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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유복(遺腹)”이를 인도하신 하나님.

 

1. 수난(受難)-화강리교회 지방회

 

나는 1935년에 새로 생긴 북선대회의 대회장으로 임명되어 원산으로 왔다가 1939년에는 중선대회장의 책임을 맡고 

서울로 전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소위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자 해서 시국은 점점 힘들어져가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모든 정책도 전쟁준비 정책을 펴느라 미국선교사들을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다 내 보내려고 했다.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선교사는 1940년 11월까지 다 귀국하고 이시화 목사만 1941년 2월 26일까지 

계시다가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합회장이 공석이 되자, 서선대회장으로 있던 최태현 목사가 합회장 일을 맡게 되어 

서울로 전근 오셨다. 공석이 된 서선대회장 후임을 의논 하던 중에 나보고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말이 나왔다. 

회의 전부터 친구 되는 조치환 목사가 북선대회에 가고 싶다고 내게 말씀도 하셨지만 나는“내게 딸린 식구가 너무 많고 

그 많은 식구가 다 서울에 있으니 서울에 가족이 없는 분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님은 “그러면 누구를 추천하고 싶은가?” 말씀하기에 “청진에서 수고하시는 

조치환 목사를 북선 대회장으로 추천한다.”고 하자 회의에 함께 계시던 조치환 목사님은 즉석에서 

“내가 기꺼이 가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결정이 되고 나는 그대로 중선대회장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내가 서선대회로 갔었다면 나의 일생은 전혀 다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1941년,

시국은 점점 어수선해 가고 있었다. 선교사가 없는 교회의 행정은 조금 혼란에 빠졌다. 

나는 당시에 중선대회장직에 있었기에 돌아가는 교회 사정들을 보면서 전쟁의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경험이 많은 선교사들이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떠났었다면 교회는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을 터인데 

별로 말도 없이 모두 너무도 급하게들 떠나 너무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시에 우리는 종종 “지방회”라는 것을 갖곤 했다. 그 지방의 사역자와 교회 책임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교회사업을 

토의 결정하곤 했다. 중선대회에서는 1941년 4얼 7일부터 10일까지 충남 청양군 화강리 교회에서 “충남 지방회”를 하기로 

계획하고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조선합회장 되시는 최태현 목사에게서 갑자기 통보가 오기를 “급박해 가는 이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교회사업을 구체적으로 의논할 필요가 있어서 대회장회의를 개최 하신다.”고 하는데 날자가 “지방회”가 

개최 되는 날이었다. 중선대회장인 나는 물론 그 지방회를 주재해야 했지만 참가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때 최태현 목사, 조치환목사, 정붕상 목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정붕상 목사는 당시 남선대회 대회장이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시조사를 독립기관으로 결정하고 사장을 선출하는 문제로 4월 9일까지 끌었다. 

서울에 있는 합회장이나 중선대회장이 시조사 사장을 겸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택하여 맡기자는 의견이 나와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께서 "누구를 시조사 사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라고 물으셨으나 다들 가만히 있기에 

나는 "시국이 이럴 때는 좀 신중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유영순 목사가 어떻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은 이미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으셨는지 "내 생각에는 김창집 씨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아, 목사님 생각에 그 분이 좋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책임을 맡으실 분을 위해 

여기 모인 우리가 회의형식을 갖추어 정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해서 회의형식을 취하여 

나머지 분들도 다 좋다고 결정이 되어 그 분으로 시조사 사장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사장을 택하는 회의는 아주 간단히 끝났다. 4월 9일 오전의 일이었다. 

나는 이 회의가 끝나자 예정에는 없었지만 곧 청양으로 갈 차비를 했다. 청양군 화강리 교회에서 열리는 지방회의에는 

조선합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회부장인 오영섭 목사, 공주교회 담임사역자인 오석영 전도사, 

중선대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부장인 박원실 목사, 충남 당천교회 담임인 이성찬 전도사, 

중선대회 회계겸 서기 유철준 씨 등이 참석하여 도와주고 있었다.


4월 9일 오후,

나는 서둘러 충청남도 청양으로 떠났다. 차에서 내려서 삼십 리를 걸어 밤 8시 반경에 청양군 화강리 교회에 도착하니 

지방회는 이미 끝나고 다 헤어지려고 하는 때이었다. 교인들 수십여 명이 "와! 대회장님이 오셨다!"라고 큰 소리로 환영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얼핏 보니 형사가 와 있었다. 시국이 좋지 못한 때인지라 작은 집회만 있어도 형사들이 내놓고 따라 

다녔다. 많은 회의를 하다보니 형사들의 얼굴도 기억을 할 정도가 되었고 내 기억에 이 형사는 남영우라는 형사였다.

이 지방회는 이미 정해진 순서에 따라 4월 10일 안식일 설교 예배까지 순서대로 다 잘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설교가 필하면서 교인들이 "오늘로서 회는 필했지만 대회장이 왔으니 한 번 더 집회를 해서 우리 모두 다 

은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의논이 되었다.


1941년 4월 10일 저녁,

약 100여명의 교우가 어린아이들도 많이 데리고 참석하셨기에 누가복음 2장 52절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해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을 이야기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21장을 가지고 

"때가 가까이 왔으니 모두 잘 준비하도록 하자"라는 설교를 했다. 

이상한 것은 이날 저녁 집회에 남영우 형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저녁 집회는 갑자기 진행이 된 것이라 원래 제출한 집회신청서에는 포함되어 있지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941년 4월 11일 이른 아침,

교회에서 청양경찰서는 30리 길이나 되며, 또 설교도 밤늦게 끝났는데 벌써 "이 사람들이 집회허가도 없이 불법집회를 하면서 아주 불온(不穩)한 말을 했다"는 보고가 경찰서에 접수되어 4월 11일 이른 아침에 고등계형사 두 명이 나와서 잠에서 깨기도 전에 우리가 자는 방문을 예고도 없이 세차게 열고는 우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자다가 일어났으니 변소를 가야 하는데 

변소까지도 형사가 따라 붙을 지경이었다. 전부 옷을 입으라 하더니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이성찬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 나까지 6명을 체포하여 청양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아무 취조도 없이 우선 우리 모두를 감방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는 아침 늦게 어디서 가져 왔는지 설렁탕을 먹으라고 하며 넣어 주었다.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돼지고기 설렁탕 국인지도 모르고 모두들 깨끗이 비웠다. 나는 모든 분들이 나 때문에 감방에 왔다는 걱정에 설렁탕을 먹을 생각도 못했다. 우리교회 역사 사십여 년 만에 6명이나 대량으로 검거되어서 청양 경찰서에 수감된 이 일이 

바로 청양 화강리 사건으로 우리교회 역사에 첫 번째 수난사건으로 남아 있게 된다.


감방에는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가 한 방으로 배치가 되고, 나와 이성찬 씨가 같은 방에 배치되었다. 

감방으로 집어넣을 때 허리띠나 저고리 고름, 버선 매끼 등 모든 끄나풀은 혹시 자살이나 폭력에 사용될까 하여 

다 압수해 버려서 고름 없는 저고리나 허리띠 없는 양복을 입으니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 때가 양력 4월 11일이니 봄이라고는 하지만 시멘트 바닥의 감방은 매우 추웠다. 그래서 밤에 잘 때는 이성찬 전도사와 

둘이서 등을 맞대고 온기를 서로 얻어가면서 지냈다. 나는 추운 감방에서 나에 관한 일도 불안하지만 함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 당하는 일인지라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지나간 일들이 하나 둘 생각나면서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며 이번에도 인도하시리라는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1904년에 우리 교회가 한국에 들어와서 지금이 1941년이니 우리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지 37년째 되는 해이며, 내 나이 15살 때, 즉 1910년에 내가 우리 교회에 들어왔으니 교인이 된지 31년 되는 해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같이 산중에서 자라난 사람이 이 도리(道理)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게 된 것도 너무 큰 은혜인데, 도리를 전하러 

다니는 전도사요, 목사요, 대회장이라는 직분까지 맡기신 것을 생각하니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축복하셨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내 어머님은 배운 것도 없으시지만 아주 현명하게 나를 인도하여 집안에서 공부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글을 배우게 허락해 주시고 또 구학문 배우던 것 다 버리고 신학문, 그것도 모든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시고 

나를 교회학교에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신 은혜 때문이라" 생각하니 새삼 어머님의 은혜가 감사했다. 

또 이만큼 된 것이 아내 되는 이가 모든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임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할 뿐이었다. 비록 춥고 어두운 감방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나의 생애가 한 가지씩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정동심목사회고록 연재)#2

(비록 춥고 어두운 감방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나의 생애가 한 가지씩 내 마음에 떠올랐다. 연재 #1 끝부분입니다)

2. 나의 고향, 나의 가벌(家閥)

나의 출생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386 번지이다.

원래는 평안남도 함종군 오산면 성장동 이었으나 1910년

한일 합방으로 행정구역이 변하면서 약 다섯 개의 군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함종군은 없어지고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 가 보기 전에는 내 고향이

사람 살기에 별로 좋은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아는 대로 생각해 보니 우리 조상

약 12대가 이곳에서 살아 온 듯 하다.

이 동리는 서북으로 시루동산과 몽기산이 가로 놓여있고

동북으로는 운룡산이, 남으로는 남산이 가로 놓여 있었고,

동남으로 수로가 생겨서 약간의 농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깊은 산속이니 밤에 나가면 수목이 막 엉킨 사이로

별만 조금씩 볼 수 있는 산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천산물은 풍부했다.

밤나무,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개암나무, 다래나무,

살구나무, 오얏나무, 배나무와 산포도 등이 풍부했다.

그 중에도 “함종밤”은 유명했다.

그러나 밤을 수확하여 제일 큰 상층 밤은 지방 부호들이 차지하고

밤알이 작은 것만 타지방으로 나갔기 때문에 함종 밤은

맛이 좋으면서도 알이 작다고만 알려져 있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과일나무가 풍부하여 꽃피는 계절에는

그 아름다움이 정말 장관이었다.

몽기산이나 운룡산에 올라가려면 약 한 두 시간쯤 걸리는데

거기 올라가면 서해(황해) 앞 바다가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 참 경치가 좋은 곳이 나의 고향이었다.

이곳에서 서울을 가려면 동남쪽으로 약 20킬로 되는 평남 기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진남포나 평양을 거쳐서 가야만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일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한 7 -8세 때쯤에

이미 나의 집안이 두 세 갈래로 분파되어 살고 있었는데 내가 출생한 파는

아주 미약하고 가난하고 무식한 파였다고 생각이 된다.

나의 파에는 나의 5촌 숙부인 정석권, 정석재 두 분이 계셨는데

석권 숙부님은 동엽 이라는 아들을 두셨고 석재 숙부님은 무후(無後)하셨다.

나의 아버지 정석문 씨는 석주, 석열, 석연, 이렇게 4 형제였다.

나의 어머니 이섭련 씨는 평안남도 강서군 쌍능면 할농리라는 곳에서 오셨다.

나는 삼남 일녀중의 막내인데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다른 집들보다 더 가난하게 사신 듯하다.

후일에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 문중에서 주막을 하나 지어 놓고

집안 중 가장 가난하게 사는 이에게 그 주막을 주어서

술을 제조하게 했는데 나의 부모님이 한동안 그 주막을 맡아서 지내다가

내가 임신이 되었다 한다. 내가 임신이 된 중에 아버지는 1895년

음력 10월 16일에 별세하시고, 나의 누님은 이미 그 전에 죽은 모양이다.

30대에 청상과부가 되신 나의 어머니는 두 아들과 나를 임신한 채로

주막을 떠나 시동생들이 사는 근처로 이사하여 오막살이를 만들어

거하시면서 1896년 음력 2월 17일(양력 3월30일이라 생각된다)에

나를 낳으셨다. 나는 유복자로 출생하였기에 사람들은

내 이름 “동심”이 대신에 나를 "유복"이라 불렀다.


나의 어머니는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면서 베틀로서 포목을 짜서

그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신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의 두 형님

(정동환, 정동로)도 말 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는데 막내인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내가 일곱 살 가량 되었을 때

큰 흉년이 들어서 콩죽에다가 피(돌피의 개량종으로 사료로도 사용됨)

가루를 타서 먹던 일들이 훤하게 생각난다.

나는 삼촌집의 이엉 엮을 새끼도 꼬아주고 소 풀도 뜯게 하며 자랐다.

여름에 어머님은 무거운 과일들을 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과일행상을 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3. 한문공부

이런 형편에 나는 철없이 글을 배우겠다고 졸라대어

둘째 동로 형님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4개월 만에 다 배웠다고 해서

어머니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책거리"를 하신다며 콩을 볶아

식구들이 나누어 먹던 생각이 떠오른다.

이때 내 나이는 8세쯤 된 듯하다.

이후에는 나도 형을 따라서 3-4년간 산에 땔감을 찾아 나무하려 다녔다.

1907년 겨울, 나의 막내삼촌 정석연 씨 댁 윗방에서 나의 고모 작숙 되시는

신응태 씨를 훈장으로 모시고 한문서당이 열렸다.

글방을 여신 막내 삼촌 정석연 씨는 일자무식한 분이었으나

남들이 다하는 술을 배우지 않으신 뜻이 깊은 분이었다.

자기 맏아들 동만이를 글공부시킬 결심으로 글방을 여신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철없이 이 글방에 가겠다고 졸라대서

어머니와 두 형님들이 매우 곤란해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낮에 일도 해야 하지만 서당에 가려면 비록 훈장님이

우리 집안 고모 작숙 이라 해도 훈료(訓料)를 드려야 되는데

우리 형편이 그렇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세 살밖에 안된 나는 철도 없이 떼를 써서 결국은 가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가 있어 열심히 공부를 하였더니 근방에서 "유복"이는

장차 큰 학자가 되겠다는 소문이 났다.


자연히 가족과 친척들이 나에게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에 큰 기대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우리집안 조상시제(祖上時祭)때에 축문을 쓰거나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촉망이었다.

이렇게 한문을 조금 공부하다가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집안 아이들이 글방에 왔는데

훈장인 나의 고모 작숙은 내가 한문을 꽤 안다고 생각하여

아이들 공부시키는 책임을 나에게 맡기고는

본인은 온갖 잡다한 일들을 보고는 늦게 와서

내가 가르친 것을 한번 시켜 보는 것이었다.

나를 인정해 주심은 감사했지만 나는 배울 것이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더니 차츰 글방 아이들의 숫자도 늘어갔다.

그래서 서당을 집이 좀 더 큰 12촌 형님 정동학 씨의 사랑방으로

옮기면서 정기창 씨라는 청년훈장을 정식으로 모시게 되었다.

정 선생은 담배는 조금 피우지만 술은 일절 아니하는 분으로

정성껏 아이들을 가르치시자 다른 부모들이 자녀들을

밤에도 서당에 보내어서 밤글도 읽게 하였다.

이때는 한일합병 이후인지라 각 지방에 의병단체들이 일어나

경찰의 관심이 그곳으로 집중이 되어 치안은 극도로 문란했다.

하루 밤에는 이 시골 마을에 강도가 침입하여 훈장님과 모든 학생들을

꼼짝 말라고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 씌워 버렸다.

그리고는 이 집 안방에 들어가 상당한 물품을 가져갔는데

이날 밤에 이 마을에 여러 집이 강탈을 당하였다.

이때 겪었던 무서움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당시에 서양식으로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들을 "중놈"라고 불렀는데,

하루는 이 글방에 평생 처음 보는 "중놈" 두 사람이 찾아 왔는데

매우 젊잖아 보였다. 그 두 “중놈” 손님들은 훈장선생님과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하기에 하도 궁금하여 가만히 엿들으니

"길가에 떨어진 씨" 또는 “돌 짝밭에 떨어진 씨”가 어떻고 하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후에 내가 교인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전도하러 왔던 예수교인이었던 것을 알았다.

이 당시 평안도 지방은 감리교 구역이었는데 정기창 선생은 이 “중놈”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얼마 후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정기창 훈장님이 가르치시던 동학형님의 사랑방 서당도 없어지고

십 일촌 숙부 되시는 정덕현 씨 라는 분이 훈장으로 들어섰다.

이분은 밤낮 술집에만 다니며 학동들을 다 내게 맡겨 두니 내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학동들을 위해서도 이런 훈장님은

안 되겠다고 말이 나와 나의 집안조카 정태연 씨를 훈장으로 세웠다.

나는 서당에서 별로 더 배울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다녔다.

다행이 서당을 삼 년 남짓 다닌 결과 혼자서도 웬만한 것은

문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이 때부터 유교에 대한

예의, 도덕, 효자 되는 글을 탐독하였다.

내 기억에는 우리 아랫마을 새 성장동에서는 1907년경에 이미

안식일교회를 받아들였다. 새 성장동 윗동네에는 정씨네가 한 이십 호,

서남으로 진대동에는 곽씨네가 한 사십여 호, 동남쪽 운룡 골에는

한씨네가 한 삼십여 호 살고 있었다.

이 세 동리에서는 저마다 양반이라 우기며 세를 부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도(道)를 받아드린 안식일교인 몇 사람은

곽씨, 한씨, 정씨를 교인으로 만들려고 상당히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나

받아들이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이 안식일교인들은 정유복이를 교인되게 하면

정씨네를 교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내게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안식일 교인더러 "서양 오랑캐의 것"을 배웠다고

악설(惡說)을 하며 한문 공부에만 전념했다.

내 어머님은 계속 과일장사를 하셔서 돈을 좀 모으셨는지

내 학비 부담하시는 것이 그전보다 훨씬 수월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하루는 꽤 많은 돈을 내어 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셨다.

이전에는 내가 공부 중간 중간에 우리보다는 넉넉히 사는

석열 삼촌네 소를 돌보거나 허드레 일을 도와 드렸는데

우리 송아지가 생긴 후에는 그런 일들을 못해 드리니까

이때부터 삼촌은 우리 집을 시기하며 괴롭히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상당히 아량이 계신 분이라 나에게는

“공부나 잘 하라”고 격려를 하시면서 억지 쓰시는 일없이

가족간의 어려움을 조용하게 해결하시곤 하셨다.

나의 어머님은 배우신 것은 없으나 청상과부로

열심히 가정을 꾸려 나가며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셨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는 어머님의 말씀이라면 감히 거스르지를 못했다.


내가 열 네 살쯤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 그때말로 염병이 돌았는데

나도 병에 걸려 사십여 일 간 앓고 겨우 살아남았으나

머리가 몽땅 빠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머리칼 없이는 서당에 안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시집오실 때 사 가지고 오신 "달비"라고 하는

여자용 머리 테를 이리 저리 손질해서 조금 남은 머리카락에 매어

마치 총각 머리처럼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신 일도 있다.

참 자상한 어머님이셨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머리가 빠졌으면 어때? 잔소리 말고 빨리 서당에나 가라!"고

큰소리를 치실 법도 하셨는데 말이다.

4. 서양 오랑캐교회와 진명학교

1910년, 내가 열 네 살 되던 어떤 가을 날,

나의 12촌 형님 정동욱 씨가 찾아와

"새 성장동 안식일교인 박승관 씨 댁 소가 몇 날 전에 갑자기 죽었는데

그 일을 위로하기 위해 신자들이 떡을 만들어

신자나 불신자나 다 청하여 대접한다 하니 유복이

너도 나하고 함께 가자!"고 하셔서 그날 밤에 따라 갔다.

그런데 신자들을 보고 "서양의 오랑캐"니 어쩌니 하며

배척하던 나에게 어찌도 그리 친절한지,

이제까지 그런 친절함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돌아올 때는 "신약전서"라는 처음 보는 작은 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닌가?

책이라면 없어서 못 읽을 때이지만 교회 책인지라

아무도 모르게 열심히 읽어 나가다가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때부터 이 책을 더욱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몇 날이 지나자 나를 “소 장례잔치”에 초대했던

정동욱 형님이 예배당을 가자고 하기에 사양치 않고 갔다.

이십 여명 되는 신자가 얼마나 친절히 대해 주었던지

나도 모르게 이분들과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너무나도 친절하게 사람대접을 받고 나니 그 후부터는

서당이고 무엇이고 다 물리치고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복이가 서양 오랑캐의 도(道)에 미쳤다.”고 할까봐

겁이 나서 공공연하게 다니지는 못하고 가족 몰래 몰래 다녔다.

곧 들통이 났지만 나의 형님들은 “유복이가 서당선생이 나빠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 하면서 “곧 훌륭한 선생을 모셔 올 터이니

예배당에 가지 말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안식일이면 빠짐없이 몇 주일을 더 나갔는데

무슨 진리를 갈구하거나 깨달아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내게 너무 친절을 베풀어준 사랑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한 안식일 예배 후에 어떤 신자가 나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나무 의자에 앉혀 놓았는데 조금 후에 싹둑 싹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비로 만들어 뒤로 늘였던 그 귀한 머리가

땅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때 받은 마음의 충격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얼마 전만 해도 머리 깍은 사람더러

"중놈"이니 뭐니 하고 비웃던 내가 금방 "중놈"이 되었으니,

이 모양으로 어디를 가야 할 지 난감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상황을 아신 어머님은 말 한마디 없이

눈물부터 흘리시는 것이 아닌가?

두 분 형님들도 얼마나 섭섭해 하시는지

아직도 그 얼굴 모습이 생생하다.

또 나에게 시제 때 축문 부를 것을 기대하셨던 몇 분 삼촌께서도

나를 보기만 하시면 “집안 망하게 되었다.”고 야단을 하셨다.

그래서 그날부터 몇 날 동안 나는 집에 있지를 못하고

좀 잠잠해 질 때까지 이 산골짝, 저 산골짝으로 피하여 지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도리어 나를 당당하게 교회에 나가게 하였다.

새 성장동 안식일교회는 이십 여명 신자 중에

한문에 유식한 분은 거의 없었다.

한문을 삼사년간 배운 나는 성경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보니

성경을 꽤 아는 것처럼 보였고 교회에서 듣고 배우는 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꽤 노력했다.

그 때는 건강개혁이라는 말은 안 썼지만 피있는 고기는

먹지 말라고 가르치기에 육식을 안 하기로 결심하고

14세 때 이미 담배 피우는 것도 배웠지만

담배도 일절 끊어 버리고 담배를 사는 대신 연보를 했다.

안식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불과 6-7년밖에 안되고,

새 성장동에 교회가 들어온 지는 불과 삼사 년밖에 안되어

조직이라고는 안식일학교 뿐이었다.

신자들은 나에게 안식일학교 서기직분과 교회 회계직분까지 겸하여 맡겼다.

그래서 얼마 되지는 않지만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금전까지 맡아 관리하였다.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몰라도 정성껏, 정직하게 이 직분을

반년 정도 해 나가자 훌륭한 교인이라 칭찬을 해주어 으쓱하게 되었다.


1911년 봄,


새 성장 동 교회의 어른들이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보게, 유복이! 교회 본부에서 교인이 많은 교회들을 선정하여

소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가르친다는데 우리교회도 그중 한 곳이라네."

"아니, 어르신! 그게 정말 입니까?

그러면 신학문과 성경도 가르쳐 줄 것이 아닙니까?"

"아, 그거야 물론이지! 이제 곧 진명학교라는 소학교가 시작하네!"

나는 그 말을 듣고 교회가 끝나자 곧 집으로 달려와

숨 가쁘게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 안식일교회에서 이곳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신학문을 가르치기로 했답니다.

이제 한문은 얼마큼 알기도 하니 서당은 그만두고

새로 설립되는 소학교에 다니게 해주십시오!"

"..............."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아무 말도 안 하시는데

두 형님이 갑자기 반대를 했다.

"그건 안 돼! 너의 서당선생이 훌륭하지 못해 그런 모양인데

형들이 수소문하여 좋은 한문 선생을 모셔올 터이니

다시는 그런 소리하지 말고 서당에서 한문이나 열심히 공부해라!"

"형님! 그것이 아닙니다. 신학문을 배우고 싶은 것이니

제발 교회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

"시끄럽다. 신학문 배우면 집안 망한다.

다시는 그 소리는 입 밖에 내지마라!"

형님들은 이미 결정이 났다는 듯이 어머님의 말씀은

들어 보지도 않고 밖으로 휙 하니 나가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포기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는 어머님께 희망을 걸고

다른 때처럼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한문선생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도 나이가 이른 것이 아닙니다.

꼭 신학문을 배우게 허락해 주십시오! 네? 어머니!"

잠깐 망설이시던 어머님이 진지하게 말씀을 하셨다.

"유복아, 너도 알다시피 삼촌 세분에 형님이 두 분 계신다.

아무도 글에 대해서는 너만큼은 알지 못하니

네가 잘 생각하여 결정하도록 해라!

그러나 앞길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내 나이 80이 지나 생각하여도 어머님의 넓은 아량과

지혜롭던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에 용기를 갖고 서당을 중단하고

교회에 세운 소학교를 갔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어머님 외에

모든 사람들이 "유복이는 집안 망하게 할 놈!"이라며

빈정거림과 박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러나 반발 심리인지 핍박이 심할수록

교회와 학교에 더욱 열심히 나갔다.

가족들 중 둘째 삼촌은 나와, 이일을 허락한 어머니를

가장 심하게 괴롭혔다.

하루는 둘째 삼촌이 술이 잔뜩 취하신 채로 집에 오셔서

어머님이 계신 방에 들어가 소리를 질러댔다.

"아주머니! 저, 저 유복이 저놈, 우리 집안 망치는 놈인데

왜 아직도 예배당과 예수쟁이 학교에 다니게 버려둡니까?

집안 망해도 형수님은 좋단 말인가요? 말 좀 해보시오! 예?!!"

내 일로 화가 나서 술을 드신 것인지,

아니면 술기운을 빌려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셨던 것을

큰소리치시는 것인지는 몰라도

당장 무슨 일을 저지르실 것 같아 마음이 졸였다.

"둘째 삼촌! 유복이도 이제는 나이가 열여섯입니다.

글 배우는 문제는 그 아이도 생각하는바가 있을 것 같아

저도 말리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니 삼촌이 참아 주세요!"

"아니 뭐요? 집안이 망하는데 참으라고요?

에이, 집안 망하게 할 이놈을 그냥……."

하시며 방문을 덜컥 열고 나가시더니 김장독이 눈에 보이자

몇 달을 먹기 위하여 만든 우리 김장독을 돌로 내리 쳤다.

할 수 없이 내가 삼촌을 잡고 말리려 하자

이번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우리 오막살이 집 문을 부수어 버리고 휭 하니 나가시는 것이 아닌가?

이 소란 속에 무엇보다 김장 김치가 어찌 되었나 살펴보았더니

천우신조로 김칫독이 우두머리만 조금 깨어지고

김치는 그냥 소복하게 있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침 일찍 어머님께 내 뜻을 말씀 드렸다.

"어머니! 지금 이른 시간이지만 삼촌이 나가시기 전에

삼촌을 찾아가 뵈어야 되겠습니다."

"아니 유복아! 안 된다. 안 돼! 너 어제 저녁 일을 벌써 잊었느냐?

무슨 일이 생기려고 새벽부터 찾아간단 말이냐?

맞아 죽는다! 제발 가면 안 된다!"

한사코 말리시는 어머님을 뒤로하고 나는 삼촌댁으로 향했다.

넉넉히 사시는 삼촌댁이라 크고 넓은 판자로 만든 대문이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주먹으로 문을 쾅, 쾅, 쾅 두드렸다.

"작은어머니! 대문 좀 열어 주세요!"

"아니, 너 유복이가 아니냐? 네가 새벽부터 웬일이냐?"

"작은 아버님을 뵈려 왔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냐? 작은아버지는 아직 주무시는데……."

"그러면 방에 들어가 있다가 일어나시면 뵙고 갈게요!"

하면서 나는 작은아버지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통에 삼촌이 깨어나시며 말하셨다.

"너 유복이, 새벽부터 웬일이냐?"

"아니 작은아버지! 어제 저녁 우리 집에 오셔서 하신 일이 생각도 안 나세요?"

"아니, 유복아! 내가 너희 집엘 갔었어?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내가 무엇을 어찌 했기에 이른 새벽부터 와서 난리냐?"

"작은아버지!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 오셔서 소리소리 지르시고

또 왜 어머님께서 그리도 힘들게 담가 노신 겨울 김칫독을 돌로 깨버리고

또 잘살지도 못하는 우리 집 문은 왜 부수셨나요.

우리는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

내가 하도 당돌하게 찾아와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우물 주물 하시다가 겨우 한마디 하셨다.

"아무래도 내가 술에 취해 그랬나 보구나!"

"작은아버지, 우리에게 너무 하십니다.

그런데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놈아! 술도 곡 식물이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작은아버지께서 제 술값을 주십시오!

저도 오늘부터 술이나 먹고 놀면서 예배당도, 교회 학교도 안 나가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정해 주십시오!"

"......................."

내 말을 들으신 삼촌은 하실 말씀이 없으신 지 한참이나 말없이 계셨다.

"유복이 너............ 그만 물러가거라!"

이것은 나의 문제에 대한 작은아버지의 동의나 마찬 가지였다.

이일 후에 나에 대한 핍박은 퍽 잠잠해 졌다.


진명학교는 6학년제로 설립되었는데 나는 4학년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때는 한학(漢學)을 알면 유식하다는 평을 받는 때였기 때문에

나는 4학년 입학허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학교가 시작되자 이 근방의 한문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무시로 학교 구경을 오곤 해서 부작용도 생겼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진명 학교에 새로 김대순 선생이 부임하자

내 12촌 형님인 정동학 씨가 학교로 심방 왔다.

김 선생님은 손님 대접하느라고 자기 옆자리로 모시었다.

이때는 이름만 학교지, 의자도 없이 선생이나 학생이

모두 구들돌에 앉아서 가르치고 배웠다.

그런데 이 날 김 선생과 손님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어떤 학생이 책을 불쑥 내밀면서

“선생님! 이자가 무슨 자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 글자는 "시끄러울(소리) 성"(聲)자인데

선생님은 한문에 그렇게 익숙지 못한 분이라서

갑자기 대답하신 것이 "귀먹을(조용할) 정"(靜)자라고 하셨다.

이것을 본 정동학 씨는 이때부터 “이 학교 수준이 겨우 이거냐”하면서

여기저기에 선전하면서 나에게 “겨우 그런 교육받으러 갔느냐”고 비웃어 댔다.


나는 모든 비방을 무릅쓰고 1년간 열심히 공부했더니

그 이듬해 성적이 우수하다고 6학년으로 월반 진급되었다.

이렇게 인정을 받는 것은 좋지만 신학문의 기초가 없이 진급하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에도 산수에 관한 기초가 빈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 학교에 대한 악선전이 계속 되었지만

선생님들은 아랑곳 않고 열심히 가르치셨다.

안식일 교회에서 설립한 학교가 몇 되지 않아서

멀리 경상북도 경산에서까지 학생들이 왔다.

이 학교가 비록 교통이 불편한 산중에 있었지만

유학생들까지 합하여 40여명이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로는 매우 큰 숫자였다.

나는 어느 학과보다도 성경을 매우 좋아해서 성경도 많이 읽었다.

당시에 나의 생애를 틀 지워준 성경 절들 중

몇 가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디모데전서 5장 6절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는 말씀은

읽을 때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세상 즐거움에는 참여치 않겠다!" 라는

결심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시편 119편 9절-11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 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를 읽으며

주의 법도가 무엇인지 알기 원하고 그대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런 결심을 하고 나니 시간만 축내던 세상 친구도 멀리하게 되면서

그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성경 읽는 일에 보내게 되었다.

디모데 전서 5장 8절,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를 읽으면서 나는 누구보다도 우선

나의 일가친척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1912년,


내 나이 16세가 되던 가을, 약 60여 년 전의 일이다.

우리고장 주위에 있던 증산 사과리 예배소, 함종 고앙재 예배소,

강서 거장리 예배소, 함종 성장동 예배소의 교우들이

어떤 안식일에 성장동 예배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어떤 조직체가 주최한 것이 아니고 네 곳 교우들이

서로 연락하여 합동으로 모인 것이다.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니 감격스러웠는지

네 곳 교회가 서로 뜻이 맞아 무슨 연합조직체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전도활동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모두 찬성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운동이 아니었던가 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면 조직과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서

회장은 김덕건?씨 라는 분이 피임되고 서기에는 내가 피임되었다.

조직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다만 이렇게 조직을 가지고 네 곳 교회에서 번갈아 모이면서

대 전도회의 계획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안식일, 평생 처음 보는 코가 크고 높은,

그때 말로 “양국사람” 두 명과 어떤 조선인 한 명이 나와서

나에게 있는 문부(文簿)를 보자고 하더니

무슨 불법단체의 서류들인 양 전부 압수해 가는 것이 아닌가?

요새말로 하면 평신도 차원의 네 교회 연합선교조직의 대 전도회의 꿈은

시작도 못해보고 와해되고 교인들의 열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당시 안식일교회 조직이 완전치 못한 때라

전도활동과는 관계없는 조직들을 멋대로 만들어

종종 교회나 본부가 어지럽게 되곤 해서

다른 지역과 통신을 자유스럽게 할 수가 없던 때인지라,

소문에 어느 지역에 조직이 생겼다 하면,

“자라보고 놀란 이가 솥뚜껑보고 놀라”는 격으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거조(擧措)를 취한 듯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때 왔던 양국인 중 한사람은,

나중에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된 순안 의명학교 교장 이희만 씨였다.

지금 생각해도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1912년, 11월.

내 엄지손가락은 한 토막이 없고 손톱도 없어서

처음 보는 사람이나 아이들이 그 내력을 묻곤 한다.

11월이면 우리 고향에는 이미 초겨울에 접어들었고 해도 일찍 저문다.

내가 다니던 진명학교는 우리 집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었다.

당시에는 야학을 다니는 학생이 많았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하루는 어쩌다 학교에 갈 시간에 늦어서 부랴부랴 오두막집을 나서면서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유복이냐? 오늘은 학교 가기 전에 소죽 쑬 준비는 해 놓고 가거라!"

"어머니! 학교 갈 시간이 벌써 늦었어요.

소죽은 둘째 형님이 하셔도 되잖아요!"

"나도 안다. 그런데 아직도 셋째삼촌 댁에서 술들을 마시는

모양이니 어쩌겠느냐? 더 어둡기 전에 빨리 해 놓고 학교에 가거라."


둘째 형님만 집에 계셨던들 이일은 아니 일어났으리라!

해는 져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소죽준비는 한사람이 조짚을 손에 쥐고 작두에 들이대면

다른 사람은 작두 날 위에 연결된 줄을 손으로 끌어 올린 다음

작두날을 발로 밟아 조짚을 썰면 되는 것이다.

"둘째 아주머니! 저 소죽 만드는 것 좀 도와주세요. 학교 늦었어요!"

"네. 알았어요. 에이고..이이는 아직도 어디서 술만 마시고 있누?"

"아주머니! 제가 조 짚을 넣을 테니 작두를 밟으세요.

빨리 하세요. 저 학교 가야 되요."

"알았어요. 유복이 삼촌! 빨리 조짚을 넣으세요!"

"예. 아주머니. 제 걱정 마시고 작두나 빨리 빨리 밟으세요!"

겨울해가 지자 어둠이 빨리 오는지라,

급한 나는 정신없이 조 짚을 작두에 들이밀었다.

"악! 내 손가락..내 손가락이!"

"유복이 삼촌! 왜 그래요? 아니 삼촌 손이..

어머니! 유복이 삼촌이 손을!...."

"무어라고? 무엇이 어떻게 됐다고?!! 무슨 일이냐?"

"어머니! 유복이 삼촌 엄지손가락이 작두에.."


나는 조짚을 작두날에 넣고 둘째 아주머니는 날이 이미 어두운지라

내 손가락이 아직 작두 날 아래 있는 것을 보시지 못하고

작두날을 발로 내려 밟으신 것이었다.

나는 마디가 잘려나간 엄지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잡고 있다가

부엌문을 박차고 나오신 어머님이 보시도록 잡고 있던 손을 놓자

갑자기 피가 세게 내뿜었다.

“아니. 아니, 저 피가! 유복이 손가락이...이걸.. 이걸 어떡하지?"

“어머니. 제가 그만.. 어쩌면 좋아요! 어머니.."

“아니다.. 내가 학교에 늦은 애를..

그나저나 약도 없이 이일을 어쩌면 좋나..이일을!"

“어머니! 제가 어디서 들으니까 이렇게 잘라진 데는

오래된 거미줄을 쓴다는데..."

“그래! 약이 없으니..... 빨리 헛간 구석구석에 가서

거미줄을 걷어 오너라. 어서 빨리!"

“예! 어머니!"

지금 생각하면 농촌에서 어쩌다 그런 비위생적인 약방문이

소문으로 돌았는지, 그 더러운 거미줄을 걷어서 약이라고

상한 손가락에 쳐 맸으나 다행히 부작용이 안생기고

얼마 후에 엄지손가락이 아물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이 도우신 기적임이 틀림없다.

손가락 한 마디만 잃은 것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면서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교생활과 집안일을 열심히 했다. 주위사람들은

소위 신학문을 가르친다는 학교를 계속 비웃고 반대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선생님들은 성의껏 가르치고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며 집안일도 열심히 했다.


졸업반 학생은 나와, 내 십이촌 동생 동성군,

용강군 광양만에서 유학 온 이격원 씨,

평남 대동군서 유학 온 최경선 씨 등 네 명이었다.

주위의 반대와 비웃음은 오히려 우리 네 학생을 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열심히 공부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여러 과목들 중에 나는 성경과 한문을 무척 재미있게 공부했다.

당시 교사는 김대순, 정동필, 하동만 씨 등이었는데

이분들에게서 한문은 배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문책이 신 교과서로 꾸며져 있으니 취미 있게 보고 읽곤 했다.

나는 학교에서는 물론 특히 집에서 성경을 고성대독(高聲大讀)을 하니

동네 사람들이 비웃던 것도 점점 식어져 갔다.

아마 내가 부끄러워했다면 그 비웃음은 더심하고 더 오래 갔을 것이다.

1913년 3월, 네 명의 학생이 진명학교 제일회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만 1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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