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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목사 회고록 연재)#9

(이때 개종하신 분이 김완식 선생이신데 이 분은

내가 남선 대회장이 된 후에 다시 극적으로 만나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연재 #8 끝부분입니다.)

3. 용정 선교-제 2부


1926년 12월, 연년생으로 셋째 딸 정실이가 태어났다.

둘째 딸 충실이의 출생 때처럼 최마르다 전도부인이

또 수고해 주셨다. 두 번씩이나 신세를 져서 아내와 의논하여

광목으로 치마 적삼을 해 드렸다. 비록 광목옷이지만

최 전도부인의 새 옷을 보고는 같이 일하는 모 지도자가

칭찬을 한 모양이다. 칭찬을 듣게 된 최 마르다씨는

정 전도사 집에서 선물로 해 주었다고 대답을 했다는데

그 후로 이 지도자의 가정에서부터 정 전도사와 최 부인과

무슨 불순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일의 시종을 아는 교우들, 특히 젊은 층의 교우들은 나에게

“그런 누명을 쓰고 잠잠히 있는 멍텅구리가 어디 있는가?

교회 앞과 상부에 보고해서 이 일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내라”고 야단들을 했다. 나는 사역자와 사역자는

어떤 일이 있든지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기에

꾹 참고 지냈지만 청년으로서 이런 누명을 참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내 아내와

토진간담으로 이 일을 의논하였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문을 퍼뜨리던지 나만 당신을 의심치 않으면 되는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주님 사업이나 열심히 하라”며 용기와

신뢰에 가득한 말을 해 주었다. 별로 배운 것이 없는 아내로부터

이런 용기 주는 말을 들으며,

사람됨은 지식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최마르다 전도부인에게 선물을 준비할 때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한 것이 너무나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혜를 너희도 항상 기억하기 바란다.

마음으로 고생은 되었지만 한 1년간 지나가니

사실이 아닌 소문은 봄날에 스러지는 눈과 같이 없어짐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정실이의 이름에 정자를 붙인 것은

용정에서 정자를 따다 붙인 것이다. 용정으로 오기 전까지

큰아들 태혁이는 삼도구교회에 속한 삼명학교에 다녔다.

용정으로 와서 태혁이와 태영이 학교문제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용정에 있는 일반학교는 사회주의 사상이 보편화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사상이 어떻게 꼴 지어질지가 염려되었다.

그래서 안식일을 허락해 주었던 동흥소학교에 다니던 태혁이와

새로 입학하는 태영이를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영신소학교로

전학과 입학을 시켰다. 그래도 기독교 학교가 안심이 되었다.

장로교학교라 안식일 문제가 어려웠으나 용정에 있는 동안

다행히 퇴학을 당하지 아니하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너무도 어렵던 용정에서 조금씩 전도가 되어 교인들이 생기고

교회가 안정이 되어 가자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내가 경원시(敬遠視)되는 계기도 되었다. 걸핏하면

전도하는 일은 물론 선교에 관하여 의논하는 일에도

나를 제외시키는 일이 점점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일이 복이 되기도 했다.

1926년 겨울 초로 생각된다.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조선 땅 길주로 전도여행을 갔다.

이 전도회 기간 중, 나는 고국에서 오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리교회가 경영하는 순안병원의 원장 되시는

허시모(C. A. Haysmer-편집자 주))의사가 자기 과수원에 들어왔던

어떤 소년의 이마에 염산으로 도적이라고 쓴 흉터가 발견되어

그 일을 비난하는 기사가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나는 이미 간도지역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읽어 알고 있던 차라,

이 기사를 보는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있는 사회주의 사람들이

무슨 일들을 벌일지가 눈에 선했고 이 병원과 같은 소속인

우리 안식일교회를 용정에서 몰아내려고 할 것이 눈에 뻔했다.

이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손을 써야한다는 확신이 서서,

나는 간도선교 본부인 투도구교회로 달려가 투도구 지역 몇몇 교회에

이 소식을 전한즉, “아무리 우리교회 선교사가 한 일이지만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자!”고들 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있는 노투구, 삼도구, 팔도구에 힘들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리니 그분들도 우리 교회의 일이지만

잘못 되었다 하며, 거리가 멀어 모임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투도구에서 결의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간도 안식일교회 신도대회”라는 명칭으로 모임을 갖고

순안병원 허시모 원장을 징계하고 피해를 당한 소년에게

위로금을 주는 동시에 허시모 원장은 사회 앞에 사과하라는

결의를 했다. 나는 이 결의문을 당일로 가지고 용정으로 돌아와서

간도일보에 기사를 내게 하였다. 그 이튿날 용정 거리에 나가니

“허시모 성토강연”이라는 대서특필의 포스터가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교회의 이름으로 결의문이

나간 후였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용정의 유지들은

“안식일교회에도 민족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구만!”이라고

칭찬의 말들을 했다. 나는 “당신들이 안식일교인들을

어떻게 보는 것이냐?”고 큰소리를 할 수 있었고

안식일교회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길주전도회에 나만 빠진 것이 섭섭했지만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으로 감사했다.

길주지역 전도회에서 돌아오신 최 목사님은 이 지역 책임자로서

이번 일이 걱정이 되셔서 “정 전도사가 간도지역 안식일교회 신도로써

허시모 원장에 대한 이런 결의를 한 것에 대해 아무래도

잘 못한 것 같다”고 하시고는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이 우리 교회

상부 기관에 보고하셨던 것 같다. 나는 최 목사님께

“조금 두고 보시면 아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과연 우리교회 기관에서도 “간도에서 이런 결정을 해서

처리한 것은 잘한 일이다.”라고 기별이 왔다.

이런 기민한 결정이 없었더라면 간도지역에서 우리교회는

민족반역의 지탄을 받고 교회는 물리적인 공격도 당했을 것이 뻔했다.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때로는 사회적으로 기민한 대처를

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해인 1926년 겨울인 것 같다.

용정에서 붉은 벽돌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현대식으로 지은 감리교회에서 김건수 목사의

특별전도 대강연회가 있었다.

나는 젊은 사역자로 흥미를 갖고 참석했다.

천명에 가까운 청장년이 모였는데 이 날도 예외가 없이

그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자 곧 청중들이 발을 구르며

야유를 해대었다. 그렀지만 누구 한사람 감히 그 수라장을

수습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

감리교 책임자를 불러 “왜 청중에게 호소하여

무마를 시키지 않느냐?”고 하니 “뭐라 말해서

청중을 조용하게 합니까?”라고 묻기에

“여기는 정치적 강연과 달라 교회에서 하는

전도 강연인데 상식이 있는 여러분이 이렇게 야유하고

발을 굴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상식 없는 일을 하지 마시고 물을 것이 있으면

강연 후에 아래층에서 강사와 같이 문답식으로 상론함이

정당한 일이라”고 호소하라 했다.

그 책임자는 곧 설교를 중단하고 나의 말대로 진지하게

호소하니 청중은 잠잠해지고 김 목사도 설교를 끝냈다.

이 교회의 책임자는 내게 와서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비록 교파는 달라도 전도회를 위해 도움을 주고받아

서로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1927년 봄이다.

경성부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조선합회 주최로

사역자수양회가 있어 참석했다. 합회평의원회(행정위원회) 위원이신

서선대회장 이근억 목사가 나를 찾아와 하시는 말씀이

“정 전도사가 그동안 간도에 가서 어찌 그리도

목회의 결과가 없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 이번 사역자수양회 후에 정전도사는

우리교회 사역에서 아주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너무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에 나도 인간인지라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침착하게 “간도 같은 지방에서

얼마큼 해야 결과가 있는 것으로 인정이 되는지는 모르나,

아무 설명도 없이, 또 내가 설명할 기회도 없이 합회평의원회에서

사역자를 제명, 또는 면직할 수가 있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 목사님은 아무 대답이 없이 돌아가셨다.

나에게 이렇게 조용히 전해 주시는 것은 늦기 전에 속히

무슨 대책을 세워 보라는 무언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 이런 상황을 전해준 서선대회장 이 목사님께

감사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 결과, “간도선교에 대하여는

한 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모르는 잘못이 있다면 조언과 충고와 훈련이 있어야지

한마디 예고도 없이 이렇게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뒷전에서 불평을 말하기보다는 전(全)간도의 지도자이신

최태현 목사님을 찾아가 전후의 사정을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로 직접 최목사님을 찾아갔다.

”최 목사님, 지도자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나

합회평의원회에서 제가 목회자로 간도사업에 별로 결과가 없어

면직시키기로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

“정 전도사가 간도에 와서 별로 성과가 없었던 것이 사실 아니오?”

“목사님! 성과가 있고 없는 것은 목사님과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사님께서 제 해임 안을 제출하신 것인가요?”

“나는 지도자로서 그곳에서 있었던 성과를 가지고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오!”

“목사님, 선교가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를 숫자적으로 따지는 것은

저도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 보시오”

“최 목사님은 1922년에 간도로 오셨고

저는 1924년 5월에 간도에 부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정 전도사의 선교성과와 무슨 관계가 있소?”

“최 목사님은 제가 간도에 들어오기 전까지

2년 5개월을 선교하셨고 또 그 후 2년 반 해서

5년을 선교 하셨는데 그간 교회를 몇 군데나 세우셨나요?

또 다른 분들 중에 교회를 세운 분이 얼마나 계신가요?”

“......................” 묵묵부답(黙黙不答)이시었다.

“저는 용정에 전도사로 결정이 되어 간도로 갔으나

부임 초에 삼도구에 가서 몇 개월을 보내고 그 후에는

투도구 간명학교 교사가 부임하지 않는다고 저를 교사로

몇 달 동안 일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후 목사님이 몇 년씩 일을 하셨어도

교인 한 명 생기지 않은 용정에 와서 포교한지 일 년 만에

사 오십 명의 교인이 지금 모이고 있고, 용정 전도회를 통해

”훈출라자“라는 곳에도 70여명의 신도가 모이지 않습니까?”

“.............................” 역시 묵묵부답 (黙黙不答) 이셨다.

“목사님이나 다른 지도자들이 하신 선교결과를

저에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역시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말씀을 드렸다.

“목사님. 제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교회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정신만은 참작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다 그런 정신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저 정동심,

의식문제(衣食問題)나 해결하려고 사역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시고 목사님 생각하셔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를 물러나오며 이것이 사역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내가 전(全)간도 책임자이신

최태현 목사님께 말씀드린 다음날, 서선대회장 이근억 목사님이

다시 나를 찾아 오셔서 “최 목사님께 무슨 말을 드렸는가?”물으셨다.

나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씀드리고 “왜 그러시는가?”하고 물으니

“최 목사님과 평의원회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고 정전도사도 사역자로

유임이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너무도 하나님의 은혜와 이 근억목사님의 사랑이 감사했다. 또

한창 젊은 나이에 있는 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결정하셨던 일을

그대로 진행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다시 목회의 길을 걷게 해 주신

최목사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한편 어떤 일이던지 사람이 자기 할 일을 떳떳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면 누가 무엇이라고 하던 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이 되었다.

이날의 일은 후일에 내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

많은 생각을 하게했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7년 5월경이라 생각된다.

조선합회 총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사역자 부인을

동반한다기에 나는 아내와 충실, 정실 두 딸을 데리고 참석했다.

태혁, 태영, 진실이는 이영수 씨 부모에게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번 총회에는 어머님도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오셨다.

총회기간 중 간도선교부의 총 책임자 최태현 목사님은

중선대회장으로 영전되시면서 우리에게 간도지역 후임을

추천해 보라는 지시를 하시기에 간도에서 함께 일하는

이준래 씨, 김하서 씨, 최마르다 여사 등이 모여 후임에 대해

의논해 보았으나 이 분들은 누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며

나보고 추천을 해 보라 했다. 나는 김규혁 목사나

홍신우 목사를 추천하니 모두 이의(異議)가 없다하여

두 분을 추천했다. 두 분 중에 김규혁 목사가 될 것 같다는

말이 들렸다. 총회기간 중, 결과가 아직 나지 않은 상태에서

김규혁 목사는 나를 찾아와 간도지역 선교 상황, 사회적 상태,

의료시설 등에 관하여 속속들이 물으셨다.

나는 이분에게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유감없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배웠다.

내가 3년 전, 1924년에 간도로 전임될 때 그저 젊은 기분으로

“100만 동포가 사는 곳에 다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무모한 용기만 갖고 훌쩍 간 것이 퍽 어리석은

처사였음을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

만 3년이 넘게 모든 일에 함께 하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총회에서 김규혁 목사가 간도 책임자로 결의되었다.

총회 후에 어머님과 함께 고향도 잠깐 방문하여 3년 만에

친척들을 기쁘게 만나고 다시 간도로 향했다.

고향에서 충실이가 산길에 넘어져 이마가 터져 조금 고생을 했다.

용정에 돌아오니 교우들과 세 자녀가 모두 평안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두 분 노인의 말씀이 “철모르는 세 아이가 오늘 부모님이

용정에 몇 시에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며

시계를 몇 시간 빠르게 돌려놓고 기다렸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이런

천진난만한 자녀들을 더욱 정성껏 키워야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먼 간도 땅에서 나를 지도하시던 최태현 목사님이 떠나시게 되니

마치 부모님이 떠나시는 듯한 마음이었다.

특히 최 목사님의 자당님은 성격이 남성다워서 통이 크시고

특별히 우리 가족을 사랑하시던 분이셨고 최 목사님 사모님도

매우 어지시고 현숙하신 분으로 우리를 가족처럼 사랑해 주시던

분인지라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기가 힘이 들었다.

최 목사님도 가끔 교회 일로 의견을 달리 한 적은 있으나 그것은

어디에서, 누구하고나 있을 수가 있는 일이었고 그분에 대한

존경심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나를 간도로 불러 주시고 지도해 주신 분이

막상 떠나게 되니 마음이 무너지는 듯 했다.

1927년 7월, 최 목사님은 영전되어 떠나시고

후임인 김규혁 목사님은 3개월 후에 부임 하셨다.

그 공백기간에 다른 목회자도 없고, 나에게 임시로

책임을 맡긴 것도 없는데 교회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나에게 연락을 했다. 당시 간도지역에는 투도구, 용정, 삼도구,

노투구, 팔도구, 훈출라자, 청진 및 길주 등에 교회가 있었다.

하루는 삼명학교에서, 여선생의 문제가 심상치 않으니

곧 와서 처리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 여선생도 의명학교

출신이었는데 젊은 과택(寡宅)으로 몸 바쳐 학교를 위해

많은 수고를 했었는데 어찌하다가 이 여선생이 불신자와

이성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교회 내에 퍼졌다.

교회직원회는 나를 투도구로 불렀다. 교회직원들을 만나

의논을 해 보니 일이 심각했다. 그들은 교회직원회에서

결정하여 면직시키기를 원했다. 나는 또 다시 기도를 드리고

이 여선생을 만나 진지하게 상의를 하니 이 여선생 스스로

삼명학교를 사직하겠다고 했다. 교회 직원들은 직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면직을 시키려 했는데 사임을 못 하겠다고 하면

참 일이 커질 뻔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게 다투거나

마음상하는 일이 없이 해결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역시 기도의 힘이었다.


1927년 10월경,

학수고대하던 김규혁 목사님이 간도 땅으로 부임하셨다.

우리 교인들은 전임자와 후임자를 비교하는 폐습 때문에

영적으로 항상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전임자이신 최태현 목사님은 부지런히 심방을 하시는 분이었고

김규혁 목사님은 이론 즉 가르치는 일을 잘 하시는 분이었다.

교인들 중에서 방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또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두 사역자를 비교해 가며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교인들 사이가 자꾸 벌어졌다.

이 두 사이에서 거중조정(居中調整)할 이는 나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둘로 갈라진 교우들의 문제들을 무마하느라고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며

비방을 일삼는 교우들을 단시간에 화해시킨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생각 끝에 지금 오신 분이 전임자의 장점을

일부라도 취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되었고 다만 김 목사님이

오해하시지 않도록 그 뜻을 전하는 길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김 목사님 부부는 이곳으로 부임하시면서 나에게

무슨 일이든지 토진간담(吐盡肝膽)하라 하셨다.

그래서 가끔 두 분이 함께 계실 때에 “김 목사님! 이런 것은

이렇게 바꾸심이 좋겠고 저러한 것은 아니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간곡히 말씀드리면 사모님이 듣기가

거북하신 지 “정 전도사는 그런 잘못이 없소?”라고 하셨다.

나는 젊은 혈기에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사모님께

“그 일에는 제가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례하고 실례되는 태도였는지..

사모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을까 생각이 되며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실 뿐 아니라 언제나 “고맙네!”하시고는 젊은 혈기의 나를

책망하신 적이 없다. 김 목사님은 원래 주관이 강하신 분이시라

“고맙네!” 하시고서 실제로 받아 드리시는 일은 적었지만

젊은 나를 항상 용납하시던 인자한 모습은 언제나 나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셨다. 좋은 선비 같으신 호인이셨다.

1927년 12월 경.

삼도구에서 교사로 일하시던 장병삼 선생이 주안에서 잠이 드셨다.

장 선생님은 의명학교 2회 졸업생으로 나의 선배이며

박봉에 고생하실 때는 나의 월급을 나누어 쓸 정도로

형제처럼 지나시던 분인데 요절을 하시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간도로 막 부임하신 김규혁 목사님과 같이

이분의 장례식을 치렀다. 당장 삼명학교의 교원문제가 대두하자

김 목사님은 후임을 택할 때까지 나에게 삼명학교 일을 보라 하셨다.

나는 170리 길이나 되는 용정에 살고 있었으니 이 부탁은

경우에 합당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지도자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가족은 두고 혼자서 가서 일을 보았다.

먼 거리를 왕래하느라 무리를 했는지 뜻밖에 심한 몸살감기에

걸리게 되었고 소식을 들은 내 아내가 남자들도 오기 꺼려하는

170리 위험한 길을 찾아 왔던 일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김규혁 목사께서도 미안하신지 나의 아내의 내왕 여비를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내 아내가 나를 찾아온 것은 병문안을 위한

사적인 일인데 그것을 공금에서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사양을 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고 정동심목사 회고록 연재)#10

내 아내가 나를 찾아온 것은 병문안을 위한 사적인 일인데 그것을 공금에서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사양을 했다. #9의 끝부분)


4. “재간도 조선인 단체 협의회”


1927년 8월경의 일이다.

용정 시내 유력한 인사들의 이름으로 우리교회에 공문이 왔다.

내용은 용정에서 “제2의 허시모 사건”이 일어났는데, 용정에 있는

어떤 조선인 단체든지 모두 두 명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지정한 장소로 나오라고 했다. 당시의 용정에 깔린 사상과 분위기로는

이런 모임에 불참하고서 포교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우리교회도 김준익 형제와 내가 대표로 참석했다.


사건의 설명은 이랬다.

어떤 일본여자가 자기 집 토마토 밭에 들어온 조선인소녀를

붙잡으려다가 놓치게 되자 개를 풀어 그 소녀를 붙잡아

하루 종일 자기 집 기둥에 묶어 체벌(體罰)한 것이었다.

이날 모임의 사회자는 흥분이 되어 “나이 어린 여자아이가

일본인에게 사형(私刑)을 당한 것인데 이런 학대를 받고도

가만 두면 만주에 와 있는 100만 동포의 생명을 어떻게

유지하겠느냐” 하며 호소했다. 이때 100여명의 단체 대표자가

모였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도 어떤 단체협의회를 만들어

동포 중에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직을 통하여 해결하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아 그 자리에서 “재간도 조선인단체협의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집행위원 15명 정도를 선출하였는데 곤란하게도

내가 그 집행 위원 중 하나로 선출이 되어 버렸다.

하도 입장이 곤란하여 사퇴를 하려고 하는데 사퇴는커녕

이번에는 나를 집행위원장으로 선출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준익 형제는 내가 위원장이 되면 우리교회 전도에 도움이

될 것이라 하며 오히려 수락하도록 권했다. 나는 그 분이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나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전도사로서

간도에 포교하러 왔지 우리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모든 위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포교도 좋지만 동포의 어려움을 모른 체 하는 포교는

동포를 배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며 끝내

나의 사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흥분되어 있는 분위기라

일단 수락했다가 속한 기한 내에 사직하기로 마음에 정하고 수락했다.

집행위원을 구성하고는 매월 1회씩 집행위원회를 모이는데

제1회는 집행위원장의 집에서 모인다고 결정이 났다.

점점 사단의 올무에 빠진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좌우간

제1회 집행위원회는 내 집에서 진행되었다. 막상 모이고 보니

집행위원 15명 외에도 방청인, 신문기자, 경관 등 수 십 명이 되었다.

나는 회의벽두(劈頭)에 내가 다니는 안식일교회는

음주, 흡연을 아니 하니 이점을 깊이 양해하시고

금주, 금연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다행히 끝까지

술을 달라거나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이 분들을 대접하기 위해 당시에 매우 귀한

잦을 대두 한 말이나 마련하여 내어놓았더니 문자 그대로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까먹고 헤어졌다. 이일 후로는

간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안식일교회의 전도사인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안식일교회는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을 원칙에 서서 해 나가면

항상 원칙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감사했다.


제 1회 집행위원회를 열기 직전, 나는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사무실을 열고 “재간도 조선인 단체협의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 조직이 시작 된지 2개월도 안되어 가입한 단체가 400여 개나 되었고

회원수가 수만 명이나 되는 당시 최고의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나는 당시 조선인들의 분위기로 보아, 이 거대한 조직체의 힘을 이용하여

불순 세력이 틀림없이 엄청난 일들을 도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이 조직체가 그렇게 정치적인 조직체가 되면 내 자신은 물론

내가 사역하고 있는 우리교단에 어떤 영향이 미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의 이 생각은 분명히 성령이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곧 집행위원장 사임서 두 장을 만들어

한 장은 “재간도 조선인단체 협의회 집행위원회”에 제출하고

한 장은 내가 보관해 두었다.

사표를 낸 후 나는 지방교회에 심방을 떠나서 2-3주 후에 집에 돌아오니

아무 영문도 모르는 아내는 “당신은 복음사업이나 성의껏 하지,

무슨 딴 일을 했기에 그 동안에 간도 총영사관(일본영사관)의 형사가

몇 번이나 당신을 찾아오게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집사람과 잠깐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어디에 잠복을 하고 있었는지 일본영사관 형사가 찾아 들어왔다.

그런데 그 형사는 내 고향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거장리 사람으로 안면이 있던 박승호라는 사람인데 지금,

형사가 되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정 선생은 간도에 전도사로 온 줄로 알았는데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오? 재간도 조선인단체협의회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간사와 기타 관계자들을 검거하는 중에 모든 서류를 압수해보니

정 선생이 집행위원장인 것을 알았소! 이미 체포명령이 내렸지만

전도사이기 때문에 대접상 우선 영사관으로 함께 가서

당신의 의견을 진술하도록 하시오!”

말이 영사관이지 우선 영창(감옥)행 임을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침착하게 말했다.

“간도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질서 있게 정돈된 사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협회를 통해 무슨 큰일이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영사관에 가야하니 할 말이 있으면

영사관에 들어가서 하도록 합시다.”

틀림없는 감옥행이었다. 그 순간 내가 사임서를 작성하여

이미 제출 한 것이 생각이 났다.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제가 집행위원장직을 이미 사직한 사임서입니다.

나는 안식일교회 전도사로 집행위원장 직분을 이행할 수 없기에

이미 사임서를 제출했습니다. 아마 정리가 안 된듯한데

압수한 서류를 보시면 분명 이것과 같은 사임서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참작하여 선처해 주십시오.”

“알겠소! 내가 최선을 다해 볼 것이지만 이와 같은 사직서가

협회 서류들 중에 없다면 그때는 나도 어쩔 수가 없음을 명심하시오!”

며칠 후 그 형사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서류들 중에서

정 전도사의 사직서를 찾아내어 일본 영사관에 극구 변명하여

일을 무사히 넘기게 해 주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정 선생! 사직서를 못 찾았다면 세상없어도

체포될 뻔했소!”라고 말해주었다.

박 형사는 “재간도 조선인협의회원 중에서 체포된 이가

무려 400명이 넘었고 아직도 체포 중이오. 그리고 모두

제3공산당원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고 있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미리 지혜 주셨음을 감사했다.

이 사건을 계속 주시해 보니 700여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서 중형에 처할 사람을 추린 것이 90여명인데

모두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고, 어떤 사람은 취조기간이

10여 년이 걸렸으므로 고문 중에 죽은 사람,

또는 그 사이에 병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가 1941년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에도

간도 제 3 공산당원 중 12명이 사형을 당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나도

사형을 당했을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나를 살려낸 그 “재간도 조선인 단체협의회 위원장사임서” 한 통은

해방 후까지 가지고 있다가 분실되었다.


1928년경이다.

영전되어 가신 최태현 목사님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간도지역에 본부가 있는 “참 예수교회”에 관하여 알아보고

보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최 목사님이 간도에 계실 때

나는 “참 예수교”에 관한 말을 듣고 그 책임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제 최 목사님의 부탁을 가급적 속히 알아보기로 하고

그 교회책임자가 있는 간도내의 중국인 수도격인

“국자가”라는 곳으로 달려갔다. 북간도 “참 예수교”의 책임자는

“백득은”이라는 중국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동만에 와서

참 예수교를 선교하는 중 상당한 핍박을 받다가 안식일교회가

자기의 교회처럼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등, 같은 점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며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백득은 씨를 그 교회에서 장로라고 부르고 있기에 나도

그분을 장로라고 불러 주었다. 백 장로의 말에 의하면

“참 예수교” 본부는 중국 천진에 있고 교주는 우바울 이라는

중국 사람인데 본래 양주업을 하던 사람으로 묵시를 받고는

양주업을 전폐하고 전도사업에 전념한다고 했다.

“참 예수교”에서 전하는 교리는 우리 교회교리와 흡사한 것이

많았으나 다른 것들은 신자들이 모여서 종종 방언을 하고 있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실 때는 머리를

앞으로 숙이셨으니 그 본을 따라 침례 받는 자는

앞으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는 앞쪽으로 엎어지게 해서

물에 잠기게 하여 침례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잇부인 같은 선지자를 알지도 못한다 하고

인정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 교회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중국에도 우리재림교회 서적이 많이 출판되어서 보급되었는데,

우바울 이라는 양조업자가 우리 재림교회의 서적을 구입하여 보고

감명을 받고 자기 나름대로 “참 예수교회”라는 교회를 시작한 듯 했다.

나는 왜 나에게 “참 예수교"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셨는지는 모르나

내가 알아본 그대로 알려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최 목사께서

우리교회의 명칭이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다가

간도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합회평의원회의 때에

”참 예수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우리교회와 흡사한 이 교회의

이름을 우리교회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자고 의견을 내셨다 한다.

합회평의원회에서는 그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다가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의논이 되어 최 목사님께서 나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내가 알아본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여 보냈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은 합회 평의원회에서

내가 보낸 기록을 가지고 상당한 논의를 했으나

”참 예수교회”의 주장이 우리교회와 대동소이하나 우리교회의

예언의 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참 예수교회도 마태복음 24장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재림의 징조 중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다.

좌우간 우리 교회 명칭이 너무 길다고 생각이 되어 짧은 이름으로

바꾸어 보려는 긍정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알기를 바란다.

1928년 7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천막 전도회를 개최했다.

김규혁 목사님은 활동적이신 성격이기보다는 이론과

가르치는 것을 중히 여기시고 장막전도회 같은 것은 별로

흥미가 없으신 선비 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우리가 요청을 해서

이 장막전도회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함께 활동한 이들은

김규혁 목사, 정붕상 전도사, 정관신 전도사, 전도부인 최마르다 씨,

정동심 등이었다. 장막 전도회라는 것이 설비도 불충분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교파의 극심한 반대를 막으며 진행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특히 두만강 뗏목인부들이 많이 참여했다.

하루 저녁집회에는 어떤 정장차림의 손님 한 분이 참석했는데

이 신사와 뗏목일꾼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이유는

뗏목 꾼 들이 이 신사를 일본 스파이로 잘 못 본 것이다.

뗏목 꾼 중 한 사람이 이 신사에게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하고 물었다.

이 신사가 좀 공손한 태도로 대답을 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내가 보기에도 좀 불손한 태도로 “나 이런 사람이요!” 하며

명함 한 장을 휙 내던져 주었다. 명함을 본 일꾼이

“침례교 전도사네” 하고 소리치자 군중들은

“전도사면 전도사지, 왜 이리 건방져!” 하며 이 전도사를

이리 밀고 저리 밀고하는 바람에 갑자기 전도회장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지도자들은 다 피하고

전도회를 도우러 왔던 청진교회 평신도인 한필진 형제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느라고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밖에 있던 사람들까지 싸움 구경하려 수 백 명이 몰려와

서로 밀치다가 뗏목 꾼 중 한사람이 철망에 걸려 뱃가죽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피를 보자 군중들이 흥분이 되어

“전도회 책임자 나오라!”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더 소란해 지기 전에 나는 나서서 “내가 전도회 주최자중 한 사람인데

우선 이 분을 모시고 곧 병원으로 가서 치료합시다!” 하고 큰소리로 제의했다.

그러나 군중은 ”당신은 책임자가 아닌 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무슨 소리냐?

책임자를 찾아내어 해결하자!”라고 소리들을 쳤다.

그사이, 침례교 전도사는 봉변을 피해 달아났다.

나는 “우선 사람부터 치료 합시다!” 말하고 다친 사람을 끌고

병원으로 가는데 군중은 그냥 “책임자를 찾아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선비 같으신 우리목사님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실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다친 사람을 데리고

병원 가는 길에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을 지나며 큰 목소리로

“긴상(김 선생) 계십니까? 함께 병원으로 갑시다.”하고 크게 물으니

안에서는 벌써 알아채고 “긴상은 시내로 들어갔다”고 하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자 군중은 병원은 그만두고 경찰서로 가자고

난리를 쳤다. 나는 우선 병원으로 가자고 큰소리로 말했으나

군중은 기어이 경찰서로 가자고 난리를 치며, 흥분한 군중은

나까지 놓칠세라 나를 단단히 붙잡고 경찰서 문 밖까지 당도하니

따르던 군중은 겁이 났는지 떨어져 나가고 뗏목 일꾼들만 몇 백 명쯤

경찰서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그 다친 사람과 뗏목 일꾼들과 같이 경찰서 문으로 들어가니

밤 11시가 지난 시간인지라 숙직 순사(巡査)만 몇 명 있었다.

뗏목 일꾼들은 자기들이 경찰서로 가자고 아우성들을 쳤지만

막상 경찰서까지 오니 순사에게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당황한 기분이었지만 곧 사태를 알았다.

누군가 군중심리에 불을 질러놓고는 뒤로 빠져 버린 것이었다.

틀림없는 공산분자들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내가 경관에게 “여기 온 사람들을 너그러이 처분해 달라”고 말을

시작했다. 예상 한 대로 순경은 “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놓고는

너그러이 처분해 달라는 것이냐? 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내가 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이들이

나를 데리고 온 것”이라고 말하자 뗏목군들은 신사복 입은 사람과의

다툼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했다. 이 순경은 “의복 입는 것은

자유인데 이유 없이 소동을 일으켰다”하면서 뗏목 일꾼 중 몇 명을

그 자리에서 가두어 버리고는 우리를 나가라고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뗏목 일꾼들은 나에게 갇힌 사람들을

속히 풀려나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며 신신부탁을 했다.

일꾼들이라 미욱하면서도 순진한 데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김 목사님께 “전도회 하다가 사람이 이렇게 갇혔으니

경찰서에 가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정 전도사가 전도회 하자고 의견을 내었으니 정전도사가

해결하러 가보라“고 하셨다. 문제는 벌어졌지만

목사님이 가시기만 하면 쉽게 해결이 될 것이기에 말씀을 드렸지만

”역시 선비 같으신 우리 목사님은 이론과 이상은 높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잘 모르시는구나!”하고 생각이 혼자 갔다.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이렇게 찾아주니 감사합니다.

역시 선교인들이 다르십니다. 어젯밤 몰려왔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술에 많이 취하여 그렇게 된 듯해서 이미 다 석방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순경들에게서 이 말을 들을 때에

얼마나 상쾌했던지!” 우리 목사님이 사람사이에서 생기는

이런 재미난 일들을 경험해 보시면 선교하는 방법도

많이 달라지실 터인데....”하는 생각이 났다.

이 날 이후로 전도 집회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기분이었다.

설교 끝날 때마다 ”믿기로 작정한 분은 거수해 달라“고 하면

수 백 명의 뗏목 일꾼들은 거의 모두 다 거수하곤 했다.

하나님의 사업도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진행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심을 나는 더욱 믿게 되었다.

이렇게 2주 동안의 회령 전도회는, 성황리에 잊지 못할 전도회로

무사히 끝나게 된 것을 감사드렸다.


1928년 여름,

내 아내는 여섯 번째 아기를 임신했다.

약한 체질의 아내를 돕느라 몇 달간 가정부를 두어 집안일을 돕고

영양분 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섭취하도록 했더니 다행히

임신 중인 아내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아내의 해산에 대해 걱정을 하자 이 가정부는 자기가 경험이 많아

잘 돌볼 터이니 염려 말라 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해산하게 되자 이 가정부는

“자기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며 뒷걸음질을 치니 난감했다.

1929년 4월 10일.

나는 할 수 없이 “하나님이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드리면서 아이를 손수 받았다. 다행히도 나의 아내는

“이번처럼 순산하기는 처음이라.”하여 나의 마음은 너무 후련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해산한지 3일 만에 산모의 수족을

깨끗이 씻어 준 것이 잘못 된 일인지 그날 밤부터 산모는

전신에 열이 나면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그래서 전부터 사귀어 오던 정창성 의사를 청하니

산욕열(産褥熱)과 난소염의 합병이라 하며 얼음찜질을

계속 해 주라 했다. 얼음이 귀한 때이지만 열 한 살 된 태혁이와

여덟 살 된 태영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머니를 위하여

얼음을 구하러 사방으로 다니다가 소문에 용정 뒷산에

얼음이 있다하자 그곳에 가서 땅을 파 본즉 얼음이 나오기 시작하자

얼음을 얼마나 파 왔던지 곡간에 있는 독에 잔뜩 채우도록 구해 왔다.

산모에게 얼음찜질을 한 일주일 했더니 산모의 우편에서 나던 열이

좌편으로 옮겨갔다. 다시 정창성 의사를 부르니 이제는 자기가

할 수 없다며 용정에서 제일 유명한 제창 병원으로 찾아가라 했다.

이 병원은 캐나다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제창병원은 모든 부서가 얼마나 친절한지 아직도 인상에 남아있다.

심지어 서양인원장은 나의 설명을 듣고 친히 우리 집까지 와서

내 아내의 병을 진찰하더니 난소절제수술을 해야 된다며

입원을 시키라 했다. 내 방을 보더니 “그리스도인이냐”고 묻기에

“안식일교회 전도사”라고 말하니, 교파가 다른데도 반가와 하면서

“병원에 당까(환자 이동용 침대)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교회 교인만

빌려주는 것”이지만 병원 서무계에 가서 원장의 지시라고 하고

사용하라고 했다. 이 당까 덕분에 나는 내 아내를 병원까지

쉽게 운반하여 입원을 시키었다. 교파를 초월한 그 분들의 친절은

배울 점이 많았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에 크게 감사했다.

아내의 수술경과는 매우 좋았고 열흘 가량 병원에 입원했었다.

수술 후 너무나 감사해서 병원직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제의를 했더니 병원총무는 원장에게 문의해 보더니 나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감사하지만 만약 그것이 전례가 되면,

후에 가난한 사람들이 대접 못하는 것을 너무 미안해 할 것”이기

때문이라 해서 나는 다시 감동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퇴원을 하는데

원장의 말씀이 “당신의 형편을 생각하면 입원비는 전부 면제하여 주고

싶지만 그 또한 전례가 되면 아니 되니 이십 원정도만 내라.”고 했다.

내가 대강 계산해도 수백 원이 될 것이 확실한데 교파도 다른 전도사에게

정말 교파를 초월한 친절과 사랑이었다.

너무도 의외의 일이어서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당시 건강보험 같은 것도 없던 때에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알고 나는 온 가족과 함께 감사했다.

그러나 산모는 수술후유증인지 갓난아이를 먹일 모유가 나지를 않아

근심하다가 “라꾸도갱”이라는 분유를 사서 모유대신 만들어 주었으나

잘 먹지를 않아 우리 속을 태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이의 생명은 부지하였으니 이 또한 감사했다.

이 아이의 이름을 태중(泰中)이라 한 것은 중국에서 났으니

중국이라는 “중”자를 떼어서 태중이라고 지었다.

산모의 건강과 새로 출생한 아이를 키우기가 너무 힘이 들어

생각다 못해 합회에 사정을 설명하고는 그래도 고향이 가까운

“서선대회 지역으로 전근시켜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나는 교회당국의 결정을 따르는 것을 내 사역의 신조로 삼았으나

이런 청원을 한 것은 내 사역 중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한다.

합회 당국에서는 서선대회가 아닌 중선대회로 전근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가족을 살리고 싶은 내 의향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교회 상부의 명령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1929년 5월 초,

곧 있을 조선합회총회를 계기로 나는 약한 아내와 올망졸망한

여섯 자녀를 거느리고 그간 정든 간도 용정을 하직하고

고국을 향해 떠났다. 남들이 가지 말라고 충고했고

또 거절할 만한 사유도 있었지만 젊은 혈기 하나로

막중한 책임을 느끼면서 5년 전에 이 간도에 왔던 내가

이제 스스로 청원하여 떠나게 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는 건강도 회복 못한 초췌한 모습에다

제대로 먹이지를 못해 파리한 모양의 갓난아기를 거느리고

귀국하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비록 간도에서

할 일을 다 못하고 오는 느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한한 복을 주시어 세 자녀를 더 얻어

귀한 자녀 여섯을 데리고 귀국하게 된 것이 무척 감사했다.

용정에서 청진을 거쳐 서울까지, 그 먼 길을 몸이 약한 아내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무사히 와서 총회에 참석하고 우리는 다시

500리 길을 여행하여 고향집에 도착했다. 만 5년 만에 상봉하는

그 기쁨이란 형언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많이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잘 모시지를 못한

죄송한 생각이 사무쳤으나 우리를 보는 어머니는 너무 기뻐하셨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임을 다시 깨달았다.

모든 가족들은 이제 출생한 지 3개월 남짓 된 태중이가

지금까지 젖 한 방울을 못 먹고 지낸 것을 몹시도

애처롭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 나의 작은 형님 댁에

출생했던 아기가 난지 몇 날 안 되어 죽어서 슬픔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형수님께 여쭈어 보니 아직도

젖이 충분히 나온다기에 이 날부터 태중이는 나의

작은 형수님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되었다.

형님부부도 아이 잃은 것을 무척 섭섭해 하시다가

조카를 돌보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히 생각하시기에

우리 모두 감사했다.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셨으니 감사를 드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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