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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3

제 2부. 배움의 길과 가르침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1913년 3월, 네 명의 학생이 진명학교 제일회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만 17세였다. #2의 끝 부분)

1. 순안 의명학교

교회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누구나 순안 의명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허나 거리상으로나 경제적인 면에서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학비조달관계로 진학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형님들을 제쳐놓고 소학교를 다닌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한데 중학교를 가겠다는 말을 하기가 정말 어려웠으나

진학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식구들이 다 모인 때에 어렵게 청을 드렸다.

"어머님, 형님, 그간 교회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 시작한 공부, 중학교도 다니게 해 주신다면

힘을 다해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두 형님은 어이가 없는지 말씀 한마디 없이 천장만 쳐다보셨다.

막내인 나는 또 어머님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가정 형편이 힘든 것 알지만

허락해 주시면 힘을 다 해서 해보겠습니다."

"유복아! 네가 진학을 원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 많은 학자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어머님! 진학만 허락해 주신다면 노동을 해서

학자금을 대겠습니다. 허락만 해 주십시오!"

".................."

"어머님! 진학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제발 허락만 해 주십시오! 네?!"

"그래! 우리집안 형편은 유복이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정말 노동해서 공부할 자신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시작은 해보자꾸나!”

"어머님!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 힘껏 해 보겠습니다."

이때에 기쁜 마음은 하늘을 날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어머님의 큰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순안 의명학교는 내 집에서 약 110리 떨어진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 있었다.

안식일교회 계통의 소학교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4월1일에 학교가 시작한다 했다.

1913년 3월 하순,

아침 일찍 둘째형님 동로 씨와 함께 그 먼 길을 걸어

저녁 늦게 순안 의명학교에 당도했다.

하도 먼 길이라 형님께 “힘들지요?” 하고 물으니

“유복이 네가 여기까지 유학 온 것이 대견하고 기뻐서

피곤함을 모르시겠다.”고 했다.

내가 진학하는 것을 형님들이 못 마땅하게 생각하시는 줄로

알았는데 실은 경제적 문제로 걱정한 것뿐이었지

막내인 나를 사랑하고 대견하게 여기시고 계셨던 것이었다.

형님의 노고와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눈물겨웠다.

이때 같이 입학한 이는 박기석, 정동성, 최경선, 송찬오, 이격원,

김병직, 정관신, 최경신, 김은수, 민채희, 김일세 제씨였다.

내가 여장을 풀어놓은 곳이 처음 들어보는 기숙사라는 곳이었다.

이 기숙사는 사각으로 된 집인데 열 개 정도의 방이 있었고

서남쪽으로 출입구가 하나와 서북으로 비상출입구가 하나 있었다.

나는 5호실에 배정되었는데 같은 방에 4학년생 강봉호,

고두칠, 김의목 세 사람, 전영역 씨가 삼 학년,

신입생으로 하동만 씨와 나, 6명의 학생이 한방에 있게 되었다.

하동만 씨는 진명학교 선생으로 있던 분이라 하여 당장 이 학년으로

편입이 되어 내가 결국은 유일한 신입생이 되고 말았다.

내 나이 17세가 되어 상당히 숙성되고 키가 크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잘 어울려 지났다.

또 한문을 잘한다고 인정을 해 주어

상급생들도 나를 홀대(忽待)하지를 못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면 각 방별로

식사를 준비하는 일 이었다.

한사람이 일주일간씩 식사를 책임 졌는데 식량과 반찬,

땔나무까지 모든 것을 각 방 학생들이 준비해야 했다.

드디어 내가 음식 짓는 차례가 되었는데 집안에서 막내로 자라서

밥이나 반찬을 만들어 보기는커녕 쌀을 일어 보지도 못했으니

밥이 돌투성이요, 거기다 아래는 타고 위는 설어 버린 것이 아닌가?

우리 방 학생들이 조반을 못 먹고 학교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창피하였던지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씩 배워서 조금씩 해 나갔다.

그래도 겨울을 나기 위해 담근 김장은 우리 5호실이

제일 잘했다는 평을 들었으니 신기하다.

한 번은 밥도 잘 못하는 우리가 좁쌀떡을 해 먹기로

의기투합하여 의논 끝에 좁쌀을 불려 갈기까지는 잘했는데

그 후에는 어찌 할 줄을 몰라 내 생각대로 재를 퍼서 담아놓고

그 위에 보자기를 펴고 그 위에 좁쌀을 갈아서 만든,

물이 흐르는 반죽을 퍼서 놓으면 된다고 했더니

방원들이 다 옳게 여겨 그리 하였다.

이렇게 걸러진 가루덩이로 떡국대를 만들자하여

막대기 같이 딱딱한 좁쌀 떡국대가 만들어 졌다.

여기까지는 잘 됐는데 “이 딱딱한 좁쌀 떡국대를

뜨거운 물에 잠깐 삶으면 된다.”고 했으나 모든 방원들은

“처음부터 물에 떡 덩어리 넣고 끓여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처음부터 물에 넣고 끓이니 떡덩이가 모두 풀어져

떡 물이 되어 버렸다.

즉 좁쌀 떡 죽이 되 버린 것이다.

저녁은 굶고 그 떡 물을 큰 보시기에 퍼 놓고

이튿날 점심때에 떡 먹고 싶으면 5호실로 오라고 했더니

모든 학생이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그 물 떡을 맛있다고

삽시간에 다 퍼먹은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한창 배가 고픈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많은 시간 노동해서

식비와 학비를 거의 벌어 썼다.

그래서 나는 간단한 금전출납부를 만들어서 세세히 기록하여

적지만 손수 십일금도 드리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한 번은 여름방학 직전에 어떤 상급생이

나에게 돈을 1원 50전만 꾸어 달라했다.

그래서 꾸어 주고는 금전출납부에 기입했다.

개학 후에도 돈을 안 갚기에 독촉한즉 돈 꾼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증명할 길이 없어 금전출납부를 보여주니

“네가 금전출납부 중간에 거짓 기록했을 리가 없으니

갚아 준다.” 하면서 돈을 갚았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간단한 금전출납부를 손수 만들어 기록해 왔다.

내가 집에서 소죽 만들다가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잃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것이 경험이라 하여 나는 노동으로 처음에

소죽 만드는 일을 해서 학비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삼 학년 때는 주로 등사 일을 하고

졸업학년에는 예배당과 교실 소제(청소)를 했다.

등사나 교실 소제는 상당히 신망 있는 학생에게 준다고

알려져 있어서 마음 뿌듯하게 일했다.

그러나 학비를 벌고 자취생활을 해야 하는 기숙사 생활은

바쁘고, 어렵고, 기쁘기도 했다.

나는 믿음생활의 일부라 생각하고 십일금도 정성껏 바치고

채식도 했는데 여러 면에서 학우들은 나를 신임해서

학생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가도 내가 중재하면

내 말을 어려워하면서 잘 듣는 것을 보고 감사했다.

그러나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기숙사에 절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사감선생이 상급학생을 모아놓고 누가 이 절도질에

관계가 되었을까 하고 의견을 물은즉 어떤 상급생이

나를 혐의자 중에 한사람으로 말했다는 것을 듣고는

사감을 찾아가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 후, 그 일 저지른 학생이 탄로 나서 해결되었지만

나는 얼마동안 마음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학교생활은 상당히 바빴고 힘들었다.

학생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오후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 6시에 기침, 밤 10시에 취침,

아주 규칙적이고 바쁘지만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매일 4시간씩 노동한 임금으로

식비와 학비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

내가 삼 학년 되는 때에 한식 장방형 기와집으로

기숙사 한 채를 더 짓고 자취제도대신

식당에 식모를 두고 공동식사를 했다.

60여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게 되니

나이든 어른 같은 중학생들 중에는 말썽을 부리는 학생도 있었다.

어떤 나이 많은 학생은 공공연하게 밥을 밥상에 버리고

나가는 이도 있었는데 하도 나이가 많아 직접 대고 말은 못하고

사감선생은 밥상에 밥을 버리는 학생이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까지 드리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순안 의명 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은 나에게 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인간적인 배움과 신앙의 아름다움을 얻게 했다.

의명학교는 중학과정이고 교실도 초라하기는 짝이 없었지만

당시에 안식일 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교육기관인지라

많은 학생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학교는 석박산 골짜기에 재래식 기와집인데

장방형 네 칸짜리 집이었다.

교사는 8명으로 서양인 2명, 일본인 1명, 본국인 5명이었고

우리는 주로 한문과 성경을 공부했다.

내가 입학할 때 학생 수는 한 40명으로 남녀 공학 이었다.

나의 반은 남자 8명, 여자 4명으로 시작했으나

2학년 때에 보결생 두 명이 들어오고 한 명은 낙제를 해서

2학년 때부터 13명이 되어 모두 함께 졸업했다.

이때는 말이 의명중학교지 신학교(神學校)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또 남녀공학이지만 남녀 학생에 대한 감시는 대단해서

예배드리는 때에는 남녀 학생이 좌우로 앉고 가운데는

휘장으로 막아서 서로 얼굴도 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남녀 학생은

피차간에 말을 건네어 본 적이 없었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드리는 조석예배는 물론 화요일, 금요일,

안식일 예배에 참석률도 거의 100%에 가까웠다.

또 인상에 남는 일은 학생 모두가 졸업하면 복음 전도자가 되겠다는

분위기여서 석박 산에서 개인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학생들은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함경 남북도 에서 왔는데

학생수의 증가로 순안에 가장 중심 되고

경치 좋은 곳에 부지를 정하고 1913년 여름에 기공하여,

붉은 벽돌로 같은 해 10월에 준공을 했다.

온 학생들이 새 교실에서, 새 기분으로 공부하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가없다.

이때 학교제도는 한 학년을 3학기로 나누었는데, 4월부터 7월이 1학기,

9월부터 12월이 2학기, 1월부터 3월이 3학기였다.

7월에 방학이 시작되면 대부분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비를 위하여 노동을 했다.

2. 침례와 결혼

1913년 여름방학 때 한달 만 일하고 집에 돌아가니

성장동 교회에서 침례식이 있어서 나도 침례를 받았다.

침례를 베푼 목사는 선교사 노설 목사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에 침례를 받기는 했으나 침례에 대한

예비지식이나 준비도 없이 침례 받은 것이 퍽 유감이었다.

그러나 내 딴에는 침례를 받았으니

범사에 더욱 잘하기로 깊이 결심했다.

그래서 집에 와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데로

집안일을 많이 보살펴 드렸다.

농우(農牛)를 아침저녁으로 풀을 뜯게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 일도 꼭 책임 있게 해드리고

다른 일도 그 전보다 더 열심을 내어 도와 드리니

어머니나 형님들이 무척 기뻐하셨다.

특히 당시에 사람들이 한국식 버선에 짚신을 신었는데

나는 짚신을 곱게 삼는 기술이 뛰어나 남는 시간에는

모든 가족의 짚신과 학교 가서 신을 나의 짚신도

여러 켤레를 삼아 가지고 가곤 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 겨울 방학은 연말 연초를 포함해서

약 열흘이 주어졌다.

1913년 12월, 비록 열흘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방학이라고 백 리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오냐! 유복이 왔느냐?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

좀 들어오너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네, 어머니!”

다른 때와는 달리 심각해 보여서 긴장이 되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유복아! 멀리 가서 공부하기 힘들지?

그런데도 그냥 공부를 계속 할 생각이냐?”

“그럼요. 이제 시작인데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요?”

“별 것 아니다. 공부는 계속 해도 좋다!

그런데 이번 방학에 내려온 김에 장가를 가라!”

“아니 어머니. 이제 공부를 막 시작했는데 무슨 장가를...

어머니. 저 장가 안가요!”

나는 안 그래도 행여 공부를 중도에 중단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늘 걱정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장가를 가라니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다.

방학하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겨우 시작한 공부인데

마칠 때까지는 장가는 정말 못 갑니다.”

“아니다. 이미 음력 11월 20일로 다 정해 놓았다.

우리 형편에 장가가서 며칠씩 있을 필요도 없고 하니,

당일로 장가가서 색시만 시집으로 데리고 오면 된다!

색시는 여기서 한 걸음이면 갈 수 있는 진대동 “곽씨” 집안이니

하루에 다 할 수 있다. 염려 말고 준비해라!”

당시에는 요즘처럼 어떤 날을 정해 결혼식을 올리고

살림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으로 장가를 가서

며칠씩 지내면서 잔치를 하다가 신부를 데리고 시집으로 오는,

여러 날이 걸리는 대 행사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면 잔치의 날자가 짧아 질 수도 있는데,

어머님은 우리가 가난하니 당일로 신부의 집에 장가를 가서

그날로 신부를 시집오게 하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음력 11월 20일로 정해진 것이었다.

바로 내가 장가가는 일이 나도 모른 채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형님부부께 별의별 핑계를 다 해대며

음력 11월 20일 아침까지 장가를 아니 가겠다고 졸라대었다.

실제로 “곽씨” 문중이 사는 진대동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2-3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었음으로 장가를 가야하는 아침까지도

장가를 안 간다고 우기며 버티었다.

한참 승강이를 하고 있는데 신부 댁에서 전인(專人)이 찾아 왔다.

“저 진대동, 곽씨댁에서 왔는데요. 말씀을 전하라 해서 왔어요!”

“아니 웬일이요? 무슨 일이 났소?” 어머님이 물으셨다.

“네, 신부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니 일 나기 전에

빨리 장가와서 신부를 데려 가라 하네요!”

“알았소! 이제 곧 간다고 전하시오! 곧 간다고!”

어머니는 내게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고 곧 간다고 대답해 버리셨다.

이제 17세 밖에 안 된 내 나이로,

도무지 피할 길이 없이 어머님의 독촉대로

부랴부랴 장가를 가보니 과연 신부의 아버지는

인사불성으로 병석에 누워 계셨다.

잔치고 뭐고 할 것 없이 신부를 데리고 시집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도 이때는 안식일교회가 생겨서

정문국 전도사가 (최휘천 목사 외조부-편집자 주)시무하고 있었다.

나는 신부와 같이 시집으로 오는 도중 신부를 데리고

예배당에 들어가 정문국 전도사에게 말씀드리니

그 자리에서 몇 마디 주례말씀과 기도를 해 주셨다.

신부가 시집온 다음 날, 음력 11월 21일에 잔치를 하는데

우리 동네에서 나까지 세 쌍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마 이 날이 길일(吉日) 이었던 모양이다.

나의 고모 사촌 형 최성붕 씨와, 나의 한문 서당 동창인

홍태조 씨의 결혼식이 같은 날 있었는데 약속이나 한 듯

세 신부의 나이가 모두 15살이었는데 그중 내 신부의 생일은

음력 12월 1일이었으니 만 14세도 채 안된 나이였다.

이날 결혼한 다른 두 사람은 불신자 가정의 결혼이었고

나만 신자의 결혼인지라 신자로써 최선을 다해

모범되는 가정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불행하게도 결혼한 지 나흘 만에 나의 장인

곽경범 씨는 세상을 하직하셨다.

전부터 알고 지난 분은 아니었지만 매우 서운하고 슬펐다.

“나는 어찌해서 이렇게 아버지 덕이 없을까?

이제부터 신부의 아버지라도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볼까 했는데....

내가 그렇게 불러 보고 싶었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신부는 곽경범 씨의 1남 3녀 중에 막내딸이었는데

이름은 곽동익 이었다.

중매결혼으로 어린 나이에 알지도,

보지도 못한 나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 곽씨 문중은 다른 문중보다 훨씬 보수적 이어서

내 아내 곽동익은 언문 한 줄도 못 배운 그야말로 까막눈이었다.

그래도 학생에게 시집을 온다고

글을 한자라고 배우기 위해서 열네 줄로 된 언문을

한지에다 써 가지고 온 것을 보니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어린 소녀이지만은 모든 면으로 상당히 얌전하고 겸손해 보였다.

나는 새 아내에게 모든 일에, 그리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지내라고 이야기 해주고 아내의 이름도 “곽동익” 대신

“곽치겸”이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새 아내의 오빠의 이름이 “곽치익”이었기에

그 치자를 따라서 “치겸”이라고 지어 주었다.

어린 나이로 시집을 왔으니 모든 일에

너무도 서먹서먹해 하기에 나는 “이 집안에는 딸이 하나도 없으니

여동생처럼 마음을 놓고 지내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신부는 얌전하게 생활을 하며 예배당에도 열심히 다니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닌 덕분에 언문도 속히 배운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결혼한 지 약 1주일 만에 학교를 가게 되었다.

당시 관습으로는 신혼부부라 해도 남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

흠 잡히는 시대인데다가 신부가 어려서 얼마나 부끄러움을 타는지

일주일간 말 한마디 해 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작별 인사도 한마디 못하고 그냥 저만큼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애처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 도착하면서 어린 신부가 친정에 가 버렸을 것만 같은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서 글도 모르는 신부이지만 편지를 한 장 띄웠다.

편지도 누가 읽어 주어야 할 것이라 생각되어 간단하게 쓰고

잠언 31장 30절 말씀을 적어 보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봄방학이 되자 집에 와보니 신부는 시집에 그냥 있었다.

내가 보낸 편지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서 뜯어보고

어린 신부를 놀려댔다는 것이 아닌가?

어린 신부로 수줍기만 한 줄 알았더니, 편지를 뜯어보고

놀려댄 일에 대해 정색을 하고 “마땅치 않다!”고 내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장가를 갈 때까지도 계속 우리는 오막살이집에서 살았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으로 된, 말 그대로 오막살이였다.

이런 집에서 어머님, 나의 둘째 형님 부부, 나와 나의 아내,

이렇게 다섯 식구가 한방에서 지냈으니

그 불편했던 점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아마 둘째 형님과 형수님이 제일 불편했으리라 생각이 된다.

봄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과 형님은

그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좀 큰집을 마련하신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비록 그 초라한 오막살이 집이었지만 내가 오줌 똥 싸면서

15년을 살던 많은 추억이 담긴 그 집이 헐린 것을 볼 때에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이렇게 철도 들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어린 아내는 나의 의견에 잘 따라서 교회에도 잘 다녀 주었다.

친정에 다니러 가서도 교회를 잘 나가서 나는 고맙고 흐뭇했다.

교회를 잘 나가다 보니 성경을 읽고 싶어 해서 언문을 읽는 실력도

빨리 늘어 오래지 않아서 성경을 읽기에도 충분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집이 농촌 집안인데다 나 외에는 교인이 없으니

농번기에는 내가 학교에 가고 없으면 나의 아내가

농사일을 돕느라고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혼 전부터 생각하던 디모데 전서 5장 8절,

즉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하는 말씀을

영적인 면에서 이루어 보기로 결심했다.

나의 가족과 어린 아내를 위해 나의 가족 전부를

교회로 인도하면 안식일 문제가 해결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까지 함께 갈 수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 실천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반대하는 교회 학교에 다니면서,

우선 생활 속에서 가족에게 좋은 감화를 끼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전도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어린 아내를 위해서라도 더 잘해보자고 생각하고

학교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방학 때 집에 오면

동네에서 누구보다도 불평 없이 부지런히 집안일을 도와드리었다.

교회 학교가 사람을 더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결과, 내가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나의 어머니,

두 분 형님부부, 조카들까지 거의 10여명이 다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온 가족이 안식일에 함께 교회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틈틈이 모든 가족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되니

그 기쁨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전보다 온 가족이 더욱 화목하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동네에서 모범가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든 가족이 한 믿음 안에서 화목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

바로 천국이 오늘 임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아내에게는 간단한 산수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수줍기만 하던 아내도 이제는 온 가족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학교로 갈 때에는 봉투에 주소를 써주고 가면

종종 내게 직접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은 배운 것은 많지 않으나

신앙으로 사는 것의 기쁨을 알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결혼 한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1915년 말경이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4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결혼 한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1915년 말경이었다. #3의 끝부분입니다.)

3. 순안 의명학교 졸업과 문서전도

순안 의명학교 5회 졸업이 1917년 3월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1월초에 서울에서 합회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졸업반 학생들은 총회에 참석하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우리의 형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교회당국에서 3월에 졸업하는 졸업반 학생은

모두 합회총회에 참여하도록 결정이 났다.

그 결의에 따라 1917년 1월, 추운 일기였지만 우리 졸업생 13명은

그 총회에 참여하게 되어 내 일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게 되었다.

요새말로 하면 꿈같은 졸업여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많은 기억은 없지만 총회 중에 대총회에서 다니엘스라는 목사가 와서

말씀을 하는데 많은 은혜를 받아 우리 교회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교회를 통해 좋은 경험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사업을 내 일생 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도록

인도해 주는 힘 있는 설교였다.

1917년 3월(내 기억으로는 3월 21일 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13명의 학생이 의명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제 5회 졸업생들은

김병직-평남 순안

박기석-평남 대천

박제정-경기도 인천

송찬오-평남 평양

유영순-평북 의주

이격원-평남 용강

정동성-평남 강서

정동심-평남 강서

최경선-평남 대동군

김은수-황해도 장연, 여학생

김일세-평남 용강, 여학생

민채희-경기도 용인, 여학생

최경신-함남 원산, 여학생

여학생 4명과 남자 9명, 13명이 가족처럼 공부하다가 졸업했는데

교회기관에 취직된 사람은 박재경 씨(순안병원 남 간호원으로)와

유영순(시조사 사원)씨 두 명뿐이었다.

그 외에 남자 졸업생은 권서원(지금의 문서전도자)으로

1년간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졸업하면 틀림없이 교회 기관에 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실망이 컸으나 동생이 졸업을 한다고 100여리나 되는 길을 걸어 와서

졸업식에 참석하신 동로 형님을 뵈오니

실망대신 반갑고 감격된 마음뿐이었다.

내 나이는 21세가 되던 해이다.

졸업 후에 4년간 정들었던 학교를 뒤로 두고

패전한 군인처럼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어머님과 형님들, 친척들, 특히 어린 나이로 출가해 와서

내가 졸업하면 선생으로 가게 되기를 고대하면서

4년여를 기다리던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앞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고 기다리기로 다짐했다.

같은 해 7월에 남 상익 권서 부장으로부터

권서사업(문서전도)에 참여하라는 편지를 받고

남상익 씨를 따라서 평안북도로 문서전도를 위해 떠났다.

이때 같이 졸업한 이격원, 송찬오, 정동성 제씨와

또 강서에 있던 소년 이근욱 씨가 같이 갔다.

나는 여비로 1원 70전 (미화로 1불쯤 될까?)을 가지고 떠났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의 독서열이 말할 수 없이 낮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중인지라 경제공황(經濟恐慌)으로 모든 가정이

너무도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권서사업이란 고생 그 자체였다.

우리 일행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갖고

안주, 박천, 연변, 휘천, 강계로 들어가면서 정성껏 문서 전도를 했다.

1917년 음력 8월 15일 추석이 왔다.

이날은 마침 안식일이었고 우리 일행은 강계읍 어떤 여관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어느 분이 의견을 내었다.

“자! 오늘 추석이기도 하고 마침 쉬는 날이니

우리 산딸기나 따먹으러 나가 보세들!”

“와! 좋소! 오랜만에 외지에서 산딸기 맛이나 봅시다!”

모두 신이 나서 당장 나서기로 했다.

“저어..오늘 안식일이기도 하고 저는 다른데 갈 일이 있는데요...”

“아. 안식일이니까 그냥 소풍가는 기분으로 다들 감세..

그럼 동심이는 가볼 데를 가보게!”

내가 좀 고지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안식일에 소풍 겸 산딸기를

따먹으러 가는 것도 싫었지만 실은 누구를 꼭 만나야 했다.

몇 날 전에 이곳 우편국사무원이 나에게 매우 친절하기에

곧 사귀게 되었었다. 그 분을 오늘 만나기로 마음에 결정한 터라

우편국으로 발길을 향했다. 토요일은 반공일이라

오후에는 우편국 사무원들이 쉬는 날인데도

나를 반가이 맞아 주어 우리는 해가 지기까지

교회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를 하다 여관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이격원 형제가 여관 아랫목에서 신음하고 누워있었다.

“아니 격원이! 이게 웬일인가? 멀쩡하던 사람이..

산딸기 먹고 탈이라도 났는가?”

대답 없이 이 격원 형제는 신음만 하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산딸기 따먹으러 갔다가 뱀에게 물렸네..그것도 독사에게!”

“아니 그러면 빨리 치료를 해야 되지 않겠나? 독이 퍼지면 어쩌지?”

“사람들이 독사에게 물린 데는 돼지고기가 약이라 해서

돼지 새끼 한 마리를 사서 썼네!”

이불을 들추어보니 독이 올라 발등으로부터 종아리까지

퉁퉁 부어 있는데 의사도 없고 약이라고는 돼지 새끼를 사서

내장을 긁어내고 그것을 독사에게 물린 발에 붙이고 있었다.

격원이는 “다리가 터지는 것 같다.”고 밤새 신음을 했다.

우리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며 격원이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 음력 8월16일 아침,

지도자이신 남상익 선생은 우리들을 다 모이라 했다.

“자! 나는 이격원 형제의 치료를 위해 여기 강계에 남겠네!

그러니 네 사람은 여기를 떠나 우연 읍과 초산 등지로 다니면서

권서를 계속 하게!”

“남선생님! 독사에 물린 친구를 두고 어찌 떠나겠습니까?

우리 다 남아서 있겠습니다. 우연 읍이나 초산은

한번 도 가 본적이 없는 곳입니다.”

“초행길인줄은 나도 아네만 여기 다 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게야?

여기 일은 나한테 맡기고 빨리들 떠나서

친구 격원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권서들 하게!”

남상익 선생의 말씀은 거역할 수가 없을 만큼 진지 하셨다.

나와 정동성, 송찬오, 이근욱 네 사람은 신음하는 친구를 뒤로하고

평생 처음 가는 우연 읍을 향해 걸어서 떠났다.

교통수단이라고는 걷는 길밖에는 없었다.

반나절 가까이 걷다보니 배는 고픈데 추석 다음날이라

어디에도 먹을 것을 파는 곳이 없었다.

배고픔을 참고 걷다 보니 길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기러기 너 댓 마리가 천연스럽게 헤엄을 치며 놀고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기러기를 향해 돌을 던지니

한 마리가 누군가의 돌에 맞아 날지를 못하게 되어

그 기러기를 잡아 동네 이장 집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러기를 내어 주니 점심을 잘해 주었다.

우연읍(邑)이 이렇게 먼 길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날 해가 저물어 우연읍 뒷산을 넘게 되었는데

웬 산짐승 떼가 가까이 오는 것 같아서 우리들은

그 짐승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댔다.

저녁 늦게 여관에 들어가 손님들과 이야기 중에

우리가 짐승들에게 돌 던진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은 크게 놀라하며 ‘당신들이 사냥꾼이냐?

아니면 무엇 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리 겁도 없느냐“ 고 야단이었다.

그 사람들의 설명인즉 뒷산에 있는 짐승의 떼는

산돼지 무리인데 돌을 안 던져도 마구 사람에게 덤벼들어

크게 상처를 내곤 해서 어두워지면 그 길을 다니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은 돌을 던져 짐승들의 화를 돋워 놓고도 무사했으니

참 재수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재수가 좋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사야 43장 1-3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신 것을 알고 감사를 드렸다.

우연읍과 초산지방의 권서는 유난히 더 어려웠다.

하루는 네 사람이 하루 종일 권서 했으나 숙박비도 안 되어

사람들에게 그 지방유지 댁을 물었더니 면장 댁을 알려 주었다.

당시의 풍속은 길손들이 그 지방 유지의 집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가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이 면장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 아침 떠나려 하니

그 면장이 나와서 “밥값을 안내고 가려 한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면장 댁에서는

이만한 정도의 손님은 그냥 대접하는 아름다운 풍속이기에

여기도 그럴 줄 생각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면서 마치 싸움이라도 할 기세이기에

주머니를 털어 식사대를 계산하여 주었다.

인심이 고약하다고 생각되었다.

온 종일 기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권서를 하다가

이날 밤은 이 지역 이장 댁에서 1박하며 이장에게

오늘 아침에 면장 댁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한 즉

이장 말씀이 “이 지방에서도 웬만큼 사는 댁에서는

손님에게 식사대를 받는 일이 없다.”고 하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면장은 얼마 전에 서울 공진회에

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관에서 밥을 시켜 먹다가

남긴 밥값을 안 내겠다고 우기며 다툰 사람이라.”고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해주면서 우리들에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니

“너무 섭섭해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이 이장 댁에서는 “밥값을 받지 않겠다.” 함으로

시조 월보 2부를 드렸더니 아주 감사히 받는 것이었다.

우연, 초산은 압록강 변 7개 읍중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어느덧 진눈 개비가 내리기를 시작하며

추워지기 시작했다. 입고 간 옷이라곤 여름의복 뿐이니

따뜻한 남쪽을 향하여 차츰 차츰 고향 쪽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나한테는 처음으로 객지에 나왔다가

2-3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빈손으로 들어가기가 뭣해서

기념물로 샀다는 것이 작은 형님의 방한모자 하나와

아내가 쓸 바느질가위 하나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계산하여 보니 남은 돈이라는 것이 35전이었다.

집을 떠날 때 가지고 나갔던 것이 1원 70전 이었으니

결국 1원 35전을 손해를 본 셈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도 없었지만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사오지 못한 것이 한없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서운해 하시는 기색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철없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한 면이었을 것이다.

돈은 벌지를 못했으나 처음해본 권서사업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4. 소학교 (희명학교) 교사

평안북도 몇 고을에서 권서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의 집 근처에서도 권서를 하였다.

그 것은 가족 보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또

시간을 허송하느니 보다 이렇게라도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하루는 누가 나에게 엽서를 한 장 전해주었다.

“이 엽서 얼마 전에 우체부가 주라고 했는데

이제 생각이 나서 가져 왔는데요!”

“아! 감사해요. 그런데, 아니 이렇게 오래 되었는데

이제 전해 주시 다니오?!”

“미안합니다. 너무 바빠서 고만 깜빡해서...”

순안 의명학교 교장 이희만 선생님의 엽서였다.

순안의명 소학교 교사 자리가 하나 났으니

시급히 오라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오래 가지고 있다가

이제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의 마음은 순안에 가기만 하면 선생노릇을 하게 될 것이라는

흐뭇한 마음에 동로 형님에게로 달려갔다.

“형님! 동로 형님! 순안 의명소학교에서 저보고 와서 선생을 하랍니다!”

“아니 무에야! 그거 정말 반갑구나. 정말 대견하구나!”

“그럼 내일 순안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럼, 그럼! 내가 같이 가 줄 터이니 함께 가자. 정말 흐뭇하구나!”

그 이튿날 나는 형님과 함께 순안으로 가는 길에 친정에 가있는

아내를 찾아가서 순안 의명소학교 선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

정말로 기뻐했다. 급하게 순안에 당도하여

엽서를 보내 주신 이희만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 그간 안녕 하셨습니까?

엽서를 보내 주셔서 엽서를 받자 곧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아니 그 엽서 보낸 지가 언젠데! 그간 기다리다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을 이미 채용했소!”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섭섭한 심정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데리고 갔던 형님도 무척 섭섭하신 모양인지

돌아오면서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 이튿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가 실망을 할까봐 들리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이미 음력 10월경이라 날씨가 무척 추워졌지만

형님을 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나

닥치는 대로 적극적으로 도와드렸다.

그리고 친정에 가있는 나의 아내도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아내는 오히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동안 공부하고 권서 한다고

객지생활만 하다가 이제 집에 돌아와 이렇게 같이 지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하며 나를 위로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을 해 주는 아내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또 안심도 되었다.

1918년 3월 하순경,

이희만 교장께서 다시 편지를 보내셨다.

내 집에서 한 40여리 떨어진 강서군 성태면 대마리에 있는

희명학교에 교사자리가 생겼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희만 교장은 우리 교회본부의 교육부서기를 겸했던 까닭에

이런 교사임명 편지를 하셨다.

이번에도 동로형님이 희명학교까지 동행해 주셨다.

이 학교의 교장은 이희만 교장이 겸직을 하고 계셨고

나의 동창선배인 이근팔 씨가 주무교사로 일하고 계셨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한 달 가량 어린데 나의 선배이었다.

이근팔 씨는 약 2년 전에 부임해서 부인과 딸 진복 양,

아들 성찬 군, 두 자녀를 데리고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분 댁에서 기거하면서 4년제인 이 학교에서

두 학급을 맡아서 일했다. 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4월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했다.

매달 25일 경에 사역자의 월급이 오는데,

설명서를 보니 내게 매달 7원을 주는데

십일금을 미리 감한 6원 30전이 월급 액수였다.

내가 거하고 있는 이 선생의 댁의 한 달 생활비를

사람 수대로 나누었는데, 나와 이 선생 부부,

아이 둘은 한사람으로 쳐서 4등분하여 내 몫이 5원 70전이었다.

내 월급에서 십일금과 생활비를 빼니 60전이 남았다.

교회에 연금 내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런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일하는

그 재미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내 월급이 적어서 그렇다는 말이지,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면서 함께 지내게 해 주신

이근팔 씨 가족에게는 감사한 마음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2개월 남짓 지난 6월 어느 날,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교실밖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학교에 어떤 젊은 부인이 들어왔다.”기에 나가보니

천만뜻밖에도 나의 아내였다.

나의 아내는 시집온 지 5년 만에 (실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했다)

처음으로 혼자 집을 떠나본 것인데 그것도 처음 와보는 외지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기뻤던 모양이다.

이때 나의 아내는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남편과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를 찾아온 것인데

나는 봉급이 나 혼자 살기도 태부족이니 어쩌면 좋을까 하고

근심이 태산같이 밀려 왔다. 생각다 못해 아내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여름 방학까지만 기다리라고 달래었다.

임신한 몸으로 나를 남편이라고 먼 길을 처음 찾아온 아내에게

돈 한 푼도 못 주어 보내는 서글픈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내를 돌려보내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가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내의 바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철이 들기 시작을 했던가 보다.

그러나 7원의 월급을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었다.

선배 몇 분과 의논을 하니 그 분들 말씀이

“부부가 함께 살림을 하면서 사역을 하면

월급을 올려 줄 것”이라는, 내게는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분가하여 아내와 함께 살면서

사역을 해야 되겠다는 무모한 배짱을 갖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거의 4개월간이나 일을 했는데 돈 한 푼 없이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자니 참 막막하였다.

그런데 무슨 배짱인지 학교 근방에 작은 초가(草家) 한 채를

주인이 팔려고 내어놓았다는 말을 듣고 돈 한 푼 없으면서도

그 집을 사고 싶어 집주인을 찾아갔다. 주인을 만나

선금이나 잔금을 방학이 끝나고 와서 함께 내겠다고 했더니,

내가 희명학교 선생이라는 말에 그리하라고 했다.

그 당시 인심들이 그렇게 후했다.

몇 달 동안 일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으니

가족을 만나 볼 염치가 없지만 집으로 돌아 왔다.

그래도 어머님, 형님, 형수님 등 모든 집안사람들이 내가 선생으로

일하다 돌아 왔다고 얼마나 흐뭇해하시는지 나는 좀 안심이 되었고

“이런 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하고 생각이 되었다.

몇 날이 지난 후에 어머님과 형님에게 조심스럽게 분가문제를 제의하였다.

“어머님, 형님, 제가 이제는 선생 노릇을 하고 있고 아내도 임신해서

해산달이 가까우니 학교 가까운 데로 분가를 하면 어떠할까요?”하고

제안을 하자 형님이 일언지하에 반대하셨다.

“유복아! 네 뜻은 일겠지만 농사철에는

한사람 몫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지 않냐?

네가 분가한다는 생각은 안하고 이미 농사계획을 다 해 놓았는데

분가를 한다면 어쩌란 말이냐? 나는 반대한다!”

나는 형님의 심정을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었다.

“형님! 형님 마음 저도 잘 알고 있고

그 동안 저를 위해 얼마나 잘 해 주셨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집사람은 분가를 안 해도 조금 있으면 해산달이 되어

오히려 짐만 되고 앞으로 농사일도 거든다는 것이 힘들겠으니 하는 말입니다.”

“하긴 유복이 말도 일리가 있다!”

어머님이 나를 거들자 형님도 어머니 말씀을 듣고는

내 말에 동의를 해 주셨다.

“어머님, 형님! 감사합니다. 개학이 될 때까지 제가 힘껏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은 학교가 개학하는 9월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분가의 동의를 얻기는 했지만 월급 7원이 문제였다.



선배들의 의견을 따라 나는 교회본부 앞으로

오는 9월부터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간다는 서신을 보내었다.

얼마 후,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가면

매달 5원씩을 더 주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우리 부부는 물론, 어머님과 형님도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안심했다.

7원으로는 분가하여 살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하순이 되어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떠날 시간이 되자

어머니가 말씀을 하셨다.

“유복아. 네가 분가한다니 내가 학교까지 따라 갔다 오겠다.”

“아니 어머니!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여기 일도 바쁘신 데 걱정 마세요!”

“아니다! 그래도 네가 선생이 되어 분가한다니

내가 가서 너희가 살집이라도 자그마한 것을 사주고 싶고

여기 살림도 조금 가지고 가야겠다. 둘째도 같이 갔다 오자!”

“네. 어머님! 그러지 않아도 제가 갔다 오려고 했습니다.”

“어머님, 형님!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어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님의 사랑에 목이 메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가 떠나는 날, 어머니와 형님은 팥과 좁쌀 몇 말, 솥과

몇 가지 살림을 소에다가 싣고 희명학교까지 우리와 함께 가셨다.

그리고 계약금도 없이 배짱과 구두로만 계약된 작은 집을 사서

이사하게 해 주셨다. 이때의 감격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비록 유복자이지만 형님과 어머님의 크신 사랑을

너무도 많이 받았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 ?
    명지원 2012.02.15 00:34

     

    유복자, 어머니의 말할 수 없는 고생, 머릴 싹뚝싹뚝 자를 때, 그 이후에 얼마나 당황스런 날들을 보내셨을까요^^ 신학문, 손가락 잘린 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유학온 최경선 씨....”. 저의 선친께서 대동군 출신이어서 최경선씨가 너무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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