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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7


(임병의 씨는 내가 추천한 김동해 씨를 불러서 일하게 했고

이 분은 운전과 구내발전소등을 책임져서 삼육신학원에서

인정받게 되었고 삼육신학원 후에 그의 자녀들도 모두

교회 내에서 신실히 일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 연재#26 끝부분)


9. 청주 합회 총회



1952년 6월,

청주에서 한국연합회총회를 하게 되었다. 해방 후 교회가

아직 자리도 잡히기 전에 육이오 사변과 일사 후퇴로 인해

교회가 당한 피해가 너무 커서 복구하기가 벅찬 때에

이렇게 청주에서 합회총회가 열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 되었다. 총회에 관한 결정 사항들은

교회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나와 관계된 한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6.25 동란과 1.4 후퇴 때에 이북에서 월남하여

이 총회에 참석을 하게 된 분도 꽤 계셨는데 김O장로나

박O 목사 같은 분들이 계셨다. 박O 목사는 나와 동갑으로

생일은 나보다 늦지만 순안 의명학교는 나보다 선배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별 허물없이 친구로 지내왔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원륜상 목사는 1946 년 3월경에

내가 원동지회부회장으로 선출된 것을 알려 주었다.

원동지회부회장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일본의 압제아래서 고생한 한국교계에

정신적인후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이 된다.

그나마 내가 중선대회장으로 서울에 있다가 남선대회장이 되어

대전으로 가면서 원 지회부회장직분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원 목사를 통해 원동지회에 사의를 표명했었다. 원 목사는

나에게 “목사님, 아무말씀 하지마시고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하기에 그대로 끌고 오다가 이번 청주총회에 남선대회장과

원동지회부회장의 직분을 가진 채로 참석을 했다. 그런데

친구로 지내던 L목사가 이 원동지회부회장직을 맡고 싶다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한국교회역사에 없던 이 분의 후원회까지 만들어 김O 장로,

나의 친구 되는 박O 목사까지도 그분의 후원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는 부작용까지 생겨났다. 문제는

원동지회부회장직은 원동지회총회나 원동지회행정위원회에서

결정해야 되는 일인데 이일을 한국연합회 총회에서 선출하자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현재 그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친구 되는 L목사가 몇 분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고 있으니

비록 내가 사의를 표명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그 자리에 있으니 그런 선거운동이 가부간에

옳다, 그르다, 라는 말도 할 처지가 못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회총회 선거위원회에서 발표하기를 원동지회부회장은

그냥 정동심이로 되었다고 발표가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원동 지회부회장의 자리를 원했던 L목사나 맹렬히 운동을 하던 분들의

섭섭해 하는 모습도 보기 민망했지만, 이 분들이 나 보기를 얼마나

어색해 하는지 그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안식일시간이 되어오는 금요일오후에 나는 L목사에게

“우리 목욕이나 하러 갑시다.”하고 청했다. 역시 친구는 친구이었다.

L목사는 목욕하러 따라 나서면서 “정 목사! 대단히 미안합니다!”라고

하기에 “미안하기는 뭐이 미안해?”하고 되물었다. “아, 내가 쓸데없는

운동을 한 것 같아 미안하오!”라고 재차 사과했다.

“L목사! 나 그런 것 괴이치 않아! 그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지

뭘 그래!”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나서 시원하게

목욕한번 하고 나니 우리는 다시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섭섭했던 일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우리 한국재림교회는 바닥이 본래 작은 곳이니

친구사이에서나, 잘 아는 동료사역자사이에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으나,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한시라도 빨리 서로

섭섭함이나 어색함을 해결하지 아니하면, 교회 내에 파가 생겨나기

마련이니, 부디 속히 해결하여 사단이 사역자 개인의 신앙은 물론이오,

우리교회의 귀중한 사업을 방해하지 말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체함 없이 이렇게 목욕 한번으로 다시 옛 친구로 돌아가 평생을

친구로 보냈고 그의 자유손이나 나의 후손들도 이런 일로 한번도

사이가 벌어진 일이 없이 서로 형제처럼 가까이 지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이 된다. 나의 자유 손들이나 L목사의 자유손도

그 점을 명심하고 계속 한 형제처럼 지내기를 바란다.

안식일이 지나고 일요일 집회에서 나는 마음먹은 대로

원동지회부회장직을 사임한다고 했다. 이 때에 원동지회에서

지회장을 비롯해서 4-5명의 원동지회부장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내가 사표를 제출하자 원동지회장 암스트롱 목사는 “그러지 말고

정 목사가 부회장의 직분을 그대로 수행하라.”고 간곡한 말로 권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만약 내 사표가 수리되면 절차의 합법성에 관계없이

다시 이번 합회총회 선거위원회에서 다른 사람을 원동지회부회장으로

선출 할 것으로 확신했었다. 이렇게 해서 L목사가 원동지회부회장

자리를 합법적으로 계승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해이며 실수였다. 암스트롱 목사는

“본인이 그렇게도 사의를 원한다면 원동지회의 책임자로

그 사표를 받겠지만 원동지회부회장직은 여기서 선출하지

못한다.”하며 더 이상 한국연합회에서 원동지회부회장 선출하는 것을

방임하지도 않고 원동지회부회장에 한국인을 두지 않을 것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합회총회에서 분수에 넘게 지회에서 다루어야 할

지회부회장선출에 관한 일을 한 것을 방임하는 것처럼 하더니 결국은

이후부터 아직까지 원동지회부회장직을 한국연합회에 더 이상

주지 않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청주총회 시에 또 한 가지 나와 관계가 있는 일은 대회분리에

관한 일이다. 나는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약 6년간 남선대회를

맡아 일 해왔다. 지역은 꽤 넓으나 교인 숫자로 보면 남선대회를

둘로 나눌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선대회를 호남과 영남,

두 지역으로 나누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문제는 선교적인

필요보다는 육이오전쟁으로 인해서 북선대회가 문을 닫게 되면서

남아도는 인적자원이 가져온 하나의 부작용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 문제도 몇 명이 힘을 합하여 벌리는 운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 문제에도 내가 관련된

것이기에 아무런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영남대회는 그냥 정동심 목사를 두고 호남대회를 새로 시작해서

어떤 분들을 선출한다는 계획이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나는 이시화 목사에게 “호남대회장은 누구로 할 생각이냐?” 물으니

“새로운 사람을 찾아 안수를 주어 대회장을 하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해서 남선대회를 둘로 나누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받아들이되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새로운 분에게

안수를 주어 호남대회를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었다. 결국 남선대회를

둘로 나누어 영남대회는 내가 계속 맡고 호남대회는 허만식 씨에게

목사 안수를 주어 호남대회장으로 삼았다. 남선대회를 둘로 나누니까

지역이 작아져서 일하기는 매우 쉬워졌다.

청주 합회총회 후,

1952년 하반기에 대전 삼성국민학교를 빌려 전도회를 했다.

신종균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서 2주일동안 해 보았는데

대전은 워낙 유교적성향이 많고 기독교에는 너무도 관심이 없는

지방이어서 큰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개종한 사람들 중에서는

침례교회에서 집사 일을 하던 젊고 얌전한 분이 개종하여 후에

유력한 장로가 되었다.

10. 삼육 신학원으로

1952년 합회총회가 있기 전부터 삼육신학원 원장이던

이제명 목사(JAMES LEE)가 계속해서 나를 삼육신학원으로

오라고 연락을 해왔다. 합회총회 후에 대전으로 돌아와

전도회를 하는 중에도 또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너무 사양함도 바른 길이 아니라 생각이 되어

1953년에 가도록 하겠다고 허락을 했고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막상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나니, 1947년에 와서 1953년까지

만 6년을 재직한 남선대회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남선 대회는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 충청남도

이렇게 5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다.

해방 후의 힘든 상황아래서, 또 민족의 가장 아픈 6.25전쟁을

치루면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히 감사했다.

또 해방 후 만 2년이 지나도록 교회로 돌아올 생각을 못하던 분들과

허심탄회하게 의논하여, 이응준 씨, 권숙련 씨, 허만식 씨, 박찬문 씨,

신종균씨 등이 다시 나와서 전부 목사가 되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남한5도를 위해 일하는 동안, 요즘 말하는,

소위 지방색이 없이 지낼 수 있었음을 감사드린다.

내가 남선대회로 와서 제일 먼저 방문한 지역이 전라북도

금산 지역이었다. 내 일생 처음 방문하는 남쪽지방이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가 높은 곳에 이르러 동네 이름을 물으니

“하(下)소리”라고 했다. 한참을 내려가 평지에 도달하여 다시

그 동네 이름을 물으니“상(上)소리”라고 했다. 지형으로 보면

높은 지역이 의당 “상소리”일 것이고 낮은 곳이 “하소리”일 것인데,

하도 이상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평지 좋은 땅에서 양반이

살았음으로 지형이 낮아도 “상소리”가 되었고 지대가 높은 지역에는

상민이 살았기에 지형이 높아도 “하소리”가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인데도 유교사상이 잘못 전해져서

양반, 상놈에 동서남북이 서로 갈라져서 남쪽지방 사람이니 북쪽지방

사람이니 해서 늘 잘 화합하지 못하는 백성이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전에 천도교에서 발간하는 조선지의라는 책을 사다

보았는데 어떤 암행어사가 조선 땅을 다니면서 조사하여

임금에게 바친 글에 8도 사람은 너무도 달라 서로 화합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가 6년간

남쪽 5도의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지방색의 어려움이 없이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믿음과 한 소망과

사랑 가운데 지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북쪽이 고향인 나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분들이 아껴주시고 사랑으로 도와

주셨음을 감사 드렸다. 내가 지금까지 사역 하는 중에

제일 오래 지낸 곳이 바로 이 남선대회인 것 같다. 남선대회는

영남대회로 이름하고 경상북도 대구로 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1953년 4월 경,

남선대회를 떠나기 전에 대전근방 교우들을 방문하기로 하고

나는 내 아내와 이곳저곳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거센 총소리가 나더니 그 총알이 내 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원두막 옆에 젊은 군인 두세 명이

총을 가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전쟁 후라 군인들에게는

질서고 뭐고 없었다. 아마 우리 부부를 젊은 남녀가 지나간다고

생각하고 장난삼아 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이 아슬아슬한 일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나의 후임으로는 나와 함께

일하고 있던 신종균 목사가 취임하게 되어 감사했다.

1953년 8월 중순경,

삼육신학원이 있는 삼육동으로 전근했다. 매우 오랜만에 다시

교육기관으로 왔다. 이때도 김용길 씨가 트럭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 이삿짐을 싣고서 삼육동으로 갔다. 삼육동의 모든 제직들이

따뜻하게 반기어 주어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나를 오라고 청한 이제명 목사는 이미 필리핀으로 전근을 가셨다 한다.

매우 당황했다. 이제명 원장이 나를 부를 때에 내가 맡을 직책이

무엇인지를 묻지도 않고 왔는데 나를 청한 분은 이미 필리핀으로

가버렸으니 공중에 떠있게 된 나는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내 나이 57세였는데 평생 이렇게 어리석음을 느낀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을 맡기든지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드렸다. 나와 같은 고향 친구인 박원실 목사도 열심히

일하고 계셨고 내가 대전에서 올려 보낸 김동해 씨도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 삼육신학원 원장의

책임을 맡으라는 결정이 났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으나

이제명 목사는 이미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를 불러들였고 다만

내가 도착하기 전에 결정이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때는

정말 내가 역량이 부족하여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라는 생각에

가슴만 답답했다. 그야말로 호미난방(虎尾難放-호랑이의 꼬리를

붙잡고 있음)의 느낌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의 직분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기도를 해 본적도 별로 없었다. 내가 왜 삼육

신학원으로 왔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박원실 목사 같은

고향 친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삼육신학원은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않은 교육기관이었다.

해방 후에 한국에 다시 나온 선교사들 중 몇 분들은 “자라보고

놀란 자가 솥뚜껑만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일본인 당시에

정부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대한민국이

독립이 되었는데도 정부로부터 학교인가 맡는 것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특별히 한국연합회장 이시화 목사는

“우리가 교육기관은 설립하되 정부당국의 인가는 절대로

받지 말자!”는 주장을 강력하게 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삼육신학원도 정부의 인가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삼육신학원이 인가가 있어야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도

안심을 할 것이며 또 대한민국이 독립국가가 되었으니

정부의 인가 없는 학교들은 곧 정리가 될 것이 자명한 터라

인가신청을 하자고 했으나 선교사들의 강력한 반대로 시작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급변하는 한국의 모든 사정을 보면서

“틀림없이 어느 날, 인가가 없는 학교들은 폐쇄하라는 불똥이

떨어질 터인데,”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내가 삼육신학원장의 직을 맡은

그 다음해인 1954년에 이시화 목사가 대총회에 참석하면서

나에게 합회장 서리를 하도록 결정하고 떠났다.

선교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때 삼육신학원 인가를 맡지 않으면

큰 어려움이 올 것 이라는 생각에 학교인가를 위해 서둘렀다.

이때 교육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여식 목사를 사무실로 불렀다.

“이 목사, 삼육신학원은 한국안식일교회의 최고 교육기관인데

인가가 없다니 될 말이요?”

“정 목사님, 그래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이번에 인가를 한번 얻도록 해 보십시다.”

“글쎄요, 합회장도 없는데 이런 중대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까지 이렇게 말하니 나도 조금 흔들렸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인가를 받아야 우리 청년들을 계속

교육시킬 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되었다.

“이 목사, 지금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 합회장 서리에 삼육신학원장 자리에 있소.

지금이 절호의 기호이니 한번 인가를 받도록 용기를 내 봅시다.”

내가 비록 이렇게 강하게 말은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교회규칙대로 하면 도무지 사리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중대한 일은 학교직원회와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를 통해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가 주저하는 것도 당여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멀리 내다보기로 하고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를 다시 설득했다.

“이 목사,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소, 그러니 이 목사도 교육부장으로

장래를 내다보고 나와 협력하여 인가를 받도록 합시다.

삼육신학원의 장래가 우리에게 달렸소.”

거듭 설득을 하자 이여식 목사도 동의를 했다.

이 분의 동의야 말로 정말로 고맙고 유쾌했다.

그때의 쾌감은 말로 형용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여식 목사에게 “우선 다른 교파에서 경영하는

신학대학들의 학칙을 참조하여 좋은 점들을 추려서

교칙을 만들어 보십시오!” 했더니 전적으로 동감이라 하시었다.

이 때부터 이여식 목사의 활동은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급속도로 추진 하셨다. 이시화 목사가 돌아오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데 의견이 서로 합하고 나자 그야말로

“순풍(順風)에 돛단배”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이 되었다.

이여식목사와 함께, 이미 인가를 받은 다른 신학대학과

일반대학들의 학칙을 수집하여 좋은 점들을 따서 급하게

학칙을 만들어 인가신청을 했다. 일정시대와는 달리

그리 까다롭지 않다 하지만 보통 몇 번씩 수정하여 다시

제출하게 한다는데 그런 일 한번도 없이 정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교육 부장

이여식 목사의 열정과 수고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가는 허락이 되었는데 당국에서

인가서를 내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시화 목사가 오기 전에

인가서를 찾아놓아야 되는데 해당부서에서는 뒷돈을 바라는지

허가된 인가서를 내주지를 않으니 속이 탔다. 이시화 목사가

돌아와 인가를 취소한다고 한마디만 하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와 의논을 하니 뒷돈을 줄만큼

여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코”가 필요 하다는 쪽으로

우리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마침 셜(설인호)선생이라는,

키가 대단히 크신 분이 선교사로 나왔으나 한국어를 배우느라고

아직 직분이 없이 계시던 분이 계셨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삼육신학원 인가서를 찾아와야 할 터인데 같이 가자”고

부탁을 하니 아무 내용을 모르는 이 분은 쾌히 승낙을 했다.

문교부에서도 서양선교사가 같이 가니까 두말없이 인가서를

내 주는 것이 아닌가? 당시 한국의사정이 이러했다.

이시화 목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나는 잡고 있던

범의 꼬리를 절반은 놓게 된 기분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서는 인가가 없는 학교들은 폐쇄(閉鎖)한다는

법령이 생기고 점차적으로 무인가 교육기관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1961년에 삼육신학원이 4년제 삼육 대학으로 인가가 승격되고

1966년에는 삼육종합대학의 인가를 받았다. 나는 인가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나름대로 의문이 풀리고 내가 삼육동으로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언제든지

사람을 불러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일하게 될 부서도 모른 채 삼육동에 온 나에게 원장의 과분한 직책이

주어져 어리둥절했는데, 갑자기 교회전반의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합회장 서리의 권한이 주어져서 이여식 목사와 마음이 통하여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적중하게 인가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니

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확신이 생겼고 내가 삼육동에 멋모르고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부임한지 일년 남짓 지나자 이제명 목사의 동생 되는 다니엘 리

(이단열)가 삼육신학원 원장으로 결정이 되어 미국에서 나왔다.

사실 교회기관에서, 대학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중대한 일을 맡겼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도 감사했다.

다니엘 리 선생이 삼육신학원장이 되면서 나는 드디어 호랑이의

꼬리를 완전히 놓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교회 일을 시작할 때에 무슨 일이든지 교회가 맡기는 일은

순종하겠다고 결심을 했었지만 신학원 원장을 그만두자

나이 60이 되어가는 나에게 같은 교내에 있는 삼육고등학교

교장으로 가라고 하니 참 난처했다. 그러나 삼육신학원장은 물론,

고등학교 교장이 될 자격도 없지만 나는 처음 결심을 생각하며

사양치 못하고 한국 삼육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삼육 고등학교도 정부의 인가가 없는 상태이었다.

마침 나에게 몇 촌 조카사위가 되는 김영도 선생이

교감으로 있었는데 공부도 많이 했고 교장 될 자격도

충분히 갖춘 인재였다. 나는 삼육고등학교 제반 일들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고 김영도 교감은 모든 일을 성실히 해주어

한 일년간 나는 무사히, 큰 어려움 없이 일을 했다.

이단열 선생은 한국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데다가 너무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이유 없이 아랫사람들에게

까다롭게 임해서 가끔 충돌이 있었다. 일년쯤 지나자

나에게 고등학교 교장을 그만 두고 삼육신학원 남자기숙사의

사감을 하라고 했다. 내 직분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되어 그런지

내가 사감직을 맡을 때는 모든 직원이 내게 미안해했다.

삼육신학원에서 졸업생 한 번 배출하고, 이제 삼육 고등학교에서도

졸업생을 단 한번 배출해 내자 삼육신학원 남자기숙사

사감 직을 맡게 된 것이다. 내가 원장 직에 있을 때에 살펴보니

특별히 남학생들의 사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나이 60이 되어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그 어려운 사감 직을 맡는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교회가 나에게 맡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맡기로 했다.

그런데 사감 직을 맡고 나니 성경과 한문도 함께 가르치라고 했다.

정말 힘에 겨웠다. 나의 힘든 상황을 아는 친구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목회로 나오면 아무 교회라도 맡겨 주겠다고 성화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교사들에게 끼치게 될 영향과

오해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기쁨으로 일하기로 했다.

앞으로 우리교회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기로

결심을 굳히자 내 마음도 안정이 되고 기쁘게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내어 삼육신학원에 공부하는 청년 남녀들을 만나서

내 생각을 얘기도 하고 지도하면서 많은 보람을 갖게 되었다.

그때 삼육신학원 여기숙사는 얌전한 문병난 씨가 사감으로 있었는데,

문 여사감과는 서로 오래 알고 지나온 터라 남녀기숙사의 그 많고

어려운 문제를 서로 의논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내가 사감을 하면서 있었던 일 중에 한 가지는 생활 습관에

관한 일이다. 당시에 기숙사 방이나 예배실은 온돌이나 마루여서

들어 갈 때는 모두 신을 벗어야 했다. 각 방도 그랬지만 특별히

예배 실 앞에 전 기숙사생이 각자 마음대로 벗어놓은 신발 모양은

가관(可觀)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는 서로 신발을 찾아

신으려고 난리였다. 작은 일이지만 지금 정돈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방에 들어갈 때나

예배 실에 들어올 때에 보기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나갈 때는 편하고

쉽게 신을 수 있도록 신을 똑바로 놓으라고 지시를 했다.

각 방에는 방장이 책임을 지고 시행하라 했다. 처음엔 학생들이

대단히 거북해 했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를 했더니 점차 습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발 바로 놓기 문제는 여자 기숙사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남자기숙사에서 신발 정돈을 한다 하니 여기숙사도

따라서 신발 바로 놓기 습관이 시작이 되었다. 재미있는 일은

처음에 남학생들이 괴로워하였으나 여기숙사도 그렇게 한다니까

별 불평이 없이 곧 시정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4-5명이

같이 있는 방에서 신을 가지런히 놓으니까 얼마나 모양이

좋은지 몰랐다. 이 습관은 내가 사감을 그만 둔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된다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다니엘리 선생에게도 전해졌던 모양이다.

원장으로 가끔 기숙사를 돌아보곤 하신 모양인데 한 번은

다니엘리 선생이 나에게 와서 “정 목사! 학생들에게 신발 놓는

교육을 시켰다 하던데 어째서 O호실은 신발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것이요? 이렇게 교육을 시켜도 되는 것입니까?”하며

따져 묻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교육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세말로 트집이 완연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원장선생! 내가 아무리 지도를 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을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은 아니지 않소? 아무리 공부를

잘 시킨다 해도 다 100점을 맞는 것은 아니지 않소?

만약 당신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방의 학생들을 당신도

나와 함께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원장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오?”라고 이야기를 하니 “미안합니다.”하고 돌아갔다.

내가 본래 교회 일을 시작할 때에 마음에 작정한 것은

“어떤 일이 있든지 우리 교역자들끼리 다투는 일은

피하자”라고 했었기 때문에 비록 다니엘리 선생과 의견이

여러모로 달랐지만 다투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종

다니엘리 선생이 민족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 할 때는 좀 힘이 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에 재림교회 청년이

군대에 가면 안식일문제와 집총문제로 매우 고생을 당하거나

수감되는 일까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애국심을 가지라 하면서도

군대에 가지 않게 되면 잘된 일이라고 칭찬하는 모순(矛盾)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나오는 징집영장이 학교로

배달이 되곤 했는데 원장은 나에게 “이제부터는 사감이

책임을 지고 영장 받은 학생들을 데리고 소집 장소에 가서

심사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군대문제를 나이가 많은 나보고

함께 가서 해결을 하라니 참 암담했다. 그러나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소집된 학생들과 함께 가는 책임교사가 심사관에게

이야기를 잘하면 징집을 연기해 주거나 심지어는 가끔 면제도

해 주었다. 그러니 당시에는 청년을 데리고 갔다가 군대에

안나가게 해서 학교로 다시 데리고 오면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학부모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못된 폐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삼육신학원 원장으로 있을 때에, 그전처럼 구호물자가

나오면 인근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또 가까이 있는

이 징집심사관들에게도 구호물자들을 분배하여 쓰게 하였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구호물자를 나누어 준 것도 아닌데,

이 구호물자를 나누어주고 나서는 심사관들이 삼육신학원

학생들이 징집되어오면 학업을 마치고 군대에 가도록 여러 번

편리를 보아주고 있었다. 특히 내가 사감이 되어 징집된 학생들을

데리고 가면, 내가 구호물자를 분배해서 쓰게 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찌 알고는 여러 번 징집 연기의 편리를 보아주었다.

물론 징집연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학업을 중도에 그만 두고

군대에 나간 청년도 많았다. 좌우간 징집영장이 나오면 소집 장소로

가기 전에 함께 모여 기도드리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가서

떠내 보내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나도 잘 아는 우리교회기관에서 중책을 맡아

일하는 분의 자제에게 징집영장이 나왔다. 그런데 징집일에 모여서

기도드리는 중간에 이 청년이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얼마나 군대가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으면 그렇게 하였겠는가마는 그동안 소집 일에

당사자가 없어진 일은 없었으니 신학원의 신용문제가 걸린

참 난감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원장 되는 다니엘리 선생에게

이 문제를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나보고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왜 그 학생을

뒤로 빼 돌렸느냐?”고 터무니없는 구실을 만들어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청년들이 애국심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내가 그 청년을 빼 돌릴 이유도 없거니와

자기가 스스로 가버린 것을 그래도 원장인 당신에게 보고를

아니할 수가 없어서 한 것인데 이게 웬 터무니없는 비난이냐?”고

강하게 항의하자 “정 목사, 미안합니다.”라고 해서 충돌을 피할 수가

있었다. 나의 나이 60세였고 원장의 나이 36세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우리교회의 청년들이 군대에 가도

집총문제나 안식일문제로 고생하는 일이 없고 군대에 다녀오면

여러 가지 특전이 있으니 자원해서 군대에 가는 청년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군대에 가서 종교적인 문제로 감옥까지

가야하는 우리 청년들의 입장을 알 리가 없는 다니엘 리 선생은

현지 사정을 모른 채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군대 가기를 꺼려하는

우리 교회 청년들을 비하(卑下)하는 것 같아서 충돌이 생긴 것이었다.

이일 후에도 이런 우월감과 문화적 차이로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감으로 있는 박원실 목사에게 종종

“삼육신학원에 서양학생들은 한 명도 없고 전부 한국학생뿐인데

모든 일을 우리의 사정이나 형편을 모르는 서양 사람에게만 맡겨두고

잘 해 나가겠지 하지 말고, 당신은 비록 학감이지만 실지로

삼육신학원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충고하곤 했다.

이단열 원장과는 한 캠퍼스 안에 살면서도 별로 동행할 기회가 없었는데

하루는 이단열 원장과 그 분의 차로 서울을 다녀오다가 경기도청 앞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차를 좀 세우라 하고는 먼저 내려서

다니엘리 선생에게 말을 했다.

“이 선생, 여기가 경기도 도청이고 우리 삼육신학원은 경기도에

속해 있는 몇 개 안되는 대학교육기관이니 오늘 여기를 지나가는 김에

경기도지사를 한 번 만나보고 갑시다.”

“도지사를 만나면 무엇 합니까? 나는 만나볼 생각이 없습니다.

정 목사, 차에 타시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선생, 한번만 들어가 만나 봅시다. 한번 만나보고 다음부터

만나던지 말든지 생각해 봅시다.”

그래도 안 만나겠다고 계속 우기다가 내가 차에 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듯 도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도지사가 이익흥 씨였는지 아니면 이기이라고 하는 평안도

사람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사람이 큼직하고

너그러워 보였다. 내가 다니엘리 선생을 데리고 들어가

소개를 하니 이 도지사는 “서양 사람이 이렇게 오셨냐?”고 하면서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좋은 차(茶)를 만들어 대접을 하면서

계속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사진사를 불러 다니엘리를

가운데 세우고 사진까지 찍으며 융숭한 대접을 하자 다니엘리도

처음 들어갈 때와는 완전히 표정이 달라 보였다.

학교로 돌아오면서 다니엘리에게 오늘 도지사 방문한 감상이

어떠냐고 물으니 “괜찮아요”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요! 가 뭡니까? 이제는 우리나라도 독립하고 이만큼

발전했는데 우리나라 선교사로 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 지방의

수장(首將)이나 나아가서 대통령이라도 방문하여 학교에 관한 일이나

우리 선교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물었더니 “정 목사의 말이 옳습니다. 다음부터는 방문을 잘 하겠다”고

시원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해부족과 문화의 차이로 의견이 상반되는 적도 있었으나,

이런 솔직하고 시원한 면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능한대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다. 나는 우리교회에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까다로운 선교사 두 어분 중 한분이

이단열 원장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까다롭다고 생각한 분들도

모두 지식과 뛰어난 행정력을 가졌던 분들인데 “본방인(本邦人)들과

협력하는 일에 서로 좀더 각근(恪勤)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 또한 새로 맞이하는 선교사들에게 우리의 풍습과 문화와 예의를

거부감 없이 잘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우리 사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자녀가 많았기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사감직도 감사함으로 맡았다. 삼육신학원 학생 중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지만 어떤 부부는 인근에 방을 얻고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몇 가정 있었다. 나는 비록 기숙사 사감이지만

자취를 하는, 가정을 이룬 학생들도 종종 방문하여 지도하고 위로하고

또 살림의 지혜를 나누거나 너무 어려운 학생들은 가끔 힘 되는 대로

돕기도 했다. 비록 재정문제로 기숙사에 들어와 살지는 못했지만

사감이 자기들도 방문을 해 준다고 매우 기뻐하고 감사해 했다.

한국은 11월이면 김장준비를 한다. 겨울을 위해서 꼭 치러야 하는

고생되는 일이다. 하루는 자취하는 어떤 학생의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때에 그 학생은 김장독을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지라 바로 처마 밑에 땅을 파고 있었다.

비가 오거나 또는 지붕에 있던 눈이 녹으면 김장독에 물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김장을 꺼내는 여자는 처마에서 내리는 물로

고생을 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다른 곳에 김장을 묻으라고 말을

해 주고는 “김장할 무 배추는 어디 있는가?” 하고 물으니

어색해 하면서 말이 없었다. 그 학생의 사정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학교 회계실에 가서

내 이름을 대고 돈을 좀 달라고 해서 김장철을 놓치지 말고

김장을 담그라.”해서 그리 되었다. 아무 일도 아니지만 이 청년은

아직도 그때 일을 이야기 하면서 감사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한다.

또 그때에 나에게 한문을 배웠던 옛 학생을 만나면 내가 한문 시간에

내었던 문제를 아직도 이야기하며 서로 웃곤 한다. 나는 칠판에

人人人人人人 즉 사람 인(人)자 여섯 개를 써 놓고 말을 만들라 했다.

학생들이 상당히 힘들어하기에 나는“사람(人)이 사람(人)이면

다 사람(人)이냐? 사람(人)이 사람(人)다와야 사람(人)이지!”라고

풀이를 해주고 “당신들이 앞으로 목사나 선생으로 나간다면

책상 앞에 목사(牧師)라는 여섯 글자나 선생(先生)이라는 글자

여섯을 써놓고 매일 반성하며 생활을 하라!”고 했다.

그 때 같이 공부하던 이들이 다 훌륭한 주의 종이 되어 일선에서

수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 생애에 큰 기쁨이 되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8


(그 때 같이 공부하던 이들이 다 훌륭한 주의 종이 되어 일선에서

수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 생애에 큰 기쁨이 되었다. #27 끝부분)

 

11. 중한 대회장과 영남 대회장-제 1 부


1953년 8월에 삼육동에 왔으니 거의 만 3년 되는 1956년 7월에

합회총회가 열렸다. 총회 때에는 대회장들을 선출하는데 이때

중한대회장은 대회장으로 계신지가 일년이 채 아니 되신 분으로

나와 매우 친한 분이셨다. 중한대회장으로 계시던 김명길 목사가

개인사정으로 1955년에 대회장직을 그만두자 합회평의원회에서는

잔여기간을 위해 이 분을 중한 대회장으로 선출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그대로 유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를 했었다. 과연 예상한대로 총회

선거위원장은 “중한대회장에 현 대회장님이 유임되었다.”고

발표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총회대표들이 이 안을

거부하고 다시 선거위원회로 되돌려버렸다. 총회선거위원회는

다시 회의를 하여 결정한 것을 발표 하는데 나를 중한대회장으로

한다고 발표를 하자 총회대표들이 이 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나는 친구로서 참 난처했지만 피할 수도 없는 사정이었다.

한국내 안식일교회가 워낙 바닥이 좁은지라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하였다. 합회총회의 뜻하지 않은 결정으로 중한대회장이

되긴 했지만 일년 만에 물러나신 친구 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총회 끝날 무렵에 이렇게 결정이 되어 이 분에 대한

보직도 결정 못하여 결국 대회장을 하시던 분이 내 지도아래서

보직도 없이 계셔야 했다.

 

생각다 못해 중한대회 평의원회의 결의를 거쳐 이 분을

OO교회로 모시기로 했다. 나는 한 3년 동안 교육계에서만

묻혀 있다가 나와서 그 동안 목회 방면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번에는 OO교회에서도

대회의 결정에 반대를 하고 나왔다. 참으로 난감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직접 OO교회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면서 ”대회장을 하시던 분을 교회가 담임목사로

맞는다면 교회의 체면이나 대회장 하시던 분의 체면에도

얼마나 좋겠는가?”하고 설득하여 결국 의견에 일치를 보게 되었다.

전임대회장 하시던 목사님도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일하시고

교우들도 목사님을 도와 일을 잘하여 좋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무리 교회일이라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디에나 어려운 문제는 있었다. 그런데

그때 중한대회에 내가 있을만한 집이 없어서 집을 찾고 있는데

이단열 원장은 나를 불러 “왜 아직도 이사를 나가지 않는가?”라고

추궁하기에 “이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줄 아는가? 내가 이사할 만하면

지체 없이 할 터이니 재촉하지 말라”고 하며 다시 한번 의견에

충돌을 보았다. 이 당시 중한대회구역은 충청남북도와 경기도와

서울지역이었다. 이전에도 중선대회에서 일해 보았고 해방 후에도

합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지방들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별로 낯설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대회 사무실로 경기도 남쪽에 있는 오래되고 건실한

우리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실한 교인으로, 장로와 교회 직원으로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 오시던 분인데 그냥 지나가다 들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 온 것이 틀림이 없는데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자꾸 지체하셨다. 그 교회에는 나와 거의 동년배로 그동안 교회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친 유능하신 분이 사역자로 시무하고 겠셨다.

한참 만에 이 장로님이 말문을 여셨다.

“대회장님. 우리 교회에 좋은 사역자를 보내 주셔셔 감사 합니다.”

“아 그야 내가 한일이 아니라 대회 총회와 대회 행정위원회에서

결정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 분이 오셔서 열심히 하시고 또 교인들도 사정이 전보다 좋아져서

십일조가 많이 늘었습니다.“

“아, 듣던 중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장로님.”

“그런데 우리 사역자님께서 얼마 전에 그 많아진 십일조를 대회로

보내지 말고 교회에서 쓰자고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는 교회 행정상 원칙으로 볼 때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 제안을 철회해 주실 것을 간청했으나 고집을 부리십니다.

교회 직원회에서 그분의 뜻에 동참하는 분과 원칙을 내세우는 분들과

완전히 둘로 나뉘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사역자와 다툴 수도 없고 교인들이 알면 교회가 둘로 나뉠 것 같아

걱정이 되어 대회에서 속히 해결해 달라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 분을 일단 보내놓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묘안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경험이 없는 젊은 사역자라면 꾸중이라도 할 일이지만 나와 거의 동년배로

교회의 모든 요직을 거쳐 간 경험이 많은 분이니 참 난처하기 말할 수

없는 일이 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회에서 회의를 열어 그 사역자를

문책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시간을 끌면 교회가 정말 둘로 나누일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하나님께 다시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린 후 다음날 몇 시간을 내서 그 사역자를 찾아갔다.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우리가 가진 시간

중에서는 안식일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십일조의 축복임을 설명하고 그 분이 말씀한

십일조에 대한 그 제안의 부당함을 설명했더니 역시 경험이 많으신

사역자이신지라 곧 그 사항의 중대함을 깨달으시고는 내가 생각이

짧았노라고 하시면서 곧 시정하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곧 다시 옛날의 우정을 되 살릴 수가 있었다.

역시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안식일과 십일조만은 우리가 하나남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옛날에도 가지고 있고 지금도 동일하다. 교인으로서,

그리고 교회나 사역자로서, 또는 대회나 대회장이라 할지라도 십일조

문제에 있어서 결코 시험 받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대회장이 된지 약 일년 반 뒤인 1957년 말, 합회총회가 다시

열렸는데 이번에는 나에게 문제가 닥쳐왔다.

합회총회 하는 중에 총회 선거위원 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정 목사, 지금 총회선거위원회를 하는 중인데 누가 정 목사에게

비리가 있다고 하여 사실여부를 알고 싶어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이나 해 보시오. 전혀 감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예, 정 목사가 중한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회와 의논도 없이

대회자금으로 정 목사가 거할 사택을 지었다 하니 사실인지요?

사실이라면 중한대회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아무리 일을 잘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대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사람입니까?

이문동에 우리교단의 사택들을 지을 때에 대회평의원 중에서

우리대회도 이번에 사택을 하나 준비하자하여 회의를 해서

지은 것이니 대회평의원회 의사록을 가서 조사해 보십시오.”

그러자 이 분은 대회평의원회 의사록을 점검한 결과 모든 일이

대회평의원회의 의결을 통하여 진행된 것이지, 대회장 마음대로

한일이 없음을 알아내고 나에게 다시 찾아 왔다.

“정 목사! 대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한 일이 없음은 밝혀졌습니다.”

“내가 그런 짓을 아니 한다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압니다. 그래도 중한 대회를 떠나심이 좋을 듯 합니다.”

“떠나야 된다면 떠나겠지만 이번에는 또 무슨 이유이랍니까?”

“다름 아니라 정 목사가 대회장으로 공평하게 한다면서

구제품을 합회본부교회인 회기동교회에 많이 주지 않는다하여

회기동교회 도르가회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실 입니까?”

나는 곧 “나를 대회에서 내 보내기 위해 누군가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사실입니다. 나는 대회장 때나 삼육동에서 미국구호품을 우리만

쓸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이웃과 나누어 쓰도록 해 왔습니다.

지난번에는 대회의 돈을 의논도 하지 아니하고 불공평하게 사용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공평하게 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분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선거위원회에서

나를 영남대회장으로 선출했다고 발표가 되었다.

나는 교회 일을 시작할 때부터 가능하면 윗분들과 다투지 말자하는

생각과, 교회조직에서 나보고 어디든지 가라는 대로 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다시 영남대회로 가라고 할 때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남대회로 이사하는 것은 58년 2월쯤 하기로 하고 나는

총회결정대로 1958년 1월부터 일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영남대회는 신종균목사가 대회장이었는데 이번총회에서

호남대회로 가게 되었는데 아직 대구에 계셨다. 그런데

신 목사는 열정도 있지만 성격이 좀 급하였다. 내가 도착하자

신 목사님 말씀이 “총회 때에 영남대회회계 이재찬 씨는 호남대회로,

호남대회회계 노승익 씨는 영남대회로 보내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두 대회의 회계는 그냥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고 의견을

내어놓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은데 합회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니

우선 합회에 알아보자”라고 했다. 그래서 합회에 연락을 하니

“회계 당사자들만 허락하면 그렇게 해도 좋다.”라고 답이 왔다.

그래서 노승익 씨에게 편지를 해 보니까 노승익 씨는 회답하기를

“저는 영남대회로 가겠습니다.”라고 답이 오더니 신 목사가

호남으로 떠나기도 전에 대구로 왔다. 노승익 씨는 대구로 와서

곧 모든 서류를 다 챙겨보더니 하루는 나를 회계실로 들어오라 했다.

“목사님, 서류를 다 살펴보니 영남대회에 부채가 좀 있네요,

어떻게 하지요?”

“글쎄, 부채가 있다면 차차 정리 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소?”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신종균 목사가 문 밖에서 이 대화를

어떻게 들었는지 갑자기 회계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지금 무슨 말씀들을 했소?”라고 성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 신 목사, 왜 그러시오?”

“아니 나, 신종균이란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들 그러십니까?”

노승익 씨는 얌전한 사람으로 말을 별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을 했다. “신 목사! 왜 그러시오?

우리가 뭐 잘못 말한 것이라도 있소? 회계가 새로 와서

서류를 살펴보고 영남대회에 부채가 있으니 대회장인 내게

부채가 있다고 보고한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일이오?

노승익 씨가 임자를 비판한 것도 아니고 신 목사가

물어내야 한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을

잘못한 것이오?”하고 내가 이야기를 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미안 합니다.”하고 수그러들고 곧 사과를 했다.

성격이 조금 급하시지만 잘못되었다고 생각 될 때는 시원하게

사과를 하시는 성격이셨다. 그래서 직책이 교체될 때는 이렇게

작은 일에도 의견 충돌이 있기가 쉬웠지만 큰일 없이 신종균 목사는

이재찬 씨와 호남대회로 가고 나는 노승익 목사와 같이

영남대회 일을 보게 되었다. 영남대회를 떠나시기 직전

신종균 목사는 고맙게도 영남대회 형편에 대해 몇 가지

참고할만한 일들을 솔직하게 말씀 해 주셨다.


많은 교회가 새로운 목사나 전도사가 부임하면

전임자들과 비교를 하거나 또는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지가 않으면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에 치중하거나 또는 방문하는 일에

치중하게 된다. 웬만큼 경험을 쌓은 목회자가 아니고는

두 가지 다 완전하게 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가 힘이 든다.

그 중 한 가지가 경상북도 상주에서 일하고 있는

고문경 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 목사의 말씀이

고문경 씨가 그 지역 전도사로 있으면서 설교준비를 한다고

별로 방문을 하지 않고 있으니 사역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셨다.

전임자가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떠나면 후임자는

그런 사정들을 알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신 목사님은 이런 사정 몇 가지를 소상히 말씀해 주고

떠나신 것이 매우 감사했다.

 

그래서 1958년 2월경, 우리가족이 영남대회 본부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로 이사를 끝내자 나는 첫 지방출장으로

고문경 형제가 전도사로 있는 상주로 가서 반갑게 만났다.

“고 전도사, 상주로 부임해 온 후에 설교 준비하느라

별로 심방을 하지 못하고 집에 주로 있다고 하는 소문인데

그것이 사실인가” 하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네! 사실입니다! 그 동안 이곳에 와서 화요일, 금요일,

안식일 설교준비만 해도 시간이 벅차서 방문보다는 설교준비에

시간을 주로 쓰고 있었습니다.”라고 변명 한마디 없이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라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교회는 사역자가 부족해서 전도사가 설교와 방문, 두 가지를

다 해야지 한 가지라도 등한히 하면 그일을 이해못하는 교인들이

불만을 가질수 있소!”라고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고문경 전도사는

금방 깨닫고는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 다음부터 “고문경 전도사는 방문도, 설교도 잘한다.”고

알려졌고 그 지방에서 “괜찮은 전도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 후로는 고문경 씨가 일을 열심히 해서 1959년 영남대회

행정위원회의에서 영남대회 청소년부장으로 결정이 되고

고문경 전도사도 쾌히 응하여 1959년 7월 하순경

영남대회가 있는 대구로 왔다.

 

그런데 대구로 오자마자 곧 어려운 일을 당했다.

고문경 전도사의 둘째 아이인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한두 살

정도였다. 갑자기 아이가 경련을 하며 죽을 지경이 됐다.

젊은 부부이니 어찌할 줄을 몰라 갈팡질팡 하는데 그 집을 보니

사과를 갖다 놓은 것이 있었다. 대구는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라

사과를 사다 놓은 모양인데 당시 과수원에서는 독한 농약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 어린애가 그 사과를 핥아먹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고전도사 부인과 대구 동산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들은 죽는다고 버둥거리는 이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여서

토하게 하고는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어린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씻어주고, 계속 무엇을 마시게 하자 그 이튿날 회복되었다.

이 일 외에는 고문경 전도사가 대구에 와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고문경 전도사가 대구로 오자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고 전도사, 우리 다른 대회에서 안 해 본 일을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안 해본 일을 해보다니요?”

“그 동안 어떤 집회를 하면 자격을 따져서 참석 시켰는데

이번 여름에 10대부터 30세 미만 청년 남녀는 누구나 다

참여하는 청년 대회를 한번 해 보면 어떻겠소?”

“제가 청년부 책임자이니 한 번 해 보지요,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요?”

“그간 여러 곳을 다녀 보았는데 부산 해운대 덕성보육원이 있습디다.

장소도 크고 밥해 먹이기도 제일 좋을 것 같소. 그곳 원장이

서 영우라는 분인데 내가 연락을 해 보겠소”

“그럼 연락을 해 주십시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고맙게도 덕성보육원 서영우 원장도 쾌히 승낙을 해서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일이 진행이 되었다. 그래서

각 지역 심심(深深)산골에 있는 교회까지 통지하여 각자

여비만 부담하면 숙식비는 우리가 부담한다고 했다.

그 해 8월 중순경, 교회단위로 서신연락만을 했는데도

200여명 이상의 청소년이 참가하는 큰 집회였다.

청년만의 모임을 해 보기는 한국연합회가 생긴 후에

처음 일일 것이다.


그런데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깊은 산골에 사는 청년들이 평생 기차를 처음 타 본 것이다.

정거장에서 기차표를 사서 표 검사를 하고서는 기차를 탄 후에는

표가 필요 없다고 생각이 되어 기차표를 찢어버린 것이다.

처음 하는 청년대회인지라 우리는 부산역에 마중을 나갔는데

기차역에서 기차표가 없다고 이 청년들을 내어 보내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알게 된 우리는

역원에게 사정을 했더니 교회의 입장은 이해하나 그 많은

청년을 내어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역원은

사람을 시켜 이 청년들이 타고 온 기차를 검사하게 하니

과연 찢어진 표들 중 얼마를 발견해 냈다.

그래서 기차 표 값을 이중으로 내지 않고 무사히 나왔다.

처음 갑자기 준비한 일이라 작은 불상사들이 있었지만

재미있게 집회는 진행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은 내 친구로서 순안 의명학교

후배동창인 고치규 선생의 아들 고찬연 선생의 일이다.

아마 본인은 아직까지 자기가 결혼한 일을 잘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치규 선생은 월남할 때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을 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고찬연 선생이다.

한 번은 “이렇게 외롭게 월남을 했는데 내 아들은 믿음을 모른 채

군대에 가있다”며 아들을 걱정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 선생에게 “군대에 가있는 아들에게 이제라도 교회에 잘 나가도록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라”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공대를 다녀서

수학을 잘 한다니 제대하면 우리교회 학교계통에서 교사로

일하도록 해보자”고 했다. 고 치규 선생은 “정 목사가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고 하면서 “정 목사도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나도 그 아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군대로 서신을 보내어 “부대를 방문하는 우리 사역자와 연락해서

안식일도 잘 지키고 믿음을 지키다가 제대를 하면 우리교회

교육기관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 아버지의 편지에 감동을 받았는지 그 후에 고치규 씨는

“내 아들이 정 목사가 말 한대로 제대를 하면 교회 직장에서

일하고 싶은 듯한데 아직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으니

이제는 교인과 결혼을 시켜서 믿음으로 잘 지나도록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아들의 혼사를 걱정했다.

 

이번 영남대회에서 준비한 청년대회가 해운대에서 열릴 때

고치규 씨도 부산에 계시면서 나를 만나려고 해운대로 오셨다.

이때 내 안사람과 동창생인 김인애라는 분의 큰딸 정순희라는 여성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경산 삼육고등학교 영어선생으로 있었다.

그 여동생도(정영희 인가 그랬다)보기에 괜찮고 모든 면에 참했다.

나는 평소에 김인애 씨의 딸들을 잘 인도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청년대회 순서 중에 정순희 선생의

여동생의 순서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치규 씨에게

“내가 생각한 처녀가 있는데 그 처녀가 이번 청년대회 순서를

맡았으니 그 시간에 와서 가만히 선을 보라”고 했더니 그대로 했다.

그 순서 후에 고치규 씨에게 “그 처녀가 어떠냐?”고 물으니

“참 좋습니다. 우리 집 며느리로 삼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당신 아들이 이 처녀를 보고 좋다고 해야 되니

당신 아들에게 편지를 해서 휴가를 나와 맞선을 보도록 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당시 경산 삼육고등학교장 한기조 선생에게

사정을 말하자 한기조 선생은 영어 교사인 정순희 선생에게

연락을 하여 처녀와 총각이 선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만난 후에

두 사람이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해야 되겠는데 나더러

주례를 해 달라고 부탁이 왔다. 그래서 나는 고치규 씨에게

“당신 아들은 아직 침례를 안 받았고 처녀는 침례를 받았는데

내가 목사로써 주례를 하면 우리 교회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결혼을 위해서만 침례를 받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더 더욱 없으니 경산중고등학교 교장인 한기조 씨에게

주례를 청해서 하면 좋겠다.”고 하니 고치규 씨도 좋게 생각하여

한기조 씨가 주례를 해서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

고 선생은 침례도 받고 모범적인 가장이 되어 가정을 잘 이끌었다.

 


그 후에 영남대회에 속한 경산삼육고등학교 교사로 취임이 되어

열심히 일하다가 후에 서울삼육고등학교로 가서도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교회 내에서 신실히 일하고

있는 것을 보니,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뒤에서 노력한 보람이 있어

마음이 매우 흐뭇한 것은 물론이고 마치 내 자녀가 잘 사는 것

이상으로 기쁘다. 그래서 이 영남대회의 청년대회가 더 오래

내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고문경 전도사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 대회장 등 여러 요직을 거쳐 큰 일군으로

일하고 미국에 와서도 유능한 목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교회지도자는 본인이 교회의 일을

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사람을 키우고 그 앞길을

열어 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된다.

잘못된 것을 보고 자르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라는 말이다.


 

청년사업과 젊은 목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또 있다.

각 대회 대회장은 합회행정위원회에 참석을 한다.

한번은 합회행정위원회를 참석하려고 서울에 갔다가

내가 중한대회장으로 일할 때 함께 대회청년부에 일하던

김선억 씨를 만났다. 함께 일하던 사람이니 반갑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정 목사님! 제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걱정거리라니, 무슨 일인지 말을 해보시오.”

“정 목사님 후임으로 오신 대회장님이 저에게 정 대회장이

있을 때는 청년부 일을 잘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일을

잘 하지 않는가? 하며 자꾸 불만스럽다고 이야기를 하시네요.”

“그런 불평을 들을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목사님! 정 목사님 계실 때와 똑같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힘쓰고 있고 오히려 더 열심을 내고 있는데 자꾸 그런 불평을

말씀하시니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

“정 목사님, 제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참고가 될 말씀이나 조언을 좀 주십시오.”

“김 선생, 우선 맡은 일에 충실히 하고 있으시오,

앞으로 좋은 길이 생기면 의논합시다.”

 

이렇게 말해 주고 그날은 헤어졌다. 빨리 어떤 길을

모색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김선억 씨 대신 다른 사람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합회 행정위원회에 참여하여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때 체코사람으로 미국시민이신 클라임스(구인서 씨)라는 분이

어떤 보직도 없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는데 이 젊은 선교사

클라임스를 한국연합회 청년부장으로 하자는 안건을 선교사들이

행정위원회에 내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 교회사업은 선교사가

모든 것을 다 주장하고 있었다. 대회와 합회의 인사배치까지도

합회장을 위시한 선교사들의 주장대로 거의 이루어 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행정위원회에서는 사전에 의논한 것도 아닌데

우리 한국인행정위원 몇 명이 클라임스를 연합회 청년부장으로

하자는 안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 어떤 보직이나 필요성도 없이

젊은 선교사를 오게 해서는 자리를 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반대를 한 것이다. 그러니 선교사들 입장이 대단히 곤란해 졌다.

행정위원회를 3-4일을 해도 결정이 나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에는 클라임스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오,

다만 선교사들의 독주를 한 번 막아보려는 공통적인 뜻이

우리 속에 있었던 것뿐이었고 클라임스가 희생양이 된 것 뿐이라

생각이 된다. 우리도 이제는 그만하면 선교사들에게 우리의 뜻이

전해 졌다고 생각들은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후에 내가 점심을 먹고 회의실에 다른 분들보다 조금 일찍

오게 되었는데 합회장도 먼저 혼자 들어오셨다.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다.

“합회장님, 젊은 선교사 클라임스를 꼭 청년선교회 부장으로

세워야 되겠습니까?”

“아 그랬으면 좋겠소, 오늘 회의에서 그리 되도록 좀 합시다.”

“그러면 오후회의에서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단 우리도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요?”

“선교사들의 원대로 클라임스를 합회청소년부장으로 세운다 해도

한국말을 거의 모르니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니 한국사람 한 분을 부부장으로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러면 그렇게 안건을 내어 의견들을 들어봅시다.”라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오후회의를 시작할 때에 내가 발언권을 얻어서

“이만하면 우리 서로의 뜻을 알았을 터이니 다른 선교사에게

겸직을 시키는 것보다는 비록 젊지만 클라임스를 연합회 청소년부

부장으로 세우도록 해 보십시다, 이 안에 제가 동의합니다.”라고 하자

어떤 선교사가 재청을 하고 표결에 붙여 어려움이 없이 통과가 되었다.

나는 다시 발언권을 얻어서 “클라임스 씨는 나이도 젊지만

한국말도 잘 모르니 부부장에는 한국 분으로 한 분을 선출함이

좋겠다.”라고 안을 내면서 중한대회 청소년부에서 일하는

김선억 씨를 추천한다고 동의를 했다. 선교사들이 재청을 하여

김선억 씨를 합회청소년 부 부부장으로 선출했다.

김선억 씨에 대한 걱정이 빨리 쉽게 해결이 되니까 참

내 마음도 후련했고 김선억 씨도 매우 만족해했다.

 

얼마 후에 다시 합회행정위원회에 나온 안건 중 한 가지는

곧 일본에서 동양에 있는 합회청년부관계자들을 초청하여

회의가 있을 터인데 한국에서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고 의논한 결과

나를 한국대표로 보낸다고 결정을 하게 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믿고 선택해 주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나이 이미 50이 훨씬

지난 때인지라 극구 사양을 했다. “그러면 누구를 보내면

적당하겠는가?”라고 행정 위원들은 내게 질문을 하기에

나는 청년부관계자 회의이니 합회청년부 부부장인

김선억 씨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추천을 했다.

모두들 좋게 생각해서 김선억 씨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원래 얌전하고 성실한 김선억 씨가 일본에 가서 아주 좋은

인상을 주고 온 모양이었다. 일본회의에서 돌아 온지 얼마 후에

일본 삼육대학에서 김선억 씨를 일본 삼육대학 기숙사사감으로

초청을 했다. 김선억 목사 본인도 “그 초청에 응할 마음이 있다.”해서

합회행정위원회에서 쉽게 결정이 되어 일본으로 갔다.

사감이라는 직분이 생각보다 몹시 어려운 것인데도

한 4년간 일본에서 일을 잘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미국이민의 문이 열리자 일본 삼육대학에서도 그 동안

일을 열심히 한 김선억 목사에게 미국으로 가도록 길을

잘 열어주었고 또 일본주재 한국대사가 김선억 씨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 미국으로 비교적 쉽게 오게 되었다.

김선억 목사는 미국에 와서도 성실하게 목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젊은 분 한사람에 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원래 교사로 사역을 시작해서 그런지 청소년과 교육에

관한 일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영남대회장으로 일하면서

자연히 영남삼육 중 고등학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지방학교이기 때문에 우리교회 원칙을 따라 교사를 구하기가

참 힘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사람이

유형환 씨였는데 그는 내가 삼육 신학교에서 가르친 청년으로

후에 한국연합회 회장도 오래한 분이다.

어느 때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어떤 행정위원회 때

서울에 와서 유형환 씨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유 선생, 영남지방으로 와서 학교에서 일할 마음이 없는가?”

“목사님의 부름에 응할 마음이 있으나 이미 다른 대회장이

가자고 청한 분이 계십니다.”

“한발 늦었구만! 여러 곳에서 오라고 한다니 좋은 일이네,

어디를 가든지 잘 해보게나.”

“목사님, 저는 어느 대회를 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니 영남대회로 갈 마음이 있지만

어디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본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먼저 말씀하신 대회장님이 내일 9시에 오셔서 확실한 말씀을

주신다 했으니 그 때까지 오셔서 가자고하시면 그리 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정 목사님 부르심에 응하겠습니다.”

“아, 정말 고맙소, 유 선생, 그러면 내일 아침 9시까지 기다리겠소!”

나는 다음날 아침 9시가 되기도 전에 유형환 선생을 찾아가

9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으나 다른 대회장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자 유 선생은 “목사님, 먼저 저에게 말씀하신 대회장은

어찌 된 일인지 아니 오시네요, 목사님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30세 미만인 청년 유형환 선생은 영남삼육 중 고등학교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선생들과 의논하여 유형환 선생을 교사와

사감을 겸하도록 했다. 체격도 늠름하고 말도 잘하고

또 신앙도 좋아서 학생들이 유 선생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는 서울로 가서 결혼을 하고

다시 영남대회로 돌아 왔다. 신혼이 된 젊은 부부가

젊은 아이들이 쉴 사이 없이 드나드는 기숙사 사감의 직분보다는

전도부 방면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유형환 군의 앞날을 위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본인의 의사를 물으니 유 선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다음 번 대회행정위원회에서

의논하기로 했다. 내 생각에는 진주에 주상규 목사가 오래 계셨고

교인들도 점잖아 젊은 사람을 보내기에 적당하다고 생각이 되었고,

주 목사도 새로운 곳으로 보내 주는 것이 본인을 위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회행정위원회가 열렸을 때에 나는

“주상규 목사를 마산으로 보내고 진주에는 유형환 목사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더니 행정위원들이

“절대로 아니 된다”고 하면서 극구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처음부터 그런 완강한 반대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또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러면 유형환 씨를 마산으로 보내고 주상규 씨를 그냥

진주에 두자.”고 의논하여 결정을 하고 회의를 끝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몇몇 행정 위원들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목사님, 왜 유형환 씨를 진주로 보내고 주상규 씨를

마산으로 보내려고 했습니까?”

“왜라니요? 갓 결혼한 젊은 신혼부부를 젊은 청년들이 많은

학교 남자기숙사에 두기가 그래서 목회부로 보내려고

생각을 했던 것이오. 유형환 씨 본인도 전도부를 원하고요”

“그러면 유형환 씨를 마산으로 보내면 되지, 왜 주 목사를

마산으로 보내고 유형환 씨를 진주로 보내려 하십니까?

유형환 씨가 평안도출신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게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나 유형환 씨나 다 평안도 사람이었다.

나는 진주가 마산보다 더 좋다 라고는 생각도 안했는데

이분들은 내가 이북 사람을 더 잘 봐 주려 한다는 생각들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북 사람으로 영남 대회를 맡아 일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어떤 그룹이나 파를 조성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 해왔다.

같은 평안도 출신을 더 잘 봐준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원산에 있을 때에 중선대회에서 ”같은 이북출신이니

서울 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도 거절하고 청진으로 갔다가

아내까지 잃었는데 이제 그런 오해를 받으니 기가 막혔다.

“내가 어찌 같은 이북사람이라고 더 잘 봐준단 말씀들이시오?

내가 정말 그랬었다면 대회장으로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리 했을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아니 했겠소?”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십시다.

그러나 왜 주 목사를 마산으로 보내고 유형환 씨를 진주로

보내려 하시는지 그 이유는 자세히 설명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다들 무슨 대단한 이유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생각해 보시오, 마산교회는 군대에 있는 청년들이

매 주일 6-7명이 교회로 나와서 자고 가곤 합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목회 일을 시작하는 30도 아니 된 신혼부부를

그곳으로 보낼 수야 있겠소? 그리고 주 목사는 진주교회에

오래 있었으니 그 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보냄이 좋지 않겠소?”

“아, 목사님, 그렇다면 대회장의 의견대로 처리하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더 기가 막혔다.

“아니 행정위원회의에서 결정된 일을 이제 내 마음대로

번복해서 처리하란 말이오?”

 

그제야 모두들 회의를 다시 하자고 해서 기도를 하고

회의를 열어서 다시 결정이 되었다. 유형환 씨는 진주에 가서

목회 일을 열심히 성공적으로 했다. 매우 감사한 일이다.

교회 안에 그룹이 생기거나 지역감정을 따라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만큼 교회의 발전에 지장이 되는 일도 없다.

그러나 그 부조리가 이미 우리 교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라 생각이 되었다. 유형환 씨의 일은 사실

극히 사소한 일 중에 한가지일 뿐이다.

지방색에 관한 더 큰 일들과 지방색을 토대로 당을 짓는 일은

그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었지만 이일들은

본인들과 교회와 대회 그리고 합회에까지 계속 어려움을 끼쳤고

교회의 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일에

관계 되었던 분들 중에 정말로 교회 요직에서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이 그냥 평범하게 교회일을 하다가 그만두거나 은퇴하게 된 것이

몹시 아쉽게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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