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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9

(지방색을 토대로 당을 짓는 일은 그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었지만 이일들은 교회의 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일에 관계 되었던 분들 중에 정말로 교회

요직에서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이 그냥 평범하게 교회일을

하다가 그만두거나 은퇴하게 된 것이 몹시 아쉽게 생각이 된다.

연재 #28 끝부분)

11. 중한 대회장과 영남 대회장-제 2 부


한번은 내가 영남대회장으로 있을 때에 부산위생병원 요직에는

이준민 씨가 병원총무로, 나의 맏사위인 김성래 목사가 원목으로,

그리고 김성래 씨의 부인이자 나의 맏딸인 “진실”이가 부산위생병원

원장인 에릭 의사의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준민 씨도

이북사람이오, 김성래 목사는 나의 사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북사람이거나 이북사람과 가족관계가 있다하여 병원에서 전부

나가 달라는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부산위생병원은 영남대회구역 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합회 직속기관이었다. 그래서 부산위생병원에

잠시 들려보니, 내가 보기에도 해결을 빨리 보아야 할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연합회행정위원회에서 우선 이준민 씨와

김성래 목사, 두 가정을 부산위생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전직을

시키자고 내가 안을 내고 설명을 하여 전격적으로 결의가 되었다.

그런데 부산위생병원 원장인 에릭 의사 본인이 한국어를 못하는데

부산에는 그나마 영어를 하는 간호원이 김성래 씨의 부인 리나

(진실이의 영어 이름)인데 김성래 씨 가족이 전근을 가면 자기가

일을 할 수가 없다고 고려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다시 연합회

행정위원들은 여러 가지 의논들을 해서 다른 결정을 했으나 계속

배척운동을 하여 결국 다른 곳으로 전근을 시켰고 부산 위생병원은

한동안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를 시작한 분들이 혹시 교회 사역에서 당시 말로

“잘릴가 보아” 좀 젊고 과격한 분들과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그런분들 몇 명이 대구에 있는 영남대회 사무실로

데모를 하겠다고 찾아 온 것이다. 당시에 아무리 사회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데모를 통해 성취하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이 일도

해결을 해야 하지만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사무실로 불러드려서 전에 없이 심하게

질책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더니 자기들이 생각을 잘못했노라고

사과 하면서 돌아들 갔다.

 

그런데 이 일들의 전후 과정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연합회장과 연합회

행정위원들의 귀에 들어갔는지 얼마 후에 연합회에 회의에 침석 차

서울에 갔는데 연합회장 데이비스(한국명 태 비수 목사)목사가 회의 때

느닷없이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정 목사는 대회장이면 대회장답게 일을 처리 하셔야지 그게 무엇입니까?”

“태비수 목사님, 무슨 일을 가지고 지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영남대회내에서 사역자 배척운동을 한 사람들을 아직도 그냥 두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연합회장님, 그런 말 마십시오, 비록 사람들이 실수를 할수 도 있지만

지금 서로 마음을 합하여 일들을 잘하고 있습니다.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일에 따르지 않은 사람을 그냥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태비수 목사님, 지금 그 분들은 저와 의좋게 일도 잘하고 있고 또

그 지역에서도 그분을 좋아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더구나

대회내의 사역자를 옮기는 것은 대회행정위원회가 할 일이지,

연합회장이나 연합회행정위원회가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한다면 대회행정위원회에서 하겠습니다.”

“..............”

나는 영어는 잘 모르지만, “서양 분들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달라서

그분들의 생각대로만 일하면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회장이라 하더라도 할 말은 하곤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할 말이 없으셨는지 태비수 목사도 가만히 계셨다.

그런데 말은 얼마나 빨리 전해져 나가는지 문제를 야기했던 분들의 귀에

내가 연합회 행정위원회의에서 마치 연합회장과 크게 다투기나 한 것처럼

전해 져서 행정위원회가 끝난 후에 대회로 돌아오자 그 분들이 나에게

사과를 하는 연락들을 해 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우리는

더욱 신뢰를 쌓을 수 있었고 전보다 더 마음을 합하여 얼마동안 일을

잘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당시에 요직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연합회총회나

연합회 행정위원회의 결의를 거쳐야만 했는데 당시에 선교사의 통솔하에

있던 한국 교회는 연합회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연합회 행정위원이 선교사인

까닭에 정말로 요직에서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충분한 자질이 있는

분들도 결국은 평범하게 교회 일을 마치게 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교회는 세계적으로 매기13째 안식일에 선교지를 위해 특별

연금을 거두어 특정지방을 위해 사용하는데 이번에는 한국에

배정이 되었다. 그래서 연합회행정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영남대회

본부에 예배당이 없으니 그곳을 위해 사용하게 해 달라고 안을

미리 제출을 하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다. 연합회행정위원회가

시작이 되어 이 안건이 나와 의논이 시작도자 다른 대회 대회장께서

우리 대회도 본부 예배당이 없으니 우리 대회에도 그 선교지 자금을

달라고 즉석제안을 해서 그 돈을 둘로 나누기로 결정이 되었다.

둘로 나누인 돈을 가지고 건축업자에게 교회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옛날에 원산에서 교회를 한번 지어본 경험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교회라야 가정집 수준이었다.

 

나는 영남대회 회계(재무)인 노 승익 장로가 건축에 대한 경험이

조금 있는 듯하여 의논을 한 결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직할(直轄)하여 건축을 하면 돈이 적게 든다고 했다. 수소문 한 결과

경주교회에 새로 나오는 목수가 일을 잘 하신다 하여 불렀다.

그분은 신체피부에 조금 문제가 있는 듯 했으나 일을 신실하게 하셨다.

또 대구에 벽돌 쌓는 분이 계셔서 부탁을 했더니 “예배당을 짓는 일이니

임금을 얼마를 주던지 자기가 일을 하겠다.”해서 맡기었더니 매우

신실하게 해 주셨다. 그래서 꽤 큰 이층 건물을 지어서 아래층은

대회 사무실로 하고 이층은 교회로 설계를 하여 건물을 완성 시켰다.

이층이 교회인지라 소음을 막기 위해서 마루를 이중으로 하고 그

사이에다가 톱밥을 많이 사다 넣었더니 소음도 없고 보온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래층에 대회 각부사무실이 들어가고

이층은 예전에 비해 매우 큰 교회가 들어갔다. 좋은 목수가 있는 김에

예배당 의자까지 직접 만들어 넣으니 매우 훌륭한 교회가 되었다.

교인수가 원래 얼마 안 되어 걱정을 했지만 큰 교회를 짓고 나니

교인수도 훨씬 늘어나서 매우 감사했다.

 

그전부터 대회 본부교회에 정복수라고 하는 과부가 한 분 계셨다.

그 남편은 나와 순안 의명학교동기 동창인 이격원 씨였는데

외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내 안사람과는 전에 같은 전도부인으로

친하게 지내시던 분인지라 여러모로 대회와 우리 집을 도와주곤 하셨다.

그런데 이 분은 발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시고 계셨는데

마침 그때 나의 네째 아들 태목이가 군대에 나가 전라남도 광주에

가 있었는데 나의 집사람이 태목이를 자주 보기를 원하는 것을 알고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기에 그저 감사하다고만 말을 하고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복수 씨가 자기아들과 어떻게 운동을 했는지

우리 태목이를 대구로 오게 한 것이다. 태목이는 음악을 좋아하던

아이인지라, 대구지방에 군인으로 있으면서 주말에는 교회로 나와서

찬양대를 조직하여 열심을 내니 여기저기서 많은 청년들이 찬양대에

가입을 하여 교회가 청년이 많아져서 매우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1년인가 갑자기 5.16혁명이 생겨서 모든 일이

혼란스럽게 보였다. 그중 한 가지는 정부주도로 학교마다 혁명 전,

즉 구체제 하에 있던 선생들은 다 내보내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우라는

정책이 시달되었다. 참 난처한 일이었다. 나는 군부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인데 우리교회학교

선생들을 그렇게 급하게 대체(代替)시킬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간 교회학교이기 때문에 담배나 술도 하지 않는 품행이방정한

교사들을 채용했는데 갑자기 그런 사람들을 구할 수가 없으니

이제 정부의 새 대책 때문에 아무나 데려다가 대체(代替)시킨다면

교회학교로서 학생들의 교육은 어찌하란 말이냐?”하고 사정을 해대었다.

그러자 그 군부의 사람들은 ”아, 그런 학교라면 혁명에 반대될 것이

없으니 모든 선생들을 그냥 유임시켜도 좋다“라는 허락을 받고

무사히 어려움을 넘겼다. 다만 지레 겁을 먹었는지 미리 사직을 해버린

한두 분 선생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혁명 정부가 제기한 그 다음문제는 교회단체가 재정에 대한 문제는

외국사람에게 의존 말고 내국인이 맡아야 된다는 시책이었다.

우리교회는 재단법인체로 되어있었고 교회 재단이사장은 연합회장이

겸직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연합회장이니 연합회장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재단이사장은 한국 사람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긴급 연합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영어를 아는 박창욱 선생으로 하자고 의견이 나왔는데

연합회장 데이비스(태비수)목사는 이일은 원동지회에서

결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그 결정을 원동지회에 넘겼다.

곧 원동지회에서는 “정동심 목사를 재단법인이사장으로 하라.”는

회신이 왔다. 그래서 1961년 5월에 재단법인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우리교회 안에서는 이사장이 무슨 권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국책 상

그 직분을 맡기는 했으나 공부도 별로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믿고 교회 내에서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믿고 맡겨 주심을 감사했다. 원동지회의 회신이 오자 박창욱 선생은

웃으며 “모든 것에 경험과 힘도 있어야 하지만 배경도 있어야 되는

모양입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정 목사님은 이력도 있고, 원동지회 빽(배경)도 있으니 이렇게

된 것 아닌가? 해서요” 하면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빽”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서 함께 웃었다. 재정에 관한 경험이 많은 박창욱 선생은

나의 이사장 직분을 잘 하도록 정말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1년 6월, 또는 7월인 것 같다.

영남 대회총회가 열렸다. 대회본부는 대구에 있지만 숙소와

집회장소 등을 참작하여 영남대회 총회는 경산에 있는 경산

삼육고등학교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걱정을 했던 지방색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 총회 참석자들 중에 유력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를 아니했다. 조금 후에 알아보니 유력한 분들 중 몇 분이

경산역에 나가 대표자로 오시는 분들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서

먼저 회의를 한다는 말이 들려 왔다. 대회총회가 열리기 약 두 시간

전에 나에게 자기들이 모인 곳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곳에 가니 유력하신 총회 대표자들 중

대 부분의 남한 출신들이 그곳에 모여 계셨다. 들어가자마자

그 분들은 나에게 흥분된 음성으로 말했다.

“정 목사님, 이번 총회에서 사표를 내시겠습니까?

아니 내시겠습니까? 대답을 하십시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 내가 책임 맡은 바로 이 대회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일을 추진 할 때는

교회의 규정도 잘 알아서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 신도들은

물론 지도자들도 대회장으로 있는 정동심 목사는 그 동안 어떻게

일을 하였기에 총회대표자들이 교회의 기본규정도 모르고 이렇게

하는가 하고 이야기 할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이번 대회총회에

사표를 제출한다는 일은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 정동심이라는

사람을 영남대회장으로 결정하여 보낸 것은 한국 연합회총회의

결정이지 영남대회의 결정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내가 사표를 제출하면

한국연합회로 제출하지, 영남대회 총회에 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알려드리지요.

만일 저에 대해서 불평이 있을 것 같으면 이번 총회에 오신 대표자

여러분들이 전부 연명(連名)해서 이 정 동심 이가 영남대회 대회장으로

적당치 않다는 결의문을 써서 연합회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그 중에 박의창? 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일정시대에

경찰서 사법계주임으로 계셨던 분인지라 경우가 밝고 세상 돌아가는

규칙을 잘 아시는 분이었다. 그는 부산 서면에 있는 보육원 원장

최매실 씨의 가장 되시는 분인데 그분이 큰소리로 말을 했다.

“정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우리가 뭘 모르고 이렇게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다간 영남대회에 수치만 돌아 올 것입니다. 총회 시작할

시간도 다 되었으니 총회장소로 갑시다.”

나는 이분의 하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내가 나온 후에 그 사람들은 원래 계획대로 노승익 씨도 불러서

나에게처럼 “이번 총회 때 영남대회 회계 겸 서기 직분을 사직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고 질문한 것이다. 노승익 씨는 내가 이곳에 이미

불려 왔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교회의 규정을 잘 아시는 분이라

”저는 이번 총회에서 사표를 낼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국 연합회

총회에서 결의하여 영남대회에 회계 겸 서기를 하게 된 것이니

사표를 낸다면 한국 연합회에 제출 할 것입니다.”라고 같은 대답을

한 것이었다. 노승익 씨까지 그렇게 대답을 하자 박의창? 씨는

”노승익 회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더욱 확실하니 총회에 참석하러 가자“라고 하자

많은 대표자들이 동의를 하고 총회로 왔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 모였던 대표자들 모두가 다 지역감정을 가지고

사전에 계획하여 당을 짓고 대회장과 회계 및 다른 부장들에 대해

이북사람이라고 배척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몇 몇 분들이 주동이 되어 기차에서 내리는 대표자들을 안내하여

총회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가서 그들 나름대로 섭섭했던 일을

설명하자 동정심도 생기고 또 군중 심리에 의해서 과격한 언동을

하게 되었으나, 경우가 바른 몇 분의 말을 듣고 지금의 일들이 경우에

어긋나는 것을 알고는 헤어져서 총회로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대회총회는 시작이 되었다.

내가 대회장이니 총회의 사회자가 되어 대회총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총회 첫날밤 집회가 거의 끝난 무렵, 어떻게 된 일인지

대표자 중 신모라고 하시는 분과 경산에 사는 권모라고 하는 두 분이

일어나서 서로 팔을 벌려가며 큰 소리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신모씨가

뒤로 넘어지며 마치 호흡이 끊어진 사람처럼 되어버린 불상사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당한 일이라 겁이 났는지 아무도 신모씨를 돕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응급상황인데 어디서 의료인을 찾을 수도 없어서

나는 사회를 하다말고 내려와 대야에 찬물과 수건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수건에 물을 적셔 신모 씨의 얼굴을

닦아주고 몸을 주물러 주고 하니 얼마 후에 깨어났다.

이번 영남대회 총회 때 일어난 첫 불상사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신모씨와 권모씨를 방문했더니 서로 미안하다는 표시를 해서

일이 수습이 되어 총회 동안 무사히 넘어갔다.

 

대회(현재의 합회)총회기간 중에 중요한 일들 중 한 가지는

선거위원회에 관한 일인데 관례적으로 연합회장이 선거위원장의

일을 하게 된다. 나는 20 여 년간 대회장을 하면서 한번도

선거위원회에 들어가겠다고 신청을 한 일도 없고 또 한번도

선거 위원회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 그 이유는 대회총회

선거위원회에 그 지역 대회장이 들어가면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의논한다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총회는 시작 전부터 지역적인 파벌과 그룹을 짓는 문제가 있었고

또 선거위원도 그룹의 영향을 받아 선출이 되었기에 걱정이 되어

나는 선거위원장이 되신 연합회장에게 이번에는 선거위원회에 좀

들어가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평생 처음 그 같은 요청을 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총회가 끝날 무렵, 선거 위원회는 결정한

사항들을 대회장인 나에게 먼저 통보한 후에 총회에 내어놓고

가부를 결정하려 한다면서 선거위원 몇 분이 나를 만나자 했다.

“목사님, 이것이 선거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인데 이대로 총회에

제출해도 되겠습니까?”

결정된 사항들을 보니 앞으로 일을 해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결정들이었다.

“선거위원회의 일들을 보느라 수고 하셨고 이렇게 미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결정된 사항들을 보니

저에게 영남대회에서 대회장의 일을 그만 두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대회행정위원들은 대회의 모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사람들인데

영남대회 내에 우리 신학교까지 나오신 분들도 많은데, 어떻게

우리교회의 국민학교도 구경 못한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행정위원으로

선출을 했으며, 더구나 영남대회 내에서 가장 큰 지역인 부산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모두 행정위원에서 제외 시켰으니 어떻게

영남대회를 이끌어 나가라는 말씀들이신가요?”

그러자 선거위원중의 한사람인 D 장로가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다른 것은 저도 별로 할 말이 없지만 부산에서 일하는

사역자를 행정위원회에서 제외시킨 것은 그 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그랬습니다.”

D장로는 영남대회 평신도 대표로써 가장 경우도 바르시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생각하시는 분이었는데 이 분까지도 이렇게 말씀을 하시기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렇다면 정말 그 안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총회 선거위원들은 대회 각부주임들과

대회행정위원들을 선정하는 일까지만 총회에 제출하는 것이고

대회내의 사역자 이동문제는 새로운 행정위원들이 충분한 계획과

토의를 거쳐서 결정을 하는 것인데 어찌 이번 선거위원들은

사역자 이동문제까지 거론을 한단 말입니까?

부산에서 사역하는 분들을 제외시킨 것은 그분들을 우리 영남대회에서

쫓아내기라도 하실 생각들이신가요? 어찌 이리 경우에도 없는 일들을

한단 말입니까? 다시 잘 생각 하셔서 올바른 결정들을 하시게 되기

바라면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다. 총회 시작 전부터 몇 사람에

의해 시작된 지역적 배척감정과, 당을 만드는 일들을 보면서 우려했던

유감스러운 일들이 총회기간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다행히

선거위원들이 다시 총회에 내어놓은 선거위원회의 안들을 보니

부산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권숙련 씨, 고문경 씨 등 몇 명이

행정위원으로 포함이 되었다.

 

선거위원들이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드려도

어떤 때는 개인의 감정이나 불순한 의견들이 잘못된 결정들을 하도록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이번 총회에서도 몇 분의 주동으로 처음부터

총회가 힘들게 시작이 되고 잘못된 결정들이 생길 뻔 하였으나 다행히도

다시 원칙적인 결정들을 하려는 노력들이 보인 것은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었다. 이런 일들은 언제라도 생길 수도 있으나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아야 할 대회부장까지 합세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몇 번이나 OO부장을 불러 자제해 줄 것을

부탁 드렸으나 앞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계속 그 일에 앞장 서는

일을 서슴치 아니하였던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영남대회총회는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총회가 끝나기 전에 새로 건축된 대회본부교회

낙성식을 하기로 결정이 되어 모두 대구로 올라갔다. 낙성식은 성대하게

치러졌고 많은 분들이 교회를 위해 선물도 준비해 주신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총회가 끝나자 대회 직원으로 유임된 OO부장이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저는 이번에 다시는 교회 사역을 못하게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OO 부장,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이번에 목사님이 그렇게 말리시는 데도 그룹에 가담하여 좋지 못한

행동을 함께 주동했으니 이번 일로 교회 사역은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목사님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OO 부장!,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서

대회장 마음대로 그렇게 면직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설사 나에게 마음대로

해직을 시킬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해도 내 마음에 합당치 않다

하여 면직시키고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도 교회에서 대회장 직을 주어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모든 일에 잘 생각하여 처신하겠습니다.”

아마 이번 일로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을 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영남대회장의 일을 보면서 경상남북 도에 계신 교우들이, 나와

영남대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깊이

느꼈고 이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대회본부교회 낙성식을 하면서

그 동안 영남대회 내에 건축한 교회들이 생각이 났다.

본부예배당을 비롯하여 삼천포, 경주, 강구, 부산병원, 경상남도 함양읍

화산리, 대구 중동교회, 통영교회 등이었다.

대구 중동교회는 대회에서 별로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그야말로

모든 교우들이 손수 나서서 힘을 합해서 일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또 화산리지역 예배당을 지을 때는 그 교회에

남자는 한두 분밖에 없고 청년여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모두

가정사정이 어려운 데도 불구하고 처녀들까지 나와서 모래를

머리에 이고 날라서 벽돌을 만들어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을

보고는 교우들이 합심만 한다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그 중에도 특별히 감사한 것은 통영(현재 충무시)예배당에 관한 것이다.

통영예배당이나 삼천포예배당은 둘 다 2층으로 지었는데 통영예배당은

정말 교인들이 합심하고 헌신하여 건축하였다. 통영 내에 아주 높고

좋은 위치에 하얀 2층 예배당을 지었는데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게 보였다.

통영교우들이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삼천포, 부산 또는 거제도로 다니는

역객선에 타고 있는 많은 선객들이 배가 통영항구를 드나들 때마다

“저 예쁜 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식교 예배당“이라고 해서

선전도 잘되고 통영에서 교회를 말하려면 안식일 교회를 빼놓을 수

없게 되어 통영 내에 명물이 되었다. 모든 교우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해 했다. 교회의 아름다움만큼 사역자와 교우들이 한 마음이 되어

좋은 감화를 끼쳐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을 했다.

영남대회총회가 끝나고 1961년 후반기가 되면서 나의 은퇴와 나의

후임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회장을 선출하는 일은

연합회총회에서 하거나 연합회행정위원회에서 결정을 하지만 대회장이

은퇴를 할 때는 후임에 대해 의견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였다. 연합회

행정위원회의를 하려고 서울에 올라오니 박창욱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정 목사님, 이제 목사님도 리타이어(Retire)할 때가 되어오는데

영남대회장 후임으로 누구를 생각해 본 일이 계신지요?"

"그리 물어봐 주니 감사하오, 그러나 나보다는 박 목사가 합회 회계로서

각 대회를 다녀 보았으니 나보다도 더 사정을 잘 알 것 아니오?

혹시 누구라도 생각해 보았소?"

"글쎄요, 교회사역의 연륜이 많으신 한 두분이 계시기는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지방색이 문제나 경산에서 있었던 대회 총회 때의 일로 인해

계속해서 불상사가 있었으니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이용진 목사가 어떨까 생각이 되는데 목사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내 생각에도 그렇소. 그 분들 다음은 이용진 목사가 교회 일도

열심히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도 대회장의 부인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 그분을 후임자로 추천하시지요."

"기회가 되면 그리 하도록 해보지요."

결국 연합회 행정위원회에서는 나의 후임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왔고 1961년 말, 한국연합회총회에서 이용진 목사가

영남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비록 후임이 결정은 되었다 해도 이 용진

목사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던 이 용진 목사보다 교회 사역의 연륜이

더 많으신 목사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이제 후배인 이용진 목사가 대회장이 되었으니 그냥 같은

대회에서 일을 하시고 싶소?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하는 것이 좋겠소?"

"목사님, 감사합니다. 실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만 말 꺼내기가 뭐해서

가만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대회로 가는 것이 좋겠소?"

"합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합회의 결정에 맡기시겠다.”는 목사님들의 이 대답 한마디에서

이 분들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분에게서

더 이상 지방색 문제가 생겨나지 않겠다는 약속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합회에 건의를 해서 이 선배 목사들이 다른 대회로 가서

사역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고나니 모든 일이 문제가 없이

잘 해결된 느낌이 왔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원칙대로만 해 나갈 것 같으면 형제사이에 큰 문제가 없이

잘 해결되는 것을 다시 경험했다. 

 

은퇴를 눈앞에 두고 생각해 보니 나의 사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연합회행정위원회의를 통해 결정된 나의 제안들도 생각이 났다.

첫째는, 내가 알아보니 세계 각국에서 안식일학교는 오전 9시 30분에

시작되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오전 10시에 시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합회행정회의에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몇 몇 선교사들의 말이

"한국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아니하여 그렇게 결정이 된 것인데

10시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하며 우리의 시간관념을 나무랬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결정해서 시켜만 보시오,

잘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선교사들은 "연합회

행정위원회의시간도 지켜지지 않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사실 행정위원회의가 9시 반에 시작한다 하면

10시나 되어야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수치스럽게도

"코리아 타임 (KOREA TIME)"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래서 행정 위원들에게 "앞으로는 시간을 좀 잘 지켜서 그런 말을

듣지 말도록 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다음날에는 모든 행정위원들이

회의시작 5분전에 다 참석을 해 주었는데 오히려 항상 회의에 늦게 오는

우리의 습관을 예상하고 선교사들이 회의에 늦게 왔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이제부터는 코리아타임이라 하지 말고

아메리카타임이라 하자"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모두 회의시간에

늦지 않게 참석들을 했다. 나는 선교사들에게 "자, 보십시오,

옳게 시간을 정해놓고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설명하면 다 이렇게 잘 하지 않는가?"하며 "안식일 학교 시간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으로 결정을 하자"고 했더니

오전 9시 30분으로 결정이 되어 매우 기뻤다.

 

둘째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찬미가에 "천당"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천당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인데 우리가 원래 불교국가가

되어서 그런지 기독교에서도 별 생각이 없이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고

영혼불멸설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교회 찬미책에서 "천당" 대신에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했더니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결정을 하여 우리 찬미책을

교정할 때 "천당"이라는 말을 빼고 "천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에 우리나라는 독립은 되었어도 교회는 재정적으로는

독립을 못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을 통한 대총회나 지회의 허급액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이니 우리는 선교사들이 어떻게 하자고 하면

그냥 따라가는 형편이고 우리의 의견을 별로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번은 연합회장이 회의에서 교회지남을 적어도 한 4000부

정도는 출판을 해야 채산이 맞는데 너무나도 교인들이 교회지남을

구독하지 않아서 적자가 많아 출판을 계속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했다.

교인들을 위해 발간되는 교회지남이 정간이 될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제안하기를 "내가 서양교인들의 집을 방문해 보니

아침마다 "In The Morning"이라는 기도책을 가지고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을 위해서

“매조 기도력”이라는 책을 만들기는 했는데 제목과 성경 절만 뽑아 놓았으니

재미도 없고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실정이니 이제라도 서양 분들이 보는

"In The Morning"이라는 기도력을 번역해서 교회지남에 올리면

틀림없이 독자도 많아지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니

그렇게 시도를 해 보자"고 했다. 모두들 좋게 생각하여 곧 교회지남에

기도력을 번역하여 올리자 교인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많은 교인들이 영적으로 좋은 감화를 받는다고 하면서

“교회지남은 버려도 기도력 부분은 따로 떼어 보관하며

계속 읽는다."라고 했다. 물론 교회지남의 독자가 몇 배나 늘어서

더 이상 손해를 본다는 말도 없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계속 교회지남에 기도력이 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곤 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초창기 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력을 읽는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 교회의 일들은 작은 것부터 항상 기도드리며

생각해서 결정을 해 나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이라 생각이 된다.

 

1961년, 나의 후임 이용진 목사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영남대회를 떠나게 되었다. 나의 지난 일생을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感慨無量)하였다. 이북 땅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대회장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생각을 해도 믿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감사했다. 연약한 내가 1917년부터 일해서

1961년까지 45년간을 과히 큰 허물이나 큰 문제없이 지나온 것을

하나님과 교회와 가족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배운 것이 많지 않았지만 교회 일을 시작할 때 결심 한 것이

몇 가지 있었고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생각이 되었다.

첫째는 교회 일을 하면서 그룹을 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처한 입장이 약하고 힘들어도 어떤 편을 만들거나

당을 지어 해결하거나 밀고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둘째로 내가 교회 일하면서 위에서 지도하는 분을 거슬러

"다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위에서 결정된 일은 순종하고 최선을 다해 꼭

성공하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넷째로는 언제나, 비록 어려울 때라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결심이었다.

45년간 일해 오면서 육신의 생각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도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내가 결심한 그 심정을 가지고

일해오니 별 큰일이 없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내가 대회장 같은 지도자의 입장이 되어서도

나의 지도를 받는 분들에게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원칙을 생각하면서 지도를 하고, 내 생각을 말해주고

서로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의 생각을 받도록 노력을 하니

문제도 적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1961년 12월, 다른 때보다도 대구에 추위가 훨씬 심했다.

그 추위에 이사하는 것도, 이사 오는 것도 무리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신임대회장이 되신 이용진 목사에게 오는 2월쯤 이사해

오시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으니 쾌히 허락을 해 주셨다.

그래서 61년 연말에 대회장직에서 은퇴를 했지만

62년 2월 20일경에 대구를 떠나게 되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30

 

(1961년 12월, 다른 때보다도 대구에 추위가 훨씬 심했다.

그 추위에 이사하는 것도, 이사 오는 것도 무리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신임대회장이 되신 이용진 목사에게 오는 2월쯤 이사해

오시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으니 쾌히 허락을 해 주셨다.

그래서 61년 연말에 대회장직에서 은퇴를 했지만

62년 2월 20일경에 대구를 떠나게 되었다. 연재 #29 끝부분)

 

제 9 부. 황혼기(黃昏期)에 인도하신 하나님


1. 은퇴 후의 축복

 

내가 교회에서 거의 45년간 일을 했지만 식구가 많아 항상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 왔다. 서울에 셋집이라도 얻을 요량을

하고는 신임 대회장과 대회 회계인 노승익 씨와 의논을 하여

20만원을 꾸어서 서울로 와서 우선 맏딸 네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영남대회장직에서는 은퇴를 했지만 아직 한국연합회 재단법인

이사장의 직분이 2년이 더 남아 있으니 한국연합회에서 일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64년까지 만 2년을 교회에서 일을 더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안식일교회에서 일한 햇수는 47년으로 되어있다.

영남대회에서 빌려온 20만원을 가지고는 서울에서 집을 도저히

얻을 수가 없기에 변두리로 가서 세를 얻던가, 아주 싼 집을 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막상 다녀보니 변두리라 해도 백만 원 이하로

집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 해 보였다. 그런데 하루는 불암동이라는

시골에 허름한 초가집이 나왔는데 40만원 정도라 했다. 값이 싸니

얼마나 형편이 없는 집일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나의 처형인

김병숙 씨가 우리를 찾아 왔다가 "그 집을 한번 가서 보기나 하자"고 했다.

그래도 내가 망설이자 “언제까지 불편하게 딸네 집에 얹혀 살 것이냐?"

하면서 재촉을 해 댔다. 결국 가서보니 집은 허술한 초가였지만 땅이

약 200평이나 되어 무엇을 심어 먹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처형은

“이 집을 꼭 사라!”고 하며 강권을 했다.

그래서 집주인을 만나서 그 자리에서 35만원에 계약을 하고

20만원을 계약금으로 지불했다. 나머지 잔금 15만원은 아들네

집에서 마련하여 지불하였다. 이사를 하며 아내가 혹시 이 집을

싫어하면 어쩌나 하고 매우 걱정을 했지만 집을 보고는

농사를 지어먹을 땅도 있다 하면서 매우 좋아했다.

아내 자랑을 하는 것 같지만 나의 아내는 비록 누추한 초가였지만

"내 비록 산과 들이나 혹 초막 속에 거해도 내 주를 모신 곳이면

그곳이 천국 되도다."라는 찬미를 항상 부르며 감사해 했다.

 

그 동안 나는 아내가 원산을 포함한 이북 땅 여러 곳과 대전, 대구,

서울 등 남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이웃이나 교인 누구와도 다투어

본 적이 없이 잘 지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동안은 언제나 교인들을 상대하며 살아 왔는데

이 “불암동”이라는 곳은 교인이라고는 한 집도 없는 동네였다.

마치 소돔, 고모라에 이사 가는 기분이면서 한편으로 아내가

이웃들과 잘 살아갈 수가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으나

동네 사람들과 아주 정답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매우 감사했다.

교회사역에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 중 한 가지는 주부 되는 사람이

교우나 또는 이웃과 서로 잘 지내지 못해서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아내는 이웃들과 잘 사귀어서 가끔 빨랫감을 가지고 동네 앞에 흐르는

시내로 나가면 "목사님 사모님 나오셨다"고 하면서 가장 깨끗한

제일 윗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과 잘 사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안사람은 밭을 일구어 고추, 토마토, 고구마, 배추와 무,

감자 등을 손수 농사지어 거두어 먹으며 매우 흐뭇해하고 감사해 했다.

이 동네에는 박씨 문중이 한 70호가 되는데 나는 우리 마당에서부터

동네 밖에까지 길도 쓸고 길가에 잡초도 뽑고 했더니 동네사람들이

매우 감사해 하고 우리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이 동네는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먹골배"가 많이 나는 곳인데

배가 익을 때면 동네사람들이 서로 배를 가져다주곤 했다.

또 동네에 환갑이나 결혼식이 있을 때는 우리를 빼지 않고

청해주었고 우리는 그 때마다 시골 식으로 깨나 고추 등

농사지은 것을 한 광주리씩 선물로 가져다주곤 했더니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70여 호 되는 박씨 문중은

전부 불교를 믿고 있어서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

그러나 우리의 감화를 받아 동네 역사상 처음으로 박씨 문중에서

두어 가정이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으나 동네 친척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한지 얼마 가지 아니하여 교회 나오는 것을 중단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에게 와서

의논을 하는 등 우리를 마치 가족이나 되는 것처럼 대해 준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내 기억에 태목이가 성균관대학 약대를 졸업한 것이

61년인 것 같다. 서울위생병원 약국에서 일하게 할까 하고

위생병원에 갔다. 차라리 위생병원 원장 닥터 루를 만나서

얘기를 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서로 잘 아는 사이인지라

총무에게 직접 갔다. 병원총무는 나에게 느닷없이 “태목이가

다른 형제들과 의가 좋은가?"하고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태목이가 다른 형제들과 매우 의가 좋다."라고

대답을 해 주었다. 나의 이 대답 때문에 태목이는 위생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당시 병원총무는 서울위생병원에

우리 딸들과 며느리가 간호원으로, 둘째 아들 태영이는 약국에서

일하는 등, 병원에 우리 가족이 많은데 태목이 까지 들어와

만약 가족이 그룹을 지어 병원과 총무에게 어려움을 줄까 해서

걱정을 한 것이었다. 내가 만약 “태목이가 다른 형제들과

의가 나쁘다."고 말을 했다면 아마 별 어려움이 없이 서울위생 병원

약국에 취직이 되었을 것이다.

태목이는 할 수 없이 서울 삼육중학교 선생으로 취직해서

얼마간 일도하고 약국도 직접 열어서 개업을 해 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그러다가 을지로에 있는 국립 중앙의료원에

견습 요원으로 취직을 하여 명륜동에 있는 누이 집에 기거하면서

다니기 시작을 했다.

태목이의 바로 아래 여동생인 경실이가 1961년에 미국에 갔는데

서신 연락을 하고 있던 모양인데 하루는 태목이가 "미국에 갈 길이

생겼는데 미국 가는 것이 어떨까요?" 라고 물었다.

나는 미국에 한번만 가 보았지만, 나라가 크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다.

내가 찬성을 했는데도 결정을 못하고 차일피일(此日彼日)하다가

자기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 본 모양이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야! 지금 미국에 간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니냐? 남은 가보려고 해도 길이 없어 못 가는데 너는 지금

여동생이 길을 다 열어 놓고 부모님도 찬성을 하는데 뭘

망설이냐?"라고 다그치니 결국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태목이는 1964년 2월경에 미국으로 갔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은 막내 딸

경실이 덕분이다. 경실이는 영어를 잘했다. 경실이가

서울 위생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 있다가

미국에 있던 어떤 의사와 연락을 해서 얼마동안

트레닝을 받고 돌아가는 케이스로 미국에 왔고

그 다음에 정실이 역시 같은 케이스로 미국에 왔다.

이제 경실이의 주선으로 태목이는 유학생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는데 당시 이민 케이스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다.

태목이가 미국에 와서 한두 달 후에 연락하기를 “자기가 결혼을

했으면 좋겠는데 미국에 오기 전에 선을 봤던 그 여자가 시집을

안 갔다면 그 여자와 결혼을 할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여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하고 삼육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김인숙 이라는 여성인데 그 전에 누구의 소개로

선을 한 번 본적이 있었다. 김인숙 선생을 만나 “미국에 가 있는

내 아들이 당신과 약혼 할 마음이 있다는데 본인의 의사는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그리 하겠다"고 대답해 주기에 태목이 없이

인숙이만 집으로 청하여 약혼을 하고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인숙이는 간호원이 아니라서 수속이 매우 힘들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64년 8월경에 미국에 가서 태목이와 결혼을 했다.

나도 불암동에 와서 살면서 한국 연합회 재단법인 이사장 일을

보기 위해 출퇴근을 하다가 1964년 하반기에 완전히 은퇴를 했다.

이 때에 이여식 목사가 중한대회장으로 있었는데 나에게 "정 목사님,

이제 은퇴해서 월급도 적을 터인데 중한대회에서 일 좀 해 주시면

대회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 드리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내가 성질이 고약한 것인지,

아니면 고집이 센지는 몰라도 그 제의를 거절하고는 이여식 목사에게

"내 월급을 보충해 준 다면 일할 마음이 없소, 은퇴 후에 나오는 월급이

비록 적으나 내가 자비량(自費糧) 하고, 이 목사가 어떤 교회를

지정해 주면 기꺼이 돕겠소!"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최형국 형제가 경영하던 면목동에 있는 모의보육원교회를 가서

돕게 되었다. 돈에 관계없이 교회를 돕는다는 것은 매우 보람이 있는

일이었고 오히려 더 가치가 있는 목회를 하는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것은 정말 나에게 축복된 일이었다.

 

내가 대구를 떠나 불암동으로 와서 걱정이 된 일은

막내아들 태경이의 일이었다. 태경이가 경산 삼육고등학교에서

한국 삼육고등학교로 전학을 한 것은 2학년 때였다.

당시 지방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서울에 와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내가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태경이가 서울로

전학을 와서 경산에 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편지하기를

"경산에 있는 너희는 서울에 있는 삼육고등학교가 좋다고 종종

말해 왔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서울에 와 보니

우리 경산삼육학교 보다 분위기도 못하고 학생들의 품행도 경산학교만

못하니 서울 올 생각 말고 거기서 공부 잘하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생각보다 철이 많이 들었다.”라고 생각하고 별로 염려를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쁜 친구들을 사귄 모양인지 학교에 가는 일도

소홀히 하고 학생신분에 어그러진 길로 자꾸 나가기 시작을 했다.

단속을 할수록 나이가 많아지면서 더 옆길로 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65년에 미국에 있는 자녀들과 며느리, 사위가 함께 편지하기를

"어머니가 미국에 들어오셨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나는 혼자

미국에 가 본 일이 미안했던 터이라 아내에게 “자녀들도 있으니

구경도 할 겸 미국에 가라”고 수속을 해 주었다.

수속이 순조로워 65년 6월 16일에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영어 한마디 못하는 아내를 혼자 보내려니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마침 친구의 딸 한영옥 씨가 미국에 살면서 한국에

왔다가며 나의 아내를 모시고 가겠다고 해서 걱정을 덜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의 아내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김포 비행장으로 가면서 아내에게

"미국에 가면 아들 딸 식구들과 잘 지내고, 건강하고, 믿음 가운데

살도록 최선을 다 하시오. 그리고 나는 미국으로 갈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그리 아시오. 여기에서 이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귀중하오."라고 말했다. 열 번 이상이나 나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떠나고 나니 밥은 할 줄 알았지만 남자만 셋이

집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삼육신학교

여자기숙사 사감선생을 찾아가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도울 수 있는 모범되는 여학생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전용희 양을 소개해 주었다. 용희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으로

충청남도 홍성이 고향인데 가족은 교인이 아니었다.

용희도 쾌히 허락을 해서 우리 집에 와서 정말 헌신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가족이 교인이 아닌데도 믿음이 좋고 얌전하며

공부도 잘하고 그 바쁜 졸업반이면서도 성실하게 우리 가족을 위해

도와주었다. 지금도 그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많다.

 

2. 도미

내 아내가 미국간지 한두 달 후에 자녀들이 "아버지도 미국으로

들어오십시오."라는 초청장과 함께 비행기표 살 돈도 함께 보내 왔다.

나는 내 아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수차례에 걸쳐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 한대로 "나는 미국에 갈 마음이 전혀 없으니

그리 알아라. 이 돈은 내가 여기서 쓸까? 아니면 돌려보낼까?"

하고 회답을 냈다. 그 후에도 몇 번 서로 오라느니 못 간다느니

하면서 편지가 오갔다. 나의 자녀들은 "그러면 아버지가 미국에

와 보신지도 15년이 되었으니 이번에 많이 변한 미국 구경도 하시고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으로 나가시라"고 편지가 왔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러 간다면 좋다. 그러나 그곳에

살 맘은 없다.”라고 재삼 다짐을 하고는 수속을 시작했다.

미국에 잠깐 다니러 가는 것이라 생각이 되어 한국연합회나

친구들에게 수속한다는 말도 아니했다.

 

내가 미국을 싫어 한 것이 아니라 "미국은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이 가서 영어와 새로운 것을 배워서

한국에 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뿐이고,

또 은퇴를 하고 나서 교회를 위해 이렇게 봉사하는 것이

너무도 보람 있고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수속은

너무 쉽게 되어 2-3개월 후에 대사관에서 나를 오라고 했다.

영사는 "당신의 아내가 미국에 가 있는데 당신까지 가면

미국에 가서 살겠다는 것이 아니요?"하고 물었다. 나는

"내가 목사로서 미국에 가는 것은 기한 내에 아내를 데리러

가는 것"이라고 평소 생각했던 대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영사는 "아, 그런가요?" 하면서 더 묻지를 않고

비자를 선뜻 내 주었다. 나는 영사에게 목사직을 걸고 정직하게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미국에 와서 알고 보니 내 아내가 떠나고 나서 내가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민망했는지 태국이가 미국에 편지하여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계시게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나의 도미 수속은 태국이가 도맡아 했다.

영사는 비자를 내어 주면서 1965년 11월 21까지 떠나라고 했다.

그래서 떠나는 날을 11월 21일로 잡고 11월 18일에 회기동에 있는

중한대회 사무실에 알리려고 들렀다. 미국 간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중한대회장 이여식 목사가 어디서 들었는지 나에게 물었다.

"아니 정 목사님, 미국 가신다면서요?"

"실은 내 아내가 미국 갈 때 여러 번 미국에 안 간다고 했었는데

아이들이 나이 많은 어머니를 와서 모시고 가라니 어쩌겠소? 잠깐 다녀오리다."

"언제쯤 떠나실 예정입니까?"

"오늘이 18일이니까 3일 후 일요일에 떠날 예정이오."

"아니, 세상에 이런 영감이 다 있나? 3일 후 떠날 영감이 친구들도

안보고 떠나려고 했단 말이오?"

"갔다가 곧 돌아 올 것이니 소문 낼 이유도 없고 해서 연합회에도

알리지 않았단 말이오."

"연합회에 알리지 않은 것은 내가 상관 않습니다.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내가 친구들에게 알릴 터이니 내일 점심에

간단히 송별회라도 하게 나오시오"

당시에는 미국 가는 것이 큰일이나 된 듯 송별회도 했다.

다음날 30여명의 친구들이 점심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동안 여러 번 미국에 다녀온 이근화 박사가 내 옆에 와서 말을 했다.

"목사님, 미국 가시면 하실 일이 많습니다."

"잠깐 방문이나 할 터인데 무슨 일을 한단 말입니까?"

"그냥 하실 일이 아니라 좌충우돌(左衝右突)해서 해결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좌충우돌이라니 무슨 일인지 말 좀 해 보시오, 우리 가족이야기요

아니면 교회에 관한 이야기요?”

"네, 교회에 관한 일입니다만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가 보세요."

식사가 들어오자 미국에서 얼마 전에 돌아온 방례두 장로가

내 앞에 앉아 식사를 했다.

"방 장로, 내가 내일 모레 잠시 미국에 가는데 이근화 박사의 말이

미국가면 교회일로 좌충우돌 할 것이라고 말을 하니 무슨 문제를

가지고 저리 말하는 거요?”

"아, 나성에 우리 한인교우가 약 30여명이 되는데도 서로 마음들이

맞지를 안아서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답니다. 아마 목사님이 가시면

그곳에서 교회 일을 하시게 될 겁니다."

"그런 말 마시요! 나는 잠시 방문하고 내 집사람을 데리고

귀국을 할 터인데..."

"아닙니다. 목사님, 대회에서는 목사님 같은 분을 한국교회지도자로

세우려 할 것입니다. 교인은 삼십 명밖에 안되니 정식월급도

줄 수가 없어 은퇴한 목사님이 가시면 생활비나 좀 드리면 되니까

마침 잘 됐다 하고 일을 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 없소, 나는 잠시 갔다가 귀국 할 것이고

또 그 곳에서 일 할 마음도 없소."

 

그리고는 11월 21일에 한국을 떠났다. 보통 연합회에서 일하던 분이

미국으로 떠나게 되면 송별회를 성대하게 해주곤 했는데 나는 곧

귀국하리라 생각해서 연합회에 떠난다는 말도 하지를 않아서

송별회도 못 받고 떠나왔다. 이렇게 영원히 귀국을 하지 못할 줄을

알았다면 송별회라도 해서 모든 친구들과 동역자들에게 인사나

제대로 하고 왔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있다.

이제 내 뜻과는 달리 미국에 살게 되니 인사도 못하고 온

친구들이나 동역자들이 너무 그리워서 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미국으로 오려면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야 했다.

떠날 때에 한국은 겨울철인지라 오바를 입고 왔는데 하와이에 오니

나만 오바를 입었는데 얼마나 덥고 무거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쓴 웃음이 난다. 하와이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일본 사람처럼 생긴 직원이 내게 와서 일본말로 어디를 가는가

묻기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로스안젤스로 간다고 했더니

로스안젤스로 직접 가게 해 주겠다고 했다. 믿어지지가 안아서

"거짓말이 아니냐?"고 재차 물으니 "왜 거짓을 말하겠느냐" 하면서

친절하게 수속을 해 주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일을 전화로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교회 사역자들도 모두 이렇게 남에게 친절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항상, 언제나 어디서나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나는 몬트리팍에 있는 막내 딸 경실 네 집으로 갔다.

나의 아내도 경실 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내가 왔다고 몇 명 안 되는 우리 교우들이 방문을 해주어 반가이 만났고

특히 김병윤 씨 부부가 우리를 방문하여 즐겁게 만났다.

 

3. 나성 교회- 제 1 부


1965년 11월 26일 금요일.

미국에 도착한 후, 첫 금요일 저녁에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에 갔다. 그 장소는 우리 딸네 집에서 차로

약 15분가량 떨어진 화잇 메모리얼 병원 모퉁이에

방을 하나 얻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한국에 와서 수고하신 이제명 목사(James Lee)가 설교를 하셨다.

일반적으로 설교자가 “그렇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는 것은

보통 회중의 동의를 유발하여 “아멘!”하게 말하도록 하려는 것인데

이 목사도 이날 저녁 설교 중에 “그렇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설교자가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S장로가 손을 들고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곤 해서

설교자와 교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S장로는 순안 의명학교를

나오시고 우리 교회학교에서 선생으로 여러 해 동안 일하신 장로인데

이제명 목사와 무슨 감정이 계신지는 모르나 설교 중에 이렇게 하시니

설교자나 회중이 모두 민망해 하는 것 같았다.

미국 와서 첫 번 드리는 예배가 이렇게 진행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과연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다음 날 안식일 예배를 드리러가서도 모든 것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안식일 예배는 한국에서 씩씩하게 사역하던

이승일 목사가 설교를 했고 나는 은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방문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간의 교회 사정을

듣게 되었다. 이날 나는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몇 분이 미국 교회의

사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에 대한 해답을 대강

들은 셈이 되었다. 그 내용을 줄여서 정리하면 대강 이러하다.

 

이승일 목사는 원래 사역을 하러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학생 비자로 미국에 왔다. 그때에 한국인 약 20여명이

화잇 메모리얼병원에서 방을 한개 빌려 과정공부도 한국어로 하다가

예배까지 드리게 되었다. 이승일 목사가 미국에 오기 전에

최태현 목사의 사모님과 그의 자녀분들이 미국에 와서

다른 한국 분들과 과정공부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중 황승일 장로의 사위가 되는 최희만 군이 한국인 그룹을

인도하려고 하다가 공부를 더 하려고 앤드루스 대학으로 가면서

가족들과 몇 교우들과 의논하여 이승일 씨에게 교회를 지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공부하러 떠났다 한다. 이승일 목사가 한국인 그룹을

인도하게 된 것을,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헌신하여 일하신

이제명(James Lee) 목사가 알고서는 이승일 씨가 학생의 신분으로는

교회를 지도하기가 힘들겠다고 생각이 되어 대회와 연락을 하여

그 당시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얻기가 힘들었던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많이 도와주었다. 이제명 목사는 이승일 목사를

이민국에 데려가서 “이 사람이 지금 학생 비자로 왔지만 한국에서

여러 해 동안 목사로 일을 하던 사람으로 이곳에서 모이는 한국인

그룹에 지도자로 택함을 받았는데 영주권이 있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겠다.”라고 이민국에 설명을 하고 영주권 신청을 해 주어서

이승일 목사는 어렵지 않게 영주권을 얻게 되고 대회 인준을 받아

나성 한인재림교회의 초대사역자의 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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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년 동안 앤드류스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떠났던 최희만 씨가

무슨 연유인지 일년 만에 나성에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나성으로

돌아온 최희만 씨가 교회를 인도할 마음이 있었겠지만 이미 대회에서는

이승일 목사를 정식 교회지도자로 인준하여 일하게 하고 영주권까지

받도록 해서 법적인 신분까지 해결을 해 준 뒤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교역자에 대한 관계로 이승일 씨와 최희만 씨의 의견이 잘 안 맞는 것은

물론 교인들 내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되고 있을 때에

내가 미국에 온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강 나에게 들려준 나성한인그룹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두 안식일이 지나고 나서 이승일 목사가 찾아와서

"이제 목사님이 오셨으니 제가 교인들을 방문할 때에

목사님께서 함께 방문해 주시면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도움을 청하기에 쾌히 승낙을 하고 함께 방문을 다녔다.

방문을 다니면서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들이

나보고 미국에 들어오라고 한 것은 나로 내 아내를 돕기 위한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내가 미국에 들어왔을 때는 외손자가

한 명이었는데 태목이 네도 아이를 가져 두 손자를 돌보게 되니

너무 벅차서 나를 청하려 하던 차에 한국에서 태국이가 형과 누나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로 계시게 하는 것은 못할 일이니 모시고 가라고

편지를 해서 내가 이렇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두 손자를 돌보는 아내를 두고 나는 밖으로 방문을 다니고

있으니 아내에게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사역을 시작한

이승일 목사의 부탁을 기쁘게 승낙하고 함께 방문을 다녔다.

1966년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이승일 목사를 도와서

방문을 다녔다. 아내에게 조금 미안했으나 미국 생활이 갑갑한 나로서는

방문이 참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방문을 하다가 이승일 목사가

불쑥 이렇게 말을 했다.

“목사님, 저 아무래도 교회 일을 못 하겠습니다.”

“왜 갑자기 그러시오, 조금 힘들어도 잘 해 보시오.”

“목사님, 정말 힘이 들어 못 하겠습니다.”

“임자가 대회에서 사역을 하겠다고 해서 사역자 증명도 받지 않았소?”

“물론 받았지요.”

“그 기간이 언제 까지오?”

“네, 1967년 3월까진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기간까지라도 아무 말 하지 말고 열심히 일 하도록 하시오.

임자가 한국 사람으로 처음 인정받은 사역자인데 중간에 그만두면

대회에서도 우리 속에 대단한 트러블이라도 있는 줄 알고 좋지 않게

생각할 터이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나저나 고만두겠다는 것이

이 목사의 개인 사정이오? 아니면 교회 내에 어려운 형편 때문이오?”

“목사님, 하여간 못 하겠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어려운 일을 말하지는 아니하고 그냥

못하겠다고만 했다.

“그러면 이 목사, 67년 3월까지 만이라도 못한다는 말 내지 말고

힘써서 해 보고 그 때가서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대회에서는 교우들이 이 목사를 매우

푸대접이나 하고 괴롭히기나 한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교회의 앞날도 좋을 것은 없는 것 아니오?”하고 간곡하게

권면을 하곤 했다.

그러나 1966년 6월인가 어느 날, 이승일 목사가 찾아왔다.

“목사님, 저 대회에 사표를 냈습니다.”

“아니 이 목사, 사표를 내면 어떻게 하는 거요, 대책도 없이....”

“사표와 함께 한국에서 오신 정 목사님이 교회 일을 대신하면

좋겠다는 안을 냈습니다.”

이거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이승일 목사는 “현재 우리 한국인그룹은 화잇 메모리얼병원교회의

한 부서로 되어있는데 병원교회 목사가 대회행정 위원으로 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이미 그 분과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양해가 된 듯했다. 병원교회목사의 이름이 레널드 목사였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이승일 목사의 말은 “우리가 병원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레널드 목사가 오는 안식일에 와서

발표를 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도와 주셔야 되겠습니다.”라고

간청을 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었고 어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은퇴한 사람으로 이제 교회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일도 없고

더구나 영어도 모르고 운전도 못하고...미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교회일

하겠다는 미련은 추호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다음 안식일에 10시 50분쯤 레널드 목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잠깐 광고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여기에서 목사로 있던 이승일 목사가

사표를 냈기 때문에 대회에서 사표를 수리하고 여기에 오신 정동심 목사를

후임으로 하기로 대회서 결의했습니다.”하는 발표를 했다.

나는 레널드 목사에게 잠깐 앉으시라고 하고 말을 했다.

내 기억에는 최희만 씨가 통역을 한 것 같다.

나는 “대회가 이미 이승일 목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나에게

교회 일을 하라고 결정을 했다니 그 결정에 따라 한 2개월간

일을 하겠소, 그러나 나는 내 자녀의 집에서 살고 있음으로

생활에 문제가 없으니 그 2개월간은 월급도 받지 않겠소,

그러니 두 달 동안에 대회에서는 후임자를 택하도록 하라고

대회에 전해 주십시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말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1966년 7월부터 나는 이승일 목사 다음으로

목사의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잘 융합이 되어 있지 않은 교인들을 방문을 해야 일이 풀릴 터인데,

내가 영어도 모르고 운전도 못하니 참 막막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태중이를 데리고 대회에 들어가

“내가 영어도 못하고 운전도 못하니 방문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화로 일을 해야겠는데 내가 아무리 자녀의 집이라지만

전화를 마음대로 쓰기가 뭣하니 대회에서 전화비라도 부담하라!”고

했더니 “전화비를 청구하면 얼마든지 준다.”고 했다.

이때부터 전화방문을 시작하고, 일이 급하면 전화로 배석원 씨나

이승일 목사에게 부탁하면 이 분들이 서슴없이 도와주었고 심지어

방문할 때 운전도 해주곤 했다. 특별히 배석원 씨는 부탁만 하면

곧 와주곤 해서 집에서는 “빨랑빨랑한 배석원 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방문을 도와주신 분들에게 대회에서

자동차 마일레이지 비용까지 신청해서 드리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회가 나를 택해 놓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나의 후임을 선택해 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두 달을 하겠다고 했는데

어느덧 10 개월이 지났다. 재촉을 해도 답이 없는 대회의 결정을

기다리다가는 한이 없을 것 같아서 나 혼자라도 후임을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조병서 목사의 부인에게서

내게 편지가 왔다. 편지에 “지금 나성 교회는 정 목사님이

책임자로 계신데 후임만 생기면 그만 두실 계획으로 일하고

계신다니 우리가 가서 목사님 후임으로 일하면 어떠하겠는가?”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조병서 목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천만뜻밖에 그의 아내에게서 편지를 받고, 그 주소로

조 병서 목사에게 직접 서신을 띄웠다.

“내가 임자의 아내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나성 교회에 와서

지도자로 일하고 싶다는데 그것이 본인의 뜻인가?” 하고 물었다.

조병서 목사도 내게 “목사님이 원하지도 않으면서 수고하고

계신다는데 그 자리를 내주실 의향이 계시면 그곳에 가서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회답을 보내 왔다. 나는 너무 반갑고

빨리 자리를 내어놓고 싶은 마음에 통역할 나의 아들을 데리고

화잇 메모리얼병원교회 목사이자 대회행정위원인 레널드 목사를 찾아갔다.

“레널드 목사, 지금 내 후임으로 올 분이 한 분 생겼는데,

이분은 한국 삼육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하던 목사인데 지금

미국에 와있습니다. 저하고도 잘 아는 분인데 이 분이 나성교회에

지도자로 올 마음이 있다고 하니 그분을 나성 한인교회지도자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조병서라고 하는 목사이십니다.”

“그 분의 나이는 몇이나 되었고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

“그이 부인은 몇 살이나 되고 어느 학교를 나왔나요?”

“...............”

“그 분들의 자녀는 몇이나 되나요?”

“................”

“그 부인은 직업이 무엇인가요?”

“.................”

마음이 급해서 레널드 목사에게 갔지만 묻는 말에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레널드 목사는 조 목사에 관해서 자세히

알아서 다시 알려 달라고 해서 돌아왔다. 그 후에 서신을 통해

조목사의 부인은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고 자녀는 이남 일녀라는 등의

자세한 사항들을 알아서 레널드 목사에게 주었더니, 대회 행정

위원회에서 몇 가지를 더 알아보고 채용에 관한 가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대회에서는 거의 한 달이나 걸려서

한국 연합회와 삼육대학으로 조 목사에 관하여 조회를 한 결과

내가 말한 것과 별 다른 것이 없는 것을 알고는 조병서 목사의

채용을 결정하게 되었다. 조병서 목사는 당시에 앤드루스 대학에

공부하러 왔다가 기한이 되어 한국으로 나가려든 차에 나성에

목사의 자리가 있다 해서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레널드 목사에게 “사역자가 오기 전에 교회 앞에서나

교회장로들 앞에서 먼저 의논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만일 교인들 앞에서는 묻지를 못해도 장로 몇 분 앞에서는

한번 먼저 의논을 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면서 몇 몇 장로들과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어느 안식일 설교예배 후에 나와 황승일 장로, 배석원 장로,

최희만 씨 등 몇 몇 장로가 함께 갔다.

레널드 목사는 “지금까지 정동심 목사가 수고했는데 그 후임으로

조병서 목사가 오는 것이 좋다고 대회에서 결정을 했는데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황승일 장로는 “그 분이 안수를 받은 목사이십니까?”하고 물으니

레널드 목사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황승일 장로도

“그렇다면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형식상, 한 분씩

의견을 묻는데 다 찬성을 했는데 장로 한 분이 적극 반대를 했다.

난처해진 레널드 목사는 나에게 “그러면 시간을 두고 이 문제를

다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나는 모든 분들 앞에서

“항상 100% 만족을 얻을 수는 없지만 절반 이상이 찬성을 하면

결정이 되는 데 지금 다 찬성을 하고 오직 한 분만 반대를

한다고 해서 결정을 못하면 앞으로도 어떻게 일들을 결정하겠는가?”

라고 말하자 레널드 목사도 “미국에서도 반수 이상이 찬성을 하면

결정이 된다.”고 하면서 이 문제는 가결이 된 것으로 인정하고

교회에서 발표를 하겠다.”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신 장로는

그 분 나름대로 틀림없이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당시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며칠 지나서 레널드 목사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대회의 절차는 모두 끝나서 조 목사에게 연락을 하여

이미 나성으로 떠나오고 있으니 지도자인 정 목사가 전화로라도

이 사실을 한국인 교우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라고 해서

나는 “그리 하겠다”라고 했다.

 

우선 나는 K장로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 K장로는 아직은

나성교회의 지도자인 나도 모르게 교인 몇 명을 초대하여

조 목사가 부임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레널드 목사와의 회동 때 이 K장로의

식구들도 참석하여 이미 찬성을 했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다른 교인들을 모아 놓고 조 목사의 부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분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모임을 갖고 있던 것이 가책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전화 한 것이 자기들의 모인 것을 내가 이미 알고

그 일을 책망하기 위해서 전화한 줄로 착각을 하고 계신 듯 했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묻지를 아니 하였는데도 매우 당황해 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심지어 내게 들리는 것도 모르고 ”정 목사 전화인데

미안해서 뭐라고 하지?”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는 말이 다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전화를 한 것은 조병서 목사가 이미 나성을 향해

오고 있으며 며칠 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통고하느라고

전화를 했다.”라고 알려 주었더니 “조 목사가 벌써 떠나서 이리로

오고 있다는데 어떡하지?”하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전화로 다 들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분들이 모여서

조병서 목사의 후임 반대 운동을 의논하다가 “조병서 목사가 이미

이리로 오고 있다니 떠난 사람을 막을 수야 없지 않은가?”하는

의견이 나와 그 회의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아래서 조병서 목사는 1967년 6월말에

아내와 같이 도착하여 7월부터 교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월급을 받는 사역자로서는 제 2대, 나까지 포함시키면 제 3대

지도자가 되는 셈이다. 나는 2개월만 지도자로 봉사한다고 하다가

일년 넘게 일하게 된 것이다. 비록 일년 남짓하게 일했지만

상당히 어려운 환경에서 일을 했었다. 조병서 목사는 영어도 잘하고

운전도 할 수가 있으니 곧 자리를 잡고 일하기 시작하고 또 미국으로

들어오는 교인수도 늘고 해서 점점 교회가 틀이 잡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의 분위기는 누가 일을 해도 힘든 상태였다.

조병서 목사도 일하기가 힘이 들어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조 목사는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을 다스리는 경험은 많았으나 교인들을

많이 다룬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매우 힘들어했다. 조병서 목사도

얼마 있지 않아 나에게 함께 교인들을 방문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여

이승일 목사 때처럼 함께 방문을 다녔다. 이승일 목사는 한국에서

10여 년 동안 목회를 한 사람으로 신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아도 힘들었었는데, 조병서 목사는

학생들을 다루던 사람이라 신자를 다루는 것이 매우 고생이 되는

듯 했다. 그래도 어언간 일년을 열심히 일하셨다.

 

1968년이 되자 조병서 목사는 한국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 목사가 한국으로 나가려는 것을 모르고 모셔왔는데

가야 되겠다고 하시니 뜻밖이었다. 나성으로 올 때에 이미

한국으로 갈 계획을 가지고 오신 것인지, 아니면 유학생 신분으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가겠다고 하시는 것인지, 또는 목회자로

일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으로 꼭 나간다고 하시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으로 나가야 한다며 조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이제 한국으로 나갈 터인데 이 교회의 후임자를

제가 지정하고 나가려 합니다.”

“조 목사, 여기 와서 일년 동안 수고를 많이 했는데 후임을

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원칙과도 어긋나니 그냥 조용히 귀국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그래야 뒷이야기도 좋고 교회도 편할 것 같소”

“그러면 목사님은 왜 나를 후임자로 세우셨습니까?

저는 왜 그렇게 못합니까?”

“조 목사, 그 때와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오,

그 때는 대회가 한국인교회 사정도 모르고 또 교인도 이 삼십 명

정도밖에 없던 시절이요. 나도 이 개월 정도만 일하겠다고 대회에

이야기했으나 대회가 일년이 넘도록 후임자를 물색도 못할 때이니

사정이 다르지 않소? 이제 그럭저럭 교인도 100여명이 넘었고,

대회도 한국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이해도 많이 달라졌으니 이제라도

대회가 원칙을 따라 결정하게 두고 그냥 귀국함이 좋을 듯 하오.”

“.....................”

조 목사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이미 어떤 후임자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결정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얼마 후에

그러한 말들이 소문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의 들린

이런 말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는 조 목사가 직접 최희만 군의

이름을 후임자로 대회에 제출을 했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최희만 군과 이근화 박사의 이름이 대회에 제출되었다는

말이 들렸다. 당시에 서울위생병원 원장으로 있던 이근화 박사가

나성에 와 있었는데 이근화 박사가 사위되는 닥터 한

(한영일산부인과 의사)과 의논하여 대회에 그의 이름을 후보로

제출했는지는 모르나 조병서 목사의 후임으로 두 명의 이름이

대회에 제출이 되었다고 했다. 후보자가 두 명이나 되어서 그런지,

대회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를 못하고 자꾸 시간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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