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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1

 

(과연 그 형사 들이 말한 대로 한 이틀 후인가 이여식 선생이

풀려 나왔다. 경찰서까지 찾아 간 것이 도움이 된 것인지는 모르나

참 다행이라 생각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누가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불안한 세월이었다. 연재 #20 끝 부분입니다.)

 

4. 원륜상 목사 (Ralph S. Watts, sr.)

1946년 2월인지, 3월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에 내가 병원총무와 시조사 총무를 겸직하는 때였다.

하루는 병원구내를 살펴보며 다니는데 천만 뜻밖에도

군복을 입은 한 거인 같은 사람이 나타나 대뜸

“정 목사!”하는데 군인 복장인지라 곧 알아보지를 못했다.

“나 원륜상 이오!”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하는데 목소리는

틀림없이 원륜상 목사였고, 자세히 보니 미국으로 들어갔던

원륜상 목사였다. 다만 군인복장이 이렇게 사람을 다르게

보이게 했다. 우리는 얼마나 기쁜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뜨겁게 포옹을 했다. 내 평생 처음으로 서양 사람들의

가장 친근한 인사인 포옹으로 인사를 한 것이다.

나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나는 원래 감수성이

조금 부족한 사람인데, 포옹을 하고 인사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를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신자들이 평생 이러한 교제를 하면서 산다면 참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교사중에 가장 먼저 한국으로

다시 나온 이가 바로 원륜상, 이 분이었다.

“아니 원 목사!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왔소?

그러고 웬 군인 의복이요?”

“아, 편지나 전화할 수 없이 시국이 빨리 돌아가기에

필리핀에 들렸다가 이렇게 왔습니다!”

“좌우간 기쁩니다. 그래 앞으로 어디 유하고 식사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조선에도 미군들이 들어와 있으니까 내가 조선의

군정고문관으로 올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 군인이니까

며칠동안 군대 내에서 먹고 자고 할 터이니 내 염려는 하지 마시오.”

 

1940년 11월경에 선교사들이 강제로 귀국을 할 때,

그 분들이 다시 나오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 못했다. 나는 성격이 좀 무뚝뚝한데 특히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점수가 “제로”(빵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원륜상 목사와는 아주 절친했다. 특히 교회 내에서

최고의 성직(聖職)인 목사안수를 같은 날 받은 것도

우리의 관계를 두텁게 했다.

1933년 2월 10일, 안식일에 원륜상, 피일선, 박기풍, 조치환, 정동심,

이 다섯 명이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귀국했던

그 원륜상 목사가 5년 3개월 만에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으니

그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필리핀에 군정 고문관으로

주재하면서 아무래도 조선교회를 방문해야 하겠기에 모든 일을

제쳐놓고 이렇게 나온 것이라며 지금 조선에 군정고문관으로

나올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나는 이곳저곳에 연락을 하여

임성원, 이여식, 이준민, 김상칠, 오석영, 조경철 씨 등을 불러

원륜상 목사와 기쁨의 대면을 하고 우리는 그간의 일들을

서로 이야기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1904년에 조선에 복음이 들어와서

선교사들이 떠나가던 1940년 까지 36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교회를 축복하셨는가? 로부터 시작해서 선교사들이

떠나고 난 후 5년간 우리 교회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일들,

즉 충남 청양사건(1941년 4월 11일), 한국연합회 지도자들의

대량검거(1943년 2월 4일)와 수난, 일본총독부에 의한 조선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대한 강제해산명령

(1943년 12월 27일 밤)등을 이야기 할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런데 원 목사가 자기는 필리핀에

다시 가서 얼마동안 있다가 돌아올 터인데 그동안 누가 합회장의

일을 보살피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러자 임성원 목사는 “원 목사! 그것이 무슨 말이오?

지금 내가 한국연합회 회장이오!”하고 말씀을 했다.

졸지에 합회장이 둘이 생겨 버린 것이다. 원목사의 말은

“전쟁 때문에 할 수없이 미국에 들어 갈 때에 합회장 직을

최태현 목사에게 맡긴 것은 영원히 맡긴 것이 아니고

내가 돌아올 때는 모든 직분을 다시 예전대로 돌리기로

우리 모두 의논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 아니냐?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당연히 내가 합회장 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또 임성원 목사는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10월에 합회총회를 해서 당선이 되어 대총회까지 보고했으니

내가 정정당당한 합회장 이다!”라고 해서 서로 입장이

대립이 되었고 우리는 참 난감한 입장이 되었다.

함께 모였던 우리 대부분은 “한국교회가 비상상태이며

또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교회에 선교사가 다시 나와야 재건이 빨리 될 터인즉

서로 마찰이 되는 일이 없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데로

의견이 일치 되었다. 임성원 목사도 지혜가 많으신 분인지라

“내가 양보할 터이니 원 목사의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의논이 되어 원 목사가 합회장 일을 맡기로 해결이 되었다.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고상한 정신만 따른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우리는 모두 임 성원 목사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원륜상 목사의 사회로 교회의 장래 사업을 의논하다가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된 위생병원 정사영의사 문제가 나왔다.

즉 "현재 정사영 박사가 중량교 밖 상봉리에 개인이 세운

애민병원에 나가느라고 위생병원에는 오전만 일하고 있으니

오후에 병원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제였다.

나는 지난번에 이 문제로 힘든 일을 당한지라 가만히 있는데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최태현 목사의

자제 분인 최옥만 씨를 추천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원 목사가

펄쩍 뛰면서 "정 목사는 그렇게 아무나 추천을 해도 되느냐?

그 사람이 무슨 의과공부를 했느냐?" 하면서 회의석상에서

나를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원목사의 의견에 동조를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의과 공부는

안 했지만 위생 강습소를 다녀 위생관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까 회의를 인도하던 원 목사는 "닥터 루가 속히 나올 터이니

그 때 의논하자.”하고 회의를 끝냈다.

 

그런데 마침 이 회의에는 헛소문을 뿌리던 L씨도 참석을 했다.

그 회를 필하고 나오면서 L씨는 “정 목사님! 오늘 보니까,

제가 그간 말하고 다닌 것이 잘 못된 일임을 알겠습니다.

제가 공연한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라고 사과를 했다.

나는 “우리교회를 재건하려는 이때에 사실이라 해도

말을 삼가야 하는데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면 얼마나

재건에 지장이 되겠습니까? 앞으로는 특별히 말에 조심하여

우리 모두 화합해서 교회를 재건하도록 하자”라고 말을 했더니

L씨도 “잘 알겠습니다. 조심 하겠습니다”해서 그간 마음에

부담되었던 일이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참고 있으면

적당한 때에 좋은 방법으로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여 주심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 드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교회의 일을 다시 의논하면서 원 목사는

역시 우리 교회는 서선지방을 중심으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 하였다. 그래서 의논 끝에 북한지역 선교에

제일 적임자는 임성원 목사라는데 의견이 일치가 되고

원목사도 그분이라면 믿고 맡길 수가 있다하여 그렇게

거의 결정이 되었다. 임성원 목사께서도 서선대회장으로

가시는 것에 만족하시며, 또 북한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하셔서

그렇게 결정이 되려고 하는 데 갑자기 L씨는 “북한선교에는

정동심 목사가 가는 게 어떻겠는가?”하는 새로운 의견을 내어놓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 나에 관한 문제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임성원 목사도 본인이 서선 대회장을 원하시고

모든 분들의 의견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 결정이 되었다.

나는 회의가 끝난 후에 “저는 교회에서 어떤 일이 결정되면

항상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해왔고

또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 나는 일곱 명의 나이 어린 자녀를 가진

아홉 명의 대식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대식구가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런 제안을 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 그냥 적임자가 정 목사 같아서

그런 것뿐이오.”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분은 위생병원 원장의 일을 나누어 하기 위해 최옥만 씨를

추천하는 과정에서도 전혀 사실이 아닌 소문을 내어 나를

힘들게 하셨던 분이었다. 이 회의에서 서울위생병원 총무에

이준민 씨를, 조경철 씨는 문서전도 부장으로, 이여식 목사는

교육 부장으로 정했다. 원 목사는 곧 필리핀으로 갔다 와야 하겠고

또 한국에 다시 나와서도 군정고문관의 일도 계속 보아야 한다고

입장을 피력하면서 합회부회장에 정동심 목사를 추천한다고 해서

명칭은 합회장 서리로 해서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한국선교사업이 조금씩 궤도에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회의가 끝난 후 원 목사는 내가 원동지회 부회장으로

피선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뜻밖의 소식에 “그렇게 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만한 사람도 못된다.”고 사양을 했으나

“해방 후의 한국 사정과 선교를 위해서는 그 길이 좋으니

가만있으라.”고 해서 원동지회 부회장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한편 제칠일 안식일재림교회 제 46회 세계대총회 대표자를

선출하기로 했다. 1930년에 열린 안식일 교회 세계 총회 때에는

조선인으로 이근억 목사가 처음 참석 하였었다. 이근억 목사는

1915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목사안수를 받으신 유능한 분이신데

대총회를 다녀오신 후인 1931년에 별세 하셨다.

이번 46회 대총회에 대표자로 참석하는 분은, 선교사들이

모두 떠나가고 교회해산이 되어 버린 1940년 11월부터

1945년 10월 까지 만 5년 동안의 교회의 참상과 현재의 사정을

보고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는 관계로 영어도 좀

할 줄 아는 이여식 목사로 결정 하였다.

1946년 4월경,

원륜상 목사가 당분간 한국 연합회장일을 보면서 군정에도 들락거리고,

임성원 목사는 이미 북선대회로 가셨다. 나는 원 목사를 대신하여

대부분의 합회장의 일을 해야 했다. 아직 교회의 각 부서들과

기구가 정리되지 못한 때라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힘에 벅찼다. 더구나 합회장이 필리핀으로 들어간 후 합회장의

모든 일들을 처리한다는 것이 매우 힘에 겨웠다.

교회의 재건기(再建期)라 별의별 질문이 많았고

일일이 대답을 주어야 했다.

 


1946년의 일이다.

하루는 원목사가 필리핀 가기 전에 합회에서 몇 분들과

의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보니 사역자자녀들 중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많은데

정목사의 자녀들은 대학 나온 사람이 없으니 유감이오.

정 목사의 많은 자녀 가운데 대학을 갈 만한 자녀가 없습니까?”

“원 목사의 의견은 감사하지만 나는 자녀가 많아 초등학교도

보내기 힘든데 대학이라니요?

“정 목사, 그래서 하는 말인데 대학을 보낼 길이 있으니

대학갈 아들이 있으면 추천하시오”

“글세, 내 아들 가운데 전실 소생 중 막둥이 태중이가 지금

광신상업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애가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가

있다면 좋겠지만 방법을 모르겠소.”

“아, 그러면 태중이를 필리핀으로 보내기로 결의합시다.”

“결의라니 무슨 결의를 해야 합니까?” 나는 내 자녀 문제로

교회에 누가 되나 해서 펄쩍 뛰었다.

“내가 이제 필리핀에 곧 갈 터인데 여기서 결의만 해주면

내가 유학을 주선하겠고 거기 가서 노동도 하고 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오.”

“글세, 내 아이 일이니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자 모두 좋은 일이라고 결의를 해 주어 태중이는

필리핀으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내 아이들 중에서

처음으로 태중이가 대학을 가게 된 것이다.

 


태중이는 함경남도 원산제일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에

성적도 괜찮았지만 글도 잘 썼다. 한번은 그 학교교지 “청공(靑空)”에

기고를 한 일이 있었는데 “아주 잘 지은 글이라”하여 교지에

실리고 칭찬이 자자했었다. 학교에서 나에게 칭찬의 글과 함께

그 잡지를 보내 왔다. 내가 중선대회로 전근이 되자 태중이는

당시에 무자격으로 인정이 되는 서울동명학교에 전학하여

이 학교를 졸업했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그전보다 자녀교육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어서 태중이를 상급학교에 진학을

시키기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목사의 자녀인지라

어느 학교를 가든지 안식일문제만은 해결을 보아야 했다.

그래서 태중이를 데리고 평안남도 순안에 있는 우리교회 학교인

순안의명학교를 찾아 갔다. 그러나 이미 순안의명학교도

학제가 변하여 동명학교처럼 무자격으로 인정되는 학교의 졸업생은

못 받는다고 하면서 검정시험을 치라는 것이었다.

검정시험을 치룬 결과 좋은 성적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우리의 재정사정을 알아 본 결과

태중이를 입학시켜도 학교후원금을 지불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낙방을 시켜 버렸다.

 

내 마음이 아픈 것은 뒤로하고 태중이 보기에 매우 난처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회기동에서 통학하기에 힘은 들었지만

망우리 고개 너머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3년제

상업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이 학교는 사립학교인지라

안식일 문제를 쉽게 허락하기에 여기에 입학을 시켰다.

3년간 이 학교를 다니고 드디어 졸업을 할 때가 되었는데

졸업생들에게 학교에 기부금을 내라는 통지가 왔다.

나로서는 도무지 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졸업은

시켜 주겠지.” 하고 졸업식 날 학교를 갔으나 “웬걸!”

결국 졸업장을 안 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3년 공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었다. 안식일문제 해결을 위해

그 먼 길을 3년이나 통학을 했는데 결과가 이러하니,

나도, 태중이도 깊은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은 한치 앞을 못 내다본다.”고 했던가?

이 때에 가야마(香山)라는 선생이 내 집 건너 방에서

살림을 하면서 어떤 학교에 근무하고 계셨다.

태중이의 일을 듣고는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에

보결로 입학을 시켜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말씀이라도 감사했다. 나는 가야마 선생에게 “내가 안식일 교회

목사로서 태중이는 어느 학교를 가든지 안식일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며 또 보결입학은 상당히 많은 후원금을

내야 되는데 내 사정으로는 그것이 전혀 불가능함을 말씀드리고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 하다.”고 전했다.

가야마 선생은 “자기가 이미 모든 문제를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고 수속을 하라.”고 했다.

용기를 내어 수속을 한즉 안식일문제는 물론 보결수속비도

별 문제 없이 입학이 되었다. 가야마 선생이 근무하시던

이 학교는 바로 회기동에 소재했던 광신상업학교로 5년제였고

당시에는 좋은 학교에 속했다. 태중이도 이 학교에 입학을 하자

기뻐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원륜상 목사의 도움으로 필리핀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으니 가야마 선생과, 원 목사와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1948년 봄,

태중이는 필리핀 유학을 떠났고 무사히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태중이가 필리핀에 간지 약 2년 후에

한국에서는 6.25 동란으로 모든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태중이가 이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라

생각이 된다. 1952년, 태중이는 필리핀 유니온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몇 년 동안 교육사업에 헌신하다가, 뜻 한 대로

의과대학을 마치고 도미하여 의사로서 활동하며 또 교회의 장로와

찬양대장등으로 크게 헌신하는 것을 볼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와

가야마 선생과 원륜상 목사에게 감사드린다.

 

원 목사가 잠시 필리핀으로 가신동안 나는 어리석은 일을

한가지 하고 말았다. 하루는 회기동교회 교우 한분이

사무실을 찾아와 “저는 이 회기동 바닥에 친척이라고는 한 집도

없는데 지금 미곡상을 하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하며

여러 가지 말을 횡설수설 했다. 시간이 바쁜 나는 “당신이 원하는

골자(骨子)가 무엇인가?”하고 물으니 “일본시대에 법에 따라

한 집을 임대계약하고 미곡상을 겸하여 생활을 꾸려왔는데

해방이 되자 집 주인이 이제는 계약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당장 집을 비우라니 갈 곳도, 먹고 살 방법도 없으니

합회사무실 앞에 공지(空地) 몇 평만 빌려 주시면 임시로

들어앉을 방을 만들고 미곡상을 계속하면서 살겠으니

허락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정에 약한 나는 어리석게

회의도 하지 않고 허락을 해 버렸다. 한편 “합회사무실 앞에서

무슨 미곡상이 되랴? 조금 하다가 걷어치우고 가겠지!”하는

생각도 있었기에 그런 어리석은 허락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미곡상이 잘되어 나갔다. 그 때서야 나는

정신이 들어서 “비록 작은 땅이지만 후에 안나가겠다고

할 수도 있겠다.”싶어서 “합회의 토지를 사용하되 합회에서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반드시 철거하겠다.”라는 뜻이 포함된

계약서를 만들고는 그 분을 사무실로 오라고 했더니 다행히

그 서류에 도장을 찍고 갔다. 그 후 그 미곡상이 점점 장사가

잘되어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매우 기뻤다. 그런데 장사가 잘되자

방위에 방을, 또 방 옆에 방을 새로이 만들고 전화가설까지 하는 등,

점점 범위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좀 자제하라고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 교우가족의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렸으니 그냥 두었다.

 

얼마 후에 필리핀에 갔던 원륜상 목사가 돌아와 합회장 일을 보기

시작했다. 첫 눈에 띈 것이 바로 이 교우가 합회 사무실 앞에 방을

내고 미곡상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가서 철거명령을 한 모양이었다.

그 교우가 원 목사에게 “정 목사에게 허락을 받은 것인데

왜 당신이 헐라고 하는가?” 하면서 반항을 하고 철거명령에

거절을 하니 일이 참 딱하게 되었다. 원 목사는 나를 불러

“정 목사! 일을 어찌했기에 이 지경이오? 정 목사가 벌려놓은

일이니 정 목사가 어떻게 해결하시오!”라고 했다.

나는 그 교우에게서 받아놓았던 토지사용증명서류를 가지고

그 교우에게 갔다. 나에게도 철거불가를 말하며 대 들기에,

그 분에게는 매우 딱한 일이지만 그 서류를 들이 밀자 부득불

그는 며칠 후에 나를 원망하며 철거를 했다. 나의 어리석었음을

몹시 후회 했다. 아무리 신자사이라도 질서와 규칙을 따라,

회의를 거처 일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조경철 씨를 문서 전도부장으로 선출은 했는데 시조사는 아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 딱하고 안타까웠다.

원륜상 목사는 필리핀에 가셨고 재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든

상태이니 시조사에서는 아무 인쇄물도 발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교회가 해산 될 때에 시조사의 종교 인쇄물들이

필요 없음으로 재고품 중에서 상당한 양의 “현대 진리”라는

대형 전도 잡지를 근방 과수원에서 사용하려고 가져갔던 것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것을 회수하여 문서 전도를 했는데

그 “현대 진리” 잡지가 얼마나 잘 팔렸는지 우리 모두 기이한

섭리로 인도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원목사가 귀국했다가 필리핀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美軍政) 고문이 되면서 완전히 그 일에 매달리게 되니

명목만 합회장이지 부 합회장인 내가 거의 합회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 목사가 군정고문이 된 덕분에

교회재산회복이 매우 수월했던 점은 간과할 수가 없다.

원 목사는 군정고문의 일이 그렇게 바쁜데도 종종 합회로 나와서

교회 일에도 고문 노릇을 많이 하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매우 감사하다. 뿐만 아니라 식구가 많은 나 개인의 일을 도와주려고

마음을 많이 쓰곤 했다. 한 번은 나를 불러 “정 목사가 원한다면

적산가옥 중 하나를 택하여 알려주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

이 문제만은 속히 대답을 해 주는 것이 가하다고 생각이 되어

즉시 나는 원 목사에게 “나는 오두막 같은 집이라도 가지고

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거절을 하고 그 방면에는

생각을 두지 않았다. 이 때에 내린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고 그 후에 생각을 해도 그 결정에 대해서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후련한지 모르겠다.

 

5. 남선 대회

1947년 초,

원 목사도 합회장의 일을 시작하고 북선대회는 임성원 목사가

맡아서 잘하고 계셨고 대 총회에 갔던 이여식 목사도 돌아 왔다.

교회도 조금씩 정돈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47년 6월 경,

행정위원 몇 명이 합회에 모여서 충청남도,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를 남선대회로 하고,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지역을

중선대회로 하기로 했다. 당시에 나는 중선대회장의 일과

합회장 서리 (합회 부회장)의 일을 보며 중선지방의 정상화를 위해

새로이 일을 시작한 때였고 남쪽지역은 김명길 목사께서 그 지방을

정상화 시켜 보려고 열심히 일을 시작 한 때였다.

남선지역을 남선대회로 정한 것은 그 지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김명길 목사를 그 지역 대회장으로 승격시켜 교회의 정상화를

속히 이루려 함이었다. 그래도 형식상 두 대회의 책임자를 회의

형식으로 택하자고 말이 나왔는데 갑자기 이O목사가 근본 의도와는

달리 “남선대회에는 정 목사가, 중선대회는 김명길 목사가 오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행정위원들은

최선의 교회선교 회복을 위해서 대회를 둘로 나누고 중선지방에는

정동심 목사가, 남선지방에는 김명길 목사가 적임자라고

공감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느닷없이 한 분이 너무 강력하게

반대로 주장을 하니 아무도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회의 중, 쉬는 시간에 나는 이O목사에게 왜 나를 남선대회로

그렇게 보내려고 애쓰는지 그 이유를 묻자 “남선지방이 하도

우리 교세가 열악(劣惡)하여 정 목사 같은 유능한 분이

가셔야 된다.”는 말로, 당시 상황으로는 정 반대가 되는 것을

이유로 들어 나를 설득하려 하셨다. 허나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참된 이유는 “내가 원륜상 목사와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고

원 목사가 나에게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이 못 마땅하여 나를

원목사가 계신 서울로부터 떠나게 하려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이O목사가 너무도 곤경에 처한 일이 있을 때 나는

그 분의 일을 해결하기위해 나 개인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관계요로(官界要路)를 찾아다니면서 일을 해결해 드린 분인데

갑자기 이렇게 주장하고 나오시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참된 이유를 알게 되자 나는 나의 신앙을 위해서는 물론,

원 목사를 위해서도 남선대회로 자원을 해서라도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O 목사는 앞으로 나와 관계된 일이라면

정식회의를 통해 결정된 일이라도 원 목사가 정 목사를 편애하여

특혜를 준다고 말을 하고 다닐 것이 확실해 보였고, 일이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교회에 결코 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요청을 해서라도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 더구나 나는 지난번 북선대회로도 가기가 힘들다고

한 적이 있기에 아무 말 아니하고 결과에 따르기로 했다.

사실 이 회의에는 김명길 목사가 참석하신 것도 아니고

당시의 교회 상황으로 보나 식구가 많은 나는 그대로

중선대회에 계속 있겠다고 요청하면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요청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결정이 될 것은 자명하나,

교회의 덕을 위해서는 이 길을 택함이 덕이 된다고 확신했고

내 뜻을 밝히자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나는 합회장 원륜상 목사에게 “내가 남선대회장이 되었으니

내가 남선대회로 이사 가기 전에 남선대회 지방을 한 번

돌아보고 왔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했다. 그 이유를 묻기에

“이제 새로 남선대회를 시작해야 하니 얼마 동안은 지방을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을 들으니 호남지방에는 예배당이

다 초라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가서 보고 합회가 도와줄 곳이

있는가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했더니 쾌히 승낙을 했다.

정말 다녀 보니 전라 남북도에 계시는 우리 교우들은

몇 분 아니 계신데, 사는 형편도 어려우신 분 들이라 예배당이

너무 초라하고 수리할 필요가 있어도 손을 못 대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교회해산 후에 신앙심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야말로

한심한 형편이었다. 교우들은 교회를 수리하기 위해 헌금할 뜻도

없었고 그럴 형편도 되지를 못하였다.

합회에도 자금이 별로 없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남선대회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낙담부터 되었다. “이렇게 낙담부터 해서는

아니 되는데!”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적들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필요 되는 점을 자세히 적어 합회장 원 목사와

마주 앉아 보고서를 제출하며 자세히 설명하고 호소를 하였더니

그 어려운 중에서도 이 지역을 위해 보조를 해 주어서 교회건물을

수리 또는 복구했다.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이라는

말이 생각되며, 한편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주의 말씀이

이루어 진 것 같아 감사를 드렸다.


1947년 9월경,

나는 충청남도 대전(大田)에 남선대회본부를 두기로 하고

남선대회장으로 부임을 했다.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충청남도까지 5도를 순회하면서 돌아보니까 너무

지역이 넓었다. 넓은 지역이기도 하지만 거의 다 새로

시작을 해야 할 판이니 일이 벅차겠다고 느껴졌다.

당시에 합회에 김용길 씨라는 분이 트럭을 다루고 있었기에

내 이사를 부탁하니 쾌히 승낙을 해서 트럭에 우리

이삿짐을 싣고 1947년 9월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태중이도 유학가기 전에 아버지가 이사 가는 집을

한번 가보고 싶다 해서 함께 대전으로 내려갔다.

나와 아내는, 12살 된 넷째 아들 태목이, 11살 된 딸 경실이,

4살 된 태국이, 그리고 2살 된 막내 태경이를 데리고

일곱 식구가 트럭을 타고 대전으로 갔다.

당시에는 도로 사정이 나쁜 시절이라 대전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졌다. 마침 그곳에 계시던 김명길 목사의 가족,

이응준 선생의 가족, 권숙련 선생의 가족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우리 대 가족을 위하여 저녁식사까지

잘 대접해 주셨다. 저녁까지 먹고 나니 짐을 내리기에

너무 지쳐서 김명길 목사에게 “짐을 그냥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부려도 괜찮을까?” 물으니 “아, 여긴 서울과 다르니

염려 말고 주무시라”고 해서 짐을 그냥 둔 채 잠을 잤다.

밤중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서 아무래도 나가보고 싶어서

밖으로 나와 보니 가져온 자전거와 가방이 없어졌다.

태중이가 유학가면서 가져가려했던 가방도 없어졌다.

그래서 밤중이지만 김명길 목사를 깨웠더니 “대전이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말씀만 하시니 발을 동동 구른들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왕 나온 김에 집 주위를 돌아보니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워두어 갈 수가 없어서인지

버리고 갔다. 길로 나가 보니 가방도 안에 입던 옷이나

들었으니 내버리고 갔다. 모두들 놀랬지만 다 찾았으니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부임 초에 그렇게 소란을 당하고

보니까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이틀 후에 김명길 목사 가족과 태중이는 우리가 타고 온

트럭으로 서울로 갔다. 나와 김명길 목사 두 사람은

각자 교회재건의 일을 시작했던 곳을 그대로 두고,

본의가 아니게 서로 낯선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지만

주님을 믿고 열심이시던 김 목사의 앞길에 주님의 은혜로

큰 성공이 있기를 위하여 기도드렸다. 사단은 항상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교회 사업에 어려움을

주는 것을 다시 보면서 마음이 착잡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항상 쉬지 말고 기도를 하여야 함을 다시 깨달았다.

이역만리에 유학을 가는 태중이의 앞날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남선대회로 자리 잡은 곳은 충남 대전시 효동 132번지였다.

옛날 충남도지사가 살던 집으로 집이 다섯 채가 있었다.

실은 교회가 해산되기 전에 남선대회로 정하고 이곳에서

정붕상 목사가 시무하던 집인데 교회가 해산이 되자

아무것도 정리를 안 한 채로 고향인 서선지방으로 가버리신 후에

그 후 그냥 방치되어 얼마나 퇴락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붕상 목사 후에 김명길 목사가 이곳 사역자로 와있는 동안,

교회해산 전에 사역을 하시던 이응준 선생과 권숙련 선생

두 가족이 다른 채를 세내어 사시고 계셨다.

집은 다섯 채나 되었어도 사무실이나 교회당도 없었다.

그중 제일 큰 집 방 한 개를 내어서 예배만 겨우 드리고 있었다.

해방 후에 신자들이 전력을 다하여 신도대회를 열고나서

김명길 목사를 대전으로 파견하였으나 합회가 재정적으로

지방교회를 도울 형편이 안 되어 김명길 목사는 많은 수고를

하면서도 집을 관리하거나 수리 하는 것은 포기하고 계셨다.

집들의 모양이 흉측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짐들을 드려 놓고 생활을 시작했다.

특별히 감사 한 것은 아내는 물론이고 어느 아이도

불평 한 마디 없었던 것이다. 대전으로 이사 올 때는

태목이와 경실이가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왔음으로

대전 신흥국민학교에 전학을 시켰다. 교장선생과 담임을 만나

안식일 문제를 의논하니 그리 힘들지 않게 허락을 했다.

해방이 되고 보니 전학문제도 일정시대보다는 퍽 쉬웠다.

 

우리말에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 했는데 명색이 남선대회장이지,

직원 한명 없이 한 번도 와 본적이 없는 이 곳에 혼자 왔으니

그야말로 독불장군 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무실도, 교회당도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 혼자서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하는 낙망된 마음만 자꾸 생겼다.

며칠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여러 가지 생각만 하며 지냈다.

틀림없는 조선 땅인데도 외지에 와 있는 느낌뿐이었다.

그러자 낙망한 나에게 등 뒤에서 “그 훌륭한 자기나라를

뒤에 두고 우리처럼 작고 빈궁한 나라에 포교하기 위하여 나온

선교사들을 보지 못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리면서,

“하늘을 떠나 이 천하고 작은 지구성에 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일을 생각해 보라!”는 음성이 내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어렵고 외로운 처지에 처하고 보니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와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나를 대회장이라고 보낸 것이지, 한 교회의 담임 목사로 보낸 것도

아닌데 겨우 대전교회 한 가지만 보고 이렇게 낙망을 해서

앞으로 어떻게 이 큰 지역을 맡아 일하려고 이러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경우에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없을까?”하고

며칠간 기도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기도를 드리는 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3년 동안 가르치시고

내어 보내시며 “너희는 이방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음성이 들렸다. 나는 무릎을 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해방이 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교회해산으로 잃어버렸던

양들을 찾아 나섰어야 했다.”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강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어디에서 잃은 양을 찾을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자 당장 한 울타리 안에도 두 분이 계시고,

목포에도, 마전에도, 경남 부산에도 한 분, 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났다. 사실 이 분들은

“독불장군”이 된 나를 도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급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이분들의 마음에 상처를 안주고 어떻게 호소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합회에서 서신이 왔다.

“그간 교회 내에서 회계를 할 사람이 없어서 합회에서

회계할 사람을 양성했는데 그 중에 북한 사람 김O 씨라는 사람을

합회에서 남선 대회로 보내기로 의논이 되었는데 받을

의향이 있는가?”라는 서신이었다.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당장 보내 달라.”고 회답을 했다. 이제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직원 한 분이 더 온다면 그야말로

“돛단배에 순풍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답을 보낸 직후에

정작 당사자인 김O 형제가 내게 편지하기를 “미안하지만

남선대회에서 저를 받지 않겠다고 연합회로 편지를 해 주십시오”했다.

그제야 나는 “아하, 새로 시작하는 대회로서 초라하기가 그지없고,

사무실도 변변한 것 하나도 없는 이곳의 소문을 들었던가,

아니면 젊은 사람이니 서울을 떠나 이런 곳으로 오기가

매우 거북할 수도 있겠다.”라고 이해가 되어 다시

“김O 씨를 받을 마음이 없다.”고 편지를 합회로 냈다.

그 당시에 남선대회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누구도 오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 것인데 하물며

젊은 부부가 왜 서울을 떠나고 싶었겠는가?

 

그랬더니 얼마 후에 김O 씨가 다시 나에게 편지하기를

“미안하지만 남선대회에서 저를 받겠다고 연합회로

다시 편지 해 주십시오.”라고 편지가 왔다. 그래서 다시

“남선대회에서 김O 씨를 받을 의향이 있다.”고 합회에

편지를 내었더니 김O 씨가 회계로 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합회에서 김O 씨보고 “남선대회로 가라.”고 했는데

"남선대회로 갈 마음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아무 곳도

보낼 곳이 없다.”라고 해서 다시 남선대회로 오게 된 것이다.

막상 김O 형제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나의 존경하는 친구 김OO 장로의 장남이었고, 훌륭한

내조자를 데리고 와서 마음 든든하였다. 누군가 교회의 일을

의논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고 감사한 일인 줄을

새로이 깨닫고 감사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2

 

(막상 김O 형제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나의 존경하는 친구

김OO 장로의 장남이었고, 훌륭한 내조자를 데리고 와서 마음 든든하였다.

누군가 교회의 일을 의논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고 감사한 일인 줄을

새로이 깨닫고 감사했다.연재 #21의 끝 부분)

 


6.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1943년 12월 28일 아침,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해산문을 받고

교역에서 물러나 더 이상 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계신 분들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이라 이름하고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때 물러나간 사람들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라도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해산 통지서를 받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 것이며 그 후 그들이 겪어야 했든

그 어려움이 얼마나 심했으랴?!!

 

그런 분들 중에서 우선 나와 한 울타리 안에 살고 계시는

이응준 선생과 권숙련 씨를 찾았다. 내가 신자들을 데리고

예배드릴 때에 이 분들은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를 못해서

민망해 했고 우리나 가족들도 서로 보기에 참 민망했다.

그래서 그 두 분 댁에 들려서 “이제 해방 된지 벌써 3년인데

그전에 교회 일을 하시던 분들이 지금 안식일도 제대로

못 지키고 계시니 내가 오히려 미안합니다. 이제라도

교회가 당신들을 부르면 다시 일할 마음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두 분 다 ”아, 교회에서 부르기만 한다면야 교회 일을

하다마다요!”했다. 그리고는 아직 어떤 보직도 주지를 않았는데

그 분들이 다니던 직장에 사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정신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용기가 참으로 가상했다.

 

우리 재림교회의 사업 부문 중에 중요한 부문인

문서 전도부를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박찬문 씨를 부르기로 했다. 박찬문 씨는 전북 금산군

마전 태생으로 불신자의 가정에서 소년시절에

우리 교회로 나온 청년이다. 이십 세도 되기 전에

문서전도를 매우 성공적으로 한 분이기에 남선대회

문전부주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 분은 교회해산 당시에도

신앙을 잘 간직한 분들 중 한분이시다. 이분에게 몇 번씩

사람을 보내어 문전부주임을 맡도록 권해 보았으나

매번 거절을 했다. 생각다 못해 내가 직접 권해 보았으나

사양을 하면서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 월급을 가지고는 생활고를 견디기 힘들어 하니,

나도 이제 더 이상 교회월급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셨다.

이 분도 식구가 많으신 분이라 그 사정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대회가 문전부를 새로 만들기 위한 것이니

잠간이라도 맡아서 시작만 해주고 조금 궤도에 오르면

그만 두어도 좋다고 했더니 잠시만 한다는 조건으로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조금씩 대회사무실이 자리 잡히기에 지방순회로

전라남도 목포에 가니, 목포교회의 사택에 허만식 씨가

살고 있었는데 이 분도 역시 교회 일을 하다가 지금은

다른 직장에 다니며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계셨다.

나는 허만식 씨에게도 웃으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교회 사택인데 교회 일을 할 사람에게 사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 선생도 교회에서 부르면 그냥 사택에서

사시면서 다시 교회 일을 할 마음이 있는가?” 물으니

“아, 교회에서 부르지 않아서 그렇지, 교회가 부르기만 한다면

다시 일하지요!”라고 하기에 허만식 씨도 다시 불러

교회전도부에서 일하도록 해 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다음에는 신종균 형제가 부산에 있다기에 찾아 갔더니

부산에 있는 어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직업이 이분의 성격에도 맡는 것 같고

또 즐겨일하고 계신듯해서 교회 일을 하기위해서 다시

오라는 말을 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다시 일할 마음이 없는가?”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일할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기자직을 내어 놓고 기다리라 했더니

성격이 화끈 하신 분이라 곧 그리 하였다.

 

김동윤, 류재목,

이 두 분도 교회해산 당시에 유급생활은 아니 했으나

문서전도부에서 많은 수고를 하시던 분 들이라

“이제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문서전도부에서 일할

생각이 없는가?”하는 의견을 타진하니 “즐거이 다시

일하겠다.”고 하시더니 불원간 돌아와 문서전도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교회의 유급 사역자로 일을 하다가 목사 안수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대강 이러한 분들을 다시 교회로 오라하기는 하였는데

대회로서는 이 분들을 사역하게 할 만한 자금이 없었다.

이 분들은 용기 있게 직장에 사직을 하고 대회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어깨는 무겁고 잠이

오지를 않았다. 연합회와는 일언반구도 의논을 하지도 않고

이렇게 일을 저질렀으니 합회장의 얼굴을 보기도 미안하였다.

그러나 기도를 드리고 용기를 내어 염치 불구하고 합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43년 12월 27일 교회 해산과 함께 정직되었던

다음 몇 분들을 복직시키기로 생각하고 있으니

남선대회를 위하여 실수 없이 결정하여 주십시오,

특히 한 분은 문서전도부의 책임자로 신규 채용을

해야 하오니 고려하여 결정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이응준, 권숙련, 허만식, 신종균, 신규채용에 박찬문

제씨의 이름을 올리고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합회에서는 내가 진언한 남선대회의 상황과

제출한 분들에 관하여 난상토의(爛商討議)끝에 모든 분들을

적당한 곳에 배치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조금도 과장함 없이,

마치 내가 부름을 받는 것 이상으로 마음이 기뻤다.

합회의 통지에 의하여 이응준 씨는 경산학교에,

권숙련 씨는 경북 안동에, 허만식 씨는 전남 목포에,

신종균 씨는 경남 진주에, 박찬문 씨는 대전에 있는

남선대회 문서전도부장으로 배치를 했다.

이때 나는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감사하였다.

어느 지방보다도 남선대회는 교회가 한곳도

제대로 정리가 된 곳도 없을뿐더러 부임지의 사정도

매우 어려웠지만 모두 기쁜 마음으로 부임하는 것을 보면서,

이분들의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나는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 안에서 부디 성공하기를 기도드렸다.

박찬문 씨는 남선대회 문서전도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호남대회가 생긴 후에 그곳으로 가서

목사안수까지 받고 본인의 많은 가족들을

교회 안에서 양육하여, 각 곳에서 교회를 도우며

특히 맏아들 되는 박성우 군은 목사로써 수고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외의 모든 분들도

각자 부임한 곳에서 열심히, 기쁨 중에서 일하시다가

모두 목사의 안수를 받으시고 두어 분은 대회장까지 지내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깊고 크시다.

한국이 독립하면서 사회가 혼란하고 살기 어렵겠다고 해서

대총회에서 구호품이 많이 나왔다. 그 구호품의 양도

상당히 많았고 종류도 다양했다. 주로 의복이나 건포도 같은

것이 많았다. 남선대회에도 상당한 양이 오곤 했다.

나는 각 교회로 구호물품들을 보내고, 두 분 대회직원인

박찬문 씨와 김응식 씨를 불러 “근방 동회(洞會)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도 대회에 할당된 구호품을 나누어주는

것이 어떠한가?”하고 의논을 하자 적극 환영하였다.

그래서 대회 바로 옆에 있는 대전시 효동동회와,

조금 떨어진 문화동동회를 통해 구호품을 분배하자

얼마나 감사해 하고 교회에 대해 호감을 갖는지 몰랐다.

우리는 구호품을 주면서 “미국에 있는 안식일교인들이

한국 안식일교인들이 어렵겠다고 해서 이것들을 보냈는데

우리만 쓸 것이 아니라 근방에 있는 당신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드린다.”고 하자 물품이

부족한 때인지라 모든 주민이 감사해 하고

또 우리교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지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교회는 그 지역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좋은 관계를 갖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새로 대회를 시작했으니 정리할 문제도 많았고 새로 생겨나는

문제도 많았지만 영남과 호남지역에서 팔렸던 예배당을

찾아야 교회가 집회를 시작할 터인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몇 곳에서는 교회를 다시 찾았으나, 그 중에서

경상남도 진주는 힘에 겨웠다. 모든 교우들과 의논하고

기도드리며 예배당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해산당시에 진주교회를 사려고 돈을 조금 지불했던 사람이

그 지방 제일의 불량자이었는데 얼마나 위협을 해대고

못살게 구는지 재산환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보다도

교우들이 매우 섭섭해 했다. 그러나 교우들과 사역자가

협심하여 기도드리면서 일치단결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한 예배당보다 훨씬 아름다운 2층집을 마련하여

교회로 삼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화가 굴러 복이 된 셈이다.


대전에 온지 2년이 되어 가는데 연합회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어떤 사역자 한분이 천신만고 끝에

만주로부터 서울까지 왔는데 남선대회에서 채용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분을 아는 사람은 남선대회장 정동심 목사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선대회 예산이 비록 적지만 이 분을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분은 북 간도 용정에서

김규혁 목사 당시에 우리 교회의 일을 시작했었으나

지금 김규혁 목사는 은퇴를 하셨으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나와 이분과의 인연은 1926년 북 간도 용정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분의 이름은 김완식 전도사로서

당시에 감리교인이셨다. 용정에서 그 어려웠던

장막 전도회를 끝내고 나서 이 분은 감리교 목사의 허락아래

묵시록 예언에 관하여 알고 싶다고 찾아와서 함께

예언을 공부하다가 극적으로 개종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20년 만에 대전에서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을

말로 형용하기가 힘이 들었다. 김완식 전도사는 부인,

두 아들, 딸 하나를 이끌고 다섯 식구가 왔다.

남선대회가 이 분을 전남 송정리 교회로 파견하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랐다. 그런데 송정리 교회로 부임한지

1년쯤 된 후 김완식 전도사의 부인께서 남자 쌍둥이를

출산하다가 불행히도 난산(難産)이 되어 산모와 두 아이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에 막막한 일이 있다한들

이렇게 막막한 일이 있을까? 천신만고 끝에 그 먼 길을 오셔서

이제 숨 좀 돌리고 살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통곡을 했다.

 

백주(白晝)에 환부(鰥夫홀아비)가 되신 김 전도사와

의논한 결과 전도부에서 일한다는 것은 힘들겠다고 생각되어

전남 진도에 있는 학교로 부임하시게 했다. 그러나 혼자

세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 너무

힘에 벅찬지라 새로운 배필을 구하시겠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간구하며 배필을 찾았다.

구하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래지 않아서

좋은 아내를 허락하시었고 김 전도사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시다가 목사가 되시었다.

 

얼마 후, 부산에 있는 어떤 국민학교 선생이

우리진리를 깨닫고 개종하자 안식일문제로 그가 일하던

학교에서 퇴직을 당하고 남편의 실직으로 그 가정이

문제가 생겨서 거의 별거상태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이 분의 가정과 취직문제를 놓고

우리 대회 직원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나는 김응식 씨와 오래 토의한 끝에 대전에 삼육국민학교를

개설하고 이 분을 부르기로 했다. 예산도 없고, 교실도

학생도 없는 형편이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우둔하기 그지없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시작했다.

이분의 취직이 말로만 해결된 채로 퇴직 당한 분을 오시라 해서

만나보니 얌전하고 인상 좋은, 그야말로 선비 같았다.

이 분이 바로 이상록 선생이다.

 


교실은 우선 예배당으로 쓰는 방을 쓰기로 하고

교인의 자녀들을 억지로 모집을 하니 한 열명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록 선생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우리가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가정문제가 커질 것 같아 부인을 모셔오라고 권하니

이 선생은 용감하게 부인을 대전으로 오게 했다.

다행히 부인도 아무 불평 없이 남편을

열심히 돕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부인도

이 선생 못지않게 인상이 매우 온화하신 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런 어려운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을 하여 주셨다.

이상록 선생의 개종하신 일도 하나님의 인도가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이상록 선생이

부산 어떤 학교에 교사로 있을 때, 하루는

어떤 부인이 자기 딸의 편입문제를 상의하러왔다.

의논 끝에 그 딸의 입학을 허가하자 그 부인은

자기는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 성경상

주일이 토요일이라는 설명을 하며 토요일에는

자기 딸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가정 방문을 하여 더 듣기로 하고

그 부인을 보냈다. 이 여학생의 어머니는 강원도

횡성안식일교회 교인으로 감리교에서 개종하여

신실히 교인생활을 하던 박훈옥 이라는 과댁이었다.

박훈옥 여사는 이상록 선생이 가정 방문을 하자

안식일에 대하여 성경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설명을 하자 이상록 선생은 깊은 감명을 받고 개종을 했다.

그래서 성경은 “묻는 이가 있으면 항상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신 것이다.

 

후에는 조광숙 이라는 처녀를 선생으로 모셔오고 또 얼마

후에는 김기방 씨가 와서 중학교도 시작하여 대회구내 안에

교육기관이 조금씩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회장 사택 한 방을 예배당으로 사용하여 예배를

드린 지가 10년 되었는데도 정식 예배당 없이 지내다가

학교까지 시작하니 그 불편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교인수도 늘어나서 더 이상 그대로 지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울타리 내에 있는 몇 채의 집중 제일 큰집 하나를

증수(增修)해서 대회 본부예배당을 만들자고 교인들과

의논을 하니 모두 좋다하며 온 교우들이 직접 나와서

당장 손수 고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방이

되었더라도 법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道)경찰국을 거쳐 우리지역 관할파출소에 가서

우리가 소유한 집들 중 하나를 중수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려고 하는데 어떤 허가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관할파출소 소장은 “예배당으로 쓰려고 증수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가서 증수를

하세요!”라며 친절하게 구두(口頭)로 허락을 해 주었다.

일정 시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해방이 좋기는 좋았다.

 

그런데 일을 시켜놓고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오니

교회증수가 중지되어 있었다. 박찬문 씨와 김응식 씨의 말이

순경이 나와서 허가 없이 일을 한다고 중지 시켰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 순경은 평안남도 강서사람으로,

같은 강서사람인 김기방 선생을 찾아 왔으나 출타중이라

못 만나고 그냥 돌아가면서 우리가 교회 증수하는 일을

보고 간 모양이다. 그 후 이 순경이 다시 김기방 선생을

찾아 왔으나 이미 전라남도 광주로 전근이 되어

못 만나게 되었는데 고향사람을 두 번이나 만나러 왔다가

못 만나게 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허가 없이 건물을

증수한다고 트집을 잡아 중지시키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회 회계인 김응식 씨와 함께 구호품 중에 남아있던

마른 무화과상자를 가지고 그 순경의 집을 찾아가니 그 순경은 없고

그 부인이 올망졸망한 아이 두 셋을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마른무화과를 주니 얼마나 반가와 하는지 몰랐다.

 

후에 다시 찾아가 그 순경에게 “나도 강서 사람이라.”고 말하고

“지금 교회를 개수하는 것은 이미 구두로 허가를 맡았다.”고

설명을 해도 “정식허가장이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 이었다.

아마 일제시대에 순경 노릇을 해서 그 습관이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이미 구두로 허가가 난 것이니 당신만 양해를 해 주시면

되는 것인데 좀 사정을 보아 달라.”고 했더니 그나마 작은

물품이라도 주어서 그랬는지 “이번만 양해를 해 준다.”해서

그런대로 증축하고 수리하여 대회 예배당을 마련했다.

구두로 허가를 맡고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제 8 부. 한국동란(韓國動亂)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1. 세계 대총회 참석과 육이오 동란-제 1 부

 

1950년이 되었다.

이 해에 47회 대총회를 하게 되는데 한국대표로

내가 택함을 받았다. 감사하고 기쁘기는 한데

언어도 문제가 되지만 미국까지 가서 회의에 참석하는데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도 제대로 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언어가 문제인 것처럼 “영어 한마디 모르는 내가

대표로 간다면 벙어리가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표라는 말뿐이지 교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하고

거절의 뜻을 표했다. 그랬더니 “그 말씀도 옳은 말씀”이라 하면서

“영어를 모르는 정 목사 혼자 보내기는 뭣하니

영어 잘하는 이를 통역으로 보내기로 한다.”고 하며

박창욱 씨를 함께 가도록 결정을 해 버렸다.

 

처음부터 너무 가난해서 가기가 곤란하다고 말할 것을

이렇게 결정이 되고 보니 참 난감했다. 해방이 되자

월급은 안 올라가도 물가는 얼마나 올랐는지 양복 한 벌도

몇 백 원이 드니 양복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내 아내는 “한복이라도 깨끗하게 입어야 한다.”면서

고의적삼에 모시두루마기를 만든다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준비했다. 그런데 하루는 소포가 배달되었다.

한국인 친구도 아니고 위생병원원장인 닥터 루가

양복감 한 벌과 편지를 보내왔다. “정 목사가 미국

대총회에 간다니 기쁩니다. 준비하시는 일이 힘들 것이라

생각되어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양복 한 벌 만들 기지를

보내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함께 가시는 박창욱 형제에게도 드렸습니다.”라고 했다.

 

당시에는 사역자들이 어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하나의 비리(非理)로 인정을 해서 나는 누구에게

선물을 받아 보거나 주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사정을 아는 닥터 루는 받는 사람의 부담을 적게 하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 하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나는 언어보다도 준비할 처지가 못 되어

포기할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감사했다.

그 선물 자체도 감사하지만 그 분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났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 분의 선물로 나는

회색양복을 한 벌을 만들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태극기와 장고를 준비하고 대총회장에게 드릴

선물은 연합회에서 준비를 해 주었다. 나는 36년 전에

헤어진 순안 의명학교 선배가 미국에 계신다기에

은수저 한 벌을 선물로 준비했다. 사람마음은 이상하여

막상 준비가 되니 떠날 날자만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 47회 세계 총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상항)에서

개최되기에 한국에서 일본까지는 비행기 편으로,

일본에서 상항까지는 배편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박창욱 씨와 방례두 씨가 있었는데

방례두 씨는 자비(自費)로 가신다고 했다. 우리 누구도

비행기는 물론 이렇게 큰 배를 타본 경험은 없었고,

나만 간도 땅이나마 외국이라고 나가 보았고 모두

외국여행은 처음 이었다. 내 안사람도 남편이 미국 간다고

6월 22일인가 대전에서 서울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왔다.

1950년 6월 22일,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동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 누구도 전쟁이 곧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우리가 떠나던 날, 미국 고위층이 같은 비행기를 탄다 하여

군악대와 의장대의 사열이 요란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오르니 흰 솜 방석 같은 구름 위에 뜬 것이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부산을 지나 일본 땅에 들어서면서 내려다보니

곳곳마다 논밭이 잘 정돈이 되어 있고 또 나무들이 많아

아주 아름답고 부러웠다. “일본이 이렇게 다 만들어 놓고 나니

동양에서 패권을 잡고 싶어서 우리를 36년 동안이나

속국으로 만들었던 것이구나!”라는 감상이 생겼다.

한 시간 20여분 만에 일본에 내려서 하루를 묵었다.

일본 거리는 너무도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그리 친절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푸른 산과 밭과 논도 모두 규모가 있어 보였다.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삼고 있을 때에 왜 우리 민족을

일본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자주 데리고 갔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6월 23일,

일본 요꼬하마에서 “골든”이라는 큰 배를 타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배에 올랐더니 김상칠 씨의

작은아들 되는 김영욱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출장을 다닐 때 작은 배를 타면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괜찮았는데, 고약하게도 큰 배를 타면 조금만 흔들려도

뱃멀미가 나서 고생을 하곤 했다. 이 배도 미국서

군용으로 쓰던 것을 변조한 것인데 계속 멀미가 났다.

너무 머리가 아파 뱃전에 나와 주로 서 있었다.

앞으로 2주일이 걸려야 상항에 도착을 한다니 염려가 되었다.

거대한 미국 여객선으로 손님도 1, 2, 3등으로 구분이

되어있었는데 1등과 2등 손님은 식사 때에 이미

준비된 식탁에 앉아서 편하게 식사를 하면 되는데

이런 여객선을 처음 타보는 우리는 그것을 몰라

한 이틀 동안은 3등 식당에 가서 긴 줄에 서서

음식을 받아먹곤 했다. 한 이틀 후에 배에 선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안내해 주어 그때부터 편하게

식사를 했다. 이일로 우리는 많이 웃었다.

 

 

나는 멀미가 심해 방에 누워 있거나 종종 갑판에 나가

서 있곤 했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탁 치기에

그간 영어회화 책을 보고 겨우 몇 자 익힌 영어를 가지고

“WHY?”하고 물으니 “너 애드밴티스트(재림교인)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나는 재림교인이다, 당신은 누구냐?”라고 물으니

“자기도 재림교인이라며 필리핀서 온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보고 “대총회에 가는가?”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내가 재림 교인인 줄을

어떻게 알았는가?”하고 물어보니 자기가 몇 번 나와서 보니

당신이 담배도 피지 않고 가만히 서서 묵상기도 하는 것을 보고

재림교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여러 가지 몸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했지만 뜻은 다 통한 듯 하다.

 

그 이튿날도 또 어떤 사람이 어깨를 툭 치기에 또 “WHY"하고

질문을 하니 이 사람도 “자기는 재림교인으로 대총회에 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시아지역에서 대총회에 가는 사람들은

일본에 모여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중국 어느 대회의 대회장이었다. 내가 중국말을

몇 마디 할 수가 있어서 이 사람과 가끔 대화를 나누었다.

“후일에 하늘에 가면 만방에서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이 어떠할까?”하는 생각이 났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비록 말이 안통해도 행동을 보고

안식일 교인인 것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손짓과 몸짓을 해 가며 이야기를 해도 이해할 수가 있고

그런대로 서로 기쁘게 대화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렸다.

한편 깨끗한 생활과 행동을 통해 재림교인 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앞으로도 더욱 처신을 잘 해야 되겠다는 각오도 새로이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어떤 선원이 “너 어디서 왔냐고?”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너희 나라에 무슨 트러블이

생긴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이 배에서 뉴스를 들었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뉴스를 들을 수가 없는가?” 물으니

”너희는 이등선실 손님이니까 신청을 하면 뉴스를 방으로

넣어 줄 것이다.”했다. 내 생각에는 무전이나 레디오로

뉴스를 듣고 정리하여 방에 넣어주는 모양이었다.

그 신문을 부탁한즉 당장 가져다주는데 정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했는데 북한이 벌써 서울을

점령했다는 뉴스였다. 막상 나에게 일이 닥치고 보니

대총회를 간다는 것은 안중에 없고 대전으로 내려간다고 한

내 아내는 잘 내려갔을까? 특히 서울에 있는 박창욱 씨의 가족은

어찌되었을까 하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난리라곤 처음 당하는 것이니 아무 정신이 없이

무엇이 계속 나의 머리를 짓누르는 듯 하였다.

그 배에는 서로 인사를 나눈 필리핀 대표자,

중국 대표자등 다른 나라 목사 서너 명이 있었는데

박창욱 씨와 나, 방례두 씨, 일본에서 배에 오른

김상칠 씨의 아들 김영욱 씨와 함께 있을 때에

우리에게 “한국에서 이런 어려운 전쟁이 났으니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자!”라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필리핀 형제의 방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나에게 말씀을 하라고 해서 시편에 있는 말씀,

즉 “여호와는 우리의 산성이 되고 반석이 된다.”는 말씀을

내용으로 예배를 드렸고 박창욱 씨가 통역을 하여

서로 권면하며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걱정과 근심 속에서도

예배드리면서 서로 위로했고 머리가 아프면 갑판에 서서

기도드리면서 여행을 했다. 뱃멀미도 그랬지만

한국이 전쟁에 휩싸여 있다하니 며칠 되지도 않은

이 배 여행이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며칠 후에 동편으로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와! 하와이다!”라고 해서 하와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다.

지루한 여행이 되어서도 그랬지만 저 곳이

반세기 전에 조선인들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곳이구나 하니까 감개무량 하였다.

하와이에는 최형국 씨의 삼촌 되시는 분이 살고 있지만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반가이 맞아 주는지 너무 감사하고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김상칠 씨의 아들 김 영욱 씨를

마중 나온 추 선생이라는 분인데 김영욱 씨와 함께 있는

우리를 이리도 반가이 맞아 준 것이다. 불원(不遠)하여

세계만방에서 구원 얻는 이들을 상봉할 때에

이러한 기쁨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좋은 경치에 우리를 파묻히게 하여 서울서 날아온

근심도 잊고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래간만에 즐겼다.

그 사람은 우리가 생전 처음 맛보는 싱싱한 파인애플을

하나씩 사 주었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 생각하여도

군침이 돈다. 우리가 너무도 한국소식을 알고 싶어 하자

이분은 우리를 하와이 주재 한국영사관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당시에 하와이에는 경상남도 통영사람으로 후에

외무부장관까지 지낸 김용식 이라는 사람이 총영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분은 “걱정 마십시오! 이미 미국군대가

한국으로 나가고 있으니 선생님들이 미국 본토에 도착할 때쯤에는

그 놈들은 다 쫓겨 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우리를 안심 시켰다.

우리는 좀 마음이 가벼워져서 영사관을 나왔다.

 

우리는 김영욱 씨의 사돈되는 추 선생에게 “한국에 있는

최건주 씨의 동생이 하와이에서 우리교회를 다니고 있다는데

아는가?” 했더니 “하와이는 바닥이 작아 다 잘 알고 있다.”고 하며

그 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최건주 씨는 우리 한국 교회

초창기에 교회일과 시조사일로 수고를 많이 하신 분이다.

최건주 씨의 동생은 우리를 차에 태우고 하와이 시내와

자기가 경영하는 빠찡고 장을 구경시켜 주고 자기 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대접했다. 저녁식사 후에 항구로 나와

배를 탔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들의 목에

하와이 꽃으로 만든 아름다운 화환을 걸어 주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 떠나는 사람이 배 위에서

수많은 테이프 한쪽 끝을 잡고 땅에 있는 사람에게 던지면

부두에 있는 사람은 테이프의 다른 끝을 잡고 있으면서 흔들면

오색이 영롱한 테이프들이 휘날리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었다.

우리도 최건주 씨 동생이 테이프를 사서 그렇게 했는데

그 아름답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또 하와이는 더운 지방이라

수십 명의 아이들이 여객선 옆으로 헤엄을 치다가 동전(銅錢),

백전(白錢), 은전(銀錢)들을 던지면 그것을 찾으려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동전들을 찾아서 올라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배가 떠난 후에 알게 된 것은

우리 일행은 시간을 맞추어 배에 잘 탔는데 다른 목사 몇 명이

하와이와 일본의 시간이 다른 것을 몰라 배를 놓치고 말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 분들은 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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