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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1


( 정든 간도 용정을 하직하고 고국을 향해 떠났다. 중략...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셨으니 감사를 드리었다. 회고록 연재#10 끝부분)

제 5 부. 조선(朝鮮)목회로 인도하신 하나님


1. 원산으로 부임

아내의 병 회복과 갓 난 태중이에게 생명이 되는

작은 형수님의 모유가 너무 귀한지라 나는

모든 가족을 고향집에 두고 임지인 원산으로 갔다.

교우 김진택 씨가 자기 집에 유하도록 허락하여

두 달 남짓 신세를 졌다. 부임을 하고 보니

분위기가 참으로 이상한 교회였다. 그간 이 교회는

수많은 사역자들이 면직을 당해 떠나곤 해서 결국

“사역자 없이 지나는 것이 교회에 훨씬 편안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교회였다.

그런 귀띔을 받았으나 성심성의껏 일을 하니

신자들도 조금씩 영적으로 안정이 되어 가는 듯 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교인들은

교회의 관습이라 하며 매 화요일마다 모이는 삼일예배 후에는

전도사인 나를 제쳐놓고 자기네끼리 성경연구회로 모이고 있으니

불안한 생각으로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자기들끼리 전도서를 공부하다가

“일천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 하였느니라”

(전도서 7:28)라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이

여자를 너무 무시한 것이 아니냐?”라고 토론을 하다가

서로 옥신각신 하게 되더니 심한 의견충돌로

거의 다투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에게 묻기를

“정 전도사,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남자 중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더니, 신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젊은 전도사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인정은 커녕 비웃음에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결론이 없이 지나다가 얼마 지나서 어떤 유력한 목사가

교회에 오시자 이 구절을 가지고 그분에게 물으니

내 대답과 일치한 것을 보고는 드디어

나를 믿기 시작하는 눈치가 보였다.

정말 힘든 분위기의 교회였다.

두 달쯤 후에, 내 아내는 여섯 아이들과

조카딸 태실이를 데리고 원산으로 와서

아홉 식구가 되었다. 나는 원산 장촌동에

어떤 큰 기와집에 세를 들었는데 우리 외에

교인이 아닌 열 세대가 함께 살았다.

내가 살던 중 이렇게 큰집에 살기는 처음 이었고

또 평생 처음으로 전기를 사용케 되었으니

얼마나 편리하고 밝던지....온 가족이 좋아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어젯밤에 당신 집에는 창문에 누가 모래를

자꾸 뿌려대지 않았는가?”하면서

“자기들은 모래귀신이 계속 창문에 모래를 뿌려

무서워서 한 잠도 못 잤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니 무엇 하는

사람이냐 물었다. 안식일교회 전도사라고 했더니

“아, 그러니 잡신들이 당신 집은 침해를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심하게 미신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보호는

인정하는 순박한 마음들이었다.

하루는 우리 태혁이와 태영이가 뒤뜰에서 놀다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주단지를 발로 차서

그 안에 서 나온 엽전들을 가지고 놀았다.

이 집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벌 받게 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나는 “이 기회다”하고는 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이야기 해 주었으나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불안해하더니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으니 모두 안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앙을 받아 드리려고 하는 자는 없었다.

우리가 이 곳에 사는 동안 가능한대로 아이들을

예의 있게 가르치고 규칙 있는 생활을 하도록

습관을 길러 주었더니, 좋은 감화를 끼친 모양인지

인근에 있는 까다로운 일본 집에서도 “그 집은

조선 사람이지만 아이들을 잘 기른다.”하면서

자기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갖도록 허락을 했다.

이러한 허락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이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목회자는 말보다 실생활로도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끼쳐야 된다고 느꼈다.

원산 남산동에 있는 우리예배당은 비가 새고

지붕에는 노랙이 버러지가 들끓는 이십 년도 더 된

누추하기가 짝이 없는 초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난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열세 째 안식일연금 중에

한 몫이 우리 조선에 배당이 되면서 중선대회에 분배되어

원산에 예배당을 건축하라는 통지가 왔다.

온 교인의 기쁨은 말로 형용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건축업자 구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물론 대회장도 경험이 없어서 건축위원을 정하지고 않고

대회장이 직접 서울과 원산을 내왕하시면서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했다. 하루는 대회장님이

직접 청부업자와 의논하다가 의견충돌이 생겨

청부업자는 대회장에게 “이놈!, 저놈!”하며

언성을 높이더니 멱살까지 잡는 사태가 되었다.

대회장은 당황하여 말도 못하시게 되고,

나와 교인 두 명이 나서서 힘을 다하여

막무가내인 청부업자를 겨우 뜯어 말리고는

잘 타일러 위기를 모면하였다. 결국 대회는

오까무라라는 일본사람과 건축 계약을 해서

원산 남산동 27번지에 근 30평의 아담한

시멘트 블록으로 양옥집을 건축하기로 했다.

계약을 하고 나서 알고 보니 이 일본 건축가는

나쁜 쪽으로만 이력이 나서 돈을 받고도 건축을 질질 끄는,

좋지 않은 평판을 가진 자라했다.

우리가 경험이 없는 탓이니 어찌 하겠는가?

모든 교우와 의논을 하여, “이미 계약은 끝난 일이니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의탁하자” 하여 모두

기도에 매달렸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건축의 완결을 보던 날 모든 교우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교회건축은 물론

이런 경험을 통해 사역자와 교우들이 하나가 된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이 되었다. 양옥교회당이

들어서자 신자들이 너무 기뻐서 예배당 낙성(落成)기념으로

에스더에 관한 연극을 하자고 계획하면서 전도부인 오홀다 씨를

에스더로, 나를 아하수에로 왕으로 배역을 정하였다.

나는 이일만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사양에

사양을 거듭하여 겨우 모면하였다. 나는 내 배역을 면한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교우 중에서

예배당에서 이런 연극을 한 것이 좋다, 나쁘다 하여

의견대립이 생겼다. 당시 교인들의 생각을 감안하여

연극을 할 것이면 반대하는 교우들을 이해시키던가,

아니면 연극을 하려던 사람들을 설득시켜 중지하게 했던가

했어야 하는데도 나만 그 배역을 모면한 것이 감사해서

실수를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던지 교회의 평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과 교인들의 영적인 정신연령에 따라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당시에 웬만한 교회는 종각에 큰 종을 매달고 집회 때마다

종을 울리는데 우리 교회는 경제형편이 빈약하여

종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1년에 합회총회가 소집되는 기회에

전도부인 오홀다 여사가 모금을 하여 큰 종을 구입해서 달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은 건축했는데 사택이 없으니

예배당 관리가 막연했다. 예배당과 내가 살고 있는 장촌동은

이 십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고 나보다 더 가까이 사는 교인이

없었다. 그 추운 겨울밤에도 교회 방면에서 불이 났다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교회로 뛰어 가곤 했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항상 건물관리도 생각하여야 할 것을 배웠다.

원산교회는 관리문제로 많은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당을 잘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건축에 관한 경험이 없는지라

예배당에 전기를 가설할 때 전구를 몇 촉(와트)짜리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아는 이가 없었다. 그저 촉수가 높으면

밝다고 하는 것만 알아서 모두 백 촉 짜리를 쓰자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첫 달 전기 요금이 팔 원 이상이 나와 모든 교우가

깜짝 놀랐던 일은 지금도 어이가 없고, 그저 쓴웃음이 난다.

촉수 높은 전구가 전기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당시에 각 대회는 “지방목사” 제도를 만들어서 한 목사가

그 지방 여러 교회를 담당케 했고 전도사는

그 지방 목사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었다.

원산교회는 함흥지방 목사인 남상익 목사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교회건축 등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생각해 보니

내가 원산교회에 부임한지 일 년이 되도록 지방목사가

한 번도 원산교회를 방문한 일이 없기에 그 연유를

신자들에게 물은즉 원산교우들과 지방목사 사이에

감정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철렁 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원산교회는 “사역자가 없는 것이 더 좋다.”는

사상이 편만하여 대회나, 대회가 보낸 사역자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전도사로 부임했을 때에 3일 저녁 예배 후에는

나를 무시한 채 교우들만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해댈 지경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해결 짓지 않고는 영적부흥이 없다고 판단되어 이를 위해

결심하고 기도 드렸다. 얼마 후, 연중행사인 사경회 시기가 되었는데

사경회 강사는 대회에서 결정하여 각 교회에 통보를 하는데

원산 교회는 교회에서 사경회 강사를 택하라는 통지가 왔다.

얼마나 원산교회가 대회에서 다루기 어려운 교회였는지를

말해 주고도 남았다.

원산교회는 이 사람, 저 사람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결정을 못보고 드디어 전도사의 의견은 어떠냐고 묻기에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 생각하고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이라

믿고 말씀드리는데 교회도 건축을 했으니 우리가 지방목사와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이번에 지방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도 하고

어떤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의외에도 그렇게 해 보자고 의견이 통일이 되었다.

아마 교회건축 등을 통하여 우리가 한 마음이 되었고

또 기도의 응답이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지방목사인 남상익 목사를 사경회 강사로 모시게 되었다.

남 목사는 사경회에서 하고자 할 욕(欲)자(字)와

욕심 낼 욕(慾)자를 가지고 창세기 2장과 3장을 강의하여

온 교우들이 전에 없는 감동을 받는 동시에, 숙제로 내려오던

감정 문제도 봄눈과 같이 스르르 녹는 경험을 보았다.

온 교회가 기뻐하고, 지방목사도 기뻐하고,

대회도 기뻐하게 되었다. 그 후 지방목사는

원산교회를 자주 방문하게 되어 교우들과 더욱 친근하게 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한편 원산교회 소속 원명학원이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교사 두 분이 다 총각으로 매우 다루기가 힘든 상태였다.

교인수가 워낙 적어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제대로 대우를 해 주지 못한 이유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모든 교우들의 마음이 일치단결하게 되자

큰 어려움 없이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1930년 하반기에 중선대회장과 서선대회장 두 분이 서로 바뀌면서

서선대회장 이근억 목사가 중선대회장으로 오셨다.

그리고는 곧 내가 합회평의원으로 선정 되었다. 내 생각에는

이근억 목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이 된다.

대회는 곧 나에게 서울 청진동 교회로 전근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누구나 바라는 좋은 기회이며 나도 물론 서울 근무가 싫을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본래 시골 태생이라 서울 같은 도시로 가기가

적당치 않다”는 구실로 거절하는 해답을 보냈더니 대회장은

“내가 도와 줄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오라”고 서신을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내 아내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서울로 못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더욱 서울로 와야 할 것이 아니냐? 서울은

경성 요양병원이 있으니 서울로 오는 것이 아내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라는 서신이 또 왔다.

다시 나는 “내 아내가 서울로 가기를 원치 않으니

그대로 원산에서 목회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이 목사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아니 하셨다.

나로서는 대회의 전근명령에 대하여 이렇게 고집스럽게

거역하여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이런 중대한 문제를

아내와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의논도 없이 내 독단적으로

선결(先決)한 것은 옳은 일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누구나 서울 가기를 희망하는 때인지라

아내에게 말하면 서울로 가기를 원할 것이며,

나는 소신을 굽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대회의 명령을 피한 이유는 이때 우리 교회 안에도

당파가 생겼고 두 대회장님도 대회 내에 당파를 구성했다는 이유로

서로 전근케 되었다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당파의 핵심지역으로 알려진 서울에 가서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파가 생겼을 때에

어떤 파에 속하지 않고 일 한다는 것은 매우 외로운 일이지만,

특별히 교회 내에서 당파를 만드는 일이나 또 거기에 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 그리했고 지금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내가 서울로 가기를 계속 거절하자

천만 뜻밖에도 우리나라 북쪽 끝인 함경북도 청진으로 전근하라는

의외의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까지 거절할 수 없어서

명령에 순복(順服) 하기로 결심했다.

말썽 많다는 원산교회에 와서 예배당도 신축하고 부흥이 시작되며

특히 온지가 1년도 못 되는데 전근이라니 너무 의외였다.

이제 모두 정이 들고 한마음으로 일할 때가 되었는데

떠난다니 너무 섭섭했다. 그러나 대회의 명령을 따라

떠나기로 다짐하였다. 외로운 결심이었다.

2. 청진

1931년 5월, 정들었던 원산을 떠났다.

내가 갑자기 전근케 된 청진교회는 신자들이

사역자를 가운데 두고 편당(偏黨)이 생겨 결국 교회가

두 쪽이 나 버린 곳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청진교회로 부임하여 본 즉, 40여 명되던 교인이

교회가 두 쪽이 나면서 사역자를 배척하고 따로 나간 신자가

근 삼십 명이고 교회를 지키는 신자는 불과 십여 명 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이니 나를 맞이해 주는 신자도 별로 없고

따라서 당장 들어 갈 집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교회에 속한 사택이 없으니 사역자들이 전근할 때에는

교우들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거할 집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간도에서부터 나를 도와주다가 떠나버린

손성칠 씨가 이곳에 계신 것이 아닌가?

내 가족을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며 데리고 갔다.

나는 당장 거할 집이 없으니 감사 하기는 한데,

그 집 식구도 많은데 내 집 여덟 식구가 들어가게 되니

얼마나 미안하고 내 마음이 괴로웠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어려운 때에 서슴없이 내 가족을 맞이해 준

손성칠 씨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겠다.

이때에 조선합회 안식일학교부장은 왕대아 여사이고

부부장은 오영섭 씨였는데, 알고 보니 청진교회가

둘로 나뉘어있으면서 각각 자기편의 성적을 좋게 하려고

안식일학교 기말보고를 따로 하면서 숫자는

교회가 갈라지기 전의 전체 교인 숫자를

서로 적어 보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합회 안식일학교부에서는 이러한 기말보고를 받아서는

두 가지 보고를 합쳐 청진 교회 상황이라고 통계보고에

발표하고 있었다. 그러니 실제보다 두 배가 불어나 있었다.

나는 부부장 오영섭 형제에게 부탁하여, 나를 믿고,

내가 청진교회에 부임한 때부터는 교회를 떠나서 따로 모이는

그 들의 보고는 우선 통계보고에 넣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니 내가 부임하여 처음으로 제출한 제 2기 말 보고는

숫자가 형편없이 떨어진 보고이었다.

1931년 제 2기말보고를 받은 왕대아 부장은 나에게

추상(秋霜)같은 질책의 서한을 보내왔다. “사역자를 파송할 때는

교회를 발전시키라고 보내는데 당신은 청진교회에 가자마자

안식일학교학생이 그렇게 줄게 되다니 무슨 사역을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리라”고 하는 편지였다.

나는 “당신이 합회의 부장으로 숫자가 줄어드니 그럴 것이지만

파견 받은 사역자가 그런 감축된 보고를 하기로 결정하기에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나 생각하여 보았는가?

누군들 좋은 숫자를 보고하기가 싫겠는가?”라고 하면서

이번 기말보고에 대한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간 당신께서는

청진교회가 두 파로 나뉘어 있으면서 서로 계속

잘못된 보고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내가 정식 사역자로 임명을 받아 와있으면서 교회를

반대하고 떠나 간 이들의 보고를 그대로 합회가 통계에 넣고

있는 것을 시정해 달라는 것이 잘못인가?” 라고 설명을 하면서

“앞으로도 이렇게 보고 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알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교회에 남아있는 이들과 의논하여,

교회를 나간 분들에 대해 한마디도 비난하지 말고

힘을 합하여 열심히 일하자고 했다.

그러자 정신적으로 교회가 점점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갔던 이들의 대표 격인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가 다시 본교회로 돌아올 마음이 있는데 받아주겠느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알기에는 어느 누구도

당신들에게 나가라고 한 이가 없으니 물을 필요도 없이

다시 들어오십시오.”라고 했다. 얼마 후에 나갔던 그네들

전부가 다 돌아왔다. 이런 기쁨은 어찌 말로 표현 할 수가 있으랴?!

서로 마음 아프게 지내다가 진심으로 자원하여 돌아 왔으니

우리 모두는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교회는 갈라지기 전보다 더 한마음이 되고

완연(宛然)히 갱신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어느 안식일 아침, 예배당에 가기 위해 온 가족이

아침밥을 바쁘게 먹는 중에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연인즉 자기는 포항동에 있는 장로교인인데

자기 교회목사의 말씀이 묵시록은 안식일교회에서

잘 알고 있다하여 찾아 왔다는 것이다.

잠시 담화를 한 후에 그분 말씀이 이제는

안식일 교회의 사역자를 찾았으니 다음 토요일에는

틀림없이 교회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분은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두 번째 안식일에도 교회를 찾아 오셨다.

중선 대회장 이근억 목사는 나를 억지로 청진으로 전근시킨 것이

미안해서인지 내가 전근된 후 곧 청진교회를 방문하여

안식일설교를 하시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장로교인이

두 번째 참석하시던 날이었다. 설교가 끝난 후,

나는 그간 침례를 받기 위해 준비한 분들을 상대로

광고하기를 “오늘 침례식이 있으니 침례 받으실 분들은

준비를 해서 나오라”고 하면서 침례 터로 가는 길 안내광고를 했다.

그런데 이 장로교인이 모든 준비를 갖추고 침례를 받겠다고

침례장소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일을 대회장에게 말씀드리니

“나는 대회장으로서 청진교회의 일은 청진교회에서

처리하는 대로 따라 갈 뿐”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침례 터에서 임시 교회직원회를 열고 의논을 했다.

몇 명 안 되는 교회 직원들이지만 모두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사도행전에서 내시가 침례 받게 된 실례를 들면서 갑자기 나오신

그 분에게도 침례를 베풀자! 라고 의논이 되었다.

이 근억 목사도 전례는 없지만, 좋다고 하시면서

기꺼이 그 분에게 침례를 베푸셨다.

나는 물론 온 교인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동을 받았다.

그 다음 안식일, 나는 교인의 특권이자 의무인 십일금에 대한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나자 침례를 받으신 그 장로교인이

50원이 넘는 금액을 십일금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가?

교사의 월급이 십여 원 할 때이니 50원은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이 되어 “왜 이렇게 많은 십일금을 드리는가?”하고 묻자

“내가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된 때부터 수입을 생각해 보니

이만큼은 드려야 되겠기에 이렇게 기쁨으로 드립니다.”하는 것이었다.

이일로 온 교우가 또 한번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분은 교육을 많이 받은 분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의 지시를 따라서 살겠다고 하시더니 청진교회에서

물질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 사표(師表)가 되는 형제가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고 귀한 일이었다.

이런 일들을 통해 교우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로 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청진교회가 이렇게 갱생 부흥케 되고

헤어졌던 교우들이 돌아와 모든 교우들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지나게 되니 점점 신자수도 늘어났다. 이런 보고를 받은

합회 안식일학교부에서는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 주었다.

교회가 화합하고 보니까 부흥하는 일은 저절로 따라온 결과였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가 모두 잘 화합할 때는 반드시

부흥과 융성(隆盛)이 있게 됨을 깊이 느꼈다.

그래서 앞으로 할 수 있는 대로 어디를 가든지

평화스러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기로 다짐했다.

1931년 제4기 어느 안식일,

나는 설교를 마치고 교우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분열된 쓰라림에서 이제 이렇게 융합케 되는

기쁨을 보았으니 이 보람된 일을 기념하는 무슨 표시를 함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하자 모든 교우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시간이 꽤나 지났다. 그러자 한 형제가 전도사는 어떤 좋은

의견이 있는가 물어왔다. 나는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다음에 정하자.”고 이야기 했으나 모든 교우들이

“이렇게 좋은 회의는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있는 서울 회기동교회, 순안교회를 가보니

의자를 만들어 편안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도 한번

열심을 내어 의자를 만들어 모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한즉 모든 교우가 찬성을 했다.

그래서 의자를 만들기로 결의 중인데 한 형제가 일어나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이렇게 반대되는 두 가지 의견이 나오면

다수결로 정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교우가 다 찬성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그 분이 동의하기까지는 결정을 보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반대한 그 형제는 그렇게 유식한 분은 아니나

신실하신 분으로 그냥 이유 없이 반대하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 형제의 의견을 물었다.

그분은 ”우리는 재림교인으로 재림을 고대하며

또 불원(不遠)하여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우리가 재정을 들여

의자를 만들 것이 아니라 초석(草席)에 앉아 예배하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의견이셨다.

뿐만 아니라 의자를 만들려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니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참 난감했다.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느껴진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의 말씀에 공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과연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에 금전은 가지고 갈 것이 못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돈으로 의자를 만들어서 온 교우들이

편하게 쓰다가 버리고 가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그러자 그 형제가 갑자기 두 손을 높이 들면서,

큰 소리로 “의자를 만드는데 동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맘 상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의자를 만들기로 하니

반대했던 그 형제가 제일 앞장서서 일을 주장하여

4인용의자 삼십여 개를 밤낮으로 일하여 단 이주 내에 완성했다.

교회일은 다수결로만 처리하지 않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쁜 마음으로 완성한 의자에 앉게 된 모든 신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의자를 놓고 예배드리는 교회가

한국재림교회로서는 청진교회가 세 번째이고

청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의자를 만든 교회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흐뭇하게 남아있는 감사한 일이다.


청진은 함경북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큰 예배당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그 중에 장로교회당은 청진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크게 지어져 있었고, 성결교회는

우리교회 위에 높은 자리에 크게 지어져 있었다.

우리교회는 청진 신암 1동에 나지막한 곳에 조그마한

재래식 건물로 보잘것없는 교회당이었지만 이제는 지저분하던,

짚으로 된 초석(草席)은 없고 깨끗하게 의자를 갖추어놓아

아담하게 보였다. 그래서 다른 교파 청년들이

많이 내참(來參) 하게 되었다. 다른 교파의 청년층을 통해

각 교회에 대한 평이 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놀기 좋은 장로교회”, “도깨비교회 성결교회”,

“변호사 교회 안식일교회”라는 평이었다.

또 안식일교회는 “예배당에 의자를 만들어 놓고 잔뜩 다리 내 뻗고

예배드리는 불경스러운 교회”라는 질투 섞인 평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교회에 대한 평은 어느 정도 좋은 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교회 청년들이 우리 교회로 오게 되어 교인 수는

근 백 명으로 늘었으니 참 기쁘고 감사했다. 교회당은

사치스러워서는 아니 되겠지만 모든 시설을 깨끗하고

편하게 해 놓고 예배를 드린다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감화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큰아들 태혁이, 둘째 아이 태영이, 맏딸 진실이,

이 세 아이는 원산에서 원명학원이라는 우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사설기관에서 공부했었는데 이곳 청진 보통학교에

입학시킬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또 입학이 된다고 해도

안식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기도하고

힘써 알아보니 청진에서 한 오리를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가면

수성이라는 곳에 수성사립보통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을 찾아가서 교장과 다른 선생님들과 의논해 본즉

입학과 안식일 문제를 허락해 주었다. 세 아이들도 청진에서

그 학교까지 거의 한 시간이나 걸리지만 안식일을 지키게 되고

또 나라에서 인정하는 사립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기쁜 마음으로

다니는 것을 보니 원칙대로 살려는 사람의 앞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면서 아이들을 수성사립보통학교에 보냈다.

청진교회에서도 한때는 “함명야학원”을 경영했던 일이 있었다.

청진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함명야학원을 다시 열고 학생을 모집하니

삼사십 명의 여학생들이 모집되었다. 많은 수의 학생이 지원하니

선생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당했지만 많은 교우유지들이

적극적으로 도와 이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전부 여학생이고 야학이라서 하학(下學)후에 밤길을 가야 하는데

길가에 난폭한 무리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으나

선생들이 희생하여 거리가 먼 학생들은 집에까지 데려다 주어

문제도 해결되고 또 학생들은 교사들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결혼할 연령에 달한 학생들은 선생들을 믿고 결혼문제도 의논하고

선생들도 이런 학생들을 잘 지도하여 좋은 결과를 얻고

그 중에 훌륭한 교인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도 신문사에 연락한 일이 없는데,

청진에서 유일한 일간지인 “북선일보”에서

우리 함명학원에 대해 아주 칭찬하는 기사를 실어 주었다.

그 결과 청진사회에서 우리 교회와 학교가 발전하는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끼쳤다. 학부형 중에서 누군가

신문사에 연락한 것이라 생각이 된다. 교회는 그 지역 사회를 위해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2

(청진의 일간지인 “북선일보”에서 우리 함명학원에 대해 아주 칭찬하는

기사를 실어 주어서 우리 교회와 학교가 발전하는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끼쳤다. ....교회는 그 지역 사회를 위해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재 #11 끝부분)


3. 목사안수

1933년 2 월,

내가 청진에 온지 3년이 되던 해에 제 8회

한국 연합회총회가 동대문 밖 회기리에서 열렸다.

청진교회에서 대표자로 이필모, 최벽송 양씨와 내가 참석했다.

그 당시에도 합회총회 때마다 목사 안수식을 하곤 했는데,

교회전도사와 같이 참석한 평신도 대표들은 우리전도사가

목사가 되는가, 아니 되는가 하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청진교회 대표자나 나는 그런 생각이나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역자 신임서위원의 보고를 받으니

이번 총회에서 원륜상, 피일선, 조치환, 박기풍, 정동심 제씨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발표가 나왔다.

이 말을 들은 몇 분은 “나는 왜 안수를 못 받는가?”하면서

심한 낙망을 표시하는가 하면, 어떤 대표는 “이번에

우리교회 사역자가 목사가 안 되었으니 나는 돌아가서

교회에 안 다니겠다”라고 천명하는 일까지 있었다.

나는 1917년에 교회 일을 시작해서 만 16년 만에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너무 감사하고 또 황송한 생각만 떠올랐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목사라고 하는 것이

그저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목사 안수식은 2월 10일에 있었다.

안수를 받게 되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목사가 된 것은 첫 째 하나님의 은혜요,

두 째는 교회의 도움이요, 세 째는 내 아내의

적극적 내조의 덕분이며, 네 째로는 젊은 과수로서

나를 깊이 사랑하시고 내 마음대로 교회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신 어머님의 크신 사랑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젊은 과수로서 유복자였던 나를 위해

수고하신 어머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진실이가 수성 사립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두 오빠를 따라 한 1년간 잘 다녔다.

집에서 청진 역까지 한 5리 되는데 이 길을

진실이가 5-6번을 쉬어서 겨우 간다는 말을

제 오빠들에게 듣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고향 친구이자

진료소 의사인 강태순 에게 진실이를 진찰해 본 결과

십이지장충에 걸렸다고 하면서 앞으로 한 1년간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내 마음이 얼마나 캄캄한지!


강태순 의사는 내 고향 친구로 신실한 장로교인인데

교파를 초월하여 나의 가정을 자기 가정과 같이 사랑해 주었다.

그것은 특별한 약이 없으니 걱정 말고 한 1년 동안 휴학하고

집에서 잘 정양시키면 틀림없이 회복된다고 말해 주었다.

유감스럽게도 진실이는 1년간 휴학하고 쉬면서

강태순 의사가 종종 집으로 와서 진찰해 본 결과로

점점 회복이 되어 다시 학교에 갈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애를 돌보았다.

1933년 4월경이다.

청진교회 교인수도 불어나고 또 목사안수도 받고 보니

찾아오는 손님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내가

셋집에 있고 보니 손님 대접하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해서

집을 하나 사기로 했다. 그래서 청진 신암 삼(三)동에

조그만 함석집을 하나 샀다. 사고 보니

가난한 사람이 살던 집이라 고칠 곳이 너무도 많았다.

재정은 없고 상당히 고민했다. 더구나 살펴보니

빈대껍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빗자루로

쓸어내야 할 정도여서 걱정이 되었다.

4월에는 빈대는 안나오다가 5월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끝이 없었다. 결국 굉장한 양의 빈대 약을 사다가 뿌리고

나서야 거의 없어졌다. 이곳저곳을 수리하고

또 담도 없는 집이라 돌아가면서 나무 목책을 하니

조금 집 티가 났다. 그러한 집이나마 준비를 하고나니

아이들 여섯, 내 안사람해서 여덟 명의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다.

작은 집이지만 한쪽에 벽을 막으니 방 한 개와 부엌이 있어서

우리 교인 중에 이필모라는 부부가 칠운이라는

어린 외동딸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


집을 사고 나니 가옥 소유주라 해서 세금도 내니까

청진부(府)에서 부(俯)위원을 뽑을 때 나더러

투표 자격자라고 종종 부위원 입후보자들이 찾아와

자기에게 표를 던져 달라고 간청하는 이도 있었다.

살다 보니 비록 작은 집이라도 소유하니 그것도

재정의 힘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보고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내 평생 두 번째 집이라고 쓰고 있게 되니

마음도 편하고 무엇보다 우리 신자들이나 교회 손님오실 때에

방이 한두 개 있으니 모시기가 편리했다.

온 식구가 조그만 집이라도 마련되었다고 기뻐하면서

지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세월은 빨라 큰 아이 태혁이가 수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우리 교회로 진학을 하자면

순안 의명중학교로 가야 하는데 거리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공부하는 아이가 다섯이 되고 보니 학비문제가 제일 컸다.

그래서 태혁이를 청진 상업보습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게 한즉

다행히 합격되었다. 청진 수성보통학교에 네 아이,

상업 보습학교에는 태혁이, 나는 다섯 아이의 학부형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청진 상업보습학교 학부형회의를 하는데

나를 학부형 회장으로 뽑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모든 학부형들이 어찌나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지 할 수없이 그 일을 맡기로 했다.

그 일을 맡고 보니 역시 사회 각층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데 나에게 학부형회 회장이 되었으니

한 턱을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한턱을 쓴다면

역시 술대접을 하게 되는 것인데 교회 목사로서

도저히 합당한 일이 아닌지라 생각다 못해 그 학교교장에게

사임원서를 제출하고 교장에게 간곡하게 설명을 하니

교장도 양해를 하여 내 사임서를 받았다.

적당히 교회와 사회 일을 함께해 나간다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겠으나 두 주인을 충성되게

섬길 수는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사임서가 해결이 되니

내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고 후련했던지...

그러나 한편 “비록 다른 교파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대해

이단인양 크게 선전을 하고 다녀도,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보고 그 원칙대로 살고, 화평하게 살려고 하면

이렇게 인정을 받는구나!”라고 생각되어 흐뭇한 마음도 들었다.

남에게 보이려고 힘쓰지 아니하여도 원칙과 평화를 유지하며 산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나 같은 어리석고 미천한 출신인 나를 부르셔서

많은 사람의 앞에 크게 부끄러움 없이 지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

1933년 가을 경이다.

방무열 씨라는 분이 함경북도 회령읍에서 문서 전도하다가

성결교회의 회계와 집사 직분을 맡은 주집사라는 분에게

우리서적을 계속 전했다. 어느 정도 호감을 갖게 되자

이 분은 “안식일 교회에도 목사가 있는가?”고 묻고는

“목사가 있다면 속히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자

이 문서 전도인은 나에게 급히 회령으로 오라고 전보를 보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알아보니 주집사라는 성결 교인은

함경북도 웅기에서 살던 장로교인으로 어떤 일요일 저녁에

예배당에 가는 도중에 성결교회 교인들이 노방 전도하는 것을 보고

그 성결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감화를 받고

이 교회로 개종하여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이 성결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여러분이 다른 교회를

가도 좋지만 절대로 안식일 교회는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사실은 웅기 지역에는 안식일교회가 없었고 다만 김용직 씨라고 하는

특별난 안식일교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분은 어디서 살든지

안식일교회가 없어도 자기 집에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

김용직”이라는 큰 문패를 붙이고 살았다.

이 성결교회 목사가 그 문패를 보고

안식일교회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설교시간에

절대로 안식일교회는 나가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오히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한 주 집사는

이곳에 안식일교회가 있나하고 찾아보았으나

찾지를 못하다가 회령으로 이사를 와서도

계속 성결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회령 성결교회에는

이원근 이라는 분이 목사로 계셨는데 이분은 원래

북간도 용정에서 시무하시던 분으로 나도 간도에서

종종 만난 일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교회 교리도

대강 들어서 알고 계신 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분이 회령으로 전근될 때에

주집사도 회령으로 이사 와서 이원근 목사가 새로 시무 하게 된

성결교회에 다니다가 우리 문서전도인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이사 오기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안식일교회목사를 보자고 한 것이다.

회령에도 우리교회는 없고 교인만 한 가정이 있었다.

내가 전보를 받고 지체 없이 열차 편으로 회령에 가니

문서전도인과 그 성결교인이 정거장까지 나와 있기에

그 성결교인의 입장을 생각하여 이렇게 부탁을 했다.

“이원근 목사는 내가 아는 분입니다. 내가 방문 간 것처럼

그 댁에 먼저 가서 있을 터이니 당신들은 후에 오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어기고 이미 그 목사 댁에 와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그 목사는 토론에 필요한 여러 책들을

자기 앞에 내어놓고 있기에 나도 할 수없이

단도직입(單刀直入) 적으로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목사님의 교회 집사인 주사진 형제가

우리 안식일교회 교리를 알고자하여 두 교회 목사가

토론하는 것을 들을 맘이 있다 해서 왔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없지, 어쩌겠소?”

“우선 주 형제가 안식일 문제를 꼭 알고 싶다하시니

그 문제부터 집고 넘어 가시지요! 안식일문제는 십계명 중에

넷째계명에 분명히 밝혀 있으니 더 할말이 없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이미 폐했고 날자 도 변경 된 것을 가지고

안식교에서는 우기고 있지 않소?”

성결교회 목사님은 안식일 문제가 나오자

우리가 항상 듣는 상투적인 말로 대답을 하였다.

“이 목사님! 마태복음 5장에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언정

나의 율법은 일점일획이라 도 변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안식일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구약시대에 유대인을 위해 주신 것으로

이미 폐한 것을 가지고 안식일교회에서는 아직도 우기고 있지를 않소?”

이 목사님도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는 갑자기 다른 질문을 드렸다.

“목사님! 그러면 마태복음 24장은

예수 재림에 관한 일들을 예언하신 것이 확실하지요?”

“아 그거야 동의하다마다요. 내가 언제 재림이 없다 했나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4장 20절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재림은 앞으로 올 일인데

안식일이 폐했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내 질문에 이 목사님이 대답을 못 하시자

갑자기 성결교회의 주 집사께서 말을 시작했다.

”정 목사님! 방금 읽으신 성경절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겠습니까?”

“아, 물론 이지요!”라고 대답하고 나는 다시 읽어 드렸다.

“정 목사님, 성경책 좀 이리 주십시오,

제가 좀 직접 읽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드리니 자기가 직접

연거푸 두 번이나 크게 읽어 내려갔다.

”이제 보니 안식일은 폐한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니고 영영 있을 것인데

다른 목사들이 이 성경말씀을 바로 알려 주지 아니 했군요!

내가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 나는 갑니다.”

“주 집사가 이제는 알고 가신다 하니 우리 함께

기도를 드립시다.”하고 내가 이야기 했다.

“아니오, 우리 집에서는 그런 기도는 드릴수가 없습니다!”

목사의 집에서 기도를 못 드린다는 섭섭한 말을 듣고는

그냥 일어나 나오고 말았다.

주 집사는 곧 그 다음 안식일부터 우리 회령교회에 있는 유일한

안식일교회 가정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두 집이 연합해서 기도드리며 전도하여 오래지 않아

회령에도 우리교회가 생겨났다. 이때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열심히 믿는 한두 가정만 있어도

틀림없이 우리교회는 생기는 것이니 우리 지도자들은

교인가정들이 진실된 믿음과 성경 원칙대로 살도록

잘 지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체험하였다.

이때의 체험은 오늘날까지 목회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내게 말해주고 있다.


1933년 가을이었다.

나의 아내가 소청이 있다 하며 말하기를 “저고리소매에

색동 깃을 달아서 입기를 원한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나는 아내가 시집올 때 “색동옷이나 색동으로 깃을 단 것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하도 가난하게 자라서 그런지,

그런 것도 사치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탓이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시집 온지 한 주일도 못되어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한 삼년 동안은

소복으로 지냈으니 새 색시가 마음속으로

색동 깃을 단 옷을 얼마나 입고 싶어 했겠는가?

그러나 내 말을 따라 거의 20년 동안 색동옷이나

색동 깃을 달지 않고 지내오다가 지금에서 무슨 생각인지

그렇게도 그것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좋을 대로하라”고 허락을 했더니

옷에다 색동 깃을 달고 또 색동저고리를 입으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랐다. 내 아내는 웃으면서

내게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색동저고리를 즐겁게 입고 다녔다.

여자는 작은 일로도 그리 기뻐함을 알게 되었다.

1934년 3월,

태혁이는 상업보습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태영이는 청진 수성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태영이는 “태혁이 형처럼 도저히 상업학교는

적성에 안 맞아 못 다니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학교인 순안의명학교를 보내자니

거리상으로도 그렇지만 경제사정상 도저히 힘들 것 같아서

태영이에게 “그러면 한 해 쉬고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공부를 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기에

당시에 일본서 만든 중학교 강의록이 좋은 것들이 많아서

“대일본 중학강의록”이라는 것을 청해서 보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하여 우선 문제를 해결하였다.

태혁이는 “이제부터 가족들을 위해서 직장을 택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그 애도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택하겠노라.”고 해서 양복점을 하고 있는 한 교인 집에서

1934년 초부터 양복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장 아이들 문제가 이렇게 해결은 되었지만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 태혁이는 공과(工科)가 좋을 것 같고

태영이는 의과(醫科) 가 좋을 것 같다고 아내와 이야기한 것이

다 쓸데없는 일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이 많고 보니 학비조달문제가 너무도 큰 문제가 되었다.

4. 북선대회와 호남대회의 시작

1934년 6월,

사역자수양회를 한다기에 서울로 갔다.

합회 행정위원회를 하는데 뜻밖에도 나를

대회장의 직분을 맡기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목사 안수를 받은 1933년도부터는 행정위원을 안했기 때문에

행정위원회에서 무슨 결정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당신이 이번에

대회장이 되었다며 축하를 했다. 동료 사역자들은

“정 목사, 당신은 작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년 만에 대회장이 되니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가?”하며

축하를 해 주는데 어떤 행정위원이나 합회장으로부터는

아무 통지조차 없으니 곤혹(困惑)스러웠다.

그래서 합회장 오벽 목사를 만나 “내가 이번에

대회장이 되었다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 그거 사실이오, 그걸 몰랐소?”라고 하며

오히려 합회장이 놀라며 내게 물었다. 목사 안수 받은 지

일 년밖에 안된 나에게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회장이 되었으면 행정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물으니 ”아, 그렇고말고요.

내일부터 행정위원회에 참여하시오!”라고 말을 해주어

행정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의 교회 일들은 참 말로

어수룩했다. 행정위원회에 참여해서야 드디어

“내가 어느 대회의 대회장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동안 우리나라가 삼선(三鮮)대회로 되어 있던 것을

오선(五鮮)대회로 나누면서 새로이 북선대회와

호남대회를 신설했는데, 북선대회는 정동심을,

호남대회는 김례준 목사를 대회장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역이 어디냐고 물으니 북선대회는 함경 남북도,

강원도 및 북부 영동지방이라 한다. 그리고 북선대회 본부는

임시로 청진에 두지만 후에 원산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 회의를 하기 전 서선대회장인 우국화 목사가 내게 와서

가만히 하는 말이 “정 목사가 새로 대회장이 되었으니

서선대회에서 일보는 김석영 목사를 북선대회에서 받아

열심히 일 해 보라.”하시기에 처음 맡는 대회장직 이라

모든 것이 생소하기에 김석영 목사를 받아 원산으로 모셨다.

김 목사는 원산으로 올 때 부인은 오지 않고

우선 혼자 원산으로 오셨다. 서울서 회의를 필하고

청진으로 돌아와 몇 날 동안 집에서 많은 생각과 계획을 했다.

9월에는 원거리 방문을 위해서 함흥과 원산을 거쳐 강원도로 갔다.

강원도 장전 역에서 내다보니 갑자기 하늘에 구름 같은 이상한 것이

나타나기에 저것이 무엇인가 하고 옆에 사람에게 물으니

”당신 이 길이 처음이군요? 이게 바로 금강산이오.”하고

가르쳐 주어 내 일생 처음 금강산을 보았다.

강원도 강릉을 방문하여 점심 후에 가진 침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는데 신자들이 또 뭘 좀 드시라 하는데 너무

거절할 수가 없어 조금 먹었는데 그만 체했는지 몸이 매우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 눕게 되었다. 이 일이 전도부인

오병태라는 분의 집에서 생겼는데 교우들은 돌아가고

전도부인만 있는데 아무리 아파도 목사인 내가

혼자 사는 전도부인 집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명대숙 씨라는 분을 오라해서

두 부인이 한방에서 주무시고 나는 그 아랫방에서

밤새도록 앓았다. 내가 얼마나 앓았는지 그 두 부인은

병 잘 고치는 할머니를 새벽에 불러와 손을 따고 등을 두드려

겨우 진정하고 새벽에 조금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후에 내가 괴로움을 당한 담석증이

이미 이때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돌아오는 길에

함흥서 황처령을 넘어야 장진이 되는데 함흥 쪽에서는

나뭇잎이 많고 푸른데 황처령에 턱 올라서니

이미 나뭇잎은 다 지고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오바도 없이

비옷만 가지고 떠났다가 얼마나 떨었는지

지금도 추위가 닥아 오는 듯 하다. 황처령을 내려와

여관에 들어가니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추운데 왔다고 숯불로 방을 어찌나 따뜻하게 데워주는지

편안한 하룻밤을 지냈다. 그곳에 정인섭 이라고 하는

교인을 방문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떠났다.

장진을 떠나면서 멀리서 보아도 그 아름다운 금강산을

다음에는 꼭 올라가 보리라 생각만 하고 집에 오니 9월 말 이었다.

청진에 도착하니 몇몇 신자와 사랑하는 아내가 마중을 나왔다.

5. 아내의 죽음


내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몸이 대단히 편치 않다.”고 하며

병석에 누웠다. 한 삼 사일을 지나도 별 차도가 없기에

이곳에 새로 생긴 큰 “청진의원”이라는 큰 병원에 가서

의사를 집으로 모시고 왔다. 젊은 의사가 왕진을 와서

진찰을 하더니 음식을 삼가고 특별히 사과 같은 것을

많이 대접하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하고 이삼일 지나도 차도가 없어 가만히

아내의 가슴을 헤치고 보니 앞가슴 사이에는 빨긋빨긋한

좁쌀 같은 것이 돋고 볼은 점점 붉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의사가 와서 진찰 할 때 “의사님, 제 아내가 지금

열병이 생긴 것 같은데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어떻게 열병인지 아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래서 “아내의 앞가슴 사이에 빨긋빨긋한 좁쌀 같은 것이 생기고

또 앓는 사람의 얼굴이 점점 붉게 되니 그게 열병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 의사는 “증상이 그렇다면 가만히 안정하고

과일즙만 잘 먹이면 괜찮을 것”이라 하고 떠났다.

사람이 일이 안 되려면 일이 꼬인다 하더니 후에 알고 보니

이 의사는 첫해(一年)밖에 안 된 경험이 적은 의사로써,

열병에는 물을 많이 주어야 된다는데도 과일즙만 조금씩

주라고 해서 환자가 물을 자꾸 달라는데도 의사의 말을 따라

사과즙만 조금씩 마시게 했더니 그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돌이킬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한 일주일 지나니까

병세는 더욱 어렵게 되어 매일 밤을 새우며 간호를 했다.

할 수없이 태혁이는 양복점에도 못나가고 낮 시간에

어머니를 돌보고 밤에는 내가 돌보았다. 그런데 하루저녁에는

목책을 두드리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내가 이 집을 산후에 목책을 집 주위로 둘렀는데

이 목책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리다가 조금 후에는

그 목책 전부가 흔들리며 떠나가는 듯이 소리가 났다.

내가 등불을 가지고 나가니 옆방에 사시는 이필모 집사도

등불을 가지고 나왔다. 둘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내 아내는 별로 차도가 없었다. 한 신자가 경험이 많은

일본인 의사를 추천하기에 청하여 아내를 보게 한즉

“미안하지만 환자의 병이 너무 깊고, 너무 늦어

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10월 9일쯤 내 아내도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제는 더 살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며 “내가 탄 이 기차가

왜 이리 빨리 가지 않는가, 내가 탄 배는 왜 이리 더딘가?”라고

헛소리를 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몸이 너무 아파서

못 견디겠다.”라고 하기에 나는 “아프면 기도드리고

몸이 낫기를 기도하자”라고 하니까 기도를 드리면서도

너무 아파했다. 어떤 때는 두 팔을 벌려 내 목을 끌어안고

아파하면서 놓을 줄을 몰랐다. 그럴 때면 아내에게

“이제 세상을 떠난다 해도 틀림없이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이야기 하면 좀 편안해 하며

내 목에서 팔을 풀었다. 그리고 10월 10일에는

한 주일 간 보지 못하던 대변을 시원하게 보기에

이제는 회복이 되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신자들은 말하기를

“가실 때가 되었다.”라고 말들을 하지 않는가?

나의 소망과는 달리, 그 이튿날 10월 11일 오후 7시경에

사랑하는 아내는 위로 16살 된 태혁으로 시작하여

5살 난 막내아들 태중이 까지 여섯 아이를 두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너무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내 심정은 너무도 막막하여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룻밤을 지나고

10월 12일이 되니 그때부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슬픈 마음을 주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장례를 치러야 하겠기에 서울에 있는 합회본부에

전보로 소식을 전했다. 합회장 오벽 목사가 친히 오셔

장례식 전부를 맡아 수고를 해 주셔서 안장을 하였다.

오벽 목사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음만 괴롭고 답답할 터이니

자기와 함께 이 근방을 방문이나 하자.”고 해서

장례식 그날로 웅기방면으로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우리 집에서 목책이 흔들리던 얘기를 하니

오벽 목사는 “그것이 사단의 장난이라고 하면서

서양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하신다.

오벽 목사는 “이번에 정 목사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은

내 잘못이오, 미안하오. 북선대회 본부가 원산인데

진작 원산으로 정 목사를 옮기게 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 모르는데 청진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너무 미안하오.”라고 하시며 미안해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되는 것이니

심려 마시라.”고 오히려 내가 위로해 드렸다.

오벽 목사와 웅기를 함께 방문하며 정신을 차려 생각해 보니

아내와 같이 산 것이 21년이 채 못 되었는데

죽음으로 이별을 한 것이다. 배운 것도 없이 내게 와서 열심히 배워

이제 정말 교회의 중한 일을 시작한 나를 도와야 할 때에

세상을 떠나고 보니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집으로 돌아와 열여섯 살과 열세 살 된 아들,

11살, 10살, 8살 된 세 딸, 그리고 5살 된 막내아들,

여섯 어린아이가 오롱조롱 집에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답답하고 미어지는 듯 했다.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길이 없어 다시 방문길을 떠나 함경남도에 가서

한 열흘 동안 방문하고 돌아오니 두 째 딸 충실이와,

함께 사는 이칠운이가 유행하는 열병에 전염되어

한참 앓고 있기에 약을 좀 사다 쓰고 나니 다행히

칠운이와 충실이가 열병에서 회복되었다.

아내가 없으니 아이들도 어떻게 길러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6. 재혼-제1부


상처 후에 친구들은 “정 목사! 이제 상처했으니 다시 재취하면

좀 공부한 사람을 택해야 되지 않겠느냐?”하며 엉뚱한

의견들을 말했다. 나는 그러한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왜냐하면 16세 된 제일 큰 아이로 부터 5살 먹은 애까지

여섯 아이를 두고 홀아비가 되었는데 누가 이런 집에

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되겠다.”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 청진교회 여 집사인 최벽송 씨가

내게 심각한 이야기를 했다. “정 목사가 한 2 주일 동안

출장을 나가있는 동안 우리 교회 여학교의 처녀 아이들이

두세 명씩 정 목사의 아이들을 위해서 밥도 짓고 아이들도

돌보아 줄 겸해서 정 목사 집에 와서 자고가곤 했습니다.

정 목사도 출장을 가서 집에 없고 또 조금 전에 상처를 했으니

이해를 한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젊은 목사에게

보통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 목사는

다시 아내를 택해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세상 떠난 아내와 가까이 지내던 여 집사가

나의 목사라는 신분까지 고려하여 이야기를 하니 내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 여섯을 돌보면서

목사의 부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을 이해하는 여자를

구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하는 생각에 도무지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그러는 중, 하루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사역을 하는

조치환 목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조치환 목사는 나와

순안 의명학교 동창생이요 또 목사 안수도 함께 받은,

정말 다정하게 지내던 친구로 허물없이 조언이나 충고를

하는 사이였다. 조목사는 “나도 일찍 상처를 했는데

혼자 지낼 수 없어 망설이다가 재취를 했는데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다.”며 “정 목사도 불행히 상처했으나

속히 재취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면서

자기와 같이 일하고 있는 김병애 전도부인을 추천하면서

함께 살도록 하라는 편지였다. 나는 김병애 라는 사람이

전도부인이라는 것과 내가 태어난 곳에서 백 여리 떨어진

평안남도 순안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지역 사람이니 서로 이해하기가 좀 쉽겠다.”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조치환 목사에게 “좀 생각해보자”하고

편지를 내면서, 한편 남선대회 대회장 부두열 목사에게

“당신이 아는 대로 내가 상처를 했는데, 어떤 분이

당신 대회에서 일하는 김병애 전도 부인과 내가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떤가 하며 소개를 하는데

대회장으로 김병애 라는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편지로 물었다. 부두열 목사는 곧 “100% 적당한 여성이니

가정을 이루라”는 회답을 해 주었다.

그 회답을 받고 나는 김병애 씨에게도 직접 편지를 내었다.

“나는 당신을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신과 같이 일하는

조치완 목사가 당신을 소개하며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떠냐 하는 편지가 왔는데 그것이 조치완 목사 개인의 생각인가?

아니면 김병애 씨 본인의 생각인가?”하고 편지를 냈다.

김병애 씨도 “내가 조치환 목사에게 직접 부탁한 일은 없으나

그 분의 말을 들었습니다. 조치완 목사가 추천하는 분이라면 믿고

그분의 의견을 따라 저도 정 목사 댁에 가볼까 생각 합니다”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 욕심만 내어 “그렇게 합시다!”라고 할 수가 없어

다시 “내 집에는 열여섯 살 된 아들로 시작해서 다섯 살 된

막둥이 아들까지 아들 셋과 딸 셋, 여섯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말과

“그런 연고로 나는 무척 가난하게 산다.”라는 말까지 자세히 쓰면서

“이런 어려운 가정에 와서 김병애 씨가 가정을 이루어

살수가 있겠는가?”하는 편지를 또 보냈다.

그러자 이 편지에 대한 회답에는 “나는 이미 정 목사의 가정에

많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결정했고 또 전도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전도를 하는 목사의 가정을 돕기 위해서

갈 마음이 있는 것이지 재산 많은 집에 잘 살러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회답을 받고도 아이들이 어리다 생각이 되어

이런 일을 이해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에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리고 한 번 더 김병애 씨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김병애 씨를 잘 모른다. 당신도 나를 잘 모를 터인데

한 번도 본적이 없이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말을 듣기에 김병애 씨도 전남편의 소생을 데리고 있다는데

여섯이나 있는 이 집에 한 아이가 더 와서 서로

불화 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서로 힘들 터이니

김병애 씨 소생은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정 목사께서는 저를 잘 모르신다 하지만

저는 정 목사를 잘 압니다. 정 목사가 대회장으로 총회 같은 때에

나와서 말씀하시는 것을 종종 듣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소생은 친정에 맡길 생각입니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이 회답을 받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떼어놓고 오라고 하는 것도

내 욕심이고 또 어머니로 아이를 떼 놓고 올 수도 없을 것 같아서

다시 편지를 보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병애 씨가 내게 오는데

내가 가진 조건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니 그 동안의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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