중에 계신 할머니를

위로하려고 알지도 못하던 한국말을 배워서 학교에 갈 때

“우리 학교에 갑니다.”, 학교 갔다 오면 “우리 학교 갔다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영어가 섞인 발음으로 “할머니, 앙뇽(안녕)

하셨습니까?”, 잘 때는 “앙뇽히 주무십시오.”해 놓고는

“할머니 재미있죠?”등 여러 가지로 할머니를 위로 하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했던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만들어진 이 테이프가 너희들의 믿음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부록-(이 부분은 편집자에 의하여 기록 된 것입니다.)


1. 그 후의 이야기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 간단한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과 병원에서 한 이틀 밤낮을

지내면서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아버님의 회고록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을 저에게 다시

실감나도록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저희 집에 다시

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옛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습니다. 병원에서의 그 이틀 밤 동안의 말씀들과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말씀들은 회고록을 쓰게 하는 동기와

이유와 힘이 되었고, 실제적으로도 회고록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회고록 육성 테이프는 우리 집안의 장손인 근도의

죽음을 겪으면서 끝을 내셨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여니 할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이 아버님도 사랑하던 장손을

잃으시고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을 잊으실 만큼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어머님은 펜실바니아주 레딩 근교에 사시는 네 째

형님 댁에서 1986년 11월 4일 향년 80 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의 연세 90세가 되신 때였습니다. 어머님의 시신은

캘리포니아 주로 옮겨왔습니다. 글렌데일 한인교회 오성훈

목사의 도움으로 글레데일 Vallejo Drive Church에서 어머님의

추모예배를 드리고 어머님은 캘리포니아주

Hollywood Hills Forest Lawn에 있는 장지에 모셨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몇 몇 가족의 집에서 거하시다가

마지막에는 다섯째 아들인 저희 집에서 계셨습니다. 저는

뉴스타트의 일을 맡아 북 가주에 위치한 위마라는 곳에 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기뻤던 이야기는 물론,

슬펐던 일과 보람되었던 일들과 마음 아팠던 일들 까지,

그간 하지 않으셨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섯째 며느리와

나누시며 행복해 하셨습니다. 제가 주말에 나성에 내려오면

아버님은 “내가 문자와 매일 댄스를 하고 있다”라고 웃으시며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밤일을 하던 며느리가 와서

아침식사를 하시라고 하면 다리에 힘이 별로 없어서

며느리의 두 손을 잡고 식탁까지 오시는 일이 춤을 추는 듯

즐겁다고 말씀 하시곤 하셨습니다. 밥을 드실 때는

숟가락 보다 젓가락을 더 많이 사용하는 시아버님께

“숟갈로 드시지요!”라고 말씀드리면 “나에겐 먹는

자유가 있다!”라고 며느리에게 말씀을 하시며 그렇게도

자유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되도록이면 많은 자유를

허락하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생각이 나실 때마다 아버님은

“문자야! 고생이 많지? 내가 너를 고생시키지 않고 죽어야

하는데.”라고 말씀을 하시곤 해서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다섯째 며느리에게 먼저가신 어머님이 “나를 자꾸 오라고

부르신다.”하며 모든 자녀들을 모이도록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거의 모든 자녀들이 다 모였고 모인 자녀들을

일일이 다 만나 보셨습니다.


아버님은 1992년 2월 22일,

거의 모든 자녀들이 다 모인 그 주일, 안식일 아침 7시경에

향년 96세로, 수를 다 하시고 너무도 평안함 속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내가 너를 고생시키지 않아야 하는데”라는 소원의

말씀을 하신대로 너무도 평안함 가운데 수를 다 하셨습니다.

화잇부인 기념병원(White Memorial Hospital) 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렸고 아버님도 6300 Forest Lawn Drive,

Los Angeles, California 90068에 있는 Hollywood Hills

Forest Lawn에서 발인 예배를 드리고 그 곳에 있는

어머님의 묘지에 합장을 하였습니다.

몇 년 후, 막내 동생 태경이는 뉴욕 주립 공원 깊은 산 속에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아 볼 수가 없는 몸으로 사망한지 꽤

오랜 후에 경찰에 발견 되었습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나마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죽은 것은 아버님께 다행한 일이라

생각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동생의 죽음은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그 전부터 있었던 우울증의 증세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더 심했었다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재판소(裁判所) 판결문(判決文)

(원본 번역)


(아래의 조선총독부재판소(朝鮮總督府裁判所)판결 번역문은

아버님이 작고하시고 나서 오랜 후에, 어떤 분을 통하여

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어로 된 판결원본 과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받아서 우리말로 된 것만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判決原本)

朝鮮總督府裁判所(조선총독부재판소)

昭和十六年刑控第十七號(소화십육년형공제십칠호)

判決(판결)

本籍 平安南道江西郡水山面雲北里三百八十六番地

住居 京城府回基町八十九番地

牧師 鄭東沈改오? 國 本 秀 松

當年 四十六年

위 사람에 대한 보안법위반피고사건에 관련 소화16년

(1941) 8월 30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청에서 언도한

유죄판결에 대해 피고인에 의한 공소제기에 따라

본 재판소는 조선총독부검사 少磯省吾 관련심리를 통해

아래와 같이 판결한다.

主文

피고인을 징역 6월에 처함

理由

피고인은 15세 무렵부터 기독교를 신봉하여 대정11년(1922)

3월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에 있는 기독교계통의 중등학교인

사립 의명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대정12년 이후로

기독교전도사 그리고 목사로서 황해도 황주군, 평안남도 평원군,

북간도, 청진, 원산 등을 거쳐 소화 14년(1939) 5월

경성부 회기동에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로

취임하여 동 교파인 중ㅁ(선)대회장을 겸직하고 있던 중

소화 16년(1941) 4월 동 교회에 속한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에 있는 예수재림교회 화강리 예배당

신축낙성 예배로 앞서 기술한 중ㅁ(선)대회 주최로 동월

8일부터 동월 12일까지 동 예배당에서 낙성기념을 겸한

동 교파 충청남도 지방회를 개최하면서 피고인은

동 교회 전도사 평강영섭 외 4명의 사역자와 함께

이곳에 모여, 앞서 기술한 지방회의 마지막 날인

12일 밤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교회 신자 오원대식 외

남녀 신도 및 비신도 약 50명에게 설교를 하던 중

“여러분은 우리 조선이 30년 전 멸망한 이유를 알고

있는가? 우리 조선인은 한일 합방 이후 30년의

오랜 기간 일본의 통치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해 왔고,

조선은 그동안 이질적인 문화가 만연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을 우리들이 라디오를 통해 제외국에

방송한다면 외국에서 속속 자금이 들어오고

가까운 장래에 우리들은 다시 30년 전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함부로 함으로서

한일합방 이래 총독부의 통치를 비방하고 조선의 독립을

시사하는 등의 정치에 관한 불온적인 언동을 하여

치안을 어지럽힌 자로서 증거에 의해 위법사실은

설교내용 뿐 아니라 피고인의 본 법정심의에 의한

위법사실에 대한 공술과 증인 오원대식, 충본정남,

김산병두, 송원종훤, 산전형이 에 대한 검사의

각 신문조사과정에서 제각기 그날 그 장소에서의

피고인으로부터 위법사실에 대한 내용의 설교를

들었다는 요지의 각 공술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에 의해

피고인의 위법사실은 보안법 제7조에 해당됨으로

조선형사령 42조에 의거 그 형명(刑名)을 변경하여

소정기간 중 징역형을 선택하여 그 형기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6월에 처하기로 한다.

이로서 主文과 같이 判決함

피고인의 공소이유 기각

소화 16년 11월 10일

경성복심법원형사제1부

재판장조선총독부판사______

조선총독부판사____________

조선총독부판사____________

3. 조사(弔詞)


정동심 목사의 영전에 드립니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살기에 급급해서 목사님이 마지막 드셨던 입원실과

아드님 댁의 병석에 한번 찾아가 뵙지도 못하고

목사님을 여의게 되었습니다. 이 무정하고 무례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생시 같으면 “괜찮아, 괜찮아!” 하시며 등을 두드려 주시겠지만,

어른을 어른답게 한번도 모시지 못한 저희를 저희 자신들이

용서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목사님!

9순의 나이에도 꼿꼿하시던 모습, 젊은 아이들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하시던 그 맑은 총기로 언제나 우리 곁에

원로 목사님으로, 자애 깊은 아버님으로 계실 것 만 같았는데,

불과 몇 주간의 병석에서 이처럼 떠나시니 인간의 수한을

짐짓 모른체한 저희들의 무성의와 무정이 한층 뼈저린

후회로 남습니다. 모셔다가 즐기시는 음식 골라서 한번 대접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오늘 목사님을 보내드려야 합니까?


목사님!

흔히 사람들은 연로하신 어른들의 돌아가심을 두고

“호상”이라고 합니다.”만은 목사님을 보내는 저희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는 목사님이 한 인간으로 살아오신 세월과,

한 목회자로 살아오신 세월, 그리고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서 살아오신 세월의 그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 한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므로 차마 목사님이 가시는

이 시간을 마음의 눈물 없이 넘길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살아오신 한 세기의 세월은 혼란과 고통과

갈등의 시대였습니다. 전쟁에 시달리고, 가난으로 고통당하고,

인간에게 배반당하며 살아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험난한 시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살기가 힘든 시대를

당신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그 사회의 양심으로 사셔야 했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한국 재림교단에서 50여 년간의

목회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목장에서도 목양이란 고달픈 것인데 하물며 피폐한

한국교회의 50년 목양이란 얼마나 험한 갈바리의 길이었겠습니까?

무엇보다 가난한 남편으로서 여섯 아들, 다섯 딸을 부양하고

교육시켜 길러 내야했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수고와

괴로움을 어찌 저희들이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처럼, 그 많은

자녀를 기르시며 겪으신 사연을 설사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한들,

그 한스러우심을 어찌 속속들이 이해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님!

목사님은 그 모든 고통, 그 괴로움, 그 고독, 그 한을,

믿음으로 극복 하셨습니다. 마치 고통을 고통으로 즐기시듯,

목사님은 목사답게 초연히 한 생애를 넘기셨습니다.

늘.........즐겁게 일하셨고, 감사해 하셨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마치 믿음이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기쁨과 감사로 바꾸는

요술 지팡이처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희들도 이제는 나이가 50을 넘어 섰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눈이 한결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사님의 그 주름진

얼굴에 담고 계시던 그 미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수월한 것 같던 당신의 생애, 믿음, 목회들이, 실은

얼마나 힘든 것이었고, 고통스런 것이었던 가를 말입니다.


목사님!

믿음이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것임을 나이가 들면서 저희는 알게 되었고, 그리고 당신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얼마나 짙은 슬픔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 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한 생애”를 끝내시고 잠드신 목사님!

아니, 우리들의 아버님!

당신이 무언으로 보여주신 마지막 미국 생활은 저희들에게

진정한 설교요, 믿음의 모본이었습니다. 파란 많은 한 생애를

이렇게 복스럽게 마감하셨으니 후진인 저희들에게 큰 빛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완전한 자유에 드셨으니

이제야 또한 지정한 기쁨에 드셨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주님 오실 때, 그 때는 눈물 없이 뵙겠습니다.


1992년 2월 25일


자식 같은 후진,

송순태 弔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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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아버님의 회고록을 책으로 낼 준비가 완료된 당시

서문을 써 주신 유 형환 전 한국 연합회장님의 글입니다.

제가 아버님의 회고록을 올리면서 제일 처음에 올려야 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제 실수로 이제 마지막이 되어 올립니다.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그 당시 고문경 목사님께서도 서문에 올릴 글을 써 주셨는데

제가 그만 컴퓨터로 실수를 하여 그 귀한 글이 날라가 버리고

말아서 올리지를 못합니다.

고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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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심 목사의 회고록을 읽고.


먼저 존경하는 목사님의 회고록이 나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않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느끼고 깨달은 바가 많으나

그 중 세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목사님께서 1896년 3월 30일, 유복자로 태어나

1992년 2월 22일, 96세로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근 1 세기를

사시면서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잠시도 쉼이 없이 고난이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낙담하여 인생을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용기와 욥과 같은 인내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많은 친척들과

자녀 손들을 주안에 있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께서는 우리 교단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가 되시고 또 최고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성공의 비결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하시고,

책제목도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이라 하시고 평생 하나님과

동행 하셨음을 간증하셨습니다.


둘째로, 목사님께서 태어나신 때는 우리나라가 점점 쇠하여져서

일제의 탄압이 기다리고, 우리교회적으로는 1904년 세 천사의 기별이

들어오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때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탄압과 6.25동란의 고통을 이겨내고 드디어

중진국이 되고, 우리교회도 모든 고난을 이기고 크게 발전하여

중흥기에 접어들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은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의 산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셋째로, 흔히 역사나 회고록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신의 주관에 따라 쓰게 마련입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의 장점은 과장하고

남의 장점은 과소평가하거나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남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남의 약점을 말하기를 조심하고

자기의 장점을 말하는 것도 쑥스러워 하여 결국 아무

특색도 없고 참고할 만한 것도 별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끝으로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장단점과 남의 장단점도

적당히 언급하기도 합니다.


아마 목사님은 이 마지막 형태에 속하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실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교회와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으나 꼭 필요할 때는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에 확고하셨으나 이 세상의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시고 지혜롭게 살기위해

고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으시는 분마다

영육 간에 큰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끝으로 목사님께서는 청년들을 몹시 사랑하시고 또 청년들을

양성하시는 일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목사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목사님 생전에 사적으로 선물이나 식사대접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 합니다.


2002년 4월



목사 유형환 (전 한국 연합회장-편집자 주)

3. 정 동심 목사의 약력



(*아버님의 약력은 아버님께서 손수 작성하신 것입니다.

아버님의 일기장과 기억력에 의존하셨을 것이라고 추축이 됩니다. )


* 1896. 3. 30. 본적지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386번지에서

부친 정 석문, 모친 이 섭련 씨의 3남, 유복동으로 출생

(음력 2월17일)

* 1907. 4 - 1911. 8출생지 소재 한문 서당에서 한문 공부 수료

* 1910. 6. 안식일 교회 출석 시작

* 1913. 3. 21 .출생지 소재 안식일 교회 소속 진명 학교 제 1회 졸업

* 1913. 8. 15 노설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음

* 1913. 11. 20. 곽치겸 양과 결혼

* 1917. 3. 21. 순안 의명 학교 제 5회 졸업

* 1917. 7. - 1918. 3. 문서 전도에 종사

* 1918. 4. - 1921. 3. 평남 강서군 성태면 대마리 소재 희명 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근무

* 1919. 4. - 1921. 3. 조도전 대학교 교외생 법과 수료

* 1922. 3. 21. 순안 의명 학교 신학과 수료

* 1922. 4. - 1923. 3.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철도리 홍명 학교 교사로 근무

* 1923. 4. - 1924. 4. 평북 의주군 옥산면 좌동, 평남 영유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

* 1924. 5. - 1929. 5. 북간도 삼도구, 투도구, 북간도 용정에서 선교함

* 1929. 6. - 1931. 3 함경남도 원산, 함경북도 청진에서 사역

* 1931. 3. 조선 합회 행정 위원으로 피임됨

* 1933. 2. 10. 목사 안수 받음

* 1934. 6. 북선 대회장으로 피임됨

* 1934. 10. 11 아내 곽치겸 여사 장질부사로 별세함

* 1935. 2. 25. 김병애 여사와 재혼함

* 1939. 6. 중선대회장으로 피임되어 서울로 전임

* 1941. 4. 11. 충남 화강리 교회에서 검거되어 청양경찰서와

홍성경찰서에 수감됨

* 1941. 9. 홍성 재판소 선고에 항고하여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 1942. 2. 19 6개월 징역 선고받음, 항고 기각 당함

* 1942. 8. 19 화강리 교회에서 검거 된지 16개월 8일 만에 출감

* 1943. 4. -1944. 7 서울 위생병원 총무로 재직

* 1944. 8. - 1945. 8. 서울 동대문구 여관 조합 총무로 근무

* 1945. 8. - 1945. 10. 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재건위원으로 종사

* 1945. 10 - 1946. 3 시조사 및 서울 위생 병원 총무로 재직

* 1946. 4. - 1952. 6 원동 지회 부회장으로 피임됨

* 1946. 4. - 1947. 8. 중선 대회장과 한국 연합회장 대리로 근무

* 1947. 9. - 1953. 8 남선 대회장으로 재직

* 1950. 6. 미국 상항에서 열린 안식일 교회 46회

세계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

* 1951. 1. 한국 교회 대표로 원동 지회 총회 참석(싱가폴)

* 1953. 9. 삼육 신학 원장에 취임

* 1954. 4. 한국 삼육 고등학교 교장에 취임

* 1955. 4. -1956. 6. 삼육 신학원 남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

* 1956. 6. 중한 대회장에 취임

* 1957. 12. 영남 대회장에 취임, 원동 지회 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 1960. 1. 한국 교회 대표로 원동 지회 총회 참석-홍콩

* 1961. 6 한국 연합회 재단 이사장에 취임

* 1964. 4. 정년퇴직

* 1964. 5. - 1965. 4 면목동 모의 보육원 교회 예식 담당 목사로 취임

* 1965. 11. 21 자녀들의 초청으로 도미

* 1966. 7. - 1967. 6. 나성 중앙 교회 제 2대 담임 목사로 재직

(본인의 요청으로 자급 사역자로 재직함)

* 1986. 11. 4. 아내 김병애 여사 별세

* 1992. 2. 22 정동심 목사, 안식일 아침 96세로 주안에서 수를 다 하심.

슬하에,

장 남태혁자부임 명신장 녀진실사위김 성래

차 남태영김 기련차 녀충실명 윤수

3 남태중김 학경3 녀제후최 석범

4 남태목김 인숙4 녀정실

5 남태국정 문자5 녀경실

6 남태경

외에 수십 명의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를 두셨습니다.

(*아버님의 글과 녹음해 주신 육성 테잎의 말씀 위에 제 말을 더

첨부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막상 글을 편집하여 올리면서 상당히

예민한 부분들은 삭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아름답지도 못한 투박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동안

칼리포니아에 계신 저희 막내 누님댁에 한동안 거하셨습니다.

2011년 제가 수술을 받은후에 저를 방문하신 막내 누님께서

아버님의 유품을 몇 점 가지고 오셔서 전해 주셨습니다.

그 속에 아버님의 노트북이 한권 있었는데 원래 미주 시조사에

원고를 보내시고 나서 그 원고에 첨부할 글을 더 쓰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녹음 테이프의 내용과 중복되는 글도 있지만 새로운 사실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몸이 회복되면 편집하여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50회에 걸쳐 연재되도록 편집을 했었지만 좀 일직 끝내고 싶어

좀 길게 올려서 33회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께는 매회의 분량이 좀 길었다고 느끼셨으리라 사려 됩니다.

그 점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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