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322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의 갈길 다가도록 (연재)#13

(나는 다시 편지를 보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병애 씨가 내게 오는데 내가 가진 조건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니 그 동안의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연재 #12의 끝 부분)

6. 재혼-제2부.


그런데 김병애 씨는 나의 이 마지막 편지를 받기 전에

”저는 저의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갑니다.”라는 간단한 소식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써서

내게 보내면서 친정으로 간 것 이었다.

내가 “그 동안의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자”는 편지는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친정에 자기의 언니와 오빠네 집이 있으니까

자기의 딸 “제후”를 거기에 맡기려고 간 듯 했다.

이 편지를 받고 생각을 해보니 “젊은 과댁(寡宅)과

내가 가정을 이룬다 하면서 모녀를 생이별시키는

실수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내가 목사로서 “남의 아이니 내 아이니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을 사랑으로 다루면 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김병애 씨가 친정에 가면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해서 유익하게 된다.”는 말에

더욱 감동을 받아 “당신의 딸 ”제후“를 데리고 오도록 하시오.”라고

전보를 친정으로 쳤다. 그 전보를 받은 김병애 씨는

“이렇게 저의 소생도 함께 오라는 전보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편지가 와서

드디어 우리는 모두 모이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큰 딸 진실이가 나이는 어린데 어떻게 이 일을 알았는지

”아버지께서 이렇게 계모를 모셔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라고

말을 하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계모가 오면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전도부인으로 일하던 부인이 와서

너희들을 돌아보고 우리 가정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말라”고 이야기 하니 나이도 어린

진실이는 “그러면 그렇게 할까요?”라고 어른 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서 나의 여섯 아이들도 모두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이번에는 좀 공부한 부인을 취할 줄 알았는데

정 목사의 하는 일은 모르겠다.”라고 하기에 “당신들이 내 생각을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김병애 씨를 맞아들일 시간을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내년 즉 1935년 5월에 합회 총회를 하니까

그때 모여서 간단하게 식을 거행하자.” 라고 했더니

김 병애 씨는 “이미 결정이 되었으니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실행함이 좋겠다.”라는 편지가 왔다. 나도 생각을 해보니

“젊은 과수(寡守) 전도부인으로 어디로 개가를 한다 하면서

교회에서 일한다는 것이 힘들겠다.”라고 생각이 되어

“그러면 1935년 2월, 서울에서 합회평의원 회의가 있으니

회의가 끝나는 2월 25일 저녁에 간단한 예식을 하자.”는 기별을 보냈다.

그래서 김병애 씨는 1935년 2월 24일인가 서울로 왔다.

한번 도 본 기억이 없는 그이를 용산역에서 맞아

최태현 목사 댁으로 가서 하루를 묵게 하고는 25일 밤에

시조사에서 재혼식을 거행했는데 나를 사랑해 주시던

최태현 목사님이 주례를 하시고 내 들러리로는 이성의 목사가 섰고,

김병애 씨 편에는 고계옥 씨와 최 목사님 부인이 해주셨다.

이렇게 재혼식을 하고 숙소도 마땅치가 않아

그날 밤 11시 20분에에 서울 청량리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기차에 올라 다음날 새벽에 원산에 도착하여

어느 여관에 들어가 잠시 잠을 잤다.

그날 아침, 나는 원산에 주재해 있는 김석영 목사를 심방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의 재혼직전에 있었던 2월 합회 행정위원회 때에

김석영 목사에 관한 말들이 많았고 나도 “그 분을 모시기가 힘이 드니

그분이 원래 속해 있던 서선대회에서 그 분을 다시 받으시는 것이

좋겠다.”라고 제안을 하니 경험이 있는 분들이 다 수긍을 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리고는 내가 제의한 것도 아닌데

서선대회에서 이 분을 평안남도 개천으로 모시면서

새 직분에 맞게 이 분의 월급도 12원을 감한다고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새 아내와 같이 원산으로 오기도 전에 누군가

이 결의된 사항을 김석영 목사에게 전해 버렸다.

몇 시간밖에 잠을 못 잔 나는 졸음이오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인사차 김석영 목사의 거처를 찾아가니 인사도 드리기 전에

김석영 목사가 팔뚝까지 저고리 소매를 걷어 올리고 땅을 치면서

“이번에 누가 나를 개천에 보내기로 제의했으며 누가

나의 월급 12원을 감하기로 했는가?” 하고 야단을 쳤다.

이때는 부인과 따님이 원산에 방문 오셨다가 김 목사님의

큰 소리와 함께 세 식구가 마치 초상집이 된 듯 크게 우시니

내가 데리고 온 새 아내는 무서운지 그만 나가 버렸다.

나까지 그곳을 나오기가 무엇하여 그냥 앉아서

“목사님! 이러실 것이 아니라 다음 5월 달에 서울에서

합회총회가 있습니다. 그때 일의 전말을 아시게 될 터이니

조금 기다리시고 지금 너무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좀 진정이 되셨는지 “내가 미안하게 되었소.

정 목사가 새로 가정을 이뤄 오는데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새 아내와 그날 함경남도 북청으로 가서 손형국 씨 집에서

하룻밤 자고 2월 그믐에 청진에 도착하였다.

새 아내가 처음으로 집에 와서

아이들도 만나보고 모든 사정을 그대로를 잘 받아 드리니

내 마음도 안심이 되고 가정도 점점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삼일 후에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 이웃과

교회의 연로하신 분들을 청해서 인사도 하고,

그 주일에 아내와 같이 예배당을 나가니 교우들이

“전에 사모님만 못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니

이제 정 목사님은 상심 마시고 힘써 일하셔서

교회가 더욱 자랐으면 좋겠다.”고 하며 우리를 환영해 주어

나와 내 새 아내도 안도감이 생기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1935년 5월,

모든 사역자들은 아내를 데리고 5월의 합회총회에 참여하라는

결의가 있기에 아내를 데리고 합회총회에 참석했다.

이번 총회에는 한국에 재림기별이 들어온 지 30년 되는 해로

구니야 목사도 초청이 되었다. 충실이가 열병에서

회복이 되기는 했지만 계속 파리해 가기에 서울 위생병원의

닥터 루에게 진찰을 받아 보려고 함께 데리고 갔다.

나의 중매를 선 친구 조치환 목사도 약속한 대로

제후를 데리고 왔다. 제후가 열 살 정도 되었을 때인데

나를 처음 만나자 눈이 동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새 아내와 조치환 목사가 “이 분이 너의 아버지”라고 하며

이야기를 해 주고 나니 조금 표정이 부드러워 졌다.

우리 네 식구는 총회동안 이여식 목사 집에서 지나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아이들이지만 서로 의좋게 잘 지내서 감사했다.

충실이를 데리고 위생병원에 가니 닥터 루는 충실이를 진찰하고 나서 말했다.

“정 목사, 이 아이에게 복막염이 생겼는데 수술해야 되겠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닥터 루! 수술하다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까? 잘못되면 어찌 되나요?”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지요”

닥터 루는 정말 그럴 가능성도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꼬치꼬치 묻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나는 잘못되면 죽는다는 것이 매우 심각하게 들렸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아이 수술을 안 시키렵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려는 생각입니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해결해 보렵니다.”

그래서 충실이는 수술을 안 하고 제후와 함께 원산으로 왔다.

이제 청진에 가서 이삿짐을 꾸려 원산으로 오기만 하면 되기에

원산에 살고 있는 전처의 언니와 그 남편 김태점 씨에게 부탁을 하자

기쁘게 아이들을 맡아 주겠다고 해서 우리 부부만 청진으로 갔다.

당시 둘 째 아이 태영이는 순안 의명학교에 공부하러 갔기 때문에

이삿짐을 꾸린 후에 네 아이들을 데리고 원산으로 돌아 왔다.

그 당시에 사역자의 사택이 없기 때문에 나도 누구에게

집을 부탁은 했지만 와서 보니 단간 집을 얻어 놓았는데

그것도 옛적에 기생 노릇하던 어떤 수단이 좋은

늙은 여자의 집이었다. 나이 50이 넘은 여자 주인이 사는 그 집에

방 한간을 얻어 우리 식구 여덟 명이 그 방에서 자게 되었다.

여덟 식구가 한 방에서 자노라니 말할 수 없이 곤란하여

다른 집을 얻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집을 한번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 부인의 병간호와 장례식,

또 여섯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생활하느라

수중에 돈푼을 모아 본적이 없으니 난감했다.

내가 재혼을 하기 전에 아내가 될 김병애 전도부인에게

“돈이 얼마가 있는가, 또는 땅이 얼마나 있는가?”를 물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김병애 씨는 언니가 몇 있었는데 김병애 씨의 형부 한 분이

결혼직전에 나에게 편지하기를 “정 목사가 내 처제가 되는

김병애 씨를 데리고 가지만 김병애 씨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관해서는

관계하지 마시오!”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형부로써

처제를 걱정하는 것은 이해를 하오! 당신의 처제 김병애 씨가

내게 출가하여 오지만 가지고 있는 동산이나 부동산은

다 김병애 씨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다음부터

그런 걱정은 아니 해도 됩니다.”라고 회답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수중에 돈이 없이 집을 지으려 생각하니

그 형부라는 분이 나에게 했던 편지가 생각이 나면서

새 아내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가 물어 보는 것이 매우 쑥스러웠다.

그러나 이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대회장으로 목회 일을 하자면

집이 한간이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새 아내에게 물은 즉 한 500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으나 나는 새 아내에게

그 500원을 내게 빌려 달라고 했다.

“무엇에 쓰시려고 하느냐?”고 묻기에 이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셋집을

얻기보다는 아무래도 예배당 옆에 집을 하나 지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무 말도 묻는 것이 없이 500원을 쓰라고 하며 내 주었다.

한 번도 집을 지어 본적이 없는지라 이리 저리 수소문하여

집의 건축허가원을 제출하니 곧 건축허가를 내줄 것이라 하였다.

건축허가원을 제출하고 나자, 믿는 교인은 아니지만

원산에 살고 있는 내가 아는 사람이 찾아와 말하기를

“정 목사가 집을 지으신다고 하니 제가 목수 한사람을

소개할까요?”하면서 목수 한 분을 데리고 찾아왔다.

내가 대강 이런 집을 건축하기 원한다고 설명을 하니

“500원이면 건축할 수가 있다.”하여 돈을 지불하고

일을 시작했다. 집의 기초를 닦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다 올려놓았는데 경찰서에서 나와

“건축허가도 없이 건축을 시작했다.”고 심하게 야단을 쳤다.

그래서 나는 “건축하는 일이 처음이므로 건축허가원을 제출해서

접수만 되면 시작할 수 있는 줄로 알았다.”고 하니

“이해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식 허가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하니 그 관리들도

나를 용서하고 건축 허가서를 내 주었다.

그런데 겨우 허가는 맡았는데 목수는 서까래만 올려놓은 채로

더 이상 집을 지으러 오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수소문하여 알아보니 이 사람이 내 집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집을 짓겠다고 약속을 해서 주인을 안심시켜 놓고

서까래까지만 걸어 놓고는 일단 중단하고 다른 곳도 같은 방법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기꾼 목수를 만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처음에 이 목수와 건축문제로 이야기 할 때에

“이곳 원산에 나와 같은 평안도 사람이 경영하는

“삼성 목공소”가 있는데 내가 신용을 얻어서 필요할 때마다

목재를 외상으로 가져다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화근이 되었다.

내가 집지으라고 준 돈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돈도 받아 챙기고,

그 삼성 목재소에 가서는 정동심 목사가 사용할 것이라 하고

목재를 외상으로 받아다가 이 집 저 집 건축을 시작만 해 놓고는

사라진 것이다. 그 목수를 찾을 수도 없고, 돈도 잃어버리고,

삼성 목재소에선 재목 가져가고 돈 안준다고 내게 독촉을 해 왔다.

그래서 삼성 목재소에 사기당한 일을 설명하면서

어찌해야 되겠나 하고 물으니 앞으로 할 수 있는 데로 갚으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어수룩하게

잘 알아보지도 않고 불신자에게 일을 맡긴 것이 잘못이었다.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가만 생각을 하니까 이러다가는 안 되겠기에,

청진에 있는 손성철 씨에게 편지를 냈다.

비록 먼 청진에 살고 있지만 내가 일이 이렇게 되니

이 분 밖에는 믿고 부탁할 곳이 없었다. 손성칠 씨는 내 편지를 받자

“아, 목사님께서 집을 짓는다고 하면 내가 나가서 돕지요.”하고는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원산까지 와서 말썽 많았던 집 건축을 끝내 주었다.

이 집은 함석집이었는데 원산 우리교회 장로로 계신

팽용섭 씨와 이형렬 씨 같은 분들이 돈에 상관없이 열심히 거들어서

원래 계획했던 대로 아랫방, 윗방, 부엌, 건넌방 등을 포함한 집을

얌전히 지었다. 손성철 씨가 건축을 마치고 돌아 갈 때에

내가 공임을 지불하려 하였으나 목사님의 집인데 무슨 말이냐고 하며

안 받기에 여비만 조금 받아 가셨다. 그래서 아내에게 받은 돈 500원은

대부분 사기를 당했으나 감사한 분들의 도움으로 집은 완성되었다.

원산으로 이사해서 또 네 아이의 학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진주서 공부하던 제후는 6학년, 진실이와 충실이는 5 학년,

정실이는 3학년이었다. 마침 우리가 살게 된 집이

원산 제일보통학교 바로 옆이라 네 아이들을

할 수 있으면 이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서

그 학교를 찾아가 담임되실 분들을 만나 상의를 하여

양해를 받고는 교장 선생을 찾아가서 설명을 드리니

“아 그러냐?” 하시며 아이들의 이름을 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3 학년에 정 정실, 5학년에 정 충실과 정 진실,

6학년에 박 제후라고 써서 드리니 교장은

“딸 넷을 데리고 왔다고 했는데 왜 하나는 박씨요?”하고 묻는다.

당시에는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난처한 때였지만

나는 사실대로 “내가 상처를 했는데 제후는

재취한 아내가 데리고 온 애”라고 했다.

그랬더니 교장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네 아이들이

다 전학이 안 되면 제후만 우선 입학시켜도 되겠소?”라고 하신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까 “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소! 당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한번 시험을 해 본 것이오,

네 아이를 모두 다 받아 주겠소!” 하는 것이 아닌가?

이해심이 많으신 분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어려운 부탁을 드린다.”고 하면서

“네 아이들이 모두 토요일에는 학교에 못 올 것 같다.”고 하니,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묻기에 “나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교회 목사인데 목사인 내가 자녀들을 안식일에 학교에 보내면서

어찌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겠는가?” 라고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학교도 규칙이 엄해 토요일에 공부를 해야 하지만

목사가 와서 그러니 어쩔 수가 없군요.” 하면서 허락을 해 주었다.

네 아이가 다 전학이 허락이 되고 안식일 문제까지 순조롭게

해결하면서 원산에서 제일 좋다는 원산 제일보통학교에

순조롭게 전학허가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큰 아이 태혁이가 원산에 와보니 친구가 한명도 없다며

도로 청진으로 가겠다고 한다. 이거 난처한 문제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이도 열여덟이나 된 큰 아이가

4년 가까이 청진에서 살다가 원산에 오니 아무 친구도 없고

또 갑자기 계모 시하이고 하니 철이든 아이를 못 보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 아프지만 태혁이를

청진으로 보내며 조금 나이가 들면 부모로서

제어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한 3개월 후에 다시 원산으로 오겠노라고 연락이 왔다.

내가 태혁이를 청진으로 보낼 때는 “아무리 친구들이 있다 해도

자기 집만은 못 할 터이니 조금 지나면 곧 다시 오겠지.”라고

생각하고 보냈는데 정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온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으니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여러 가지로 생각 하다가

이미 청진에서 양복 만드는 것을 배우던 터인지라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원산 정미양복점이라 곳을 찾아가

태혁이를 부탁했다. 그 양복점 주인은 나보고

“아버지 되는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내가 목사”라고 했더니 “목사님 자제라면 보내라”고 해서

큰 아이 태혁이는 원산 전미 양복점에 가서 양복 기술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목사라고 하면 믿어주던 시대였다.

그런데 대회장이 되고 나니 출장이 많아졌는데

지방에 출장 갔다가 와서 태혁이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양복점에 다니는 아이 같지가 않고 얼굴이 시커멓게

먼지가 묻어서 들어오기에 “무슨 일인가?”물으니

“양복기술은 집어치고 지금은 오토바이 고치는데

나가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너 그렇게 신용 없이 그만 두는 것도 잘못 되었고

또 네 모습이 보기에 안됐다. 그러니 내가 다시

양복점에 말 할 터이니까 내일부터 다시

양복점에 나가라.”고 말한 후에 온 몸을 다 씻기고

다시 양복점에 보냈다. 아이들이 점점 크게 자라니까

부모노릇 하기가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문제들이 다 해결 되었는가 했는데,

하루는 대회일로 출장을 갔다가 저녁녘에 집에 들어오니

건너 방 책상 위에 메모가 하나 놓여 있기에 집어 드니

“나 집을 나갑니다!”라고 태혁이가 써놓고 집을 나간 모양이었다.

나의 아내도 영문을 몰라 하기에 저녁도 못 먹고 동해바다로

오르락내리락 하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고,

혹시나 해서 내 전 처형 집에 가 보아도 없고,

알만한 친구 집에 가 보아도 없으니 나의 심정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눈을 감는 둥

뜨는 둥 하며 밤을 새고 나니 그 이튿날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는 모르나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니 마음이 놓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이러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성장한 태혁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고 계속 생각하며

그해 겨울을 보내고 1936년이 되었다.

당시 합회장으로 계신 우국화 목사가 원산에 출장을 오셨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가정형편을 이야기 하고

“우리 맏아들이 지금 열여덟 살로 어른이 되었고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말을 했더니 서울로 보내면

시조사에 자기가 어떻게 주선을 해서 보겠다고 하시기에

1936년1월에 태혁이를 서울로 보냈다. 태혁이가

서울로 가면서 36년 1월 7일에 태목이가 출생했다.

그러니 우리 태혁이와 태영이는 나갔지만 제후가 들어오고

태목이가 출생하니 애가 또 여섯으로 되었다.

태목이가 태어 날 때에는 원산에 전도부인으로 온

김신덕 씨가 수고를 많이 했다.

1936년 어느 날 아침,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 했던가?

4학년에 다니던 정실이가 점심때도 아닌데

숨을 가쁘게 쉬며 집으로 왔다. “아침 먹고 학교에 가서

곧 릴레이를 하다가 배가 아파서 집으로 왔다.”기에

배를 만져보니 퉁퉁 부어 있었다. 걱정이 되어

그 때 원산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안난규라는

독일 의학박사를 찾아갔다. 이분의 부인은

우리 교회를 나오고 있었고 또 이 의사는 제일 보통학교의

교의(校醫)를 맡고 있었기에 정실이를 데리고 가서

진찰을 해 보니 급성 복막염이라 하며

곧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수술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느냐?” 물으니 역시

“잘못되면 죽는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그렇다면 수술을 안 시키겠다.”고 하니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기에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노라.”하고 데리고 왔다.

보호자가 수술을 거부하니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마 한심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정실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한 주일 가량 우리 부부는

기도드리며 정성껏 돌보니 정말 완연하게 회복이 되었다.

1주일 후에 학교에를 데리고 가니까 안 박사도

“어떻게 이렇게 회복이 되었느냐?” 하기에

“목사가 할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했더니

학교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큼 감사해 했다.

충실이때도 닥터 루가 수술이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하여,

내가 믿음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겁이 나서

충실이를 그냥 데리고 와서 부부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정성껏 간호하여 회복이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서 너 달 후에 닥터 루가 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왔기에

충실이를 데리고 가서 닥터 루에게 보이니 “당신, 뭐해서

치료했느냐?”고 묻기에 기도드리면서 정성껏 돌보았다고 하니

“참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같은 어려운 병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나와 내 아내를

도우셔서 아이들의 병이 나음을 얻은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그 이듬해에 충실이와 진실이는 6학년으로, 정실이는

4학년으로 진급하게 되고 제후는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학교에서 “제후는 졸업장 없이 졸업을 하던가,

아니면 졸업을 포기 하던가 하라.”는 것이다.

이유는 성적이 좋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후가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일신국민학교라는 사립학교에

입학을 할 때 제후의 생일을 잘 따지지 않고 너무 어리게

입학을 시킨 모양인데 현행법상 졸업장을 주기에는

생년월일이 미달이어서 졸업장을 못 주겠다는 것이었다.

졸업장이 없으면 진학도 못하고 그렇다고 집에서

일년을 놀게 할 수도 없고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해 6학년을 한번 더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후, 진실이, 충실이 세 딸아이들이

6학년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자녀가 많다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지만 모든 문제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받고 감사 드렸다.


태목이가 날 때에 여러 가지로 수고해 주신

전도부인 김신덕 씨는 내가 대회로 청한 것도 아니고

합회행정위원회 때에 “북선대회에는 전도부인이 한 사람도

없으니까 김신덕 씨를 전도부인으로 명한다.”고 해서

오시게 되신 분이다. 그런데 태목이가 출생할 때에

수고를 많이 해 주시는 과정에서 내가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 집사람과 무엇인가 서로 잘 맞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기 전에 조용히

해결함이 좋겠다.”라고 생각되어 이번 합회행정위원회 때에

“그 전도부인을 우리 대회로 보내 주신 것은 대단히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그 분을 다른 데로 전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내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합회 행정위원들이 “다른 대회는

사역자를 더 가져가지 못해서 야단들인데 정 목사는

보내준 전도부인도 다른 데로 전근시키라니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그래서 “이유는 묻지 말고

제 청을 들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래도 “그 이유를 알아야 결정을 하지 않겠느냐?”고

독촉이 심했다. 마침 이성의 목사가 말하기를

“정 목사, 사정이 어떠하다고 얘기를 해서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 전근시키기가 쉬울 터인데 왜

우물쭈물 하느냐”고 하였다. 할 수없이 “대회장인 나보다는

왜 그런지는 모르게 내 안 사람하고 무엇인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라고 설명을 시작하자

눈치가 빠르신 이성의 목사께서 내 말을 중도에서 막으며

“아! 그런 문제 같으면 속히 전도부인을 옮겨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 전도부인과 대회장 목사의 부인과 버성긴다면

그 교회일이 잘 안되니 전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하셔서

김신덕 전도부인은 1936년에 곧 다른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나나 이성의 목사는 지도자나 사역자 사이에 어떤 문제가 보이면

그 문제가 크게 벌어지기 전에 해결함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 바란다.

일본은 정신면에서도 조선을 일본화 시키기 위하여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를 하라면서 괴롭혔다.

특히 신사참배 문제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을 어렵게 했다.

우리교회는 계명을 중히 여기는 교회로 첫째 계명부터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쳐 왔는데,

신사참배는 우상 섬기는 것이 되어 버리고,

신사참배를 아니 하면 일본경찰이 가만 두지를 아니하니

교회로써는 너무도 입장이 난처했다. 더구나 다른 교파에서

우리를 주목해 보고 있으니 더더욱 다루기 힘든 문제였다.

그런 중에 합회에서는 일본 관리들의 심한 협박 등으로

할 수없이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식차원에서

신사참배를 허락한다고 결정이 되었다.

이런 애매한 결정을 내렸던 합회장인 우국화 목사는

이 문제를 책임지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사참배 등은 일본이 기독교와 그 기관들을

말살하려는 핑계거리였는데 말이다. 후에 전근해 와보니

오히려 서울은 범위가 커서 신사참배 같은 것이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목사들은

일본이 각 지방에 있는 일본 경찰을 동원해서 교회나

학교단위로 신사참배를 강요했기 때문에 정말 지혜롭게

하지 않으면 붙잡혀서 심한 고생을 하는 형편이었다.

날이 갈수록 일본과 미국이 국가 간 사이가 좋지 못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점점 신사참배라는 것을 가지고 기독교를 박해했다.

나도 원산에 와서 일본관리의 명령으로 원산 신사(神社)에

나가야 되는데 교인들 전부가 못 나오면 대표라도 나오라는

명령에, 당시 원산 교회 장로이신 팽용섭 씨와 이형렬 씨 등과

나가야 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보이지를 않았다.

비록 교단내에서 신사 참배를 허락한다고 결정이 났다고 해서

그렇게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려움에 떠는 교우를 보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면 그 결과가 뻔한데도 거절하라 할수도 없었다.

사역자라 해도 이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물며 가족이 있는 교우들이야! 정말 이 억지 같은 일에 휘말려

너무 고생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피할 방법을 모색하고 싶었다.

교인들을 대표하여, 교회의 어른 되는 장로 직분에 있기 때문에 나온

이 분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꽉 차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오래 생각한 끝에 이렇게 제안을 했다.

“우리, 이번 신사(神社)에 가서는 좀 지혜롭게 하여

곤경을 모면해 봅시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일을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반색을 하면서 물었다.

“자, 성경에 보면 다니엘의 세 동무도 그 우상 숭배하는

현장에는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가서 우상숭배 안 하고

다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그곳에 가서

”모두 허리 굽혀 경례!”라는 신사참배 호령이 나오기 전에

그 사람들 보다 훨씬 신사 가까이 나가서 마음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여 해산호령이 나기까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시다!”

내 제안에 같이 가는 분들이 다들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약조를 하고 미리 신사로 갔다. 우리 셋은

멀찌가니 앞으로 나가서 신사참배 명령이 나기도 전에

기도하는 자세로 서서 정성껏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이런 자세로 서있는 우리에게 함께 모이라고

명령도 아니 하고 저쯤 떨어져 모여 있는 저희들끼리

이런 저런 호령을 하고 나서 해산명령을 하기에

곤경을 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일은

잘했다는 이야기보다는 일본의 억지에 너무도 힘들어하는

평신도를 위해 인간이 짜낸 연약한 지혜임을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하도 어려운 시절이라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였다.

하루는 대회장으로 1936년 2월경에 함경남도 영흥을 방문했다.

다른 지역도 그랬겠지만 함경남도 영흥, 이원, 통호 등의 지역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심해서 경찰관들이 눈이 벌게 가지고

무슨 집회만 있으면 조사가 심했다.

또 기독교에 대해서도 압박이 심해서 조금만 빌미가 있어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취조(取調)가 심했다.

내가 영흥을 방문한 때에 마침 사경회가 시작이 되었는데

영흥경찰서에서 안식일교회 책임자를 경찰서로 오라고 했다.

이 지역에 손형국 씨와 정관신 씨 등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경찰서로 간다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회장으로 왔으니 내가 간다고 해서 영흥 경찰서로 갔다.

교회 일을 하면서 경찰서에 종종 불려가곤 했지만

영흥경찰서처럼 삼엄한 곳은 처음 이었다.

보통은 면회실로 가는데 여기서는 아예 아래층과

이층 사이에 있는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시멘트 바닥에 테이블 하나와 의자 3개만 놓였는데

나를 테이블 옆에 앉게 했다. 조금 후에 형사 같은 사람이

술이 취해서 들어와 한쪽 옆에 가서 앉고 조금 있더니

고등계주임이라는 사람이 와서 취조를 하는데 한 2시간동안

별의별 것을 다가지고 취조를 해대었다.

저희는 무슨 중대한 일인 양 취조를 하는데 내게는 별것 아니기에

웃으며 조목조목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 조선사람 형사는

술이 취해서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이놈이! 저놈이!”하며

욕질을 해댔다. 난 들은 척 만척하고 고등계주임하고 얘기를 했다.

내가 화를 내거나 이의를 제기 했으면 틀림없이

트집을 잡혀 고생을 했을 것이다.

고등계주임은 두 시간 이상 뭔가 사상적인 트집을

잡으려 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대답하거나 화도 내지 않고

시종 웃으면서 대답을 하니 “당신네가 이번 사경회인가

뭐인가를 하는데 집회계 없이 시작해서 지금 불법집회가

문제가 된 것이니 시말서(始末書)를 쓰라.”고 했다.

당시에 시말서를 자주 쓰면 여러모로 사역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인지라 고등계 주임에게 “시말서를

쓰기는 쓰겠는데 내 양심에 원하지도 않으면서 쓰게 되면

결국 당신들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나가서 불평을

말하게 될 터인데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느냐?”고 물었다.

고등계 주임은 잠간 주춤하더니 “아, 시말서 쓰지 말고

그냥 가시오!”라고 했다.

내 평생 처음 그런 삼엄한 취조를 받고도 시말서는

쓰지 않고 나오게 되었다. 내친김에, 불법이 되어버린

사경회를 중단하기 싫어서 고등계주임에게

“아무래도 경찰서장을 한 번 만나 보면 좋겠으니

내일 아침 만나 볼 수 있도록 주선을 해 달라.”고 했더니

어리둥절해 했다. 그 이튿날 경찰서에 찾아갔더니

그 고등계 주임은 나와의 약조 때문인지 일찍 나와 있다가

경찰서장한테 가서 뭔가 한참 이야기하고 나오더니

“지금 경찰서장이 손님이 와서 너무 바빠 못 만나겠으니

돌아가라.”고 하면서, “이제라도 집회계를 내라.”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집회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사경회를 무사히 끝냈다.

그때에 사경회 강사, 또는 교우되는 손형국 씨나

정관신 씨 같은 분들이 갔다면 삼엄한 취조실에 가서

두려움으로 아니할 말이나 반응을 보여, 고생은 물론

시말서 쓰고, 사경회도 중단 할 뻔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서

무사히 그 일이 해결된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그때 내가 무슨 구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관계기관(關係機關)에 아는 이도 없었지만 성경 말씀에

너희가 그런 입장에서도 겁내지 말고 성령의 지도하심을

따르고 믿으라고 하는 말씀대로 기도드리며 나아가니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해결해 주셨다고 믿는다.


7. 서울 삼육원의 시작과 순안 의명학교 매각설


1937 년 2월,

다섯째 아들 태목이가 36년 1월에 출생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했는데 그 기쁨도 잠간,

연년생으로 딸 경실이가 태어났다.

우유도 없는 때라 “두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두 아이를 다 살릴 수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유도 없어 영국산 라쿠도겡이라는 것을 사서

물에 타 먹이니 아이들이 설사만 하고 계속 아픈데

두 아이 다 살려보느라고 우리 부부는 정말 힘이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둘 다 살아서 잘 자라게 되었으니 또한 감사드린다.

그 힘든 중에 6학년에 다니던 세 아이, 제후, 진실, 충실이가

원산 제일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한 세 딸들을

진학을 시키기에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의붓아버지를 만나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고 할까

걱정이 되어 우선 제후를 순안 의명학교로 보냈다.

내 안사람은 제후를 입학 시키려고 순안 의명학교로 갔다.

진실이와 충실이도 공부를 시켜야 할 것 같아 아내가

제후를 데리고 순안에 가는 시간에 마침 서울서 합회

행정위원회가 있다고 해서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

그때 큰 아이 태혁이가 서울 시조사에 다니면서 받는 월급의

일부에다 내가 좀 돕고 하면 두 아이를 더 공부시킬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나 혼자의 생각으로 그리했다.

나는 합회행정위원회의중에 자녀 교육에 관한 말을 꺼냈다.

“여러분들은 자녀 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나요?”

하고 묻자 대답대신 내 질문에 대한 의도를 알고 싶어 했다.

”정 목사! 안건에도 없는 이 문제를 꺼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네, 순안 의명학교는 지역상, 또 경제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보내기에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번 우리 집에 세 아이가 졸업을 했는데, 한 아이만

겨우 순안 의명학교에 보냈으나 다른 두 아이는

사정이 안 되어 서울로 데려오고 말았기에

여러분의 사정들은 어떠한가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정 목사는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이나

어떤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금방 말한 두 가지 이유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순안의명 학교가 작년부터 점점

교회 방침과 역행을 하는데 차라리 작게라도 우리가

순수한 교회학교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을 하며 학생은 있겠습니까?”

“우선 너무 크게 생각지 말고 서울 회기동 예배당

날개 방에서라도 시작을 해 보면 됩니다.

지금 내 아이가 둘이 와 있고 또 누가 아이들을 보낼지

알아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이성의 목사도 어린 처남이 있고,

가평에서도 올 아이가 있다 하시고, 박기풍 목사도 딸아이를,

조치완 목사도 아들이 있는데 “학교만 시작한다면

입학을 시키겠다.”하여 즉석에서 여섯 명이 되었다.

여기에 용기를 얻어 우선 “서울 삼육원”이라 이름 하여

시작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합회행정위원들은

“이런 의견을 낸 정 목사가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서

아이들을 지도함이 좋겠다.”하는 것이 아닌가?

참 회의도 순진하게 진행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무슨 말씀들을 그리 하십니까? 제가 교장이 되고 싶거나

서울로 오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이참에 교회의 방침과는 멀어져 버린

의명학교를 생각해서 작게라도 다시 순수한 우리 교회학교를

시작해 보자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면 정 목사 생각에는 교장을 누구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저보고 택하라면 제 옆에 계신 이성의 목사가

적임자라 생각이 됩니다. 영어도 잘하시고 일본말도 잘하시고

여러모로 교장 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 생각됩니다.”

행정위원들의 시선이 이성의 목사에게 집중이 되는데

이성희 목사께서 “내가 교장을 해 보겠다.”라고 쾌히

승낙을 하시어 일이 일사천리로 결정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 회기동 예배당 날개 방에서 새로 시작되는

이 학교 덕분에 나의 자녀들의 교육문제의 해결은 물론,

6명 정도로 시작한 이 학교는 후에 “경성삼육원”으로 되어

순수한 우리교회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

그러면 이 학교를 시작하자고 한 이유가 되는

의명학교의 문제를 잠깐 이야기할까 한다.

한번은 내가 참여하지 못한 합회행정위원회에서

순안 의명학교를 팔기로 결의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합회행정위원회로 모였을 때에

“순안 의명학교를 매각하기로 지난번 회의 때

결의하였다는데 사실인가?”고 물으니 사실이라고 대답한다.

당시에는 본방사업이 선교사들 위주로 진행이 되는 때이라

나는 선교사들을 향하여 강하게 한마디 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안식일교회 사업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끝을 내려 하십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정 목사!”

“아니, 무슨 말이라니요? 지금 다른 교파에서는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 여러 학교를 해 나가다가 만약 못하게 되면

그 교인들 중 유지에게 경영하게 하는 일은 간혹 있지만

학교를 판다는 일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안식일교회에서 순안 의명학교를 경영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오직 하나인

그 순안 의명학교를 판다고 하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선교사들은 지난 회의 때 한일이 있는지라 아무 말 못 하고

한참이나 있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의명학교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안식일교회가 운영하던

단 하나의 순안 의명학교를 남에게 판다면,

우리교회 자체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경영하기 힘들면

교인 중 유지되는 자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경영해

나가겠다고 하면 우선 맡겨 보아야지요. 경영이 힘들다고

이렇게 팔면 교회명예가 어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다가

그럼 어찌함이 좋을까 하며 한참 이야기가 됐다.

“그러면 정동심 목사, 당신이 순안 의명학교를 맡아 가지고

경영해 보는 것이 어떻소?”

“아니 내가 의명학교를 맡아서 해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 생각 하셨고 잘못 보셨습니다!

정말 사람이 없다면 저는 이경일 씨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분은 우리 교회에서 채용하려고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보내

농과를 마치고 왔으나 우리교회에서 탐탁하게 쓰지를 않아서

숭실 전문학교(숭실대학 전신)에 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쉬다가 함경도에서 금광을 하는 이종만 씨와 함께

일하려 한다니 우리가 그를 부르면 의명학교를 맡아 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경일 씨를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 “그 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김연묵 씨 같은 분들과 함께 일하는 조건으로

“의명학교를 경영 할 의향이 있는가?”고 물으니 쾌히 승낙을 했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이경일 선생, 김병룡 목사, 그리고

정동성 목사 등과 함께 의논하여 경영하여 나가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분들이 맡아서 순안 의명학교를 경영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오래지 않아 순안 중학교를 만들어 함께 학교인가를 맡더니,

“이제는 제대로 자격 있는 학교가 되었다.”고 하면서 교인이건

교인이 아니건 관계없이 그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자녀를

우선권으로 입학시키게 하니 살림이 넉넉지 못한 우리 교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그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순안 중학교와 우리 교회와의 관계가 점점 벌어져

결국은 인연을 끊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서울 회기동 예배당 날개 방에서

5-6명의 우리 자녀를 모아서 이 성의 목사가 교장이 되어

새로 출발한 학교를 정식 교회학교로 정하고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순안에서 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태영이를 학비조달과

학교운영이 맞지가 않아서 퇴학하도록 하고 서울 위생병원

간호학교 학생으로 편입 시켰다. 태영이를 어릴 때부터

의과공부를 시키려 하던 생각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후는 순안에서 계속 공부하여 순안중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1938년,

나의 첫 아들인 태혁이가 어떤 분의 중매로 우리 교회 목사인

임종회 목사의 딸과 약혼을 하고 같은 해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신부가 될 명신이의 아버지도 명신이가 출생한 후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재취를 했고, 나도 또한 재취를 한 입장이니

같은 사정아래 있는 아이들의 결혼이었다.

더구나 아내는 1936년과 1937년에 연년생으로 낳은 아이 둘을

살려 내겠다고 고생을 하며 어디 다니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그 결혼식에

가지 못하고, 신부 측에서도 임종회 목사만 딸을 데리고 왔다.

그 결혼식주례는 원륜상 목사가 해 주었다.

나의 첫 번 며느리를 맞는 결혼식인데 두 아버지 되는 사람만이

아들과 딸을 데리고 와서 결혼식을 하게 되니 “참 세상에는

괴로운 일도 많구나!” 라고 착잡한 생각으로 결혼식을 끝냈다.

그러나 두 아이가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잘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4

(나의 첫 번 며느리를 맞는 결혼식인데 두 아버지 되는 사람만이

참석하여 결혼식을 하게 되니 착잡한 생각으로 결혼식을 끝냈다.

그러나 두 아이가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잘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다. 연재 #13 끝부분)

제 6 부. 수난(受難)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1. 수난(受難)의 시작-화강리 지방회

(*여기에 실린 글의 내용 중 일부는

연재 #1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원산에 1935년에 왔다가 1939년에는

중선대회장의 책임을 맡고 서울로 전근하게 되었다.

얼마 후, 1940년에 서울에서 중선대회 총회를 열게 되었다.

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때부터 편지나 어떤 특별한

문제들을 다룬 글들은 존안(存案)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교회의 중책을 맡고부터는 거의 모든 서신들과

중요 문건들을 존안 했다.

이번 일도 존안(存案)의 습관으로 덕을 본 이야기이다.


나는 설교나, 총회 같은 집회에 말하게 되면

성경책을 들여다보거나 또는 머리를 자주 숙이며

얘기를 하기보다는 앞에 앉아 있는 회중(會衆)의

눈을 보면서, 또 어떤 태도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설교도 하고 회의도 진행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에 열린 중선대회 총회 때에도, 하룻밤은

앞을 보면서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맨 뒷자리에 들어와 턱 주저앉으면서

양복 윗저고리를 벗어 의자에 내 걸면서 앉는 태도가

완전히 시비조였다. 그래서 집회를 필하자

곧 그이에게 가서 악수하면서

“어디가 불편 하십니까? 아니면 이집회가

어디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고 물어보니 다짜고짜로

“이놈! 네놈이 무언데 지금 내가 제수를 맞이하는 일에

방해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큰 소리로 욕을 하고 나오니 대표자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대회장이 매 맞는다.”라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돌아가지 못하고

예배당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게 되었다.

그때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어서

나는 그이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예배당에서 떠들면 무엇이 해결되겠소?

내 사무실이 바로 옆이니 그리 갑시다!”

그래서 이 분을 예배당 옆에 있는 대회사무실로

인도하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조금 전에 말하기를 제수를 맞이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동생이 지금 아무개 전도사가 있는 그 곳에 살고 있소?”

“그렇소? 왜 당신은 남의 가정 사를 방해하는 거요?”

“내가 남의 가정 사를 방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자, 여기 그 전도사에게서 온 편지를 보시오!”

그 전도사는 “이 교회에 아무개 목사의 딸이

약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약혼 상대자는 교회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의 사상도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서 전도사인 저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의논을 하러 온다는데 목사님 생각에는 제가

무어라 말해주면 좋겠습니까?” 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더니 대뜸 나에게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방해를 한 겁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여기 내 답장

존안(存案)해 놓은 것이 있으니 보시오?”

그 때야 복사기도 없으니 편지를 쓸 때

먹종이를 넣고 써서 보관한 것을 다 읽게 했다.

“당신이 보는 대로 나는 그 전도사에게 당신이

그 지역 전도사이니 그 목사의 딸이 교제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방문을 해서 성경공부도 시키고

또 침례도 받게 해서 우리 교회의 예식으로

결혼식 주례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하라고 하지 않았소?”

“음, 그랬구먼, 그랬구먼!”

할 말이 없으니 “음, 그랬구먼!”만 계속 말해댔다.

“그랬구먼!”이 뭡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그게 무슨 행동입니까? 대회장인 내가 당신에게

매라도 맞는 줄 알고 소동이 났으니 잘못하면

험악한 일을 볼 뻔하지 않았소?”

“나는 누가 와서 이일에 대해 아주 좋지 않게

이야기를 전해 주어서 그만 이렇게...”

“그러면 조용히 사무실로 찾아와서 내게

자초지종을 알아보아야지 이게 무슨 일이오?”

“.............................. ”

가능하면 편지나 답신을 보관해 놓던 습관으로

다행히 어려운 일과 창피를 면하게 되었다.

요즘은 좋은 복사기도 나오고 했으니 중요한 서신이나

서류들은 복사해 놓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바란다.


시국은 점점 힘들어져가고 있었다.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조선을 억지로 일본에 합방 시키고 조선에 대한

모든 정책도 전쟁준비 정책을 펴느라 미국선교사들을

무슨 구실을 부처서라도 다 내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를 친미파로 몰아세우고 탄압을 시작했다.

우리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 부분의 선교사는

1940년 11월까지 다 귀국하고 이시화 목사만

1941년 2월 26일까지 계시다가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전쟁의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전쟁의경험이 많은

선교사들이 모든 일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런 때를 대비하여 우리를 교육하고 떠났었다면

교회는 여러모로 혼란이 적고 또 많은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지만 선교사들도 비상 귀국하라는

국가의 명령을 듣고 떠났으니 아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떠났으리라 생각이 된다.

나는 당시 중선대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선교사들이 떠나는 모습들을 잘 볼 수가 있었다.

아직 일본이 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도 아니 한 때인데도

몹시 삼엄하게 굴었다. 선교사들이 떠날 때에 작별의 악수도

못하게 하고, 선교사들이 타고 떠나는 배 근처에 줄을 쳐놓고

경찰을 배치하고는 아예 접근도 못하게 했다.

젊은 나이에 포교하러 왔던 원륜상 목사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선교사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로 떠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원륜상 목사는 급거 귀국하면서 합회장직을 임시로

최태현 목사에게 맡기고 떠났다. 아마 곧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 했는지는 모르나 결국 이들은 5년이 지나서야 돌아 올수 있었다.

선교사가 없는 교회의 행정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서선대회장으로 있던 최태현 목사가 합회장 일을 맡게 되어

서울로 전근 오셨다. 공석이 된 서선대회장은 누가 할 것인가를

의논 하다가 내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말이 나왔다.

생각 끝에 나는 지금 많은 식구가 다 서울에 있는데

그 대가족을 이끌고 가기가 좀 무엇하기도 했거니와,

어떤 분이 그쪽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식구가 다 서울에 있으니 서울에 가족이 없는 분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님은

“그러면 누구를 추천하고 싶은가?” 말씀하기에

“청진에서 수고하시는 조치환 목사를 서선대회장으로

추천한다.”고 하자 회의에 함께 계시던 조치환 목사님은

즉석에서 “내가 기꺼이 가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결정되고

나는 그대로 중선대회장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일을 집에 와서 이야기하니 내 안사람은 순안이 고향인지라

“왜 그런 좋은 곳에 안가겠다고 했냐?”고 하며 나의 결정에 대해

매우 서운해 했다. 나는 아내에게 “나의 결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위로했다.

그래서 1941년에 조치환 목사가 서선대회장으로 가시고

최태현 목사는 서울로 와서 합회장으로 계시게 되었고

나는 중선대회장으로 유임되었다.

돌아가는 시국을 보니 교회가 점점 힘들겠다고 생각이 되어

최태현 목사님께 한 가지 의견을 말씀 드렸다.

“아무리 보아도 전쟁이 나던가 아니면 일본과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 날 것 같은데 우리끼리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하지 말고 일본합회장을 우리 조선합회의 고문으로 두어서

어려울 때는 일본합회장이 와서 우리를 좀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의 건의였다. 잘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 목사님도 가만 들어보시더니 그게 좋겠다고 해서

1941년 1월경에 일본합회장 오구라 목사를 조선합회의 고문으로

결정을 해서 일본으로 통고를 했다. 그분도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연합회에서 필요할 때마다 함께 일하자고 해서

그 일본합회장이 조선연합회 고문으로 결정되었다.

당시에 우리는 종종 “지방회”라는 것을 갖곤 했다.

그 지방사역자와 교회책임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교회사업을 토의 결정하곤 했다. 중선대회에서는

1941년 4얼 7일부터 10일까지 충남 화강리교회에서

“충남지방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추진 중이었다.

중선대회장인 나는 물론 회의에 참석하여 주재해야 했다.

그런데 그 “지방회”가 개최 될 즈음, 조선합회에서 통보가 왔다.

합회장 최태현 목사께서 “급박해가는 이 시국을 타개하고

교회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회장회의를 소집하여

교회 각부사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의논하고자 한다.”고 하셨다.

중선대회의 지방회가 시작할 때가 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때에 최태현 목사, 조치환목사, 정붕상 목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정붕상 목사는 당시 남선 대회의

대회장이었다. 의논된 일중 어려웠던 한 가지는 시조사를

독립 기관으로 결정하고 사장을 선출하는 문제로 4월 9일까지

끌었다. 시조사를 독립기관으로 하면 시조사 사장을 택하여야

하는데 서울에 있는 합회장이나 중선대회장이 시조사 사장을

겸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택하여 맡기자는 의견이 나와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께서 "누구를 시조사 사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라고 물으셨으나 다들 가만히 있기에

내가 "시국이 이럴 때는 좀 신중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유영순 목사가 어떻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은 이미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으셨는지

"내 생각에는 김창집 씨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아, 목사님생각에 그분이 좋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책임을 맡으실 분을 위해 여기 모인 네 명이

회의형식을 갖추어 다함께 합의한 것으로 함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해서 회의형식을 취하여 그 분으로

시조사 사장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사장을 택하는 회의는

아주 간단히 끝났다. 4월 9일 오전의 일이었다.

나는 이 회의가 끝나자 곧 청양으로 갈 차비를 했다.

청양군 화강리 회에서 열리는 지방회의에는 조선합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회 부장인 오영섭 목사, 공주교회

담임사역자인 오석영 전도사, 중선대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 부장인 박원실 목사, 충남 당천교회 담임인 이성찬 전도사,

중선대회 회계겸 서기 유철준 씨가 참석하여 도와주고 있었다.

4월 9일 오후,

나는 서둘러 충청남도 청양으로 떠났다. 차에서 내려서

삼 십리를 걸어 밤 8시 반경에 청양 화강리 교회에 도착하니

지방 회는 끝나고 다 헤어지려고 하는 때이었다.

교인들 수십여 명이 "와! 대회장님이 오셨다!" 라고

큰 소리로 환영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얼핏 보니

형사가 와 있었다. 시국이 좋지 못한 때인지라

작은 회가 있어도 형사들이 내놓고 따라 다니면서

감시를 해 대었다. 많은 회의를 하다보니 형사들의 얼굴도

기억할 정도가 되었고 내 기억에 이 형사는 남영우라는 형사였다.


이 지방회는 이미 정해진 순서에 따라 4월 10일 안식일

설교예배까지 순서대로 다 잘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설교가 필하면서 교인들이 "오늘로서 회는 필했지만

대회장이 왔으니 한 번 더 집회를 해서 우리다

은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의논이 되었다.

1941년 4월 10일 저녁,

약 100여명의 교우가 참석을 했는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한 분들도 많기에 누가복음 2장 52절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해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을 이야기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21장을 가지고 "때가 가까이 왔으니 때를 잘 분별하여

모두 잘 준비하도록 하자"라는 설교를 했다.

이상한 것은 이날 저녁 집회에 남영우 형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집회는

갑자기 진행이 된 것이라 원래 제출한 집회계에는 포함되어 있지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2. 청양 경찰서


교회에서 청양경찰서는 30리 길이며 설교도 밤늦게 끝났는데

벌써 누군가 "이 사람들이 집회허가도 없이 불법집회를 하면서

아주 불온(不穩)한 말을 했다"는 보고를 이 경찰서에 제출한 것이

확실했다. 왜냐하면 4월 11일 이른 아침에 고등계형사 두 명이 나와서

우리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우리가 자는 방문을 세차게 열고는

우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자다가 일어났으니 변소를 가야 하는데

변소까지도 형사가 따라 붙을 지경이었다. 전부 옷을 입으라 하더니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이성찬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 나까지

6명을 체포하여 청양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아무 취조도 없이

우선 우리 모두를 감방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는 아침 늦게 어디서 가져 왔는지 설렁탕을 먹으라고

넣어 주었다.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돼지고기

설렁탕 국인지도 모르고 모두들 깨끗이 비웠다.

나는 모든 분들이 나 때문에 감방에 왔다는 걱정에

설렁탕을 먹을 생각도 못했다.

우리교회 역사 사십여 년 만에 6명이나 대량으로 검거되어서

청양경찰서에 수감된 이 일이 바로 청양 화강리사건으로

우리교회 역사에 첫 번째 수난사건으로 남아 있게 된다.

감방에는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가

한 방으로 배치가 되고, 나와 이성찬 씨가 같은 방에 배치되었다.

감방으로 집어넣을 때 허리띠나 저고리 고름, 버선 매끼 등

모든 끄나풀은 혹시 자살이나 폭력에 사용될까 하여

다 압수해 버려서 고름 없는 저고리나 허리띠 없는

양복을 입으니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양력 4월 11일이니 아직 이른 봄인지라 감방은 매우 추웠다.

밤에 누워있는 것은 뼈를 부스러뜨리는 것처럼 맵고 추웠다.

그래서 밤에 둘이서 등을 맞대고 온기를 서로 얻어가면서 지냈다.

추운 감방에서 나에 관한일도 불안하지만 함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당하는 일인지라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지나간 일들이 하나 둘 생각나면서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며 이번에도 인도하시리라는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감방은, 헌 걸레조각 하나와 목침과 대소변 통만 때 묻은 마루위에

덩그러니 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왜 사람들이 감방을 “돼지 막”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게 되었다.

평생에 처음 들어온 감방이라 무서움도 있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 주일이 지나도 말 한마디 없이 가두어 두는데 너무도 많이 두려웠다.


나중에 안 것은 그 동안 증인을 얻기 위해서 교인들 중에

청, 장년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십여 명을 불러서

우리 모르게 심문을 한 것이었다. 교인들 중에서는

가장 일이 바쁜 김병두 형제와 오대식 형제 두 사람도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것을 알고 나니 미안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 후부터 오영섭, 오석영, 박원실, 유철준, 제씨들을 불러내어

취조하다가 이성찬 씨까지 불러내어 취조를 해대면서 왜 그런지

나는 불러 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4월 10일 저녁에

내가 한 설교에 대해서 자기네가 원하는 증거를 얻고 나서

나를 정식으로 고소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에 고등계주임

가등이라는 사람과 고등계형사 김장협 이라는 두 사람이

우리들을 취조하였다. 처음에는 “나와 동역자들이 무슨 잘못으로

이렇게 고생을 하나?”라고 생각되다가, 기도드리며 생각해 보니

“믿는 사람은 악한 사단에 의해서 까닭 없이도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힘든 매일의 감방생활에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견디어 나갈 수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할 때 유복자로 태어나 하나님을 알게 된 일부터,

어려운 교사시절, 위험한 간도지역에서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

적은 일에서부터 나를 인도하시어 의명학교 졸업생으로는

처음으로 대회장이라는 큰 직분까지 나를 인도하신

나의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함을 받았다. 감옥에 갇힌 지 두 주일이 된 후에

고등계주임과 형사는 나를 불러 호되게 취조를 해대기 시작했다.

“네가 4월 10일 저녁 설교에서 이제 우리가 다 나가서 웨치면

사람들이 우리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보내서

도울 것이니 다 같이 그리하자고 말했다지?!!”

전혀 상상도 못한 생트집이었다.

“이보시오, 내가 한 두 살 난 아이도 아니고,

열 살이나 스무 살 난 청년도 아닌,

벌써 장년을 넘은 사람인데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겠소?

나는 설교에서 그런 말을 꺼낸 적도 없소!”

“이 사람이! 증인이 다 있는데 실토하지 못하겠나?”

이렇게 닦달하면서 도무지 본 기억이 없는 청년을

대면시키고 증언을 하게 했다. 그 청년은

“당신이 그날 저녁 설교에 우리 교인들이 한번 모두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보내서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이보게 청년, 그날 내 설교에 참석했다면

내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은 것을 잘 알지 않소?

나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해 본적도 없소!”

내가 강하게 이야기하자 그 청년증인은 그만하고 그날은 나가 버렸다.

알고 보니 그는 4월 10일, 설교를 들었던 소위 “끄나풀”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날 밤에 청양경찰서에 가서 거짓말로 연락을 한

장본인이었다. 유치장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우리가 갇히게 된 것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거짓이유들을 만들거나

허위신고와 거짓증인들을 만들어 사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만들려 했다는 가장 나쁜 죄목을 만들어

씌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때는 역사적으로는 노일전쟁 때이고,

갑진년으로 서기 1904년이다. 우리교회는 정치와 선교를

분리하는 원칙을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우리교회가 조선에 들어 온지 37년 만에 우리교회 역사상

처음 이렇게 정치적인 트집으로 대량 검거되고 그 이유가

마치 정치적인 것처럼 되어 버렸으니 교회에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그지없었다.

그 이튿날도 역시 같은 말로 취조를 해 대기에 나도 같은 말로

대답을 해댔다. 그랬더니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인정했고 또 증인 중에는 너희 교인 가운데 어린 사람들도 있는데

어린 사람들이 무슨 거짓말을 하겠는가?” 하며 내게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 데리고 온 증인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20세 가량 된

청년인데 놀랍게도 우리 교역자의 아들이었다.

그 청년은 정말 섭섭하고 기가 막히게도 나와 취조하는 형사 앞에서

그날 저녁설교시간에 내가 독립운동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너무 기가 막히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 주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

이 분들 모두 다 고등계 형사들에게, 내 설교를 억지로 변조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심하게 취조를 받았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하루는 같은 방에 있던 이성찬 전도사가 불려 나갔다가 매까지 맞고

들어와서는 화가 나서 “세상에 이보다 괘씸한 사람들은 없다.”고

경찰관들과 고등계형사들을 심하게 원망하며 크게 소리쳐 댔다.

그러면서 취조하던 내용들을 큰소리로 내게 이야기 했다.

이성찬 전도사가 내게 취조내용을 말하는 것을 다 듣고는 그 이튿날

즉시 이성찬 씨를 내 방에서 빼내어 옮겨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춥고

견디기 힘든 이 감방에 결국 나 혼자 남아있게 되었고,

마주 보이는 것은 벽밖에 없으니 정말 두렵고 외로웠다.

“묵시록 20장에 있는 대로 세상 끝에 사단이 결박되어

옥에 갇히면 이 모양이겠구나!”하고 생각되었다.

화강리교회 예배소장은 성희수 씨라고 하는 분인데,

그분은 발도 넓고 교제를 잘 하는 분이라서 그런지 무사히

나가게 되어 안심이 되었지만, 참기 힘든 것은 그 교회 교인 중에

나이 많은 오대식 씨와 김병두 씨가 붙잡혀 왔는데 이 두 분을

아직 나에게 증인으로 대면시키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증인으로 이용된 어린 사람들이나 청년들은 경찰서에

처음 잡혀 와서 겁이 나있는데다가, 협박을 하거나 한 두 대만 맞아도

곧 묻는 대로 그런 것 같다고 거짓증언을 하지만 이 두 분은

도무지 나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고 있음으로 아직도

심하게 취조를 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아예 의도적으로 내가 볼 수 있는 장소에 김병두 형제와

오대식 형제를 세워놓고는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이

찢기어 나가는 듯 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이 분들이

심하게 맞는 것을 보니 “이제는 내가 안한 설교지만 그렇게 했다고

하고서 저분들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두 분을 속히 나가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하며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분들이 매를 맞는 것을 보며 “내 아내나 아이들은 나로 인해

얼마나 걱정할까?”하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을 했다.

또 “나를 포함해 감옥에 있는 여섯 가정에서 얼마나

걱정을 하겠나?”하며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를 않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와 교회를 위해서

옳은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감방에 있으면서 나는 음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릴 적에 가난하여 조밥은 많이 먹었으나 보리밥은

별로 먹지를 않았다. 그런데 감방에서는 보리를 삶지도 않고

통보리 그대로 만든 보리밥을 주어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하루는 이밥에다가 물고기반찬 한 토막 등 전혀 다른

식사가 들어오기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아내가 와서

사식차입을 했기 때문이며 오늘부터 사식을 먹게 된다고 한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아내는 시집 온지가 불과 5-6년 밖에 안 된 젊은 여자로

집안에 돌볼 아이들도 많아서 고생도 극심한데

서울서 청양까지 어린아이를 업고 내방을 하려면 얼마나

먼 거리에 고생을 했겠는가? 그 먼 길을 고생하며 와서

만날 수도 없이 밥이나 차입해 주고 가는 것을 생각 하니

마음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는 유치장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기에 무엇인가 하여

감방에 있는 목침을 세워 놓고 가까스로 올라서서 뒷벽으로 높이 있는

창문으로 내다보니 꽃이 만발한 것이 5월임을 알 수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자세히 들으니 아마 몇 분이 면회를 온 것 같은데

면회가 허락이 되지를 않아서 큰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그 사람들 속에서 내 큰 아들

태혁이를 본 것이다.

태혁이를 보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확연했다.

나는 볼 수가 있는데 태혁이는 나를 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태혁이와 다른 사람들은 곧 그곳을 떠났다.

내 마음은 너무 안타깝고 더구나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할지

마음이 매우 괴로웠고 두려웠다.

나는 모두 속히 풀려 나갈 줄 알았는데 어느새 두 달이 지나더니

곧 석 달이 되었다. 경찰서 사람들은 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여러 번 왔었지만 면회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말해주었다. 한번은 그 사람들이 “지금 네 아내가 왔다”기에

어떻게 볼 수 없을까 하고 발을 뻗치고 문틈으로 내다보니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 다른 동역자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제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을 했다.

더구나 오대식 씨와 김병두 씨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매를 맞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벌써 6월이 지났는데 저 사람들은 농사도 못하고 심한 매를

맞고 있는 것을 보니 더는 이렇게 지낼 수가 없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내가 했다고 해서

다른 분들을 나가시도록 해야 한다.”고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앞으로 크나큰 어려움이 나에게 닥치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당신네가 하는 말들이 옳소!

내가 그렇게 설교를 했소! 이제 모든 것을 다 책임 질 터이니

김병두 씨와, 오대식 씨를 더 이상 때리지 말고 방면시키고,

또 다른 다섯 사람도 나 때문에 갇히었으니 다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등계 형사들이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었다.


1941년 7월21일이 되었다.

내 안사람, 오영섭 목사의 부인, 그 외에 몇 사람이 먼 길을

찾아 왔는데 다섯 형제는 100일을 채우고 석방이 되어 돌아가고

내 아내만 그냥 돌아가야 했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할 수 없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혼자 남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견디기 외로운 것인지를 깨닫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김병두, 오대식 두 형제는

아직도 풀려나지가 않아 나를 더 안타깝게 만들었지만 이틀 후에

다까지마라는 순사가 와서 그 두 분도 석방이 되었다고 알려주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모든 것을 내가 책임을

지게 되는구나!”하고 생각하니 두렵기 시작했다.

너무 외롭고 너무도 갑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감옥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바라야 하는데도, 혼자 있기가 얼마나 힘든지,

때로는 어떤 사람이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하루는 나 혼자 감방에 남아 있을 때 일본말로 미깡이라고 하는

큰 귤 두 개가 차입(差入) 되었다. 알아보니 아내가 먹으라고

넣어 준 것이다. 너무도 고마운데 혼자 내왕하며 애쓰는 아내 생각에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방문턱에 놓아두었는데 감방검사를 하는

순사들이 “저것을 왜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먹는 것보다 냄새 맡는 것이 더 좋다.”고 하니

그들은 일본말로 “부다가요”에 있는 놈이 무슨 냄새 타령이냐?

빨리 먹어 치우라!”고 소리치며 비웃고 나가 버린다.

“부다가요”는 “돼지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그냥 두었는데 하루는

어떤 영감이 절도혐의로 체포되어 내 방에 들어 왔다.

이 영감에게는 미안하고 모순 된 생각이지만 같은 방에

죄수가 들어온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같은 정씨에 본도 같은 “진주 정”씨였다.

“비록 감방이지만 만나서 기쁘다.”고 하니 이 영감님은 다른 말없이

“왜 저 미깡을 안 먹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냄새가 좋아

여기 둔지가 열흘정도 되었으니 맛이 다 없어졌을 것이라.”하니

이 영감은 “내가 먹겠다.”고 하더니 한번도 미깡을 먹어본 적이

없는 듯이 너무 맛있게 잡수셨다.

함께 검거되었던 분들이 석방된 지 열흘쯤 되었을까?

수감 된지 거의 넉 달이 되어 가는데 순경이

중의(中衣)적삼을 갖다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 했다.

날씨는 덥고 옷은 땀에 절어서 냄새가 나고 답답하였는데

새로 세탁된 바지저고리를 갈아입으니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 후에 나를 나오라 하기에 어쩌면 석방을 시키는 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나갔다. 120일 만에 보는

바깥세상의 공기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계속 심호흡을 했다. 밖의 바람을 쏘이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줄은 내 미처 몰랐다. 비록 경찰서 구내지만

정말 밖의 세상은 눈부시게 밝고 시원했다.

“행여 석방이 되려나?”했던 희망은 곧 사라지고 순사는 나를

고등계 형사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고등계주임인 가등과

김장협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첫 마디에

“당신은 이제 재판을 받기위해 홍성으로 간다!”라고 했다.

나의 석방이 아니라 법정기일 문제로 나를 더 이상 구류할 수가

없게 되자 이제는 나를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재판을 하려고

지방법원이 있는 홍성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었다.

바깥세상의 공기의 시원함도 잠시였다. 나의 석방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식구들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 졌다.

김장협 형사는 내게 홍성으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며 머리가 길어

이발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이발을 원하는가 묻기에

몽땅 빡빡 밀어달라고 했다. 그는 당황해 하면서 수염은 몽땅

밀어 주지만 머리는 하이캍라로 깎자고 제안을 했다.

구치소에 수감된 사람으로 아직 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죄수처럼

머리를 빡빡 밀면 자기들이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120여일을 가두었으면 죄인 취급을 한 것인데

지금 와서 하는 짓이 매우 못마땅해서 그냥 빡빡 깎겠다고 우겼더니

정말 몽땅 밀었다. 이런 이발은 소년시절에 해보고 25년이 지나

처음이었다. 길게 늘어졌던 머리와 수염을 몽땅 밀고 나니

매우 초라하고 슬프게 보였지만 마음만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1, #32, #33(마지막 회) admin 2012.02.11 7023
16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9, #30 admin 2012.02.07 3960
15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7, #28 admin 2012.02.06 3782
14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5, #26 admin 2012.02.06 3615
13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3, #24 admin 2012.02.01 3528
12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1, #22 admin 2012.01.30 3832
11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9, #20 admin 2012.01.28 3534
10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7, #18 admin 2012.01.25 3484
9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5, #16 admin 2012.01.25 3650
»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3, #14 admin 2012.01.21 3226
7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1, #12 admin 2012.01.19 3327
6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9, #10 admin 2012.01.17 2912
5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7, #8 admin 2012.01.14 3189
4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5, #6 admin 2012.01.12 3096
3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 #4 1 admin 2012.01.08 3291
2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 #2 admin 2012.01.05 3527
1 Vimeo 동영상 올리는 방법 1 1.5세 2012.05.18 69500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Copyright @ 2010 - 2024 Minchoquest.org. All rights reserved

Minchoquest.org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