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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5

(나는 비록 유복자이지만 형님과 어머님의 크신 사랑을 너무도 많이

받았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4의 끝부분입니다.)

5. 첫 아이와 희명학교 교장

집은 바로 학교 옆이었는데 방과 부엌이 하나인 작은 초가집이었다.

그래도 구들바닥과 벽을 신문지로 모두 바르고 나니

그런 대로 집 모양이 났다. 우리 부부는 너무 기뻤다.

분가한지 약 2개월 후, 산월이 가까워지자 당시의 풍속대로

아내는 순산을 위하여 11월초에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

아내는 “친정으로 가는 것이 꼭 죽으러 가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혼자 떠나기를 싫어했지만 학교에 매인 몸이라 학교를 떠날 수가 없어

중간에서 나만 돌아올 때 정말 미안했다.

이 날부터 아내가 없는 집에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허전한 것인지 알게 되고 나서야 드디어

나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일남 일녀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때부터 무릎을 꿇고 아내의 순산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드리고 또 나 자신을 위하여 기도 드렸다.

한 이 주일이 지나자 아들을 순산하였다는 소식이 와서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득남한 날짜가 사실은

1918년 11월 19일인데 부지런한 나의 형님이 출생 신고를

하루 빠르게 하시는 통에 11월 18일로 출생 신고가 되었다.

이 맏아이가 “태혁”이며 나의 어머님은 “태혁”이를

“대마동”이라고 부르셨다. 맏아이 태혁이가 태어난 지

한 달 가량 지나서 내 아내가 첫아들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아내가 돌아올 때에 찰떡을 잔뜩 소에다가 싣고 와서

학생들과 교우들이 득남을 축하하며 함께 나누어 먹던

그 기쁨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모든 일에 헌신적으로 도와준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오셔서 수고하시던

이근팔 씨 부인과 아주 사이좋게 지낸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는 화평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런데 어느 화요일 저녁, 아이가 감기 기운이 좀 있었지만

삼일 기도예배를 위해 아이를 업고 예배당에 갔다가 돌아오니

아이가 사지가 뻣뻣해 지고 기운마저 없이

숨쉬기도 곤란해 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걱정은

태산 같은데 추운 겨울밤에 감기가 심해진 아이를 안고

의사에게 가다가는 일이 날 것 같아서 아이를 아랫목에 뉘어놓고

주물러 주면서 우리 젊은 부부는 하나님께 매달려

밤새 기도를 드리면서 병든 아이를 하나님께 맡겼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보니 아이가 발버둥치며

노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도 감사했다.

기도가 최고의 약(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19년 3월 2일,

학생들이 하는 말이 학교 서편 쪽 큰길에서 큰 소리가 난다하여

나가 본즉 수천 명의 군중이 사천시장을 향하여 행진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 군중은 하루 전인 3월 1일에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 큰 도시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인 군중들인데

대동군에서 시작하여 서북을 향하여 행진한다는 소식이었다.

조금 지난 후에 사천 시장에서 큰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이것은 군중들이 사천 시장에 있는 헌병 분견소(分遣所)에

불을 지르고 헌병 분견 대원 중 여자 한 사람을 남기고는

모두 살해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여자도 마차를 몰고 가던 어떤 사람이 “저렇게 살겠다고

장독 사이에 숨은 여자를 죽일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여

군중들도 감심(感心)이 되어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며칠 후에 군 당국이 동원되어 주동자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조사를 하면서 그 살아남은 여자에게 물어본즉,

그 여자는 “마차를 몰고 가다가 자기를 살려준 이가

주동자 같다”는 진술을 하며, 그 이유를 말하기를 “흥분한 군중이

그 마부의 말을 듣고 자기를 살려준 것을 보니 주동자 같다”라고 해서

그 마차꾼은 체포되어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이 전국적인 삼일 만세 사건 중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이 사천 헌병분견소 사건과 수원 어느 예배당 소각 사건이었다.

나는 사천 만세 사건에 대하여 나의 일기장에 간단히

“사천 헌병대 전멸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다음날인 3월 3일, 나는, 이근팔 교장의 월급과

나의 월급을 찾으려 한 25리가량 되는 중산우편국에 갔다.

그런데 중산 헌병대 사복형사들이 우편국에 들어오는

조선 청년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가는 것이 아닌가?

이때 나도 22세 된 청년이니 꼼짝없이

붙잡혀 가게 될 참이었다. 드디어 사복형사가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나는 겸손하게

희명학교 교사인데 월급 찾으러 왔다고 하니

들어가게 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형사가

가지를 않고 내가 돈 찾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 갑자기 내 머리에, 어제 날짜에 별다른 설명이 없이

“사천헌병대 전멸”이라고 내 회중일기(懷中日記)에

기록한 것이 떠올랐다. 이제 돈을 타고나면 그대로 잡혀가

조사를 당할 것이 틀림이 없는데, 설명도 없이

“사천헌병대 전멸”이라고 쓴 것은 틀림없이 문제가 되어

감옥은 물론 심하면 죽을 일이 분명한지라 정신이

아득해 지기 시작했다. 그 형사는 계속 내 쪽을

주시하고 있기에 나는 곁눈으로 그 형사가

딴전 보는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그 형사가 잠깐

다른 데를 보는 틈을 타서 일기장을 꺼내어 짐작으로

딱 펼치니 다행히도 3월 2일자가 나오는 것이었다.

단숨에 3월 2일 한 장을 찢어내서 입에 물고는

그날 일기 한 장을 순식간에 먹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돈을 찾은 후, 막 돌아서니 언제 들어 왔는지

중산 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기시까와 교장이

줄에 서 있다가 반가운 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기시까와 교장은 사립학교를 감시하는 책임을

겸하고 있어서 경찰과 군대 내에서 알려져 있던 일본인으로

종종 내가 근무하는 희명학교도 감시 겸 시찰한 일이 있었기에

내 얼굴을 알고 있는 터였다. 기시까와 씨는 나에게

“희명학교에서도 만세를 불렀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도 아시다 시피 우리학교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세 부르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고

마치 서로 잘 아는 사이인양 말했다.

그러자 이 일본 교장이 이날따라 나보고 큰 소리로

자기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라고 친절하게?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사양을 했는데 나를 지키던 형사가 이것을 보고는

안심이 된 모양인지 드디어 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 주사

나를 살리신 것임을 믿고 속으로 감사하면서 뒤로 돌아섰다.

바삐 집에 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점심도 안 사먹고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약 한 시간쯤 걸어오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는 “헌병 분견소가 전멸된 사천시장 지역에는

지금 평양 본부에서 보병들을 풀어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큰길에서 조선 청년들을 모두 붙잡아 가니

큰 길로 가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큰길을 피하여 산등성이로 올라서 살피어 본즉

황색 복을 입은 군인들이 모든 촌락을 샅샅이 뒤지는 것을

멀리서도 넉넉히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이리저리 피하여 거의 해질 무렵에 학교에 도착하니

순안 의명학교에서도 학생 몇 명이 피하여

우리 교장실에 와 있었다.

교장선생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알려진 서반아(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며칠째 식사를 전폐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교장선생은 “자기는 병중이라 어찌할 수 없지만

정 선생은 속히 한적한 곳으로 피난을 가라”고 하기에

기약도 없이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다급한 김에

점심도 못 먹은 채로, 나와 나의 아내는 아이만 안고

고향으로 가기로 하고 떠났다. 막상 떠나고 보니

곧 해가 지기 시작을 했고 사람들은 마을마다

일본 보병들이 쫙 깔렸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뒷길로 준포리라는 곳까지 와서

어떤 집에 들어가 사정을 얘기했더니 자기 집에서

밤을 지나고 가라며 고맙게도 저녁밥까지 지어주었다.

나는 거의 하루 종일 굶었는데도 저녁밥을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너무 시장하게 되면

밥을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경험을 하였다.

무서운 마음으로 하룻밤을 지나고 이튿날 일찍이 고향에 도착했다.

고향은 너무도 시골이라 3.1 만세사건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삼일 지나 산길을 골라 내가 근무하는 희명 학교로 오니

교장선생은 아직도 독감에 걸려 누워 계시기는 했지만

무사하시니 감사했다. 나도 몇 날 동안 아내와 어린애를 데리고

공포 속에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으나 무사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심한 독감에 걸리지 않았으니 감사하였다.

이해에 이 독감이 세계를 휩쓸었는데 일주일 동안에

이 감기로 죽은 사람이 수백만 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 뒤로 안정을 찾으며 나는 학교일뿐만 아니라

선교일도 열심히 했다. 내가 희명학교에 부임할 때

학생이 불과 이십여 명밖에는 안되었지만

교장선생님과 나는 혼신을 다해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소문이 그 근방에 알려지자 학생이 몰려와서

70여명에 가까워 졌다. 우리는 이 학생들 위한 교육은 물론

교육을 통해 학부형들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힘껏 노력하였다.

그때 한 십리 길을 통학하고 있는 김순빈 이라는 학생의 부모가

학교를 통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의 아버지는

김준동 씨라는 분으로 신실히 교회에 나왔다.

어느 날, 부친되는 김준동 씨가 별세하셨는데 동네사람은

예수쟁이의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찾아오지도 않고

장례를 돕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교우들은

가족은 아니지만 총동원해서 장례식 할 때까지 몇 명씩 교대해 가며

입관과 소렴(小殮), 대렴(大殮)도 다 해 드렸다.

막상 장례식 날이 되었으나 상여 멜 사람이

열두 사람은 되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장례식을 돕겠다고 나온 남자는

6-7명밖에 안되어 할 수없이 여신도라도 상여를 메기로 했다.

동리 사람들은 여자도 관을 메는 것을 보고는

담장 뒤에 숨어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우리를 비웃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일심 단결하여 일을 치르고 있었다.

이 지역, 성태면 면장 김석진 씨는 고인의 족질(族姪)되는 분으로

어디를 다녀오다가 교인들이 여자들 까지 나서서

장례를 치르느라 애쓰는데 자기 동네사람들은 담장 뒤에서

비웃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숨어있는 청장년들에게

당장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면장의 말씀인지라 그들이 나오자

김석진 면장은 “이런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도 집안사람들이

서로 돌보아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람 일을 하고 있는데

너희는 숨어서 비웃고 있으니 너희가 사람이냐? 짐승이냐” 하면서

몇 사람의 따귀를 때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숨었던 사람이

다들 나와서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하여 장례식은 무사히 치르고

우리 교인들은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이 후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사람답다는 소문이 나면서

대마리교회와 희명학교는 평판이 좋게 나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3.1 만세파동으로 삼천리강산이 뒤끓었지만

희명학교는 시골이라 큰 어려움 없이 지나고

곧 여름방학이 되었다. 나를 지도하고 사랑해 주던 이근팔 교장은

방학과 함께 다른 학교로 전근되시고 나는 어떤 분을 모시게 될까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서선대회 평의원회는 이 학교에 온지 겨우

1년 남짓 된 나에게 교장 직분을 맡기기로 결의하였다는 통지가 왔다.

틀림없이 전임 교장의 추천이 있었으리라.

당시에는 교회가 결정한다고 해도 조선총독부에서

교장인가가 나야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 교장인가원을 제출하고

기다렸더니 다행히도 인가되었다. 교장 직을 맡을 때

내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우리 부부는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이 직분을 맡았다.

내가 새로 맡은 교장직분도 너무 힘이 드는데

교회에서는 교회회계직분까지 나에게 맡겼다.

피할 수가 없이 맡아 놓고는 열심히 힘을 다해 일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 서선지방에 전무후무한 흉년이 들어

사방에서 강도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학교 돈과 교회 돈을 다 맡아서

당시에 금고도 없이 집에다 간수를 해야 되는데

내가 살던 집은 학교 옆에 외딴 집이라 때로는

무서운 생각도 들고 정말 염려를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히 지낸 것이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하다.

내가 교장이 되자 본부에서는 상당히 후대를 해 주었다.

나의 급료는 처음 7원으로 시작하여 12원, 30원, 40원,

45원까지 증봉(增俸)이 되었다. 이때의 45원이라면 교회 봉급으로는

상당한 급료였는데 심한 흉년으로 식량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워도

지날 수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식량조달정책으로 만주호밀을 수입하여

팔았는데 이 호밀에서 썩은 냄새가 났지만 그것도 값이 비싸

웬만한 사람은 사먹기도 어려웠다. 교회의 후대로 봉급이

오르지 않았다면 그 호밀을 구해서 가족이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니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다.

나이 어린 교장으로 제일 거북하고 힘든 것은

학부형회의 때 오시는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님들을 대하는 일이었고

또 학교 교장은 갖가지 어려운 동네일도 도맡아 해야 했다.

한 번은 학부형 중에 과댁(寡宅)이 한 분 계셨는데

어려운 중에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최선 것 살아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검정색 암송아지를 한 마리 사서 키웠는데

짐도 실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1920년 7월경,

그 과댁은 들에 있는 보릿단들을 암소 등에 가득 싣고

집으로 오는데 소가 목이 너무 말랐던지

집 근처 가까운 시궁창에 있는 물을 먹으려고

두발을 내리 딛자 소잔등에 있던 모든 짐이 그 소의 앞으로

다 쏟아지면서 소의 머리가 시궁창에 빠져 숨이 막혀 죽었다.

동네사람들은 불쌍한 과댁의 소가 죽었으니 고기라도

동네 사람들이 나눠먹고 대신 돈을 좀 모아서

과댁에게 주기로 의논들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이 동네 구장되는 임귀연 씨가 나를 찾아와

“어렵겠지만 교장선생께서 이 사연을 이곳 경찰주재소에 잘 말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시면 우리가 소고기를 나누어 먹고

돈을 모아 소를 잃은 과댁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소를 키우려 해도 나라에 보고를 해야 되고

그 소에게 사고가 생기면 사고 생겼다는 보고를 하게 돼 있었다.

소가 죽으면 “도살을 했나?”해서 매우 까다로웠다.

그러니 내가 서투른 일본말로 사태를 설명하다가 일이 잘 안되면

과댁 까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어서 걱정이 앞섰지만

동네 분들이 어린 나를 믿고 부탁한 일이니 거절도 못하고

기도드리면서 경찰 주재소에 찾아가 서툰 일본말로 얘기했다.

뜻밖에도 까다로운 주재소 주임은 “자기가 관할하는 면(面)에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까 정부당국과 잘 의논하여 해결하겠다.” 하며

“교장선생님이 이렇게 힘쓰시니 감사하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이 해결됐다. 소는 동네에서 잘 나눠먹고

주재소 주임에게도 얼마를 보내고 또 돈을 거두어

과댁에게 도움을 주었다. 기도의 힘이었다.

나는 문제만 생기면 기도에 의존하곤 했다.

6. 법과 교외생과(法科 校外生科)와 신학 공부

내가 나이도 젊고 또 교장직책 때문인지 사람들은 학교일과는

관계도 없는 여러 가지 동네일들을 해결해 달라고 학교로 찾아왔다.

차마 거절은 못하고 이일 저 일을 돌보아 주면서

나는 너무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중에도 법률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하다고 느껴졌는데

교장의 일이나 교회 일을 하려면 법률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일본 조도전대(와세다 대학)

법과교외생과(郊外生科)가 있었다. 그래서 교외생과에 적을 두고

시간이 있는 대로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법학총론을 보니 “도덕은 법과 같고 법률은 약과 같다”라는 말이 있어

참 훌륭한 말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열심히 법률공부를 하는데

이것이 엉뚱한 오해를 샀다. 당시 각 대회평의원회는

대회 안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자를 추천하여

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는데

서선대회에서는 정동심 교장이 법학을 연구하는 것을 보니

곧 법조계로 나갈 모양이어서 신학생으로 추천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교회 일을 좀 더 잘해보려고 교회의 도움 없이

어려운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한마디 물어도 안보고

신학공부추천 부결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법대교외생과를 꼭 졸업하겠다는 결심으로

1년 전체 과목들을 한꺼번에 신청하여 공부했다.

그러나 법률공부 때문에 학교일을 소홀히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1920년 우리 세 식구는 여름방학을 지나려고

외딴 곳에 있는 우리 집에 자물쇠만 채우고

고향에 가서 방학을 지내고 돌아왔다.

채소도 과일 나무도 다 잘 자라고 있고

특히 복숭아나무는 과일이 떨어진 그대로,

또 아직도 나무에는 과일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알고 보니 동네 목동까지도 “이 집은 정 교장선생 집이니

우리가 서로 돌보아 주자!” 해서 관리를 해 준 것이었다.

너무 감사했다. 나는 이것이 내가 교장이 되어서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살든지 인심을 잃지 않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다.

앞서 말한 대로 희명학교도 다른 사립학교와 같이 순찰이라는

명목아래 중산공립학교장 기시까와 씨의 방문을 받곤 했다.

이번에도 개학을 하자 곧 학교에 순찰을 나왔다.

순찰을 끝내고 기시까와 교장은 나를 불러

“본인만 원한다면 일본 동경에 있는 좋은 대학으로

진학을 시켜 주겠으며 학비도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 동안 그는 인망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조선청년들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싶던 나에게는

생각도 못한 절호의 기회였다.

대회에서는 법률공부를 한다고 교회를 떠나갈 사람이라 해서

신학생추천도 안 해주어 마음이 상해 있는 때에,

일본에 있는 좋은 대학에서 학비걱정도 없이 법률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은 장래가 보장되는 큰 유혹이었다.

고민 끝에 결정을 해야 되는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나는 ”지금 오해를 받고는 있지만 교회는 나라는 사람을 신임하여

이 어린 나이에 교장 직을 맡긴 것인데

하나님과 교회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라는 생각으로

기시까와 씨의 호의에 대해 정중히 감사를 표하고는 사양을 했다.

그때에 그의 호의를 받았더라면 사회적으로

큰 출세를 했을 가능성은 다분하지만 “지금 내 영적 형편이

어찌 되었을까?”하는 생각에 자다가도

“나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뭉클하게 일어나곤 한다.

1920년 9월말 경,

서선대회 평의원회에서는 오해가 풀려 나를 신학생으로 추천하여

“매달 35원씩 장학금을 지급하며 1921년 4월 1일부터 공부를 하라.”고

통지가 왔다.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3월에 둘째 아들 태영이가 출생하여 식구가 4명이 되어

35원 월급으로 생활이 가능할까 걱정이 앞섰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 생각되어 신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1921년 3월 하순, 신학공부를 위해 순안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학부형들과 교우들에게 얘기를 했다.

교우들과 학부형들이 얼마나 눈물을 흘리는지

신학공부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3년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힘든 작별을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의 관계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든 대마리를 떠났고

내 후임으로 고치주 선생이 오시게 되었다.

이 때는 독립된 신학교가 아니라

“순안 의명학교 신학부”라는 명칭아래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당시 유일한 신학교이었다.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장학생으로 이근팔, 박계정, 정동심 세 사람이고

서선대회와 신학교 일을 돕기 위해서 수고하던 전홍석 씨,

자비생으로는 김응주, 양총일, 김윤성 씨 등 7명이었다.

서로 다정하게 공부했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신학교수가 불충분 한 것이 유감이었다.

교수로는 여부열, 오벽, 노설 의사, 스미스 목사, 동문오,

제씨 등이었다. 또 한 가지는 대회의 추천을 받아 온 신학생들 중,

도시에서 온 분들은 이미 세속화되어 알코올이 많이 포함된

“적십자 포도주”를 마실 뿐 아니라 포도주 마시는 자체를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도 않았다. 한번은 나에게도 자꾸 권하기에

한 컵 받아 마셨는데 가슴이 화끈 하는 것이었다.

자비생 세분과 이런 문제에 관해 의논도 했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내 아내는 손님대접하기를 좋아해서 이분들을 종종 대접했다.

그래서 남선지역 분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제주도에서 오신

양총일, 김윤성 씨, 전라도에서 오신 김응주 씨 등이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동안 순안교회 집사일과

여자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안식일에는 종종 인근교회에 나가

설교를 하는 일이 무엇보다 보람이 있었다.

1922년 3월, 1년간의 신학 공부를 끝내고 졸업을 했다.

7. 홍명 학교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철도리라는 작은 섬에 있는

홍명학교는 설립과정부터가 순조롭지가 않았다.

이 학교는 순안 의명학교 제 2회 졸업생 고두칠 전도사가

자기의 고향인 철도에 학교를 설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여

시작 되었다. 철도에는 재림교인이 몇 명 되지 않는데

그나마 신앙심이 깊은 교인이 별로 없었다.

문제는 행정구역상 철도 섬에는 한 학교만 인가가 가능한데

장로교회와 안식일교회가 서로 학교를 설립하려고

경쟁이 벌어진 상태였다. 그러니 대회에서는

경험이 있는 교사를 파견해야 되겠다는 판단 아래

나와함께 신학을 졸업한 전홍석 씨를 결정했으나

안 가겠다고 하고, 다시 이근팔 씨를 결정했으나

이 분도 안 가겠다고 했다. 이때 서선 대회장은 오벽 목사였는데

세 번째로 나를 가라고 했다. 젊은 기분에 나는 대회장에게

“나한테 처음부터 가라고 하셨으면 이의 없이 갔을 것인데

두 번이나 다른 사람한테 거절당하니까 이제 나더러 가라고 하시니

나도 안가겠다”고 했다. 대회장인 오벽 목사는

얼마나 난처해하시는지 밤새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하룻밤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음날 “당신들은 서양에서

우리나라까지 선교하러 오셨는데 우리가 이 나라의 벽지라 해서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각되어 찾아 왔다”고 했더니

대회장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젊은 기상에 그 주일로 철도에 부임키로 승낙하고

농담 삼아 “이사 비는 얼마나 주겠냐?”고 했더니

“요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심각하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니

꽤 마음고생을 하신 것 같았다. 철도라는 섬은 황해도 황주읍에서

황주역까지 40 리를 서남으로 걸어가서 기차로 겸이포까지 가서

다시 뱃길로 40 리 거리를 가야하는 먼 곳이었다.

1922년 3월 하순,

우리 네 식구는 순안서 황주역을 경유하여 겸이포역에 도착하여

다시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해 저물 때쯤 철도에 도착하였다.

학교는 자로 된 초가집이었는데 이 학교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광준 선생이라는 분으로 신앙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고

단순히 그 지방 유지로써 축적가(蓄積家)였다.

그러나 우리를 환영했고 끝까지 잘 도와주었다.

학생들은 한 40명가량 되는데 모두가 순진하였다.

섬 살림에 난처한 것은 불 땔 화목(火木)을 살수가 없어

갈대를 사서 사용했는데 화력은 없고 재만 많이 생겨서 힘이 들었다.

섬사람들의 인심은 후한 편이었고 순수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가르치는 일과 함께 학교인가를 우선 얻어야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은 상당수의 섬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와 먼저 있던 선생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일에 시간을 뺏고 또 “내 반응이 어떤가?”를

살피려 드는 것이었다. 또 장로교회 지도층에 계신 분들이 찾아와

나를 위하는 척하며 전임자를 힐난도 하고 또 여러 가지로

나를 시험해 보며 내 시간을 뺏는 것이었다.

나는 곧 이 사람들이 나의 시간을 계획적으로 빼앗아

학교인가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를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인가문제로 두 학교 중에 한 학교는 폐교됨을 면할 수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박절하게 대하여

인심을 잃으면 인가 후에 학교운영 또한 힘들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드리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지혜롭게 대처한 결과 이 해 가을, 드디어 홍명학교라는 명칭으로

우리교회학교가 인가를 얻게 되었다.

이 섬 안에 인가받은 유일한 학교가 되니 학교와 교회가

함께 날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모든 학부형들도

인가를 먼저 얻었다는 일로 나를 퍽 신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또 다른 크신 은혜의 결과였다.

내 아내도 이제는 교회사역이 무엇인지 이해하면서

여러 모로 나를 열심히 도왔다. 다음해 2월경에

나는 아내가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인가 하도록

싱가(SINGER)라는발재봉틀 하나를 샀는데

우리 대회 내에 있는 사역자로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름방학이 되어서 우리 네 식구는 고향 운북리를 찾아가

모든 가족들이 즐겁게 상봉했다. 그런데 고향에 오기 전에

아내는 시험 삼아 새로 사준 재봉틀로 옷 몇 가지를 만들어

어머님과 한집에서 살던 작은 형님을 위해서 만들어 갔다.

내 생각이 모자라서 동환 맏형은 아무 것도 못해 갔더니

섭섭해 하시는 정도를 넘어 얼마나 불쾌해 하시는지 우리 부부는

너무 난처해서 예정보다 며칠 일찍 고향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다시 기차를 타고 또 작은 목선으로 철도 섬에 도착하니

밤이 깊고 어두웠다. 당시 부두시설이 형편없고 매우 어두웠다.

도와주는 직원도 없이 내 아내는 두 살짜리 아이를 업고

배에서 먼저 부두로 내리고 나도 큰아이를 업고 뒤따라 내리느라고

발을 내딛었는데 그 힘에 배가 뒤로 물러나면서 육지와 간격이

크게 벌어져 버렸다.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에서

아이를 업은 채로 엉겁결에 건너뛰었는데 틀림없이

깊은 바다에 빠졌구나 생각하는 순간, 부두 끝에 한쪽 발이

약간 닫는 느낌에 기우뚱거리면서 위기를 면했다.

그 어두운 밤에 깊은 물에 빠졌다면 나와 아이는 틀림없이

빠져 죽었을 것인데 아이를 업고 몸의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렇게 넓게 뛸 수 있었는지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감사기도를 드리며 고개를 넘어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훨씬 지났다. 집에 오자 곧 큰 형님에게

의복을 몇 가지 만들어 보내 드렸다.

1923년 2월, 이 섬에서 나의 맏딸 진실이가 출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서선대회에서 목회부 일을 하라고

나를 불렀다. 별로 오래 근무한 곳은 아니지만

섭섭해 하는 홍명학교 학생들과 학부형, 교우들을 뒤로하고

새 임지를 향하여 정들었던 철도섬을 떠났다.

이번에도 내 후임으로는 고치주 선생이 오시게 되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6

(같은 해 6, 서선대회에서 목회부 일을 하라고 나를 불렀다.

섭섭해 하는 홍명학교 학생들과 교우들을 뒤로하고 정들었던 철도섬을 떠났다.

이번에도 내 후임으로 고치주 선생이 오시게 되었다. 회고록 #5의 끝부분)

3 . 목양(牧羊)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1. 목회사업의 시작-좌동(佐洞)

1923 6,

순안에서 열린 합회총회에서 스미스 목사가 서선대회장이 되면서

나를 대회 목회부로 부르기에 대회로 가니 보직은 아직 없는데

나를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했다.

정동심 형제! 다 아는 대로 이번에 내가 서선 대회장이 되었는데

정동심 형제가 목회부에서 일을 해야 하겠소!”

스미스 목사님! 제가 그간 교사로 일 해온 것을 잘 아시면서

왜 갑자기 목회일을 하라 하십니까?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보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교사로 일하게 해주십시오.

정 형제! 서선지방에서 좀 새로운 각도의 목회 일을

추진해 보려고 계획 중이요.

새로운 각도의 일이라니요?”

그것은 다른 목회자들도 함께 의논할 터이니

정 형제는 목회 일할 준비를 하시오!

마음에 준비도 없이, 일할 교회가 정해진 곳도 없이,

하루아침에 교사에서 목회부로 부름을 받게 된 것도

어리둥절한데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각도의 일을 하라니 난감했다.

그러나 당시에 내 생각은 “교회 책임자들의 말씀이

당장 이해가 안 되도 따르겠다.”라는 것이었다.

대회장 스미스 목사는 곧 목회부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동안 목회자들은 교회가 있거나 교통이 편한 곳에서만

일했습니다. 이제는 사역자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일정기간 목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제일 어렵다는 지역을 택하면

나도 그곳으로 사역자와 같이 가서

처음 일주일을 함께 일하겠소.!

대회장 스스로 제일 힘든 곳에서 사역자와 함께 가서

일한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 그러면 여러분, 서선대회 지역 내에

가장 어려운 지역이 어디라고 생각이 됩니까?

이렇게 의논된 곳이 교인 세 명이 있다는

평안북도 옥산면(玉山面) 좌골(좌동-佐洞)이었다.

그러면 이곳에 이번 새로 목회를 시작하는

정동심 형제가 열심을 내어 시작해 보기 바랍니다.

학교 일을 열심히 하는 나를 불러, 새로 목회를 시작하라 하시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목회경험이 전무(全無)한 나에게

제일 힘들다고 결론이 난 좌동을 의논도 없이 맡기니 기가 막혔다.

글쎄, 목회신참인 나의 태도를 보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햇병아리 목회자인 나를 보내겠다고 하시고는

다른 목회자의 반응을 보시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분이셨는지는 기억이 잘 안되지만

한 사역자가 대회장에게 이의를 제기 하였다.

스미스 목사님! 가장 어려운 지역에

목회초년생을 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일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누구를 결정해서 보내면 될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셨다. 그러나 어떤분이

목사님! 차라리 성경방식으로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그분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렇게 합시다!”하며

제비를 뽑아 결정하자는 의견에 대부분 찬성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곧 제비를 뽑아 결정해 봅시다.”하며

대회장도 동의하였다.

아마 대회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제비뽑아 사역자를 정하는 일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좌골에 가는 사역자로 내가 제비에 뽑히는 것이 아닌가?

, 제비를 뽑아 보아도 정동심 형제가 좌골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합니다. 나도 함께 동행 할 터이니

곧 가도록 준비하시오! 좌골에도 그리 연락을 하겠소!

한동안 그곳에 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목사님! 저도 이의는 없습니다만 제 가족을

고향에 데려다 놓고 떠나게 허락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곧 고향으로 갔다가 순안으로 다시 오시오

한창 더운 7월에 식구들을 고향에 데려다 놓고

전무후무한 제비뽑기로 결정된 사역자인 나는

좌동(좌골)으로 가기위해 고향을 떠나 먼저 순안으로 떠났다.

약속대로 대회장 스미스 목사를 순안서 만나 경의선을 타고

백마역에 내려 구의주로 가서 일박을 한 후에

구의주에서 청성진까지는 자동차로 갔다.

청성진에서 좌동까지는 걷는 길 밖에는 없었다.

초행길에, 또 평생 처음 미국 선교사를 모셔야 되니

도대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나에게 대회장은

어디 가서 짐 싣고 갈 말이나 한 마리 얻어 오라하시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어디서 말을 구할지를 몰라

청성진 경찰관 주재소를 찾았다.

삼일운동 이후인데다 이곳 청성진은 국경지대인 까닭에

더욱 삼엄하게 무장한 경관들이 파수를 보고 있었다.

금방 이유도 없이 잡힐 것만 같은 공포심이 일어났으나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주재소에 들어가 내가 온 사정을 말한즉

의외로 모든 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좌동까지 50리가 되며 말과 말꾼을 세내려면

삯이 4원 가량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후 1시경인데,

시골이라 점심을 먹을 곳도, 먹을 만한 음식도 없었다.

그런데 말꾼이 절름발이 말을 가지고 오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닌가?

사정사정해서 다른 말을 가져와 우리의 행장을 싣고

좌골로 가는 방향도 모르니 말꾼만 따라가는데 길은 멀고

배는 어찌나 고픈지 대회장이 좌골에 가서 앞으로 사용하려고

준비한 음식을 둘이 걸어가면서 거의 다 먹어 버렸다.

얼마나 길이 험한지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밤 12시가 되었는데도 얼마 안 되는 신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반갑고 감사했는지....

서양 사람을 평생 처음 보는지라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대회장에게 허리를 굽혀 절들을 하니 스미스 목사는

어떻게 처신을 할지 몰라 나만 쳐다보니 나도 난감했다.

한 밤중에 저녁상을 받고 보니 좌골은 깊은 산중이라

강냉이밥에 갓김치와 토장(土醬)을 차려왔다.

스미스 목사는 어떤 선교사 보다 유달리 우리식사에

익숙지 못한지라 한술도 못 드시는데 보기가 너무도 딱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스미스 목사가 준비해 가지고 온 음식은

길에서 다 먹어버렸고 이 벽촌에서 서양선교사가 먹을 만한 음식은

구할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방문은 시작을 해야 하는데 이곳은 깊은 산중이라

한 십리는 가야만 인가가 한 집씩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묵은 교인 집에서 알아보니 “동편으로 산을 하나 넘으면

우리 신자의 집이 하나 있다.”해서 먼 길을 걸어서 그 집을 찾으니

한 자매가 반가이 영접을 한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려 하니

그 자매가 점심을 잡숫고 가라고 간곡히 권하기에 앉았더니

역시 강냉이와 좁쌀 섞은 밥에 갓 김치와 고추장을 내왔다.

스미스 목사도 이제는 워낙 배가 고프셨는지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고추장 한 숟가락을 가득 떠서

입으로 넣는 것이 아닌가?

고추장을 무슨 과일 쨈 정도로 생각하신 것이 틀림이 없었다.

웬걸, 곧 입을 딱 벌리고 어쩔 줄을 몰라 하시기에

체면이고 뭐고 할 것이 없이 빨리 밥을 뱉으라고 하고

물을 마시게 했다. 내가 맛을 보아도 얼마나 매운 고추장이었데......

얼마나 혼이 나셨을까?!!

돌아 올 때는 길가에 열린 산딸기를 씻지도 않고

얼마나 정신없이 따서 맛있게 잡수시는지

말릴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이 지역은 모든 길이 오솔길이었는데 대회장을 앞세우고

나는 뒤따라가다가 그분을 어른 대접 한다고 한문 글귀를 사용하여

어른은 앞서가고 젊은이는 뒤에 떨어져 간다.”는 말이 있다고 했더니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대뜸 “당신이 앞서시오!

나는 어른 될 맘이 없소!”하는 것이었다.

어른을 앞서게 해야 예의가 된다는 한문 문구를 말해놓고는

어린 내가 앞서 가자니 내 입장이 참 곤란했다.

우물이 있는 곳에 와서 대회장을 앞세우기 위해 물을

마시는 척하며 비켜서 있으면 목사님도 꼭 서서 기다렸다.

할 수없이 앞서 가시기를 권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숙소까지 내가 앞서오는 곤란을 당했다.

성경에 “경우에 합당한 말을 은쟁반에 금 사과와 같다”는 말씀이 있는데,

일이 반대로 되어 곤혹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과연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재삼 느꼈다.

숙소에 돌아와 스미스 목사님께 피곤하니 일찍 자자고 했다.

잠자리라는 것이 산촌 시골이라 흙 온돌방에 피 나무 껍질로 만든

삿자리를 깔아 놓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빈대까지 있으니

스미스 목사의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다.

자리에 눕자 산딸기 덕분인지 스미스 목사의 배 끓는 소리가

시작하는데 조금 후에는 우뢰치는 소리가 나면서

당장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 딱해 보여서 말씀 드렸다.

목사님! 대회에 할 일도 많을 터이니

내일 아침에는 대회로 돌아가시지요?

아니 정말 그래도 되겠소?”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시면서 되 물으셨다.

그럼요! 목사님이 힘들어하시니까 저도 일하기 힘드니

걱정 말고 먼저 돌아가십시오!

! 그래요? 그러면 아침이 되는대로 나 먼저 돌아가겠소!”

목사님, 그러면 저는 여기서 얼마나 있다가 갈까요?”

, 정동심 형제도 일주일만 있다가 돌아오시오!”

감사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돈도 많이 쓰고

고생도 많이 했으니 한달은 일하겠습니다.

고맙소! 고맙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한 달을 남아서 일하겠다고 했더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다음날, 배탈까지 나신 분이 먼 길을 도보로 가시게 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결국 당나귀를 세냈는데

목사님이 나귀를 타시니 발이 땅에 닿고도 남는 것이었다.

배탈 나신 외국인 혼자 백마역까지 70리 길에,

또 순안 까지 가셔야 되는데 걱정이 되어 함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가시는 대로 소식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이 삼일 후에 순안까지 무사히 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막상 산간벽지(山間僻地)에 혼자 남아 외롭고 힘들었지만,

이곳 신자들은 처음 맞이한 사역자라 하여 여러모로

나를 위로해 주고 도와주어 감사했다. 깊은 산중이라

때로는 노루나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먹으라고 가져오기도 했다.

나도 처음 시작한 목회 일이라 밤낮으로 열심히 방문하고 전도하여

한 달쯤 되자 신자들이 많이 늘었다. 깊은 산골이라 공기도 맑고

냇가에 흐르는 물도 맑았다. 그래서 이른 아침마다 냇가로

나가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냇가에는 일본말로 지까다비 라고 하던

신발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신자들에게 물어 보니 독립군과

그들을 뒤따르는 경관들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독립군은 때로는

동네의 청년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간다는 것이었다.

나도 27세의 청년이라 슬그머니 겁도 났으나 내색은 못했다.

한 달이 지나니 1주일만 일하라던 대회본부에서 한 달만

더 일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일 개월을 더 지나기로 했다.

그런데 내 월급 날자가 지나도 오지를 않아 알아보니

큰비로 강물이 많이 불어 우체부가 강물을 건너다

우편물이 물에 떠내려갔다는 것이었다. 내 월급봉투도

함께 떠내려 간 것이 확실했다. 여기는 산간벽지라

우편배달부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곤 했다.

강물이 줄어든 후에 배달부가 왔기에 나는 “전번 비에

강물이 불어 배달부가 강을 건너다가 나의 우편물들을

잃어버린 듯하니 사실을 알아보아 달라”는

우편 통신사고라는 것을 우편국에 보냈다.

얼마 후 우편국에서는 그때의 배달부를 알아내어

나에게로 보냈는데 거의 해 질 무렵에 왔다.

당신이 우편 통신 사고를 보낸 정동심이가 맞소?”

, 그런데요! 제 편지들을 찾았나요?”

여기에 그때 우편물들을 다 받았다고 쓰고 당신 도장을 찍으시오!”

아니, 받지도 않은 우편물을 어떻게 받았다고 증명서에

도장을 찍는단 말입니까? 거기엔 내 월급이 있었단 말이오,

나는 받았다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지 못합니다.

이봐요! 이번에 그 증명서가 없으면 나는 면직된단 말이요, 알겠소?

웬 말이 그리 많소?

그 큰 덩치에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큰 소리를 치는지라 황당하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리고 밤이 늦었으니 오늘밤은 당신 방에서 자고 가야겠소!

밤새 잘 생각해 보시오!

내게 허락도 없이 그냥 방에 들어와 눕는 것이었다.

이 벽촌에서 험상궂은 우체부로부터 변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밤새 뜬눈으로 기도하며 보냈는데 아무 탈 없이 다음 날 떠나갔다.

당시에 관청에서 일한다고 하면 우편국 말단 직원까지도

이렇게 소박한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것을 실지로 체험했다.

이럭저럭 또 한 달이 되어오기에 좌골에서 나가겠다고

대회에 편지를 내었더니 또 한 달만 연장하라는 명령이 왔다.

나는 대회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또 한 달을 열심히 일했다.


2. 수자골과 군모루

여기 온지 석 달쯤 되는 어느 안식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신자들이 “어떤 목사님이 오시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뜻밖의 일이라 의아해서 나가보니 영유교회에서 시무하는

나의 12촌 형님 정동필 전도사가 오셨기에 반갑게 만나

이 벽지에는 웬 일이냐고 물은즉이 벽촌에서

수고하는 자네를 찾아보고 싶어 왔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별말씀 없이 주무시고 이튿날 아침,

돌아가신다는 것이었다. 불쑥 왔다 그냥 가시는 것도 이상했지만

젊은 때라 깊은 생각 없이, 대회가 두 번이나 연장한 3개월도

끝났기에 나도 함께 가고 싶어 근처에 사시는 몇 신자 분에게만

말씀을 드리니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몹시도 미안했다.

정동필 형님과 칠 십리 길을 걸어서 경의선 백마역을 거쳐

신의주로 가서 하룻밤 쉬고 이튿날 압록강을 건너

가보고 싶던 중국 땅 안동현에 이르렀다.

안동현 시가지를 구경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명물이라는

멋진 탄자(담요)하나를 샀다. 이렇게 함께 다니면서도

동필 형님은 나를 방문한 사연을 말씀하지 않더니,

경의선 기차를 타고 순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 어파역에서 내려 자기가 맡고 있는 영유교회로 가서

하루를 묵고 가라고 했다. 나는 예감이 이상하여

그 호의를 마다하고 바로 순안으로 와서 대회장을 만나니

나를 영유교회 목회자로 결정했다면서 내일 그 교회를

한번 보고 오라 하시니 입장이 참 난처했으나

말씀대로 이튿날 영유교회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그 전부터 알고 있는 신도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

마침 이날이 화요일이라 정동필 전도사는 나에게 설교를 하라고

하시는데 신도들의 이상한 태도를 생각하여 사양했다.

그러면 사회라도 하라기에 그것까지 거절할 수 없어서 사회를 맡았다.

기도회 시간이라 여러 신도가 기도하는 중에 두 신도가 늦게 들어와서

갑자기 크게 기도하기를 “정동필 전도사가 전근가지 않고

유임케 되니 기쁘고 감사하다”라고 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은 정동필 전도사는 공석중인

대회교육부 서기직분을 맡겠다고 신청을 했는데

이 문제를 논의하는 중에 “그러면 영유 교회는

누가 목회자로 갈 것인가?”하는 질문에 정동필 형님은

나를 영유교회 목사로 추천하여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정동필 전도사가 대회 교육부 서기로

신청한 것이 부결되었고 공중에 뜬 정동필 전도사는

영유교회에 그냥 있고 싶어 화요일에 크게 기도를 드리던 두 분을

정동필 전도사 유임운동을 위해 대회로 보냈던 것이다.

정동필 전도사도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설득해 보려고

그 먼 길을 걸어 좌동까지 찾아 왔다가 말도 못 꺼내고

그냥 온 것이다. 이 두 분은 대회에 가서 유임운동이

관철되지 못했는데도 돌아와서는 정전도사 유임이 되었다는

거짓 감사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나는 다시 순안으로 가서

대회장에게 영유교회를 다녀온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니

대회장은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알고는 나에게 속히

영유교회로 취임하여 거짓말하는 그런 교인들은 다 내보내고

새로운 교인을 얻으라고 했다. 나는 그러한 상태에서

교회에 부임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씀을 드리며

내 고향으로 가서 내 아내와 의논하기로 하겠으니 대회에서도

다시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고향 운북리로 갔다.

석 달이 넘게 떨어졌던 가족을 기쁘게 만났고

온 가족이 평안히 지낸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며칠 후 대회에서, 나의 은사 되는 정기창 전도사와 같이

용강군 수자골로 가서 2주간 전도회를 하라는 편지가 왔다.

다행히 용강 경찰서로부터 전도 집회허가가 나와

우리 두 사람은 전도회를 시작해서 한창 열심히 하는 중인데,

대회에서 나에게 평남 대천 군모루로 가서

그곳 전도회 뒷수습을 하고 그 곳에서 일하던 다른 전도사를

이곳 용강 수자골로 오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그 처사가 의아했지만 대회의 명령이라

말없이 따르기로 하고 혼자서 군모루로 갔다.

후에 들은즉 서선대회 부회장 이모목사와 군모루 전도사는

막역한 사이로 전임 군모루 전도사가 군모루에서 고생을 많이 한다하여

이런 결정이 났다고 한다. 막상 대천 군모루에 가보니

이곳 교회에 주인 노릇을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전도회 뒷수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군모루에서 전도회가 열렸던 것도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을 가진

최매실이라는 여자의 열성 때문이었는데, 이 최 여사는

박의창이라는 경찰관의 아내였다.

이 경찰은 부인의 신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어서

최매실 여사는 자기 남편이 출근한 후에 자기 남편의

동관(同官)의 부인들을 모아 놓고 전도하여 그들과

안식일은 지키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최 여사의 요청으로 전도회를 했지만 최 여사가 앞에 나서서

교회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전도회의 뒤처리를 한다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안식일, 최 여사를 만나니

20세 중반의 얌전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가정을 방문하겠다고 하니 남편의 반대 때문에 자기에게

큰 시험이 될 수도 있다하며 사양을 해서 이곳에 한 달간 있으면서도

최 여사의 집을 한 번도 방문치 못했다.

3. 영유 교회

한 달간 대천 군모루에서 뒷수습을 하고 있는데

대회에서 “정동필 씨를 대천으로 전임케 했으니

영유교회로 부임하라.”고 통지가 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영유로 가보니 정동필 전도사도 새 임지로 떠나신다고 했다.

나도 식구들을 데리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나의 어머님이 우리와 같이 사시기를 원하셔서

어머님을 모시고 새 임지인 영유로 떠났다.


1923 11월 초순,

우리 여섯 식구가 영유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교우가

단 한명도 없었다. 처음 모시고 간 어머님 보기가 얼마나 민망한지,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루 밤 어떤 신자 댁에서 지나고 그 이튿날 내가 손수

셋집을 얻어 부엌에 솥을 거는 등 살 준비를 했다.

생소한 이곳에서, 나는 물론 온 가족이 고생을 했고 심적으로

타격을 많이 받았다. 며칠 후, 첫 번 맞는 안식일에 교회를 가니

어느 한 사람 따뜻하게 인사하며 맞아 주는 교우가 없었다.

이런 형편에 신자들이 사는 집도 알아낼 도리가 없어

방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몇 안식일이 지나도

신자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계속 냉냉(冷冷)했다.

그렇다고 이일은 대회에 알릴 일도 아니고

내가 해결을 해야 될 문제였다.

나는 우리교인 방문하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이 지역 장로교 목사와 천주교 책임자들을 사귀게 되었다.

타 교파(他 敎派) 지도자들을 만나보고 나니

타 교파 사람들이 사귀기가 훨씬 쉬웠다.

그 결과 다른 교파 사람들 몇 명이 우리 교회로 개종했다.

사실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보다

다른 교파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

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곳에 온지 한 달 좀 지난 어느 안식일 늦게

이곳 예배소 소장인 방효신 씨가 우리 집을 찾아 오셨다.

이유는 고사하고 부임한지 한 달 만에 처음 이 곳 교인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니 그 기쁨을 어찌 잊을까?

“아니 소장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여보! 소장님 오셨소! 저녁 준비 빨리 하시오!

“네! 곧 준비할게요! 소장님! 어서 들어가서 이야기들 나누십시오!

나의 아내도 얼마나 기뻐하며 저녁을 준비 했는지!

우리는 준비된 저녁 식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시작했다.

식사 중에 나는 말씀을 드렸다.

“소장님! 모처럼 오셨는데 집은 누추하지만

오늘 저녁은 저희 집에서 주무시지요?

“정 전도사! 좋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가자

소장님이 말씀을 하셨다.

“정 전도사! 그간 나와 모든 교인이 정 전도사에게

너무 무정하게 했소. 대단히 미안하오!

.............

“사실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소!

“네? 이유라뇨? 제가 부임해 와서 뭐 잘못한 것이라도...

“아니 그런게 아니라,

여기에 먼저 계시던 전임전도사가 가시기 전에 하는 말이

자기 대신 오는 신임 전도사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고 목회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해서...

“네. 그랬었군요.

“그런데 실상 여기 와서 일하시는 것을 보니

전임 전도사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소!

이제 모든 교인들이 협력하여 교회를 위해

다 열심히 일을 할 터이니 힘을 내시오!

“소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힘을 다해 일을 할 터이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날 밤의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나는 사역자가 교체될 때 전임사역자는 후임사역자를,

신임사역자는 전임사역자를 극구 칭찬해야 한다는 것이

목회생활의 신조가 되었다.

예배소장이 집에 다녀간 그 다음 안식일부터

모든 신자들이 어찌나 우리를 친절히 대하여 주는지,

어려움 뒤에 오는 그 기쁨은 정말 눈물겨운 경험이었다.

그간 당한 설움이 보답 받고도 남았다.

신자들과 화합해서 열심히 일을 하니 내가 부임한 지

불과 수개월 내에 신자는 배 이상이나 증가되어

나도, 교인도, 모두 힘이 났다.

6개월가량 교우들과

힘을 합하여 열심히 목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의 은사인 정기창 전도사가 일부러 찾아오셔서

“자네를 북간도로 보내려 하니 아예 가지 않겠다 말하고

조선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하여 전도 일을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이곳에 온지

겨우 반년밖에 안 되었고 또 짧은 기간 동안

교인들과 한 마음이 되어 교인수도 배나 증가되었는데

설마한들 그럴 리가 있으랴?”하고 생각했다.

며칠 후에는 정동필 전도사도 찾아와 말하기를

“아무래도 자네를 북간도로 보내기로 하는 것 같으니

아예 거절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회에서 나를 그곳으로

보낼 리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 정동필 전도사에게

“만주에는 백만 동포가 있다는데 다 안가겠다 하면 그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하겠느냐”하고 잘난 듯이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정말 며칠 후에, 대회 본부로부터 나를 북만주로

보내기로 결의했으니 속히 가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그것도 일전 오리짜리 간단한 엽서로 받았다.

이제 막 재미있게 일 한지 반년도 안 되어

막상 이런 명령을 받게 되니 어안이 벙벙하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부임한지 반년도 못되었는데

이렇게 전근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내 의견을

일전 오리짜리 엽서에 써서 대회로 보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뜻이니 가시오!”라는 대회 부회장으로 계신

이 모 목사의 무뚝뚝한 단 한마디가 적힌

일전 오리짜리 엽서 명령이 다시 왔다.

나는 대회명령은 지상명령으로 알고 떠나기로 했다.

얼마 후에 왜 이런 명령이 나에게 떨어지도록

결의가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나보다 선배인 박윤선 전도사가 만주에 가있다가

다른 곳으로 전근하며 만주에 대해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만 말을 하셔서 고참 사역자는 누구든지

만주 가기를 거절하여 결국은 나같은 신참에게

만주로 가라는 결의를 한 것이었다.

나는 대회를 찾아가 대회의 결의를 따라 만주를 가겠으나

이제 막 정든 영유교인들에게 내 입으로

차마 떠난다는 말을 못하겠으니 대회에서 어느 분이

영유교회에 오셔서 나를 전근시킨다는 통고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부임한 후에 대회에서 아무도 영유교회를 방문한 분이 없었기에,

누군가 안식일 예배시간에 오셔서 발전된 교회도 보시고

교인들에게 후임도 소개해 주시는 것이 초년병 목회자인

나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대회장 스미스 목사는 안식일도 아니고

어느 금요일 밤에, 교인도 얼마 없는데, 사전 통고도 없이 오셔서

“정 전도사가 떠난다.”는 한마디 통고만 하고 그날 밤으로

사 십리가 넘는 순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것을 볼 때에 스미스 목사의 고집을 한 번 더 알게 되었다.

이 통고를 받은 영유 교우들은 나와 별로 오래 사귀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마음속으로 슬프기도 하고

교우들의 사랑이 감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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