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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7



( 일단 “재간도 조선인협회”가 거대한 기구로 발전하자 영향력 있는

조선인 700여명을 검거하고 그중 90명을 조선으로 이송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하고 오늘 12명이 사형집행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화를 피한 것이다. 연재 #16끝부분)


5. 제 7동 담임 목사-제 2 부


나는 이 소식을 알려준 조선인 간수

“다까야마에이다로(高山永太郞)”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내가 출감할 때가 거의 가까워 진 어느 날,

이 조선인 간수가 나를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동안 비록 나에게 잘 해 주었지만, 출감할 때가 가까이 왔는데

사무실로 불러들이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뜻밖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산주이찌방”과 형무소의 일을 함께 해보니

그 동안 내가 겪은 많은 죄수들과는 달랐소. 그 죄수들 중에서

31번처럼 온순하게 복종하고 다른 죄수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 자를

보지 못했소. 또 31번은 학문도 꽤 많이 아는 사람인데

한 가지 이해 못할 것은 우리 한국에도 예부터 내려오는

좋은 유교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 예수교에 빠져 들어가서

징역까지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소.”

사실 그동안 이 고산 간수의 은혜가 감사해서 복음을 한 번

전하기를 바랐으나 주제가 넘는 것 같아 자제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를 불러 먼저 이야기를 하니 잘 되었다 싶었다.

“고산간수님! 간수님은 유교를 숭상하시는 것 같은데

유교의 무엇이 그리 좋으십니까?”

고산 간수는 3강 5륜을 설명하고 충효사상의 우월함을 강조하며

한참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며 그 가정이 한학에 뛰어난 가정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양해를 얻고 예수교를 믿기 시작한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간수님! 사람은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자기가

현재 가진 것 보다, 또 현재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갖거나 또는 그것을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간수님은 유교를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유교의 사상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 불가회생이 호지시아”라 해서

우리의 몸과 머리털까지 다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조금도

상하지 않는 것이 효자라고 했는데 간수님도 머리를 이렇게

깍지 않으셨습니까?” 아무 대답도 없었다.

”간수님은 지금 이렇게 칼도 차셨고, 또 의복도 우리 조선의복이

아닌 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까?

나도 한문을 공부하다가 예수교가 좋아서 받았는데

이를 어찌 마다하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유교의 사상을

좋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보니 성경은 유교의 사상

이상이며, 내 개인은 물론, 세계의 앞날에 관한 것 까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나의 영생까지도 이미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성경의 십계명은 유교의 도덕을 뛰어 넘고 있습니다.”

나의 열렬한 말에 간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고 간수님! 내가 안식일교회 교인으로 징역 하는 것이

좀 미안 합니다만 저를 이렇게 특별대우를 해 주셔서 너무도

감사 합니다. 허나 간수님께서도 안식일 교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역시 아무 말도 아니했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그가 나를 부른 것은 술을 좀 마시고

조금 취해서 불렀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말에 대답을 못하게 된

이 고 간수는 사무실 밖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우리 누가 믿는 것이

옳은지 지금 씨름을 해서 결판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간수님과 씨름을 하느냐?” 하는데도

계속 나를 붙잡고 씨름을 해서 결판을 내자고 했다.

술김에 씨름을 해서 그런지 간수의 기운도 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씨름을 해서 내가 씨름에 이기기는 했다.

그러자 죄수들과 특히 밥 주는 사람들은 ”산주이찌방이 오늘 간수에게

단단히 걸렸다. 오늘 대단히 많이 얻어맞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형무소의 불문율은 물론, 실제 규칙으로도 “죄수가 간수와 붙잡고

승강이를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 인지라 모두들

그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간수가 술이 좀 취하자 평소에 내가 감옥에 와 있는 것을

안스럽게 생각했던 진심이 나온 것이라 생각 하니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의 모든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들이 아니며

설명이 불가능한 이상한 일이었다.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보호하심과 기이한 인도와 섭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밖에는 달리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했다 해도,

들어와서 하나님을 전할 수 없는 이곳에 나를 보내셨음을 나는 깨달았고

감사를 드렸다. 출감일이 가까이 되어 가는 7월에 나의 아내가

마지막 면회를 오자, 형무소의 규정에도 없는 특별대접으로

면회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테이블을 놓고 나의 아내를 들어오라 하여

둘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할 말이 별로 없어 “집의 아이들이 잘 있느냐?”하며

아이들 문제로 잠시 이야기를 했다. 그때가 7월이어서 아내는

깨끗한 모시의복을 입고 와서 보기에 좋았고 마음에 안심이 되었다.



6. “가쿠리”와 출감


고산 영태랑 간수는 나에게 “곧 31번은 7동에서 격리되어 수용 된다.”는

통보를 해주었다. 말인즉슨 “이 형무소의 관례대로 출감 2일전에는

다른 방으로 옮겨 정말 형무소의 맛을 보인다.”라고 했다.

형무소에서는 이것을 “가쿠리”라고 하는데,

이 말은 “격리 시킨다!”는 뜻이다.

나는 “정말 출감을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나를 특별한 섭리로 인도하신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 동안 지냈던 감옥소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작년 4월11일,

이른 아침에 청양에서 체포되어 홍성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와서

징역을 살면서 모든 것이 연약한 내가 감당할 만큼 돌보아 주신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그 동안 비록 안식일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재판과 항고(抗告)와 복심재판을 통하여

우리교회의 입장과 나의신앙태도를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사도바울 선생이 “내가 로마에 가겠다.”고 한 것을 나 나름대로

조금 경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위로가 되었다.

사실 초심, 복심 또는 고등법원을 지나며 형무소생활을 하는 동안 얻은

모든 경험을 통해 나는 지도자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많이 배웠다.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와 수백 명이 되는 죄수 앞에서 설교를 하고

또 미성년죄수들 감방에서 이야기도 하고 그 아이들과 상담을 하며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귀중한 경험인지라 감사 드렸다.

형무소 내에 장기수에게만 주어지는 밥 주는 일을 하게 하셔서

힘든 음식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배고픈 다른 사람까지

돌 볼 수 있게 인도 하셨다. 감옥 내 전도활동과 특별히

미성년죄수들에게서 얻은 이 경험은 돈을 드려서도 할 수도 없는

귀한 경험으로 나의 목회자로서의 자세를 다시 세워 주었고

많은 말씀의 재료가 될 것이 틀림없어서 오히려 이 징역 생활을

감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석방이 되어 나가더라도 내 호적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어서 어디를 가도 전과자라는 오명을 달고

다닐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 오기도 했지만 믿음의 선구자들이

당한 고생과 견주어 보면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믿음으로 극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조선인 간수 고산은 나에게 8월 17일, 즉 출감일 이틀 전부터

밥 주는 일도 그만하고 다른 방으로 옮겨가면 “정말 징역사는

기분을 한껏 누리게 될 것.”이라 하여 겁이 났다.

그러나 그보다는 300여명의 동료 죄수들에게

“나는 3-4일 후면 나갑니다.”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고 미안했다.

특별히 함께 밥 주던 사람들은 모두가 최고 장기수인지라 나간다고 하는

말을 차마 하기가 미안하고 큰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나는 8월 14일과 15일,

양 일간 47개의 감방을 돌며 “내일 모래 가쿠리로 갑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모두들 “우리 죄수들에게

봉사 잘 해주던 목사님께서 가시면 이 더운 여름에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받아 마실 수가 없겠구먼!”하고 눈물을 흘렸고

어떤 죄수는 “목사님이 나가면 밥도 공평하게 못 얻어먹겠다!”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울기까지 했다. “이제 성경공부도

더 못하게 되는군요!”하고 너무도 서운한 표정을 짓는

순진한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흘렀다.

나는 죄수들과 손을 맞잡고 “여러분! 아무쪼록 잘 순종하여,

주어진 만기일만 잘 채우고 나오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47개의 감방을 다 돌면서 인사를 하자니

마치 큰 교회를 담임하다가 떠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보던 이 조선인 고산 간수가 나를 다시 불러

“이 형무소에서 아직까지 이렇게 한 예가 없지만,

가쿠리에 가서 이틀 밤낮을 지내려면 ”산주이찌방“이

너무 힘들 터이니 나가는 날까지 잠만 그곳에 가서 자고,

낮에는 이리 와서 밥 주는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나와 이야기나 하다가 나가라” 하고 말해 주었다.

나는 건성으로 “감사 합니다!”라고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는 방을 옮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1942년 8월 17일, “가쿠리”로 옮겼다.

그곳에 죄수가 20명 있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밤과 낮이 없이

모두들 담배를 계속 피워대는데 그 고통은 말로 할 수가 없다.

그 좁은 감방에 20명의 죄수만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한 명도 예외가 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니 그 연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끔 간수가 지나가면서

“금연이야, 금연!”하고 고함을 치면

“여기는 가쿠리요, 가쿠리!”하면서 더 크게 받아치곤 했고

간수도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곤 했다. 평생 담배에 굶주렸던 사람이

소원을 풀려는 듯이 계속 피워댔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서로

떠들어 대는지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한 사람도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밤에

잠을 자려고 하니 “아니, 내일 모레 나갈 사람이 무슨 잠을 자냐?”

하면서 계속 내 몸을 이 사람, 저 사람이 쿡쿡 찔러댔다.

하룻밤 사이에 나는 입술이 부르트고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옥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일 아침, 조선인 간수 “다까야마에다로”는 내가 배식을 위해

7동으로 가니 “그곳에 간 감상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간수님의 말씀대로 거기가 정말 징역 하는 곳입니다.

내 입술 좀 보십시오!”라고 대답 했더니

“그래! 입술이 다 터졌구먼! 무슨 일이 있었나?”하기에

잠을 재우지 않던 이야기를 하며 어디서 저렇게 담배를

많이 구했는가 물었다. 고산 간수는 가쿠리로 가서

“무슨 담배를 그리 피워대고 왜 잠들은 안 자는가?”고 묻자

모두들 “우리는 내일 모레면 나가는데 무슨 잠을 자느냐?”고

야단들을 하며 “우리는 나갈 사람들이지, 더는 죄인 아니라“고

야단들이었다. 밥 주는 일을 하고 7동에 머물러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것과 같았다. 8월18일, 그 힘든 곳에서 하루 밤을 더 잤다.

1942년 8월 19일.

아침 해가 이리도 밝을 수가 없었다.

내가 체포 된지 1년 4개월 7일이 지났다.

간수의 인도를 따라 감옥 문을 나서기 전에 그동안 나를 잘 돌보아준

고산영태랑 간수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하러 갔다.

고산 간수는 나에게 출감 후에는 절대로 자기에게 어떤 감사의 편지도

보내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행여라도 그분이 나에게 베풀어준

그 혜택에 대하여 내가 편지를 썼다가 검열을 받게 되면

상부에서 그간의 일을 알게 되고 그러면 고산 간수가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것을 두려워 한 까닭이었다.

정말 서대문형무소의 생활이 힘은 들었지만 이분의 후의(厚意)로

마치 한 큰 교회를 맡아 목회생활을 한 것 같은 감사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감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느끼는 심정은

기쁨보다는 불안하고 어깨가 무거운 듯한 심정이었다.

다시 이사야 43장 1-3절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부형(父兄) 모매(母妹)들의 기도의 은덕이라는 생각이 들며

감사한 눈물이 흘렀다.

그 안에서 출감 수속하는 동안 왔다 갔다 하며 가만 생각해 보니

형무소에서는 징역 하는 동안에 “어디서 편지가 오느냐?

얼마나 자주 오느냐?”를 보고 그 사람의 신분이 좋은지 나쁜지

헤아려 보고 또 이 사람이 비록 죄인이지만 사회에서 괜찮게 지내던

사람이로구나 하는 인정을 감옥 내에서 받게 되어있었다.

그동안 내 아내나 내 자녀들, 또 당시 한 다섯 살 먹은 태목이가

이상한 글자로 편지를 해 준 것과 북선대회장이시던 김항모 목사의

엽서 한 장외에는 아무도 서신을 보내 준 것이 없었다.

아마 세월이 험악하니 몸조심하느라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편지로 인정을 못 받는 대신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일에 인정해 주시고 간섭해 주셨음이 너무나 감사했다.

8월 19일, 오전 11시,

그 무거운 형무소 문이 나를 위해 열렸다.

서대문 형무소 문이 열리기에 밖으로 나가려고 내다보니까 우리교회

합회장 최태현 목사가 그 바쁘신 중에 마중을 나오신 것이 보였고

또 내 아내도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보였다. 위생병원에서

나를 위해 보내준 자동차가 서있는 것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그 큰 형무소문이 철컥 열려서 드디어 감옥을 걸어 나왔다.

나의 아내와 같이 오영섭 목사의 부인도 나와 있었다.

이 분들의 손을 마주 잡는 순간,

“드디어 내가 출감하였구나!”라는 것을 실감하며

정말로 감개무량 했다. 이 순간, 나는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가 죄의 감옥에서 구원 받는 순간이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위생병원에서 보내준 차에 나와 나의 아내와,

극구 사양을 하는 오영섭 목사의 부인에게 타시라고 권하여

그 차를 타고 서대문형무소를 떠나 집으로 오게 되었다.

감옥에서의 만 16개월은 참 긴 시간이었다.

청양과 홍성경찰서,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이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게 된 일을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내 아내가 그 동안 충실이, 정실이, 태중이,

태목이, 경실이, 이렇게 다섯 아이를 데리고서 무사히 지난 것을

생각할 때에 더욱 감사했다. 큰 아들 태혁이는 결혼해서 내가 있는 집

건넌방에서 살고 있었고, 딸 제후는 순안에 가서 공부하고 있었다.

태영이와 진실이는 서울 위생병원 간호원으로 들어가 있었다.

내가 출옥 하던 날,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녹두지짐을 만들어 내 놓았다.

내가 몇 개 안되는 녹두지짐을 금방 먹어 치우고

좀 더 내오라고 하자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당신이 시국을 몰라서 그렇지, 지금 양식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원하시는 만큼 잡수시기에

턱없이 모자라지만 당신이 하도 좋아하기에 겨우 몇 개라도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라고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걱정을 할까보아서 눈물도 안 흘리고 어려웠던 일은

한마디도 안 했던 내 아내는 그간의 고생을 조금씩 이야기했다.

내가 옥살이 하는 동안 내게 쌀밥을 차입하느라고 가족들은

쌀 한 톨도 구경 못하고 굶주리며 지낸 것도 알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홍성경찰서로 넘어가 6개월 징역판결을 받자마자

교회본부에서 내 월급을 절반만 주어서 반(半)월급으로는

도저히 살수가 없어 시조사에 들어가 종이를 접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 벌어서 어렵게 지난 일을 눈물지으면서 얘기를 했다.

나는 아내에게 “고생한 것을 다 이해 하지만 합회에서 월급을

절반만 주어서 어렵게 살았다는 말은 다시는 하지 말라.”고 했다. “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이만큼 지내 왔으니

감사하면서 지내자.”고 말했다. 내 아내도 “다시는 그런 말을

아니 하고 지내기로 하겠다.”고 했다. 말은 그리 했지만

식구가 많아서 월급전액을 가지고도 힘들었던 형편에 남편도 없이

반 월급을 가지고 생활한 아내에게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목이 메고 할 말을 잃었다. 이 보다는 내가 수감된 동안,

가까이 살고계신 분들 중 아무도 우리 가족들의 곤란함을 보고

찾아와 말이나마 위로해 주는 형제가 없었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내가 출옥을 했는데도 찾아 주는 이가 없었다. 전과자를 찾아 왔다가

무슨 화가 미칠까 보아 몸을 매우 사리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참 사람의 인심이란 이런 것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 안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멀리 평양교회에 계시던

최매실 여사가 사식차입에 사용하라며 적지 않은 금액을 보낸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감사한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

일본이 1941년 11월 8일에 소위 대동아전쟁,

즉 제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해서 벌써 9개월 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생활고에 허덕이는 그 속에서 내 아내는

가장(家長)없이 자기 혼자서 일곱 아이 중, 집에만

다섯 아이를 데리고 무척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그만큼 지난 것을 감사했다.

나는 16개월의 감옥 생활동안 터득한 지혜를 따라, 출감을 하면

교회지도자들과 같이 관할경찰서를 찾아가 인사를 해야

교회사업에도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합회에 가서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 우리구역인

동대문경찰서를 함께 찾아 가자고 부탁을 드렸으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합회장님은 물론 총무 일을 보시던 분이나 또는 동역자

그 누구도 경찰서에 가는 것을 몹시도 꺼려하면서 못 가시겠다고 했다.

할 수없이 혼자 동대문 경찰서장과 고등계주임을 찾아서 인사한 즉

“아, 당신이 바로 정 동심이냐?” 물었다.

이미 나의 출감이 해당경찰서에 통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내가 당신의 경찰서 구역에 살면서

본의 아니게 수감되었다가 이제 출감했습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라고 인사를 한즉 “아, 사람이

운이 좋지 못한 때에는 그럴 적도 있는 것이오,

좌우간 이렇게 찾아와 주어서 매우 고맙소!

이제라도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라오!”하며

뜻밖에도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출감하면 왜 관할 경찰서를 찾아가서

출옥신고를 해야 한다고들 말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고등계주임은 “이제 출감을 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하고

형사답게 물었다. 나는 “목회사업을 하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목회사업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아, 그럴 것이요.

그전에 하던 일이니 나가서 전도사업을 다시 하시오,

그리고 성공적으로 하기를 바라오!”라는 기대하지 않았던

호의적이고 오히려 용기를 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동대문경찰서에 출옥신고를 한지 얼마 후에 나는

교회본부로부터 아래와 같은 통고를 받았다.

“정동심이는 교회 사업에서 제거하라는 통지를

경찰서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복직 시킬 수가 없으니

교회 일을 할 생각을 하지 마시오! 그런고로 복직은 물론

월급도 회복시킬 수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비감(悲感)에 빠지게 되었으나

곧 야고보에 나오는 말씀대로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주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굳세게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출감신고 때에 나에게 생각지 않게 호의적이던 경찰로부터

과연 그러한 통지문이 교회 본부로 왔었는지에 대한 사실여부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관식(官食)을

(형무소 음식)하던 나까지 출감해서 집에 들어와 식구가 하나

더 불어났으니 생활이 말할 수 없이 더 어려운 형편이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연약한 내 아내는 그대로 시조사에 나가서 접지업

(摺紙業-종이를 접는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갔다.

출감하고 한 달쯤 되어 내 친구 이여식 목사와 손형국 씨가

나의 곤경에 처한 상황을 알고 찾아와 말하기를

“사역자양성소에서 운영하던 목공장이 있으니

정 목사가 맡아서 해 보라.”는 제의를 했다.

사역자양성소는 지금의 삼육신학원의 전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자본이 하나도 없는데 장소만 있다고 목공소를

할 수가 있는가?”하고 이야기 한즉 감사하게도 손형국 씨는

자기가 자금을 얼마간 대어 줄 터이니 해보라고 한다.

이 목공소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경영하던 것으로

“사역자”에서 “사”자와 “양성소”에서 “양”자를 떼어서

“사양목공소”라고 했었다. 그러나 시국이 험하여지자

사역자 양성소를 문을 닫으면서 자연히 사양목공소도

문을 닫았던 것이다. 이 목공소는 선교사 사택 뒤에

작고 허술한 헛간 안에 만들었었다. 두 분 형제의 권유로

경험은 없지만 목공소를 경영해 보겠다고 했으나 목수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여식 형제는 “원래 그 목공소에 일하던

두 분을 쓰라.”고 하셨다. 나는 “그 분들이 신자인가?” 물으니

대답을 안 하셨다. 그래서 강원도 강릉에 있는 내가 잘 아는

장로의 아들 이기원 군이 목공기술이 있는 것이 생각이 나서

편지를 하니 이기원 군은 먼 길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와서,

고생이 되지만 우리 아랫방에 있으면서, 원래 일하던

불신자 목수 두 명과 함께 목공소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합회장님이 나를 오라 하시기에 찾아뵈었더니

그 목공소를 쓰려거든 먼저 세를 내야 한다고 하셨다.

말씀은 맞는 말씀이신지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목사님, 한 말씀 여쭙고 싶으니 용서하십시오.

여기에 서양인 선교사들이 살다가 귀국해서 목사님 이하

몇 분들이 선교사 사택을 대신 사용하고 계신데 세를

얼마나 내시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니 아무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계셨다. 선교사들이 모두 귀국하고 선교사들의 사택들이

비었음으로 합회장님 이하 오영섭 목사, 이여식 목사, 김온준 씨,

박창욱 씨 등이 들어가서 살게 되었는데, 중선대회장으로 있던 나에게도

한집 들어와 살라는 의견이 나왔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도자급의 사역자들이 한 구내에 이렇게 갑자기 다 모여 그냥

사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 사양을 했었다.

그분들이 들어와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이 되나

그분들이 집세를 얼마씩 내시는지는 모르지만 내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택을 사용하라는 것은 사양을 했지만, 이제 그 작고

허술한 헛간 같은 목공소는 그간 문도 닫았던 것인데,

이제 형무소에서 나와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어 그 곳을 열라고

하는데 세를 내라 하시니 너무 섭섭해 무례하게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못 내겠다고 하기가 무엇해서 좀 기다려 보시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만 말씀을 드렸다.

그 목공소에서 양복장을 7-8개를 만든 후에, 문안에 있는

가구점에 연락하니까 가지고 와 보라고 해서 마차를 하나 얻어

그 양복장들을 싣고 문안에 들어갔다. 그 가구점에 가니

어수룩한 우리들에게 가격을 깎으려고 그러는지 대뜸 칠도 잘 안되고

제품이 잘 안됐다고 받지 못하겠다는 투로 이야기를 해댔다.

우리는 그래도 전화로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좀 맡아 달라고 사정을 하니 그럼 내려놓으라 하는데

이 마차꾼이 양복장을 잘 다루지 못해서 한두 개가 땅에 떨어지면서

흠집이 나니 양복장 전부를 받지 못하겠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도로 싣고 나왔다. 도와준 두 형제에게 “대단히 감사하지만

형편이 이래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니 그분들도

“형편이 그러면 어떻게 하겠냐?”고 해서 고생한 보람도 없이

문을 다시 닫았다. 이기원 형제와 불신자 목수 두 분에게도 대단히

미안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그 불신자 목수 두 사람은

밤중에 그 목공소에 들어와 목공 기구들을 전부 도적질 해 갔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한다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목공소를 그만두고 한 두 서너 달쯤 아내가 벌어오는 것 가지고

일곱 식구가 살아나가기 참으로 어려운 것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기도드리고 합심해서 살자고 아내와 같이 의논하고

믿음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이나 하면서 생활해 나갔다.

연말이 다가오기에 내년은 희망이 가득한 새해가 되게 해주시고

금년과 같이 많은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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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식구가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웠지만 기도드리면서

합심해서 살자고 아내와 같이 의논하고 믿음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이나 하면서 생활해 나갔다.

연말이 다가오기에 내년은 금년과 같이 많은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연재 #17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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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의 수난



1943년 정월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합회총회를 한다고 해서

나는 총회에서 내 월급이나 회복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참석했다. 나는 전과자라고해서

어떤 종류의 책임도 없이 평신도의 자격으로 뒤에

방청석에 앉아서 가만 듣기만 했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형사의 감시는 옛날보다 더욱 삼엄한 것 같았다.

회의진행이 너무 어수선 한 것 같아서 언권을 청해

보았으나 언권도 주지를 않아 한마디 말도 못해 보았다.

이 총회에서 중요한 직분인 선거원장에 김예준 목사가

선출되어 모든 인선을 선거위원회에서 의논해서 가지고 나오는데

유감스럽게도 합회장으로 계시던 최태현 목사는 낙선이 되시고

대신 오영섭 목사가 새로운 합회장으로 결의가 되었다.

오영섭 목사가 자질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추진력도 계신 분인데 성격이 참 급하신 아직 젊은 양반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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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2년간이나 수감되어 교회를 떠나있었고, 더구나

아무 의견도 발표를 못하게 하니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곧 신임합회장의 인사가 있겠다고 발표가 되더니

오영섭 목사가 나와서 합회장취임사를 하시는데

“일본나라가 소위 대동아 전쟁”이라는 것을 일으켜 놓고

시국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이때에 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각오가 되었다“고 하시었다.

아무리 성격이 급한 분이시지만 전쟁 중인 이 시국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무사할 수도 없겠지만 앞으로

일본에 대해 잘 해 나갈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합회총회는 삼사일 만에 은혜 속에 잘 끝난 것이 감사 했다.

당시에 우리 교회는 교인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융합하여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갔는데

특히 평양교회가 선두에서 모범이 되었다. 이때에도

평양교회가 보직이 없는 최태현 목사님을 평양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모셔가겠다고 했고 최 목사님도

승낙을 하시는 것을 보고 참 감사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이때에 평양교회 여신도 오신석 자매와 최매실 양씨가

최 목사님을 평양교회 담임으로 모셔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장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총회가 끝 난지 한 달이 되어 가는데도 최 목사님이

미처 평양으로 부임하시지를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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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4일,

합회총회가 끝난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갑자기

안식일교회 모든 중요한 지도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나

최태현 목사, 오영섭 목사, 박창욱 씨, 김상칠 씨 등

중요한 분들이 다 검거되었다. 이성의 목사는 내 대신

중선대회장 직을 맡아 일하던 중 지방순회를 나갔다 들어오자

검거되어 종로경찰서에 다섯 분이 검거되었다.

최 목사님께서 좀 일찍 평양으로 가셨으면 화를

면하시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당시의 검거가 우리 관할인 동대문경찰서가 아닌

종로경찰서에 의해서 일어난 이유와 검거된 죄명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중요한 지도자들이 함께 검거되니까

그러지 않아도 교회가 어수선해 지는데, 어쩌다 검거되신 분들의

가정에서 “누군가가 투서해서 이분들이 검거됐다.”라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잘 화합되던 분들이 서로 불신하게 되기 시작하니,

서울에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것도 부담이 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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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거되신 분들이 한 달이 지나도 안 풀려나서 교회의 일이

마비상태에 들어가자 우선 검거되신 분들의 일과 교회의 일을

진행하기 위하여 소위 합회장 대행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대행위원회 위원장에는 임종회 목사가, 위원에는 김명길 목사,

고두칠 선생, 이근팔 선생, 곽종수씨 같은 분들이 결정이 되어

교회의 제반 일들을 진행하기로 했으나,

전무(前無)한 어려움을 당한 교회의 일들을 이끌어 나가기에

매우 벅차 하는 것 같았다. 교인들은 검거되신 분들과

대행위원들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대행위원들은 검거된 분들이 풀려나도록 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고

동분서주 하였으나 검거된 분들이 오랫동안 풀려나지를 않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변호사를 택하기로 했는데

소식을 들으니 변호사 선택문제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서

아주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왜냐면 검거되신

김상칠 선생의 친척 되는 심정섭 씨는 그때 사회출입도 꽤 하시고

경제신문도 만드신 분인데 그분이 추천하신 변호사가 있고,

대행위원이 추천하는 변호사가 있어서 서로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심정섭씨 편에서 세우겠다는 변호사는 검거되신 분들의 가족들과는

좀 합심이 되지만 대행위원과는 잘 합심이 안 되어

결국은 대행 위원들이 추천한 변호사 신태학 씨가

안식일교회 고문변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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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되니 대행위원들과 검거되신 분들의 가족과는

화합이 되지 아니하고, 검거되신 분들은 풀려나지를 아니하니

점점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심지어 검거된 분들의 가족들과

대행위원은 물론 교회에서 사역하는 분들까지도 청량리에서

합회로 오가는 길에 만나게 되면 서로 피해서

길을 건너가 버릴 정도가 되는 마음 아픈 형편이 되었다.

형편이 이렇게 되니 서로 어떤 누구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일본은 전쟁에 막바지에 군수물자 조달이

힘들어 지자 우리조선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친미적인 태도를 가졌다 하여 우리교회를 더욱 탄압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변호사도 아무 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호사가 우리 검거된 분들을 돕기 보다는

일본총독정치를 따르면서 딴 궁리를 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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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경,

교회 책임자들이 검거되고 시국이 악화 되어가자

교회사역자들 중에 미리 퇴직 또는 사직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대행위원이 생긴 지 한 달 쯤 후에 위생병원 총무로 재직하시던

오치운 씨가 사직을 하자 대행위원은 나에게 경성요양병원

(현 서울위생병원) 총무자리가 비어있으니 가도록 하라는

전달이 와서 병원총무의 일을 시작했다. 병원으로 가보니

옛날 분위기는 간곳이 없고 싸늘한 기분만 감돌기에

그리스도인의 분위기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그리 쉽지가 않았다. 나는 기도를 드리면서,

“이미 징역을 살고 나온 나를 어떻게 하랴?”하는 마음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신 분들을 면회가볼까 하고

고심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청양경찰서에 있을 때는

멀어서 그랬는지 면회 오는 사람이 없어서

견디기가 힘들었었는데 여기야 가까운 곳이니

한번 면회를 해 봄이 어떨까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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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슨 일인지 오히려 종로 경찰서에서 나보고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매우 긴장이 되었지만

태연한 척하며 종로경찰서로 걸어 들어갔더니 뒷문으로

가라고 해서 들어갔다. 그런데 뒷마당 저편을 바라다보니

경찰서에서 허락을 했는지 검거된 한 두 분이 나와서

식구들과 같이 앉아 계시는데 특별히 오영섭 목사가 나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허락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오영섭 목사에게 달려가서 급하게 말을 했다.

“이번에 교회명예를 위해서 꼭 승리해 주십시오.

형무소로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무쪼록 개의치 말고

승리하십시오! 내가 청양경찰서에서 잡혀서 징역하고 나왔지만

이렇게 전과 같이 살아있지 않소?”하며 이야기를 하니

오 목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대성통곡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말을 아니 한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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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맞은 편 책상 뒤에 의자에 앉아 있던 자가 나를 불렀다.

그는 마당에 나와 있던 피의자들을 감시하던 형사였다.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요?”

“나는 경성요양병원에서 온 정동심 이라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소? 내가 바로 당신을 오라고 한 고등계에 있는 형사요!”

그 순간 “내가 또 이자들에게 걸려드는 것이 아닌가?”해서

가슴이 철렁하고 입안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형사는 내게 2심과 3 심에서도 묻지 않았던 일을 묻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 청양에서 설교할 때 마쯔오까(송강)외상이

유럽 로마에 갔던 얘기를 했소?”

“그렇습니다. 무엇이 잘 못 된 것이라도 있나요?”

“시국이 이러한데 그런 말을 무엇 때문에 한 것이오?”

“아니, 그 때 모든 신문에 외무대신 송강(마쯔오까)이

이탈리아에 있는 법왕청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로

보도 되었는데 그 일을 말한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또 그때 말한 것을 잘못 했다고 누가 증언하여

청양 경찰서에서 검거를 해서 징역까지 살고 나왔는데

왜 또 그 문제를 들추어내십니까?”

”시국이 그러하니 당신은 전과자로 앞으로 다시

또 그런 얘기하면 안 되오. 그리고 지난번에 말한 것에 대해

사실 확인하기 위해서 불렀던 것이니 이제는 집에 가도 좋소!”라고

엄포를 놓으며 집으로 가라고 했다. 싱겁기 짝이 없지만

또 걸리는 가해서 마음을 졸였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끈질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지만 할 일도 그리 없는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이렇게 사람들을 못 살게 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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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심정섭 씨가 손을 썼는지 김상칠 씨는 치료한다고

종로 4가에 있는 병원에 나와 병실구금이 되어

치료와 취조를 받는다 했다. 시국도 점점 어려워지고,

교회 내에서는 투서를 했느니 말았느니 하며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위생병원장 정사영 박사, 대행위원장 임종회 목사,

곽종수씨 등도 검거되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심지어 시조사 사장 김창집 씨와 또 박창욱씨와 함께 일하던

큰아이 태혁이까지도 체포되어 본정 경찰서로 검거되어 들어갔다.

지방에서도 황해도 사리원에서는 이명준 선생 같은 분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들어갔다.

교회가 전국적으로 어렵게 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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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생병원 총무로서, 체포되신 병원원장 정사영 박사를 위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다가

청양경찰서에 체포되었을 때의 경험이 생각이 나서,

병원직원들과 간호원들을 불러 “만일 경찰이나

형사 같은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들에게 정사영 박사에 대해서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저 모른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 집 가족들과, 친척들이 찾아 와서

“왜 정 목사는 가만있지, 여기 직원들과 간호원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냐?”고 언성을 높여서 야단을 했다.

나는 “아하, 당신네들이 몰라서 그렇지,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서

이런 일로 크게 고생을 한 사람이오.

만약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말과, 정사영 박사가

경찰에서 취조 받으며 한말이 틀리면,

정사영 박사의 입장만 곤란하게 되어 큰 고생을 할 것이며,

여기서 한 말을 교묘하게 왜곡(歪曲)하여 틀림없이

올무를 만들어 정 원장님이 크게 어려움을 당할 것이 뻔한데

그 일을 막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의 길이 아니겠느냐?”고 물으니

그제야 오해를 풀고 ”아, 그 말씀이 옳습니다!” 했다.

한번 불신의 씨가 교회 내에 뿌려지니

모든 좋은 동기까지도 오해에 오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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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주일 후에 김창집 씨와 우리 태혁이 등은

본정 경찰서로부터 풀려 나왔다. 또 임종회 씨, 정사영 박사,

곽종수 씨 등도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이 분들이 종로경찰서에 구금된 동안에 경찰서 안에서

이미 체포된 분들과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이 있었는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합회 대행 위원장으로

수고하시는 임종회 씨가 날 찾아 오셨다.

“정 목사, 우리 교회 그 그림을 좀 얻어다 갖다 주면

최태현 목사가 풀려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림이 어디 있어야지요, 걱정이오!”

“교회 그림이라니, 무슨 그림말이오?”

“아, 거 다니엘 해석한 그림, 묵시록 해석한 그림,

그거 광목 같은데다 서양서 인쇄된 것이 있지 않소?

그것만 있으면 풀려 날수도 있겠는데...그것이 없어 걱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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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불행인가, 다행인가? 내가 그 그림이 있었다.

실은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의명학교 은사이신 김봉걸 은사의

것이었는데 이분은 김선억 목사의 부친 되시는 분이다.

하도 당시에는 귀한 그림이라 나는 김봉걸 은사께

“여름방학 동안 빌려주시면 그림을 그린 후에

돌려 드리겠다.”고하니 쾌히 승낙을 하셔서 빌려 온 것이다.

그런데 방학 동안에 그림을 다 못 그리고 한참 지나서

갔다 드리려하니 김봉걸 은사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 그림을 마치 은사님의 유품(遺品)이라 생각하고

20여 년이 넘게 내 장롱 속에 잘 간수해 온 그림이다.

그런데 지금 합회장대행위원장인 임종회 씨가

“그 그림이 있으면 최 목사가 풀려날 것 같다.”하며

그림을 찾아다니다가 내게까지 오신 것이다.

이미 말 한 대로 임종회 씨는 내 큰아들 태혁이의

장인이 되시는 분이며 또 임종회 목사와 최 태현 목사는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임종회 씨가

북간도에서 최태현 목사의 인도함을 받아 교회에 잘 나오게 되고

또 그 분의 인도로 신학교도 가서 목사까지 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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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소중한 이 그림을 속한 시일 내에

돌려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기꺼이 빌려 드렸다.

붙들려 간 분들이 풀려난다면 그 그림 아니라

무엇이라 한들 드리지 않았겠는가?

이 그림을 나는 대행 위원장이신 임종회 목사에게 드렸고

임종회 목사가 아마 종로경찰서에 가져다 주셨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당시에 이 그림이 있어야만 풀려나실 것이라 확신한 임종회 목사는

그 그림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 하다가 내게까지 왔던 것이며

나도 그 말을 듣자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해온 그림을

선뜻 내 준 것이다. 임종회 목사가 아니라 누가 왔었다 해도

이 그림으로 우리의 지도자 목사님들을 구할 수 있다하면,

그 그림 아니라 무엇이라도 내어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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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그림을 가지고 있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에 그렇게 귀중하게 보관하던 그 그림을

최 목사님이 풀려나시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하여 선뜻

빌려 드린 것인데 후에 미국에 와서 교우들과 및 최 목사님의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그 그림으로 인하여 최 목사님께서 심하게

고생을 하셨다 하여 하는 말이다.

나성에서 어떤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최 목사님의 후손들과

함께 사석에서 이야기하다가 그 그림이 어떻게 경찰에 입수되었는지가

의문인 듯 하기에 나는 서슴없이 “내가 가지고 있다가

내어 준 것”이라고 사정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후에 나성 한인 안식일교우들이 사역자 문제로

의견이 갈라지고 그룹이 조성이 되면서 나에게

“왜 그 그림을 내어 주어 최 목사님이 돌아가시게 했는가?”하고

그 후손들로부터 심한 원망과 질책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시간이 아무리 흘러갔다 한들

최 목사님을 잃은 가족의 마음에서 어찌

그 슬픔이 없어지겠으며 또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것임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그 그림 때문에 더 고생을 하셨다니

그 애석한 마음과 유감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는데,

몇 십 년이 지나 작은 나성 교회 사역자 문제로 감정이 상했다고,

좋은 동기로 이루어진 그때의 일을 곡해하여 최 태현 목사님을

고생시키기 위해 그림을 일부러 경찰서에 전했다고 비난을 하더니

후에는 최목사님 죽게 하기 위하여 그림을 일부러 주었다고 하니

너무 마음이 내려 앉는듯했다. 좋은 동기도 이렇게 곡해가 되거늘

만약 그 그림을 교회 내에서 구할 수가 없었거나

또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어주지 않아서 돌아가셨다면

얼마나 한이 맺히고 원망을 들었을까? 참 마음 아픈 일이다.)


*( )안의 글은 아버님의 회고록 테이프에는 없는 말입니다.

아버님이 그 그림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왜 불행인지라고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없어서 아버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 왜 불행인지라고

말씀을 하셨는가 하고 여쭈었더니 ( )에 해당하는 답을 주셨기에

여기에 글로 옮긴 것임을 밝힙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말씀은 회고록

끝 부분에 “나성 교회”라는 곳에서 다시 언급이 됩니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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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6월 2일,

종로 경찰서에서 최태현 목사님께서 서울 위생병원으로

풀려 나오신다는 전갈이 왔다. 거의 넉 달 만에

나오시는 것인데 내가 그때 마침 병원총무로 있었음으로

최 목사님 맞을 준비를 했다. 차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니 자동차는 마당에 와있고 조금 후에

최태현 목사 사모님도 허겁지겁 달려 오셨다.

간호원들과 함께 목사님을 입원실로 옮겼으나

이미 혼수상태이신 최 목사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생각건대 경찰서에서 온갖 악독한 방법으로 고문하며

취조를 하다가 최 목사님이 혼수상태에 이르자

자기들의 야만적인 고문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혼수상태에서

위생병원(경성요양병원)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이 된다.

최 목사님을 보니 너무 고문을 많이 당해서인지 얼굴과 몸이

많이 부어올라 있어서 도저히 최태현 목사님이라고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로 누워계신

최 목사님을 보는 나는 어느 때 보다도 쓰라린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분은 나의 은사 이셨고,

나의 목회 시절에는 5, 6 년간을 극진한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고,

나의 재혼 때는 결혼식 주례까지 해 주신 어른 이셨다.

지금도 그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이곤 한다.

옆에서 모두들 목사님! 최 목사님! 하고 불러도 대답 없이

침대에 잠깐 계시다가 그날 저녁 8시경에 그만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옆에는 간호원 한 사람, 최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내가 있었다.

나는 최 목사님의 눈을 쓰다듬어 감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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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6월 2일, 저녁 8시경.

최태현 목사님은 안식일교회의 첫 번 순교하신

목사님이 되신 것이다. 이미 온 몸이 붓고 날씨도 더운

6월이라 옷을 벗기려고 목사님의 팔만 들어도 물이 주루룩

흐르는 형편이라 최 목사님 사모님께 소렴과 대렴을 함께

하자하니 사모님께서도 옆에서 보시고는 그렇게 하자하시어

간호원도 없이 나와 최 목사님 사모님, 둘이서 그냥 입었던

옷 위에 새 옷을 덧 잎혀서 병원에 시신을 잘 모셨다.

그때 이해성? 선생이 와 계시다가 “내 작숙님이 이렇게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이 있는 집을 두고 병원에 모시면

아니 된다”하셔서 시신을 집으로 모셨다가 며칠 후에

최 목사님 자택 앞에서 발인식을 하고 무사히 장례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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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목사님이 그렇게 혹독한 취조 끝에 순교 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여러모로 생각하고 배울 점이 많다.

최태현 목사님의 순교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일했던 사람으로

최 목사님의 성격과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당시에 검거된 사람들 중에 비록 새로 선출된 신임 합회장

오영섭 목사가 계시기는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가장 원로이시고

아직 교계의 지도자의 입장에 계신 분은 최 목사님이셨고

특히 종로경찰서 내에서도 피검된 모든 분들의 정신적

중심이 되는 분은 최 목사님이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일본은 고등계형사들을 통하여 안식일교회해산에 대한 서명을

강요 했겠지만 강직한 최 목사님이 거절하시고 있는 동안은

그 누구도 교회해산명령에 찬성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교단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해온 일본이나 고등계형사들이

최 목사님의 이런 영향력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급해진 형사들은 최 목사님에게 최고의 고문을 주기위한

무슨 구실이라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울러 계속 교회해산에 서명을 하는 일에 동의하도록

최고의 잔인한 고문과 협박을 최 목사님에게 중점적으로

했을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자기 생명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시는 최 목사님이 교회 해산하는 일에

응했을 리가 없고 잔인한 고문은 그 심도를 더해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라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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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러한 생각을 갖는 이유는 교회해산사건을 보면서

갖게 되었다. 최 목사님이 순교하신지 약 7개월 후인

1943년 12월 27일 밤,

최 목사님과 함께 검거 되었던 모든 분들이 일시에 풀려났는데

그분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모두 위생병원으로 모셨다.

환자를 위해서는 양식을 배급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분들이 풀려난 바로 그날 밤, 경기도 경찰부원과

종로경찰서 책임자 입회하에 회의를 하고는 모든 분들이

비통하게도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해산 선언서에

함께 서명을 하신 것이다. 즉 그간 교회 해산 서명에

끝까지 거절하신 최 목사님의 뜻을 따라 나머지 분들도

계속 거절함으로 그간 풀려나지 못하고 고생을 하다가,

고등계의 잔인함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고 또 정신적 지도자이신

최 목사님도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은 교회해산에

동의하고 풀려 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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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다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재림 교인은

너무 순진 하고도 순진 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즉 최태현 목사님이 순교 하신 다음에 고등계 형사들은

검거된 사람들에게 안식일 교회 내에 최 목사처럼

오래된 목사로서 교회내력을 알만한 분이 없느냐고

물어 본 모양이다. 그냥 “최 목사 같은 분은 더없다.”고

했으면 되겠는데 경험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김례준 목사를 지명하고는 그 분이 지금 진남포에 있다고 해서

김례준 목사는 최태현 목사님께서 세상 떠난 후에 검거되어서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 되었다. 그래서 종로 경찰서에

검거된 분은 다시 다섯 분 즉, 김례준 목사, 오영섭 목사,

박창욱 씨. 김상칠 씨, 이성의 목사로 12월 27일까지

많은 고생들을 하셨다. 교회는 합회장대행위원회가 결정한

신태학 고문 변호사의 지도아래 겨우 명목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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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있는 다섯 분이 12월 27일에

나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병원장 정사영 박사와 의논해서

이분들이 나오신 다면 곧 우리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왜냐하면 우선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또 집으로 가봐야

식량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원 직원들에게

의논을 해 보니 우선 환자를 위하여 배급 받아둔 식량이

다소 있고, 앞으로도 나는 병원 환자의 수만큼 보고하고

내가 직접 양식 배급을 받아 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사영박사도 좋은 생각이라고, 그렇게 하자 해서

병원으로 모시고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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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 27일.

다섯 분이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나서 위생병원으로 오셨다.

다섯 분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자마자 곧 손님들이

들이 닥쳤다. 경기도 경찰부에 있는 고관이라는 이들과

종로경찰서의 고위층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이 분들을 풀어 주기 전에 어떤 협박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모진 힘든 일을 당하고 나온 이분들은

쉴 틈도 없이 그날 밤으로 경무부와 종로경찰서에서 나온 사람들과

난상토의(爛商討議)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의논한 결과인지,

아니면 이미 해산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모두 풀려 날수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1943년 12월 28일부로 조선에는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포교권(布敎權)은 전부 박탈당하고

이날 이후 조선에는 안식일교회 교인은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안식일교회 교인이라는 말도

할 수가 없다는 결의가 이루어 진 것이다.

완전한 교회해산의 결정이었다. 이미 말 한대로 이러한 것이

경찰서 내에서 이미 합의가 되어서 풀려 난 것인지,

또는 이날 밤 회의에서 결정 된 것 인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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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에 교회 일을 하던 모든 사람과 교회의 모든

책임자들에게 이 교회해산문이 전해졌다. 나도 12월 28일에

이 교회해산문을 받아 드니까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이 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지 39년째요

내가 이 교회에 몸담은 지 33년째인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정말 여기서 이렇게 해도 되는가?

최 태현 목사는 고문 받으시고 세상 떠난 지가 6개월밖에

안 되는데 교회해산을 거부하고 배겨내시는 분이 없었단 말인가?

내 마음에 섭섭하기가 짝이 없었다. 당시로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렇게 교회가 어이없게 해산한다는

선언문을 받아 쥘 때는 너무도 섭섭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교회해산선언문을 지방으로 쭉 보내게 되니 교회 전체가 마치 속담에

“벌집 때려놓은 것 같다”는 것처럼 난리가 난 듯 했다.

모든 사역하던 분들은 “그 선언문 한 장에 직장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걱정 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생을 바쳐서 헌신하기로 한

하나님의 남은 교회가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뜻있는 교인들은 비밀리에 교회를 위해 기도드리기 시작을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검거된 동안 있었던 교회의 어지러웠던 일은

후일 교회 역사를 정직하게 쓰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내가 느낀 점 중 한 가지는, 검거되었던 가정들의 근심과 걱정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려울 때 일수록 더 믿음으로 서로 믿고, 붙들어 주고

도우며, 이 난관을 헤쳐 나갔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방교회나 기관의 책임자들도 꽤 많은 분들이 검거되어 짧게는

2주에서 한두 달 이상씩 험한 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키신

분들도 많이 계셨다는 것과 그 어려움 속에서도 포교하신 분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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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경찰서에 갇혔던 분들, 대행위원들, 변호사들이

교회해산에 따른 모든 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것을 본 신자들은

“마음이 너무 쓰라리다.”고 했다. 나는 병원총무로서 우리사업의

오른팔이라 하는 병원을 차지하여 보려는 인간들이 계속 내왕을

하는 것을 보려니 더욱 힘들었고 더욱 마음이 쓰라렸으며,

우리교단본부의 모든 기관들이 이리저리 처분되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중의 고통이었다.

교회의 동산이나, 부동산이 처리되기 시작했다.

부동산들은 팔고 동산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나 다 처분하여

사역하던 분들에게 퇴직금이라고 얼마씩 나누어 보냈다.

나도 그 얼마를 받았다.

당시에 지방에는 안식일교회가 가진 훌륭한 건물은 별로 없었고,

서울에 있는 시조사는 일본 기관지로 발행하는 매일 신보사에서

임대 관리하게 되었고, 경성요양병원(서울위생병원)은

총독부 결핵예방협회에서 매입하여 관리하게 된다는

마음 아픈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경성요양병원 총무로서

병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며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소문대로 총독부 결핵예방협회에서 경성요양병원을 완전히

맡게 된다고 결의가 되었고 이름도 경성요양병원에서

서광장(瑞光莊)으로 바뀌었다. 서광장의 원장 될 사람이라는 자는

보이지가 않고 총무 될 사람이라는 자가 나와서 나를 만나자 했다.

“이제 경성요양병원을 우리가 경영할 터인데 그 동안

총무로 지나던 사람으로 생각이 어떠합니까?”

“생각이 어떠냐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아, 다른 말이 아니라 다른 일하던 모든 간호원들이나

직원들을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는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고 또 당신이 총무로 오는 모양이니

나는 총무를 더 바라지도 않고 나가겠소. 허나 여기 모든

간호원들과 직원들은 취직하기도 어려을 것이오. 당신네도

이 사람들을 그대로 쓰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나갈 것인즉

그리함이 좋을 것 같소”

“아, 총무다운 말씀이오. 그러면 총무는 나가고 직원들과

간호원들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무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간호원들과 다른 모든 직원들이 취직하기 힘든 때에

이렇게 일하도록 결정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다만 “교회가 해산된 이 마당에 남아있게 된 이 분들의 신앙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염려가 매우 컸지만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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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총무의 일을 그만두면서 병원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이 났다. 내가 목회자로 일을 할 때도

항상 그렇게 생각했지만 병원도 정치와 분리해서 나간다는

원칙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각 나라에서

이 원칙을 따라 우리 교회병원이나 교회 기관이

정치의 색채 없이 순수한 종교적 입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정치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어려운 형편이 되면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병원 총무로 있는 동안에 여운형 선생이 경성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분이 원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색채가 없는

병원이기 때문에 허가가 된 것이다. 여운형 선생께서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친히 만나본 즉

풍채도 좋고 담배나 술도 안 하시고 그 행동이 단정하신 것이

목사라는 나도 그런 분과의 이야기 속에서 배울 것이 많았다.

그분도 우리 병원에 계시면서 우리 교회병원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을 갖게 되신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성이 없는 우리병원에 입원하도록 허락을 해 놓고도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여운형이라는 사람이 병실에 있는가?”

잠시만 자리를 떠도 “어디에 갔는가?” 하면서

계속 뒤에서 조사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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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 지역을 관할하는 파출소의 일본인 주임이

나를 파출소로 불러 들였다.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느 때라고 명령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파출소에 가니 놀랍게도 우리 신자가 앉아 있다가

나의 갑작스러운 나타남을 보고는 민망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때 창씨개명에 의한 나의 이름이 “구니모도”였는데

나에게 의외의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구니모도상, 당신이 결혼식을 주례한다는 보고가

들어 왔는데 몇 사람이나 주례를 했소?”

“예, 글쎄...한두 명 정도 주례를 해 준 것 같은데

그게 잘못 되었나요?”

“구니모도상! 당신이 음성도 좋고 해서 당신에게

여러 사람이 주례를 받았다는데 두 사람 뿐 이라니

그게 웬 말이오? 당신 거짓말하면 어찌 되는지 아시오?”

“정말 한두 명밖에는 생각에 없는데.......”

“좋소! 구니모도상!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앞으로 서양식이나

교회식으로 주례하면 안되오! 만약 결혼주례를 하게 되면

일본 불교식으로만 하고 남이 주례를 한다 해도

그렇게 하도록 지도하시오, 알겠소?”

일본은 안식일교회 해산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서양의 문화,

특히 기독교의 생활방식까지 말살하기로 한 것이다.

그 보다는 “아무리 시대가 험악해 졌다고 해도,

같은 교회의 교인이 목사가 결혼주례한 일까지

고자질 하는가?”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인간은 정말 믿기가

힘들고 그저 믿을 분은 우리 주님 밖에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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