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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5


(한국의 치과의사로 나왔던 볼드윈 의사는 자기 집에 여러 번

우리를 대접 만 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친절을 베풀었다.

정말 변함이 없는 그들의 친절은 배울 점이 많았다. 연재 #24끝부분)


5. 귀국

인천 상륙을 계기로 한국동란이 반전이 되자

원동지회에서는 우리보고 귀국하라는 지시가 왔다.

미국에 온지 반년 가까이 되는 11월 하순에 우리는

귀국 길에 올랐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갚아도

은혜는 못 갚는다.”더니 은혜만 지고 떠나게 되었다.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준 세인트헬레나 병원직원들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은혜로 갚아 주시기를 기도드렸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분을 통해 선교사들이 대전역에서 찍은 사진에

태국이가 들어 있어 가족들이 살아 남아있다는 확신이

들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빨리 귀국하고 싶었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큰 여객선을 타고

일본을 향하여 떠났다.


배를 타고 오다가 닥터 루에게 옷감을 얻어서 새로 만들었던

내 양복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 양복을 세탁을 했었는데

조금 더 마르라고 상항 부둣가 양지에 걸어놓고 그냥 배에

오른 것이다. 아마 귀국 한다니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던

모양이다. 박창욱 씨와 함께 여객선 책임자 한 사람을 만나

사정을 말했더니 그 사람은 상항 부둣가에 있는 여객선

사무실에 무전으로 사정 이야기를 했다. 조금 후에 내 옷이

부둣가에 걸린 그대로 있어서 찾았다고 알려 주었다.

좋은 세상이고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인심이

본받을 만 했다. 끝까지 편리를 보아 줄 수가 있는지 몰라서

나는 그 양복을 잊기로 했다. 다니엘 12장의 말씀대로

지식이 많이 증가해서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면서 내 신앙에 대해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도 멀미를 좀 했지만 별로 지루함 없이 하와이에

도착을 했다. 이번에는 배가 정박하는 시간이 짧아 구경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지난번에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주신

최 형제 댁에 인사는 하자고 해서 찾아 갔더니 매우 반가워했다.

그 분은 우리들을 선창가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 주었다.

최 형제는 선창가에서 아주 예쁜 하와이 명물인 화환을

나와 박 선생의 목에 걸어 주었다. 우리는 “이제 이 분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리며

석별을 아쉬워했다. 나는 이 분의 손을 잡고 “다시는 떠나는 일이나

헤어지는 일이 없는 그 나라에 가기 위해 주님 맞을 준비를

신실히 하자!”고 권면하며 작별의 손을 놓았다.

하와이 에서 일본까지는 별로 멀미가 없이 편안하게 왔다.

배에선 선객들을 위로한다고 연극도 하고 활동사진도 하는

오락실이 있었다. 하룻밤에는 박창욱 씨가 “연극을 하는데

구경 갑시다.”하기에 거절했다가 “미국 왔다 가면서 재료가

될 만한 것은 다 참가해 봅시다.”라고 해서 “일리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락실로 갔다. 연극을 보여주고 나서는

“이제부터 댄스를 시작한다.”고 광고를 하자 옆에 있던

천주교 신부가 좋아하며 춤추러 나갔다. 박창욱 씨가

설명하기를 오락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곳에 왔던 사람 중에

아무나 원하는 사람과 같이 나가서 춤을 출 수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사양을 하고 오락실을 나오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무나 원하는 사람과 춤을 춘다.”는 것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잘못된 생각인지는 모르나 선진국의 문화나 풍습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 된다.

일본 요꼬하마 항구에 도착을 하니 닥터 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상항 부둣가에 걸어 놓았던 양복이 나보다 먼저

일본에 와 있었다. 닥터 루가 비행기로 오면서 일본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 분의 자상함을 무엇으로 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양복 문제를 보면서 미국인에 대한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남의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과, 여객선 회사들이

끝까지 책임을 지고 내 양복을 닥터 루에게 전해 준 철저한 책임감에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고 배울 점이 많았다. 성경을 기초로 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뭔가 달라도 매우 달랐다.

일본에서 3일 정도 지난다 했다.


옛말에 일각이여삼추 라는 말의 뜻은 알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이번에 몸소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일각이(一刻) 아니라 일분(一分)이 여삼추라는 생각이

날 정도로 빨리 한국 집으로 가서 가족들의 생사와

안위를 알고 싶었다. 우리 세 명은 일본신문을 보면서

서로 걱정하고 서로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이야기를 해야 할 세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없이 앉아서 전쟁이야기만

하려니까 좀 안 되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신문을 보니

이제 전쟁은 전세가 완전히 뒤 바뀌어서 남한군과 미군이

북한군을 남한에서 쫓아낸 정도가 아니라 원산으로 해서

함경북도로 속히 진격을 하고 있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나는 두 분에게 “내가 무슨 군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남한이 진격을 하는 것이 기쁘기는 한데 걱정이 된다.”고 했더니

“왜 걱정을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지금 이북은

추운 겨울인데, 러시아와 중공이 이북의 후원자가 되어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러시아가 후퇴할 때는, 마치 완전히 쫓겨 가는 척 하면서

자기나라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식량과 월동하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다 불 태워 버리고 빈 집만 두어서, 뒤를 쫓는 적군들이 급하게

추격을 하다가 먹을 것이나 추위를 이길만한 물건들이 제대로

도착을 못해서 굶거나 얼어 죽은 적이 많습니다. 이렇게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쳤을 때 뒤돌아 내려와 치는 수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나폴레온이 이끄는 불란서 군대도 러시아로 들어가다

그렇게 망한 것 알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우리 국군이 그 전략에

속아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두 분은

나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 “그러면 정 목사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하기에 “나 같으면 평양쯤이나 원산정도에 가서

쉬면서 준비를 해서 다시 진격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급하게 올라간 것 같소. 지금 이북은 굉장히 추울 것이오.” 라고

걱정이 되어 이야기했다. 우리는 무슨 군사 전략가나 되는 듯이

많은 걱정을 해 대었다.

동경에서 다시 비행기 편으로 출발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갈 때에 비해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미국에서 신문에 본대로 왜관지역을 폭격하며 일어났던

참담한 광경이 자꾸 눈에 어른 거렸다. 비행기 안을 한번 살펴보니

많은 한국인들이 타고 있었고 우리에게 알려진 얼굴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 최고 실업가 중에 한 분인 박흥식 씨도 있었다.

“일본으로 피난들을 갔었나?”하고 생각이 되었다.

일본의 산들을 보면서 "하루 속히 우리나라의 산들도 이렇게

푸른 옷을 속히 입게 되었으면!"하는 바램이 컸다.

김포에 내리고 보니 우리나라 백성들의 움직임이 매우

활기가 있어 보여 그윽이 안심이 되면서 감사했다.


나는 위생병원으로 들어갔다. 우리 태영이가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태영이의 말이 전쟁동안 어려웠던 일은 말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들은 다 생명이 무사하며 어머니, 태국이,

태경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개는 인민군에게 살해되고

누구는 국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겹기만 하고 동족상쟁(同族相爭)의 처참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특히 내 딸의 아슬아슬 했던 경험을 들으면서 숨을 죽였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위생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피난을

가지 못한 일부 간호원 중에 나의 딸도 있었다. 인민군이 들어오고

그들의 명령으로 꼼짝없이 그들을 위해서 병원에서 일을 해야 했다.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어 나가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한다.

만분다행(萬分多幸)으로 인민군이 후퇴한다기에 “이제는 살았구나!”

했는데, “웬걸!”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바로 그 시간에 병원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나의 딸과 나의 친구의 딸을 납치하여

인민군 트럭 뒤에 강제로 태워서 떠나 버린 것이다.

무서움에 떨면서 한참을 가는데 무슨 일인지 트럭이 갑자기

잠시 멈칫했다. 두 간호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하고는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트럭에서 뛰어 내려 콩밭으로

뛰어 들어가 숨었다. 앞자리에 타고 가던 그 인민군들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간호원들을 찾을 생각도 아니 하고 도망치듯이

트럭을 몰고 떠났다 한다. 나의 딸과 그 친구가 살아 난 것은

우리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에 의한 것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콩밭에서 나온 두 간호원은 걸어서

온 길을 되돌아가는데 얼마를 가다 보니 국군들이 인민군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해 놓았는데

증명서 하나도 없이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니 매번 검문을

당할 때 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간호원입니다.

인민군에게 붙잡혀 가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돌아가는

길입니다.”라고 설명을 하면 “십계명을 외워 보라!”고 해서

십계명을 아주 쉽게 줄줄 따로 외웠더니 통과를 시켜주어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서울에 와서 이 삼일이나 되었을까?

이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었다. 아직 육이오 참상의

이야기도 다 듣지를 못했는데 국군이 후퇴를 한다고 하면서

나보고 빨리 대전으로 가라 한다. 소식을 들으니 국군이 쫓겨서

후퇴를 하는데 얼마나 급한지 흥남서 배를 타고 남으로

후퇴한다고 했다. 박 창욱 씨도 “이거 정말 목사님 걱정하신지가

일주일도 안 되는데 그대로 일이 되고 있군요!”하며 우리는 함께

걱정을 했다. 내가 무슨 군사 전략가나 예언자라도 된 성 싶었다.

우리 모두가 크게 걱정될 정도로 후퇴가 빨랐다. 나는 아직

서울 시내도 둘러볼 겨를이 없었는데 대전으로 가야만 했다.

말을 들으니 “폭격으로 인해 서울은 산산조각이 난 곳이

무수하다.”고 했다. 끊겨버린 한강다리도 복구가 아니 되어

한강에 나가 배를 타고 건너서 영등포역에 가야 기차를 탈 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검문이 심해서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닥터 루가 다시 내게 나타나서 영등포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본래 나라는 사람은 본성적으로 인간 교제에 서툴기 짝이 없는

사람인데도 이렇게 닥터 루가 나에게 많은 인간적 배려를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되었다. 닥터 루의 차를 타고

끊겨진 한강 다리 아래로 오니 미군의 검사가 삼엄했다.

그들은 닥터 루를 보더니 아무 검문 없이 나를 순순히

강을 건너게 해 주었다. 나는 그동안 닥터 루가 우리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한 일들을 생각하며 옛날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한

모세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등포 역에 이르니 벌써

어둠 컴컴한 저녁이 되었는데 식사 할만한 곳은 찾을 수도 없고

대전가는 열차를 타려고 역으로 나갔다. 후퇴를 준비하는 것인지

객차는 전혀 없고 짐차만 대전 가는 것이 있으니 타라고 했다.

그 날은 12월 그믐 경,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나는 오바도 없이 얇은 레인코트를 입고 짐만 잔뜩 실은 짐차에

내 여행 짐을 가지고 올라탔다. 그 짐들 사이에서 기대고 앉았다.

호화스럽던 미국 여행을 끝내면서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고생스러웠다. 이 일에 비하면 몇 해 전에 수갑을 차고 홍성을 떠나

서울 서대문 형무서로 오던 일은 너무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춥고 고생스러웠다. 더구나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인지라 만감이 교차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하신

말씀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옷도 변변히 못 입고 짐차를 타니

무척이나 추웠다. 그러다가 밤 12시경에 기차가 떠나 달리기

시작하자 사면으로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이 쳐 몰아 들어오는데

이러다가 얼어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54세 때이다. 대전에 도착을 하니 아침 9시 경이었다.

급하게 집을 찾아 들어가니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라

모두들 교회에 가고 없었다. 너무 춥고 힘이 들었기에 잠간

눈을 부치고 한 두 시간 후에 예배당으로 나가니 우리 세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교우들과 대회 직원들이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는지 후일에 이 세상 고난과 풍파를 이기고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서로 만날 때의 기쁨이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가 혼자서 겪은 전쟁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지만

나의 아내의 삶도 어려움의 연속이라고 생각되었다. 젊은 과택으로

1935년에 나에게 재가해서 불과 몇 해 되지 않아 남편은 붉은

죄수복을 입고 감옥에 갇히더니, 그 고생이 끝나자 이번에는

남편이 한국대표로 대총회에 참석을 한다고 해서 기뻐했는데

1주일도 되지 않아 남편도 없이 일곱 살 난 아이와 네 살 난

어린것들을 데리고 피난 걱정을 하게 되었으니 참 산 넘어 산이었다.

더구나 다른 두 자녀는 공부한다고 서울로 갔는데

생사도 몰라 참 난감했다한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에 남선 대회에는 대회장이던 나의 가족,

회계 겸 서기 김응식 씨, 문서 전도부 주임 박찬문 씨,

국민 학교 선생 이상록 씨, 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자 나의 아내는 서울에서 6월 25일 아침

첫 차로 대전으로 내려와서 육이오 동란의 소식을 듣고

전쟁의 화(禍)가 대전까지는 미치지 않았으면 하고 전전긍긍 했다.

대전 시민들도 피난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회 사역자들도

모두 피난을 간다하는데 나의 아내는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전에 함께 있던

사역자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뿔뿔이 떠났는데 어디로 피난을

가야할지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교회를 찾아 나서기로 하고

제일 가까운 마전으로 피난을 나갔다. 그곳을 찾아 들어가니

북한군이 들어오면 예수쟁이부터 죽인다고 소문이 도는데

예수쟁이 정도가 아니라 목사의 부인이 왔다고 더 쉬쉬해가면서

한술 밥도 얻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할 수없이 그곳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다른 교회가 있는 곳을 찾아 갔더니 그곳도 형편이

역시 마찬 가지였다. 결국 “죽어도 집에서 죽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주일 정도 방황하던 피난길을 집어 치우고 대전으로 다시 돌아오니

그 사이에 집에 있던 물건들 많이 없어졌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아직 인심이 남아 있어서 내 아내가 돌아오자 “미안하다.”고 하면서

가져간 물건들을 다시 돌려주었다. 북한군이 아직 대전을 점령 하지는

않았지만 선발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주 무서운 소문들을 내고 다녔다. 나의 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북한군이 대전에 못 들어오기를 희망하며 기다렸지만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전을 함락한

인민군들은 남선대회교회를 인민군의 본부로 삼고 나의 사무실을

그들의 본부 사무실로 사용을 하는 것이 아닌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바로 그 일이 내 아내에게

벌어진 것이다. 내 아내는 그저 “산성이 되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기도만 드렸다고 한다.

그들이 대전시 동쪽에 위치한 효동에 있는 우리 대회본부를 택한 것은

우리 사무실이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인단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어서 공습을 피하기에 아주

적절했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나서 첫 번째 한일은 인민재판이었다.

우리 교회를 그들이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제일 먼저 알아낸 일이

바로 이 교회 책임자가 미국에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인민재판에서 첫 번으로 몰살을 당해야 하는 가족은 바로

정동심의 가족이었다. 그 이유는 북한군의 입장에서 보면

정동심 이는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친미파라고 지목이 되는

예수교의 목사인데다가 지금 북한의 원수인 미국에 가 있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민군들은 내 안사람과

태국이와 태경이를 사형명부에 올려놓고 죽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인민재판을 하는데 한사람도 정동심을

나쁜 인간이라고 증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억지로 인민군에게 협조해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이

“정동심 이는 대전에 온 후에 동네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여러 가지로 동네 사람들을 도왔다. 미국을 가기는 했는데 그간

미국사람들과 친해 보인적도 없고 미국사람들이 찾아온 일도

별로 없다”라고 여출일구로 증거 하여 사형의 참변을 면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구호품으로 나온 건포도나 마른무화과,

또는 옷가지 등을 동회(洞會)를 통해 조금 나누어 쓴 것 밖에는 없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민군들을

감동 감화해서 나의 가족을 살려 주셨고 또 근방주민들이 나의

가족을 위해 증거 하도록 개재(介在)하셨음을 알고 감사드렸다.

나는 우리가 이웃과 화목하여 서로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가족을 이렇게 살길로 인도하신 것은 무엇인가 잠재한 뜻이

있으며 그 뜻을 찾아서 살겠다고 거듭거듭 마음먹었다.


6. 일사 후퇴

1951년 1월 상순,

대회직원들과 나의식구들을 만난 기쁨도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하루는 갑자기 집 앞에 트럭이 와르르 와 닿았다. 나가보니

서울서 온 트럭인데, 지금 생각에 김성수 씨가 운전을 하고

왔던 것 같다. 김성수 씨의 말이 “지금 일사후퇴로 북한군이

또 쳐 내려오기에 다시 피난 가는 길인데 지금 정 목사님의

가족을 모시러 왔습니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소,

여기서 교회를 지키고 있겠소.”하니까 “아, 목사님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정 목사님은 전쟁을 모르십니다. 다른 사람은

안 떠나도 정 목사님은 떠나야 됩니다. 정 목사님은 미국 갔다 온

목사이기 때문에 이번에 북한군이 내려오면 외상없이 죽습니다!”하면서

짐 싸기를 재촉했다. 사실 나는 아무리 국군이 후퇴를 해도

이번에는 대전이 함락 될 것 같지는 않아서 그리 말을 했던 것이지만

김성수 씨는 아주 강경했다. 마침 김성수 씨는 서울에 유학 갔던

태목이와 경실이도 데리고 왔기에 나의아내가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피난 갈수가 있다고 하여 대강 필요한 것만

짐을 싼 후에 온 가족이 그 차를 타고서 마전에 있는 조그만

교회로 가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냈다. 밤중에 마전교회 앞에 있는

산중에서 불이 번쩍하고 올라가곤 하기에 “저게 뭐냐”고 물으니

“가만 계십시오. 저것은 누군가 인민군들에게 신호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척 마시고 가만 계셔야지 큰일 납니다.

누가 어느 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생각보다 무서운 세상이 되어 있었다.

이번 피난의 목적지는 제주도라고 했다. 새벽에 부랴부랴

마전을 떠나서 대구까지 가서 교회를 찾아갔더니 교회 안이

피난민으로 넘치고 있었다. 도저히 자리를 찾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할까?”하고 생각만 하며 짐도 못 풀고 서 있는데

어떤 여자 한분이 교회를 찾아 왔다가 우리를 보았다.

그 여자 분은 내가 대구에서 언젠가 한번 전도회를 할 때에

다른 교파에 다니던 여자로써 매일 전도회에 참석을 하기에

인사를 나누고 결국은 우리 교회로 개종한 분이었다.

한눈에 우리 사정을 알아보고는 “목사님, 아무 걱정 마시고

우리 집에 와서 계십시오.”라고 해서 며칠 간 아주 신세를

잘 지고 나서 교회에 자리가 조금 생겼기에 우리 가족은

교회로 들어갔다. 그런데 감사 한 것은 북한 전도를 하시던

임성원 목사와 김선식 선생의 가족이 무사히 월남하여

대구에서 합류하여 지내게 된 것이다.

나는 남선대회장으로 비록 전시(戰時)이지만 부산에 많은 교인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있으리라 생각 되어 그곳에 가서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고 의논도 하기로 했다. 이런 의향을 말하자 임성원 목사도

동행하기를 원하셔서 우리는 가족을 대구에 둔 채 부산으로 갔다.

그곳도 피난민이 어찌나 많은지 가는 곳마다 길까지 막힌 상태였다.

부산에서는 미국정부가 보내준 큰 배로 사람들을 제주도로 나르고

있으며 이 일에도 닥터 루가 “현대 모세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겨우 우리교회를 찾아가니 교회마다 제주도로 피난을 간다하며 난리였다.

교인들도, 교회의 지도자들도 모두 제주도 갈 생각뿐이니 무슨

의논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사변 전만해도 사역자들의 생각은

언제나 가정보다도 교회가 먼저였으나 이 동란 속에서는 우선 자신과

가족의 피난 생각뿐이니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었다.

육이오 사변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생각 되었다.

부산에는 우리교인만 아니라 다른 교파 사람들도 많이 와서

제주도로 갈 배를 타려고 대기 중이었다. 그 배는 엘에스티(LST)라고

하는 아주 큰 배인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아우성이니 배를 타는 것도 더디고 얼마나 복잡한지 몰랐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다시 닥터 루가 나타나서

그 배의 미국선장과 및 승무원들과 함께 의논하더니

어떤 방법이었는지는 몰라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타 교파 사람들이 “저 서양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저렇게 일을 잘 처리 하는가?”하고 묻다가 닥터 루의

신분이 알려지자 “그런 선교사를 가진 안식교가 참 부럽다.”고들 말했다.

어지러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모세의 일을 닥터 루가

현대에 와서 재연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닥터 루가 질서를 잡는 일에 앞장을 서자 안식일교우들이

호응하여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 많은 타 교파 교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배를 타고 가는 중에도 청년선교회원으로

훈련을 받은 우리 교회 청년들의 자원 봉사와 규칙적인 행동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성경말씀대로

생활하는데서 그 진가가 나타난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남선대회장으로 육지에 있는 우리 교회와 교인들을

돌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주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나는 부산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며

부산에 아직 남아있거나 살고 있는 교우들과 지도자들을 찾아

방문하고 상담하고 대책들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반내현 목사와 부산 초량동 우리집회소 2층에 있는데

낯모를 청년이 병색이 완연(宛然)한 18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처녀를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그 청년의 말이

자기들은 안식일교인은 아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자기

동생뻘 되는 이 처녀가 약 2주전에 병이 나서 음식은커녕

물도 잘못 마시고 잠도 잘못 잔다고 했다. 피난길에 병원도

갈 형편이 안 되는데 이 처녀는 꼭 자기가 원하는 목사의

기도를 받고 싶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나는 의심이 생겼다.

“보아하니 당신네가 다니는 교파도 있는데 그 교회의

목사를 찾아 가면 될 터인데 하필이면 알지도 못하는

우리를 찾아오게 되었소?”

“사실은 저도 이 아이를 데리고 그동안 몇 몇 다른

교단을 찾아가서 겨우겨우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목사에게 맞대놓고 당신은 나를 위하여 기도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데로 가자고 해서 여기저기 다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여기 교회간판을 보고 이리 들어갈까? 하고 물으니

이 아이가 들어가자고 해서 이렇게 들어왔습니다.”

참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처녀 아이에게

“우리의 기도를 받으면 병이 나을 것 같은가?”하고 물으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목사이면서도 이 아이의병이 기도로서 치유 될 것 같은

믿음이 없었지만 정말 간곡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이 처녀아이가 “물 좀 달라.”고 하더니

또 대화 도중에 “잠을 자고 싶으니 베개를 좀 달라.”하더니

깊은 잠에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 처녀의 오라버니라는

청년은 “그간 물도 제대로 못 마시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두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나서 이렇게 잠을 자는 것을 보니

두 목사님이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애원을 해 대었다.

나는 반 목사에게 “나는 계속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녀야 하고

또 부산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소! 더구나 기도로서

이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으니 어찌하겠소?”하고

물으니 반 목사는 “좌우간 이 처녀를 맡아서 두고 봅시다!”하며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다. 역시 반내현 목사였다. 이 청년은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를 연신 말하며 “일을 찾아다니다가

자주 찾아오겠다고.”하고는 떠나갔다.

내가 그 청년 앞에서 반 목사에게 여러 가지 핑계를 댄 것은

사실 초량동교회의 형편이 말이 교회당이지 피난민들의 수용소나

다름이 없는데다가 피난민들이 다 교인인지도 모르고 또 그 속에는

젊은 청년들도 다수 있었는데 남의 집 처녀를 맡아 혼자 두면

무슨 일이 생길수도 있고 특히 밤 지내는 것이 문제가 커보여서

그리했던 것이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남의 귀한 딸을 맡고나서

나는 반 목사와 의논한 끝에 낮에는 그럭저럭 지내겠지만,

밤에는 수십 명이 칸막이도 없이 잠을 자야 하니 이 처녀의

한 쪽에는 반 목사가, 다른 한 쪽에는 내가 자리를 펴고

이 처녀를 보호하며 자기로 했다.

이렇게 약 2주일이 지나자 이 처녀의 건강은 물론 정신상태도

기적적으로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낮에는 성경을 가르치니 아주 잘 받아 드렸다.

이 처녀의 오라비라는 청년도 종종 찾아와 이 처녀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며 기이하게 생각하고 감사해 했다.

피난생활이 복잡하고 퍽 힘든 것이지만 우리는 신도들의

신앙 문제를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성경 공부도

시키고 침례의 중요성도 설명을 하였다. 이 피난의 와중에서도

신실한 마음으로 침례를 받고자 하는 수가 늘어나서 침례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다른 교파에 속해 있던 이 처녀도

침례를 받겠다고 결심을 했다. 이 처녀의 오라비도 자기 동생이

원하기만 한다면 비록 교파가 다르지만 침례 받는 것을

찬성한다고 했다. 이때에 이 처녀를 포함하여 수 십 명이

침례를 받았다. 피난의 와중이지만 다른 때보다도 새로운 신념과

신앙적 각오들을 가지고 침례에 임하는 것을 보고 지도자 된 우리도

감명을 받았다. 이 처녀의 오라비도 물론 침례식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했다.

많은 피난민들을 위로하고 신도들을 안도시키면서 지내노라

날자가 빨리 지나갔다. 대구에 두고 온 식구들도 잊은 채

각 교회들과 피난민 교우들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천만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나와 임성원 목사의 가족을

포함한 대구에 와있던 피난민들이 모두 다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부산에서 하던 모든 일들을 중단하고 갖은 고생 끝에

대구로 다시 와서 보니 그 많던 피난민들은 한명도 보이지를 않았다.

물론 나와 임성원 목사의 가족도 없었다. 너무도 충격이 컸지만

여기 저기 알아보니 정부에서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강제로 데리고 마산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왔다.

임 목사와 함께 기도를 드리고 다음날 마산으로 찾아 와

수소문하여 알아보니 온 피난민들은 거의 다 군용 선박으로

거제도라는 섬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거제도라는 섬은

별로 들어 본적도 없는 섬이었다. 피난민들은 거제도가 아니라

제주도로 데려다 달라고 반 농성을 하다시피 하며 떼를 쓰자

미군들은 피난민들의 인도자가 왕십리교회 교인인 김창수 선생님인

것을 알고는 미군헌병 두 사람을 시켜 김창수 선생을 양쪽에서

번쩍 들어서 군용 선박에 태워 버렸다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모든 교우 피난민들도 배에 올라타고 어제 밤에 거제도로 갔다고 한다.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거제도에 작은 승선처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모든 피난민들을

어느 곳으로 보냈는지 알 수가 있다고 했다. 마산에서는

거제도로 가는 선편이 없다하여 나와 임 목사는 다시

부산으로 가서 선편으로 거제도에 갈 수 있었다. 피난민 안내소를

찾아가니 속담에 “죽을 일이 일어나면 살길도 난다.”고 하더니

천만뜻밖에도 우리교회 김항모 목사의 서랑(壻郞-사위),

즉 김창덕 여사의 가장되는 김춘성 선생이 이곳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우리에게 “마산서 온

피난민들은 어젯밤 모두 학산으로 보냈습니다. 하루만

일찍 오셨어도 목사님과 같이 가셨을 텐데요!”했다.

또한 김춘성 선생은 나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교우 피난민들을

각별히 선처해 달라고 학산 동장에게 부탁을 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거제도에

산재해 있는 모든 피난민들을 다 찾아 다녀야 했을 것이다.

이튿날, 임목사와 나는 10여 리가 훨씬 넘는 학산으로 찾아갔다.

학산에는 피난민이 약 100여명 정도가 온 것 같았다. 그 중에

임성원 목사의 가족, 우리가족, 김창수 목사의 가족, 조돈하 선생의

가족 등이 와있어서 기쁘게 만났다. 김춘성 씨의 부탁도 있었겠지만

동네 사람들이 피난민에게 매우 호의적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든 피난민은 동회사무실로 쓰던 부엌도 없는 좁은 건물에

콩나물시루처럼 지나고 있었다. 심지어 밤에 앉아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삼일 밤, 헌 멍석 같은 것을 깔고 지나자

정부에서 무슨 지시가 있었는지 모든 피난민들을 동네

가정집으로 배치를 시켰다. 우리는 철자라는 여자아이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남편은 군대를 가고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젊은 여자의 집이었는데 임신을 한 듯 했다.

내 아내, 태목, 경실, 태국, 태경, 이렇게 여섯 식구가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동회 사무실에서 지내던 날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했고 우리에게 방을 내어준 철자 네도 너무 감사했다.

아 동네에 제일 큰 문제는 식수(食水)였다. 동네 어구에 우물이

하나밖에 없는데 물도 많지가 않아 우리나 동네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우리는 의논하여 서로 삼가서 물을 사용하니

곤란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전쟁 때인지라 마을 장정들도

군대에 가고 남자들이 별로 없어 동네가 깨끗한 편이 아니어서

교인들이 나서서 동네 청소도 하고 또 우리 스스로가 깨끗한

생활을 하자 동네 사람들도 우리를 괄시하지 않고 아주 잘

대해 주기 시작했다. 동회 사무실 한 구석을 빌리기도 하고

또 동네의 어떤 집을 빌려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다가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돈을 조금씩 헌금하여 그 동네에 있는 집을

한 채 사서 거제도에서 처음으로 우리 교회가 시작을 하게 되었다.

전쟁은 다시 길어지는 듯 했다. 그래서 우리는 피난을 왔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이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수 씨(김희조 선생 부친)를 중심으로 학교를 시작하여 아이들의

교육도 시작했다. 우리 교우 피난민이 몇 명 안 되지만 목사가 둘이요,

선생이 둘이나 되었다. 이 섬 안에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해변은 초장(草場)이 되어 양 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이 섬 안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금 시조사 편집국장으로 수고하시는 천세원 목사도 이일로 나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지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있던 거제도 학산은 통영(현 충무시)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통영교회는 우리가 피난 온 이야기를 듣고

음식과 김치 등 각종 반찬들을 많이 준비하여 여러 번

우리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당시에 통영과 학산은

뱃길밖에는 없었는데 돛과 노를 저어서 한 시간 넘게

배를 타고 와서 우리들을 돌보아 주곤 했다. 동네 사람들도

육지 사람들인 통영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고 잘 대해주는

것을 보고는 더욱 우리에게 잘 대해 주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디를 가도 외로울 수가 없었다. 통영교우들과 하나님께

지금도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거제도로 피난을 와서 곧 나는 남선대회 지역인 제주도를

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되었다. 남한에 있던 많은 교우는 물론,

북한에서 내려온 많은 교우들도 제주도로 피난을 와 있었다.

내가 제주도룰 돌아 보기위해 간다하자 임성원 목사도 따라 나서서

함께 도착했다. 제주도로 피난을 온 신도의 수가 수천 명이

되는 듯 했는데 거의 다 제주도 동북부에 위치한 성산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피난 중에도 우리 신자들은 각 방면에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닥터 루는 어느 학교의 일부를 얻어서

피난민과 그 지방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사업을 펼치고 있었는데

제주도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고 했다. 주의 종의 말씀에

“의료 사업은 선교사업의 오른팔과 같다.”는 말씀이 실감났다.

천막을 준비해서 교육사업도 이미 시작을 한 것을 보고

그 열성에 탄복을 했다. 그뿐 아니라 제주도의 선교와

제주도에 피난 온 것을 기념한다고 어느새 교회의 터를 준비하고

석조건물을 건축하고 있었다.

많은 신자들이 조석으로 해변 가나 산 밑에 모여서 우렁차게

찬송을 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감동 시켰고 이 광경을 지켜본 제주도 본토사람들도 감명을 받고

그 자녀들을 아무 설비도 없는 우리 교육기관으로 보내기 시작을 했다.

그중에 우리 교회에서 목사로 수고하는 강석배 목사나, 의료부분에서

일하는 조수영 치과박사 같은 이가 배출 되었다.

이것은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곳 마다

생명의 향기를 풍긴 결과라고 생각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이며 거제도는 두 번째로 큰 섬이다. 비록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 6.25 동란과 1.4후퇴라는 난리가 났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그 큰 두 섬으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계셨다는 확신이 든다. 피난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두 큰 섬에

복음의 문이 열렸겠는가 말이다.

제주도에는 3무5다(三無五多)라는 말이 있다.

3무는 "걸인이 없고, 도적이 없고, 맹수가 없다."라는 말이고

5다는 “바람이 많고, 돌이 많고, 말(馬)이 많고, 여자가 많고,

까마귀가 많다.”라는 말이라 했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미신이

상당히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어떤 집에 큰 뱀이 나왔기에 죽이려 하니 “제주도에서는

뱀을 신으로 위한다.”고 하며 못 죽이게 했다.

“제주도가 3무(三無)라는데 미신까지 포함하여 4무(四無)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은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때에만 가능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951년 11월경인 듯 하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서울까지 와서는 더 이상 내려오지를 못하고

남북을 서로 오르내리며 전쟁 중인데 휴전선이 생긴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견지명이 있는 닥터 루는

부산에다 위생병원 분원을 설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주도에 있던

의사들과 간호원을 데리고 부산으로 나와 서대신동에 자리를 정하고

천막을 치고는 진료를 시작했다. 닥터 루의 명성을 아는 피난민은 물론

부산시민들도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설 정도이었고 곧 자리를 잡고

부산위생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설립된 부산 위생병원은

오늘날 부산에서 역사가 깊은 우수한 병원이 되었고 복음의

오른팔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닥터 루의 선견지명이라고

확신하며 다시 한번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950년에 대총회에 참석하러 미국에 가서 반년이나 발이 묶였었고

1.4 후퇴로 거의 10개월이나 다른 지방을 방문하지 못하게 되어

계속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1951년 10월경에 그간

방문을 못했던 경남 함양지방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다.

막상 지방교회 방문을 나서니 교통문제가 가장 불편했다.

특히 미처 후퇴를 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일반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결과 산속으로

지나는 길에는 아직 버스도 없었다. 나는 진주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는데 진주에서 함양 가는 버스가 없었다.

마침 군인 트럭이 있기에 신분을 밝히고 사정을 하니

쉽게 허락을 해 주었다. 이 트럭에는 군인 두 명이

함께 타고 갔는데 산청이라는 곳에 왔을 때 그 길 좌우편은

길보다 훨씬 지대가 높았는데 양쪽 높은 두 곳에 모습이

매우 수상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 두 군인은 트럭을

정차하고 길옆에 있던 높은 바위로 가면서 나에게 따라 오라고 했다.

나는 “다리도 아프고 하니 트럭에 있겠다.”고 하니 군인들은 더 권하지

않고 바위로 올라갔다. 조금 안 있어서 맞은편 언덕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두 군인 중 한 명이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다른 군인은 곧 죽은 군인을 메고 바위에서 내려와 트럭에 싣고

할 수없이 오던 길을 뒤돌아 갔다. 내가 그 군인들을 따라 바위로

올라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몸과 가슴이 서늘해 왔다.

이 빨치산들은 낮에는 동네 가까운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나타나

양민을 괴롭힌다고 했다. 그래서 양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걸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깃발을 건다고 했다. 이날은 빨치산이

일찍 나왔기에 관에 보고를 하여 한쪽 높은 곳에는 관에서 나온 경찰이,

반대편에는 빨치산이 있다가 군인 트럭에서 군인이 내려

바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총을 쏜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등에서 땀이 났다. 함양교회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다시 거제도로 돌아왔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6

(함양교회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다시 거제도로 돌아왔다. 연재#25끝부분)


지난 #25번에 제주도에서 배출된 분들중 조수영 의사와 강석배 목사가 있다고 했는데

강석배 목사님은 그당시 나이가 어려서 해당이 되지 않으시며 아마도 강문수 형제일

것이라고 강 석배 목사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7. 원동 지회 총회

1951년 년 말,

전쟁이 길어지면서 “거제도에서 다시 겨울을 보내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합회에 계시는 이시화 목사에게서 통지가

오기를 “연초에 원동지회 총회가 있는데 정 목사는 총회에

참석하기위해 식구들을 대전으로 데려다 놓고 12월 그믐께까지

서울로 오라”는 소식이었다. 전보를 받고 보니 날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의논을 해 보니 경실이는

학산에 남아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학산에는

김창수 선생 등 몇 분이 아이들 공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경실이는 친구들도 있고 하니 그냥 있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태목이는 공부를 위해 제주도로 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을 하여 경실이는 학산에 두고 태국이와 태경이를 데리고

대전 집으로 가기로 의논이 되어 피난가면서 가져갔던 살림들을

몇 개의 큰 포대 자루에 겨우 겨우 쌌다. 학산에서 100여명 가까운

교우들과 딸 경실이를 두고 떠나려니 모두들 정이 들어 눈물로

작별들을 했다. 비록 피난길이었으나 학산 주민들과도 많은 정이

들었었는데 우리를 눈물로 배웅해 주어 마음이 아팠다.

부산가는 배 시간에 맞추어 학산에서 통영으로 건너 왔는데,

배에서 내리자 웬 순경이 나와서 검문을 했다. 아마 우리가

몇 개의 큰 포대자루에 짐을 싼 것이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이 순경은 마치 죄인 다루듯 기세가 등등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요?”

“지금 학산으로 피난 왔다가 부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소?”

“아, 저는 목사인데 피난 왔다가 지금 대전 우리 집으로

가족을 데리고 가는 길입니다.”

“목사라? 목사고 뭐고 그 짐 다가지고 경찰서로 갑시다.

가서 짐부터 검사해야 되겠소!”

학산에서 짐을 배에 실을 때에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실었는데 이 짐을 다 가지고 경찰서로 가려면 몇 번은

오가야했고 또 얼마나 힘들게 싼 짐인데...

더구나 곧 부산가는 배를 타야 되는데 경찰서를 갔다 오면

오늘 부산가는 배는 탈수가 없고 부산으로 가는 다음 배는

이삼일은 기다려야 했다. 앞 뒤 사정을 말하고 순경에게

선처를 부탁하며 사정을 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아니 말을 아니 듣겠소? 이 사람이 전쟁 중인데 정신이 있나, 없나?”

학산에서 같이 배타고 온 동네 사람 중 누구도 감히 나서서

나를 증명해 주는 이도 없었다. 전쟁 때인지라 군인과 순경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할 때였다.

꼼짝없이 경찰서로 모든 짐을 가지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부산으로 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 많은 짐을 가지고

경찰소로 끌려가 얼마나 고생을 할지 몰랐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질 않았다.

“아니, 목사님! 여기는 웬 일이십니까?”

뜻밖에도 통영에 계시는 이용진 목사(당시는 선생)가

길을 가다가 우리를 보게 된 것이다.

“아이고, 이 선생! 내가 이시화 목사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는 길에 식구들을 대전 집에 데려다 놓고 가려고 떠났는데

아마 짐이 많아서 그런지 여기 계신 순경이 이 짐들을 가지고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한다니 사정을 하는 중이오.

이제 부산가는 배를 놓치면 다음 선편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 시간에 통영사람

이용진 선생이 나타나시다니! 더구나 이용진 선생은 워낙 활달하신

분이시라 당시에 통영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분이었다.

“이보시오, 나는 통영 저 위에 사는 이용진이오, 이 분은 우리 교회

목사이시고 남쪽 지역을 전부 책임지신 분이시란 말이오.

우리 통영도 자주 방문 오시던 분이오. 어떤 의심도

받으실 분이 아니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소!”

그제야 순경도 의심을 풀고 나를 풀어 주어 겨우 부산가는 배를

시간에 맞추어 탈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이용진 목사에 대한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부산에 와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경실이를 태목이가 있는

제주도로 데려다 놓는 것이 좋겠다고 의논이 되어 아내는

태국이, 태경이를 데리고 먼저 대전으로 떠났다. 나는 부랴부랴

거제도로 가서 경실이를 설득하여 제주도로 데리고 가서

태목이와 함께 셋방을 얻어 있게 하고는 부산으로 다시 왔다.

거제도와 제주도로 약 삼사일을 갔다 온 사이에 내가 대전으로

가지고 가야할 짐들을 누가 풀어서 귀중한 것을 모두 가져간

것이 아닌가? 알아보니 짐을 가져간 사람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피난 중에 오죽하면 내 물건을 가져갔겠는가?

피난 중에 일어난 일이니 수원수구(誰怨誰咎) 하겠는가?”라고

생각이 되어 속은 상하지만 그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 묵묵히

기도를 드렸다. 그래도 남은 부엌살림과 책들을 싸니 매우 무거웠다.

서울로 가야할 시간이 촉박해 졌다.

태영이와 함께 기차역으로 나가서 태영이의 도움으로 짐 하나는

기차 선반에 올려놓고 다른 짐 하나는 매우 무거워 바닥에 두었다,

기차가 떠나자 곧 이동경찰이 와서 “그것들이 무슨 짐이고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가 목사라고 하면서

책과 부엌 짐이라고 했다. 며칠 동안 먼 길을 쉬지 않고 다니느라고

내 몰골이 험했었는지 또는 짐이 무거워 보여 무슨 의심이 생겼는지

몰라도 나보고 다음 역인 삼량진역에 도착하면 짐을 가지고

내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내리라면

내릴 것이지, 웬 말이 많으냐?”면서 “나의 아버지도 목사인데

당신 같은 목사는 처음 본다.”면서 몹시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같은 목사이니 봐주겠지.”했는데 웬걸!

삼량진 역에 도착하자마자 아까보(기차역의 짐꾼)를 시켜 내 무거운

포대자루를 덥석 기차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나도 따라 내리자마자 급행 열차였던 이 기차는

1분 만에 내 짐 한 개가 선반에 있는 채로 떠나고 말았다.

짐 검사를 끝내고 풀려나니 김천까지만 가는 완행열차밖에 없었다.

김천에 내리고 보니 벌써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 왔다.

서울 가는 기차가 있어야 대전으로 가겠는데 이미 기차 편은 끊기고

김천정거장 앞에 군인 트럭에 어떤 점잖은 사람 둘이 타고 있기에

물으니 서울로 간다했다. “나도 대전까지 꼭 가야 하는데 함께

트럭을 탈수 있을까요?”하고 물으니 “이것은 군인 트럭인데

우리는 이미 허락을 받았소! 그러니 우선 타고 있다가 운전병이 오면

허락을 맡아보라”고했다. 겨우 그 무거운 짐을 실어놓고 기다리니

술잔이나 비운 듯한 운전병이 오기에 나는 내려서 간청을 했더니

한마디로 거절을 하며 그 자리에서 발동을 걸고는 내 짐을 실은 채로

떠나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위에 있던 손님이 내 짐을

던져 주어서 그 가방은 찾았으나 당시에는 귀했던

양산 둘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쟁 중이라 인심이 사나왔다.

할 수 없이 김천역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무거운 짐을 겨우 다시 기차에 실고 대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 맞은편에 신사 양반이 한분 타고 있다가 말을 걸어왔다.

“무엇 하시는 분인지는 모르나 얼굴에 수심(愁心)이 많아 보입니다.

무슨 근심되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하고 묻기에

“내 표정이 뭐 어때서 그러는가?”하고 내심 조금 불쾌했지만

예의상 대강 이동경찰 때문에 생겼던 황당한 일을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뭐, 그만한 일을 가지시고 그리 수심이 많으십니까?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하기에

“아차! 이 양반 말마따나 목사라는 사람이 이만한 일을 가지고

남이보아도 그리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었단 말인가?” 하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반성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분은 “혹시 그 이동경찰의 이름을 기억하는가?”하고 묻는데

그 경찰의 명찰을 보아 기억은 하고 있지만 괜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하기가 뭣해서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모른다!”라고 했다.

그제야 그 사람은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저는 이동경찰을

감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짐을

찾아서 댁으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말이라도 감사해서 그제야 나는 이름과 주소와 그 짐의 종류를

자세히 말했다. 그러고 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하도 걱정을 하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신 것 같았다.

대전에 내려서 무거운 짐 한 개를 들기도 하고 메기도 하면서

30분가량 걸리는 집으로 왔다.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삼량진역에서 기차에 두고 내린

그 짐이 나보다 앞서 고스란히 이미 집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목사로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잃어 버렸던 양복이 나보다 앞서

일본에 도착했던 경험을 하고도 하나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걱정에 걱정을 더하여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찬 채로 이삼일을 보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까지 수심이 들어나게 했는데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연유를 물으니

간호원 두 명이 그 짐을 대전 역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6.25 사변동안 많은 위생병원 간호원들이

피난을 하거나 끌려가면서 대전을 거쳐 갔는데 이 두 분도

우리 집에 들려 나의 아내의 신세를 졌던 간호원들로

제주도에 있다가 서울로 가면서 대전을 들려 나의 아내를 찾아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 한다. 나는 이 간호원들을 모르지만

이 두 간호원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는데 부산에서 내가

기차에 올라 이동 경찰에게 어려움을 당하더니 급기야는

삼량진 역에서 짐을 하나 기차에 둔 채로 하차를 당하는

것 까지 다 보고 있었다. 대전에 도착을 했어도 내가

나타나지 않자 이 두 간호원들은 그 무거운 내 짐을 가지고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나의 아내에게 전해주고, 반갑게

하룻밤을 유하며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날 떠났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두 분의 간호원들이 누구였는지를 모르지만

그 분들께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어렵게 되어 가는 것

같을 때에 나는 하나님을 잊고 허둥댔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이하게 인도하고 계셨다.

나의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대전 집에 와서 보니 우리교회에서 제 1대 목사 안수를 받으신

정문국 목사의 가족이 일사 후퇴 시에 월남하여 대전까지 와서

나의 집을 사용하고 계시고 또 중선대회에서 문서전도부장으로

수고하시던 최철순 선생도 대전까지 와서 우리 집 뒷방을 사용하고

계시기에 기쁘게 만났다. “비록 피난 중에 만남도 이리 기쁘거늘

하늘에서의 기쁜 만남을 위해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섭섭한 것은 모든 교우가 헌신하여 마련했던

대형풍금을 누가 뜯어가 버린 것이었다.

대전 집으로 오자 곧 서울로 갔다.

아직도 한강을 자유스럽게 건널 수 없었다. 나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한강을 건널 수 있는 특별 도강증(渡江證)을

가지고 있었다. 원동지회에 총회를 가자고 나를 부른

이시화 목사를 만나니 다시 부산으로 가자고 하시며

만약 너무 늦었다면 부산서 비행기를 이용하자고 하셨다.

다행히 우리가 타기로 했던 대형 영국화물선이 떠나지를 않아서

우리는 배에 올랐다. 그 큰 배에 합회장 이시화 목사, 시조사 편집국장

왕대아 여사, 또 한국 교육사업을 돕겠다고 나왔던 다른 서양선교사,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뿐이었다.

다시 멀미를 할까보아 걱정을 했지만 그 큰 배에 짐을 많이 실었는지

거의 요동하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서 전혀 멀미 없이 여행을 했다.

화물선인지라 서양 사람들과 같은 객실을 사용했는데

나만 영어를 모르니 걱정이 앞섰지만 한국말을 잘 하는

이 시화 목사와 왕대아 여사가 있으니 좀 위안이 되었다.

왕대아 여사는 시조사 편집국장이었지만 일본에서 일하고 계셨다.

해방직후 겨우 시조사가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6.25 동란과

1.4 후퇴를 겪으면서 시조사는 문을 닫고 한국시조사의 자매기관인

일본 시조사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가 원동지회 회의 참석차

우리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여행 중 하루는 왕대아 여사가 “지금 증언보감을 한국말로

출판할 준비가 되었는데 단권으로 만들기에는 책의 부피가

너무 크고 두 권으로 하자니 너무 돈이 많이 들것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다. 당시에 우리말로 번역된

예언의 신이 불과 몇 권 없었던 때인지라 새로운 예언의신이

출판되기를 무두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판에 증언보감이

부피가 너무 커서 출판이 불가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시조사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들은 활자와 줄 간격이 다 같은

규격으로 정해져 나오고 있었는데 나는 활자의 크기도 그렇지만

줄과 줄 사이가 너무 넓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왕대아 여사에게 “글자의 크기도 좀 줄이고 줄의 간격을 좁히면

부피가 거의 반 이상으로 줄일 수가 있지 않겠는가?”하고 제안을 하니

“어떻게 그렇게 책을 규격에 맞지 않게 만들어 낼 수가 있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규정이나 틀에 맞추어, 살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데서 만드는 책들은 글자의 크기나

줄과 줄 사이를 좁혀서 만들고 있는데 책 읽는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지금 두 줄을 석 줄로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을 하자

“그렇게 해 보겠다”고해서 드디어 증언 보감이 출판되었다. 모두들 기뻐했다.

이 일에 관해서 쓰는 것은 물론 이렇게 해서 책이 나온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본방인(本邦人)과는

거의 아무일도 의논하지 않고 일을 해왔다. 물론 그들의 헌신에

감사하지만 그들이 본방인들과 의논을 해서 일을 진행해 왔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이번에 비록

여행 중이었지만 왕대아 여사가 먼저 의논해 와서 간단히 해결하고

책이 출판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나는 왕대아 여사가 나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여행 중에 합회장

이시화 목사에게 단독면담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순순히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시화 목사는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 나온 선교사중에

가장 성경을 잘 알고 계시던 분이시다. 이시화 목사는 아마

이십대에 선교사로 나왔는데 이미 목사 안수를 받고 나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의 해박한 성경지식으로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신학교를 맡아서 헌신 하셨다. 당시에

대 부분의 사역자는 이시화 목사가 길러서 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분이 지금은 한국연합회장이 되어 싱가포르에 가실 때에는

꽤 연세가 높으신 때였다. 이런 분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나는 왕대아 여사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용기를 얻어 단독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이 목사님, 청년 때부터 한국에 나오셔서 이렇게 연세가

많아지실 때까지 헌신해 주셔서 정말 감사 합니다.

한 번 감사의 말씀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 목사, 매우 감사 합니다.”

대답을 하시는 모양이 정말 나의 치사에 흐뭇해하시는 것이 역력했다.

“이 목사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한국에 나와

선교하시는 것이 매우 감사 하지만 가끔 선교사들께 섭섭한

생각도 들곤 합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아 아닐 것입니다.”

그 분은 아주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나에게 말을 계속 하라는 모양이셨다.

“목사님, 우리나라도 이제는 독립을 한지가 오래 되었고 목사님이

우리 한국교회의 합회장인데 한국교우들을 독립한 나라의 교인으로

대접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정 목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예를 들면 조금 전에 왕대아 부인의 증언보감 책을

출판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일정시대에는 시조사에서

책을 한 권 만들어도 편집인이나 발행인의 이름은 전부 서양 사람의

이름으로 하고 한국사람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어쩌다 겨우

인쇄인이라는 명칭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

“이제 해방도 되었고 전쟁도 곧 끝나겠으니 한국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이제는 서로 함께 의논하며

일할 때가 된 것 같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 정 목사, 잘 알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나는 이 때 이분이 이렇게 말씀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함께 의논해서 일하자!”는 나의 뜻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증언보감 책에

“편집인 정동심”이라고 낸 것이 아닌가?

나는 이시화 목사를 찾아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가 원동지회총회에 가면서 이 책에 내 이름을 내달라 했습니까?

한국이 독립 했으니 교회 내에서도 한국인과 의논하며 협조적으로

일해 나가자고 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압니다! 압니다!” 라고

대답은 하면서도 이런 면에 별로 시정되는 일은 없었다.

한 가지를 지적하면 겨우 그 한 가지만 시정이 되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한 일인지는 모르나 후에도 기회가 적당하다고 생각이 되면

서양 사람들에게 종종 그런 말을 퉁퉁 한 적이 많이 있었다.

우리의 권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온다고 생각이

되어서였다. 투쟁이나 충돌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탄 화물선은 먼저 홍콩에 들렸다. 데이비스 목사

(후에 한국연합회 회장이 됨)부부가 우리를 마중 나와

점심대접도 받고 홍콩 구경도 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말을 들어보니 이곳도 사상적인 대립 때문에 우리처럼

남북이 갈려 있었다. 사상이 뭔지!

나는 원동지회장인 암스트롱 목사가, 일본합회장으로 계셨음으로

일본어를 조금 하시기에 그곳에서 왕대아 여사와 대총회에서 오신

교육부장과 함께 원동지회장 댁으로 갔다.

언어가 소통이 되지 않아 이런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한 번은 이 댁에서 식사를 하다가 왕 부인은 느닷없이 “여기 앉아 있는

정 목사는 아들이 여섯이고 딸이 다섯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암스트롱 목사 부부를 비롯하여 몇 몇 서양인 손님들은 아무 말 없이

마치 “당신은 목사가 아이들만 나았느냐?”는 듯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문제는 나의 가정사정을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왕 부인도 그 말을 해 놓고는 분위기가 쑥스럽게 되자

“이 정 목사는 후처를 얻고 자녀들이 많은데도 가정이 매우

화평합니다. 정 목사의 식구가 50명도 더 되는데 다

우리 교인이라”고 말을 하자 그 말에는 마치 “아이들은 많이 낳지만

전부 교인으로 데리고 있으니 보통 목사는 아니로구나!”하면서

감동을 받은 듯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영어를 모르니

혼자 생각을 하고 혼자 해석을 했다는 말이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 이런 큰 회의에 참석은 했지만

앞으로 모든 사역자는 세계적 언어인 영어는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총회를 필하기 전에 나는 암스트롱 목사에게 시가지에 나가보고

싶다고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더니 시외에 떨어져 있는 지회

사무실에서 시내까지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서 “시가지에

나가면 일본말을 약간씩은 다 하지만 일본사람으로 오해를 받지는

않도록 해야지 본국인들로부터 가끔 어려움도 당한다.”고 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로써 어디를 가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과연 시가지에 나가보니 나를 일본사람으로 알고 물건들을

사게 하려고 일본말을 꽤 잘해댔다. 시내만 잠시보고 무사히

돌아 왔다. 회의가 끝날 즈음, 어떤 서양 사람이 친절하게

자기 차로 나를 태우고 싱가포르를 구경시켜 주었다.

싱가포르도 한국처럼 반도인데 국도(國道)로 얼마간 들어가더니

이 이상 넘어가면 공산주의자들이 많아서 피살되기 쉽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삼팔선 비슷했다.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언어의 불편은 있었지만 일주일간의 회의는

잘 끝냈다. “언어의 불편이 없는 그 나라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은 비행기 편으로 오게 되었는데 며칠간 필리핀을 들렸다.

우리 교회대학에서 나의 셋째 아들 태중이와 노사라 씨

(노원호 장로의 여동생)가 공부하고 있었기에 만나게 되었다.

필리핀에 도착해 보니 이렇게 더운 곳은 처음이었다.

밤에 두 번 씩 목욕을 하고서야 잠이 들 수가 있었다.

필리핀대학 학장은 일본합회장으로 있던 넬슨 목사이었는데

한국서도 한 번 만나본 일이 있는 분이었다. 안식일에 설교는

사양을 하고 일본말로 잠간 이야기하고 넬슨 목사가 영어로 통역을 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나는 서로 대조되는 두 교회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곳은 아주 깨끗한 천주교회당이었는데 매일 수천 명이

성채를 받기위하여 모여들지만 너무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은

우리가 배울 만 했다. 또 한곳은 이슬람 교회당이었다.

이슬람교의 특징은 금요일이 주일이고 하나님 다음으로

돼지를 신처럼 위하고 성전 안에는 절대로 신을 신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예수님 대신에 모하멧을 구주로 신봉하고 있는데

몇몇 신도들이 신발은 성전 밖에 두었는데 성전 안에서 웃통을 벗고

이를 잡고 있었다. 천주교당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태중이와 노사라 씨등 한국 학생 서너 명을 데리고 나가

음식을 나누면서 영적으로, 학문적으로 열심을 내라고

간절하게 권면을 하고 필리핀을 떠나 대만으로 갔다.

내가 알기에 대만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여

일본에 배상으로 주었던 땅인데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게 되자 50여년 만에 중국에 돌려주었으나 중국도

내란이 일어나 장개석 씨와 그 일행이 패하여 대만에 와서

중화민국을 설립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은 자리가 잡히고 아주 깨끗했다. 시간이 없어서 우리 교회

병원만 방문을 했다.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된 병원이었다.

그런데 이시화 목사님은 내가 필리핀과 대만을 들렸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니 나보고 혼자 하루를 머물렀다가

비자를 받은 후에 일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모르는 나는

엄두가 나지를 않아 그냥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영어를 모르는 서러움이 이렇게 컸다. 한국의 사역자는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영어를 잘 배워두기를 부탁한다.

내 비자문제로 이시화 목사님의 염려가 컸지만 일본에 도착하니

일본입국관리의 실수인지는 모르나 아무 어려움이 없이 들어갔다.

요즘 생각해보면 참 나도 막무가내였다. 일본에 오니

조금이나마 일본말을 할 수가 있어서 내 집에 온 듯 했다.

일본에 박정현 씨라는 분이 호리끼리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는데

한국 사람도 꽤 많이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

그 교회를 찾아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일본 합회장은

“마침 자기가 호리끼리 교회에서 내일, 안식일에 침례식을

거행하기로 했었는데 너무 바빠서 연기하려고 생각중인데

정 목사가 가서 대신 침례를 베풀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일본 현지목사도 아닌지라 사양을 했으나 한국 연합회

부회장에게 부탁하는 것이라며 강권하기에 승낙하고

그 교회에 가서 일본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침례를 주었는데

다나까라는 부부였다. 그 교회는 바닷가에서 먼 곳이라,

침례식을 먼저 거행한 후에 다른 손님을 받기로 공중목욕탕과

계약을 하고 교인들이 목욕탕을 깨끗하게 닦는 등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침례식을 거행하였다. 침례를 받는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또 침례 후에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간증을 하는지 내가 크게 감동을 받고 느끼는 바가 컸다.

또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침례목사를 대접한다고 며칠 전부터

준비한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하는데 목이메일 정도였다.

침례식이 끝나고 박정현 씨와 일광이 유명한 바닷가에 가서

좋은 구경을 하고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한 주일을 더 묵는다고 해서 나는 몇 곳을 더 돌아보았다.

우선 한국재림교회의 발상지 고베를 찾았으나 우리가 잘 아는

구니야 목사는 이 곳을 이미 떠났기에 한국인으로 교리를 처음 받은

손흥조 씨 등이 침례를 받았다는 곳만 방문을 하고 돌아왔다.

그곳을 방문하며 우리한국에 복음의기별이 전해진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에 감사했다.

8. 최승현 형제

최승현이라는 청년형제는 함경남도 함흥사람으로 일본에 간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함흥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하자

우리교회에 다니는 할머니와 살면서 믿음을 배우고 함흥에서

우리교회에 잘 나오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다.

최승현 형제가 함흥에 있을 때에 나는 북선대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고 또 들은바가 있어서 이번에 꼭 그 형제를

방문하고 싶은데 그 청년이 있는 곳을 알 길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교회와 인연이 많고 한국까지 다녀가신

국곡수(구니야) 목사에게 알아보기로 했다.

일본연합회에 문의하여 국곡수 목사 계신 곳을 찾아가니

나에게 한국교회의 사정을 물으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과 교제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십분(十分)느끼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구니야 목사님은

최승현형제의 주소와 근황은 물론 다른 한국인들의 사정도

소상히 알고 계셨다. 구니야 목사님은 “한국인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그 기쁨이 더해가기 때문에 최 형제의 집을

종종 방문 한다.”고 하셨다. 그분이 얼마나 한국인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만했다. 구니야 목사는 최승현 군의

신앙경험을 말해주면서 “최승현형제가 동경에서

약 반시간 떨어진 곳에서, 창씨개명을 하여

요시노부슈다이(義信主待)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그 동리에 가서 일본이름으로 찾으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기차를 타고 그 동네에 가서 어떤 사람을 붙잡고는

창씨개명 한 이름으로 최승현형제의 집을 물으니 그 사람은

“저기 서있는 아이가 그 집 아이라.”고 가르쳐 주어서

쉽게 최 형제의 집을 찾았다. 마침 최승현형제가 집에 있어서

반가이 만났다. 일본여성을 부인으로 맞아서 아들 하나를 나아

키우며 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한국식 삿자리를 깔았는데

하도 오래 사용하여서 다 헤어져 부스러기가 널려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그리 부유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을

외국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와 결혼한 일본여성은 동경에 있는 우리 위생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원으로 면허를 갖고 일하던 여성으로

최승현 씨의 믿음과 생각이 자기와 같아서 가정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 여성은 결혼하고 나서 간호원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자전거수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최 형제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남편에게 “목사님과 말씀을 나누라.”하고는 나가서 그 자전거를

친히 수리하고는 남편에게 돈을 들여놓는 것을 보았다.

남편에게 잘 순종하는 전형적인 일본여인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최승현 씨는 자기의 창씨개명 하던 일을 이야기했다.

사실은 “의로운 믿음으로 주(主)님을 모신다.”는 뜻으로

요시노부슈시(義信主侍)라고 했는데 “모신다.”는 뜻의 시(侍)자와

“기다린다.”는 뜻의 대(待)자가 거의 비슷하니까 관리들이 잘못 적어서

이렇게 요시노부슈다이(義信主待)가 됐다고 하며 서운해 했다.

이제 다시 고치려면 재판도 해야 하고 변호사비용과 수속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 했다고 한다. 나는 한문을 조금 아니까

“그것이 바로 전화위복”이라고 했더니 그 이유를 내게 물었다.

나는 “主侍(모신다)라는 이름에 실수로 획을 하나 더 넣어서

主待(기다린다)가 되었지만 그 잘못된 한문 이름의 뜻은

“의로운 믿음을 가지고 주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니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 얼마나 더 좋은 뜻인가?”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최승현형제는 “참으로 그렇군요. 정말 이제부터 내 이름에

감사하며 그렇게 살겠습니다.”하며 대단히 기뻐했다.

창씨개명 하나를 하더라도 신앙적으로 하려고 애쓰는 청년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 최 현 형제는 참 특별한 형제였다.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제 집을 찾아오면서 동네 입구근처에

집을 짓다가 버려 둔 것을 보셨습니까?”

“보긴 보았지만 그것이 최 형제의 집을 짓던 것입니까?

왜 지금 중단을 했습니까?”

“실은 제가 살집이 아니고 우리예배당을 짓고 있었는데

원래는 그 자리에 신사(神社)가 있다가 폭격을 당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사자리에 예배당을 짓고 전도하려고 했는데 신사자리에

예배당을 짓는다고 동네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단하지 왜 짓다가 그냥 두고 있습니까?”

“목사님! 재판을 하면 재판관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안식일 교인인데 신사를 짓지 말고 하나님 섬기는 예배당을

지어야 된다고 전도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뿐 아니라 대담하고 엉뚱한 청년이었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 극심하게 발악을 해서

일본 내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물론 우리 안식일교회도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일본연합회장 “오구라”목사도

잡혀가고 일본 시조사도 문을 닫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일본교우들도 교회집회를 중지하고

꼼짝 못하고 있는 비상시에, 최승현형제는 용감하게

일본 경시청에 들어가 “당신네가 만일 참된 교회를

이렇게 핍박하고 지도자를 잡아 가두어 예배를 못 드리게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 나라를 폐하실 것이니 주의하라”고

겁도 없이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한다. 그러자 경시청사람들은

최승현 씨에게 “당신이 누구이며 뭐 하는 사람인데 여기 와서

큰 소리 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 형제는

“나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교인입니다. 바로 당신네가

예배도 못 드리게 하고 전도도 못하게 하면서 잡아드린

교회책임자가 담임하는 그 교회의 교인입니다.”라고 경시청 안에서

항의 겸 전도를 한 것이었다. 경시청 사람들은 최 형제가

한국인 신분임을 알고는 매우 까다롭게 취조를 시작했다.

최승현 형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큰 소리로 성경을 가지고

종교탄압과 교회지도자들을 투옥한 일본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그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 그러자 그들은 최 형제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쩌자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최 형제는 이 순간 자기의 말 한마디에 체포당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최 형제는 두려움 없이 경시청 사람들에게

“일본에 있는 우리교회본부의 문을 닫고 지도자를 잡아간 것은

당신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나는 당신네가 잡아가던지 말든지

예배드리려고 이미 집을 하나 얻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보다는 일본 나라를 위해서

기도드리려고 합니다! 허락 하시오!”라고 선언을 했다. 놀랍게도

경시청사람들은 “당신이 예배 할 집을 얻었으면 나가서 당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예배를 드려도 좋다”라고 허락을 했다.

그래서 동경 한복판에서 집을 얻어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최 형제는 지금 생각하니 경시청에 들어가 호통을 친 것은

분명 자기의 힘이 아니었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경시청을 다녀와서 허락받은 집회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자

우리 교인뿐만 아니라 각 계층의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그 중에 한 변호사는 최 형제의 전도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니고데모”처럼 거듭나서 교인이 되었다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목사님! 얼마 후 정 목사님이 청양에서 사고가 생겨 재판도 받고

형무소로 가게 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도해서

개종한 이 일본변호사와 목사님의 구명을 위해 여러번 의논하였습니다.

그 변호사에게 비용은 내가 부담할 터이니 조선에 나가

정 동심 목사를 위해 변호를 해 달라고 청구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변호사는 여러 가지로 알아본 결과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일본인변호사가 나간다 해도 정동심 목사는 형을 면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해서 포기한 일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 일본에서도 구명운동 한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너무도 감사했다. 최승현형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지역에 많은 폭격으로 다른 집들이 불에 타거나

무너졌지만 최승현형제가 예배드리는 집만 폭격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기에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증거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합회장도 석방이 되어

동경 우리본부교회에 참석하고 있는데도 교회집회가 잘 안되지만,

최승현형제가 와서 설교를 한다면 입추에 여지없이 참석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본에 간 것이 1952년경이니 최 형제가

경시청에 들어가 담대히 호통친일도 7년이나 지난 시기인데도

요시노부슈다이(義信主待)형제가 설교를 한다면 교인은 물론

불신자도 많이 참석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듯이,

최승현형제가 일본이 전쟁 후 교회를 재건할 때에 전쟁 기간동안

신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한명도 재건위원에 참석시키면 안 된다고

계속 강경한 주장을 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고 한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자 “점심준비를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일본인

부인에게 최승현 군은 “목사님은 식사비까지 출장비로 받아서 다니실

것이니 염려 말고 찬밥 있는 대로 가져와 대접하면 된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일본인 부인은 정말 찬밥을 점심으로 내어 왔다.

최 형제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남의 기쁨이 너무

좋았기에 우리는 찬밥이지만 맛있게 먹었다. 최승현 부부는

열 한 살쯤 된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세상학교에 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자기 집에서 부부끼리 성경도 배워주고

다른 책을 얻어 학교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 아이를 정규학교로 보내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웠지만

그 부모의 믿음은 칭찬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승현 형제는 자기의 포부를 말하면서 예언의 신 말씀대로

“의료사업이 하나님의 사업에 오른팔과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어느 지방의과대학에 지망을 했다한다. 그런데 자기는 어느 모로

보아도 의과대학에 입학할 정도가 못되는데도 입학시험이나

그 까다로운 수속도 그저 형식적으로 요구를 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시는 것 같다고 했다.

최 형제는 그간 있었던 경시청의 일이나 의과대학 입학과정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나의 연약한 믿음을 재삼 반성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하루를 묵고 떠날 때에 최 형제는 이런 부탁을 했다.

자기가 내년에는 의과 대학에 입학할 것 같은데 공부가 끝나면

고국에 있는 위생병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연합회가 자기학비의 일부를 대어주어

자기와 관계를 맺게 되면 자기도 정신적으로 항상 고국을

염두에 두게 될 것이며,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에

가족을 설득하여 한국에 나가 한국의료사업을 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학비를 조달 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를 했다. 나는 해방과

육이오사변을 겪은 우리 교회가 아직 전쟁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재정적으로 너무도 힘든 때인지라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에 그의 부탁을 담고 돌아왔다. 그 후에 최 형제가

의과대학에 들어갔는지도 연락이 없었지만 나도 연락을 하지 못해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최 형제를 만난 후에 국곡수 목사를 다시 만나니 최 형제에

대해 많은 칭찬을 했다. 나는 최 형제의 정신상태가 보통을

넘는다고 말하니 국곡수 목사는 웃으면서 아다마(머리)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최승현 형제만큼 신자를 많이 얻는

사람이 없다하며 칭찬을 많이 했다. 최승현형제도 구니야 목사는

가끔 자기 집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허름한 집에서

잘 자무시고 간다고 하며 감사해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지는 사랑은 국경도 초월함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에 서로 연락도 안 되어 최 형제가 원했던 한국연합회차원의

도움도 들어주지 못한 것이 아직도 미안한 생각으로 남아 있다.

숙소에 돌아와 최승현형제의 신앙 경험담이 계속 내 마음을

벅차게 하면서 한국에서 있었던 세 청년의 일이 기억났다.

1943년, 한국연합회책임자들이 검거되면서 그 여파로

황해도 지역의 작은 지방교회에서 세 명의 청년교우가

경찰에 잡혀 들어가 분리취조를 받은 일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 분리취조가 사람 잡는 수단이었다. 다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다른 쪽에 와서는 말 한 듯이 하는 그들만의

악랄한 수법이었다. 이런 수법에 걸려든 세 청년 중 두 청년은

겁이 났는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하고 유독 한 청년은 취조관에게

담대히 자기의 신앙을 증거 하였다. 이 청년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이야기를 하며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며 세상나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생활 한다.”라고 담대히 이야기를 하자

취조관들이 감동을 받고 다른 두 청년을 불러 들여서 “너희도

믿으려면 이 청년처럼 믿어라!” 하면서 모두 훈방 했던 일이 기억이 났다.

집에 돌아오니 남선대회 직원들은 피난길에서 아직 돌아온 직원은 없고

나의 아내와 두 자녀만 있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오래지 않아

직원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이시화 목사는 금년에 합회총회를

해야 되겠는데 서울보다는 충청도 지방에서 하고 싶다고 하기에

대전에서 하게 된다면 교인들을 다 동원하여 도울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합회행정위원회에서는 1952년 6월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하기로 결정이 됐다. 합회총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기에 여러 지방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대회장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중 한 가지가 남선대회 연합침례식이다.

그간 육이오사변과 일사후퇴 등 어려운 사정으로 침례식을

거행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금만경(?) 광활한 벌판에 있는

개울에서 침례식을 거행했는데 52명이 함께 침례를 받았다.

50명이 넘는 신자가 함께 침례를 받은 것은 교회역사상

처음인 듯 하다. 이때까지는 1945년 12월경 강원도 묵호에서

반내현 형제가 인도한 40여명에게 침례를 준 것이 최고의

숫자였던 것 같다. 당시에 한국 교계에서 침례자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던 때이어서 52명에게 침례를

준다는 것은 재림 교계에서 잊을 수 없는 쾌사(快事)였다.

그런데 51명을 침례주고는 다 끝난 줄 알고 물에서 나오는데

저쪽에서 한명이 뛰어 오면서 침례를 받겠다고 소리를 쳤다.

알고 보니 자기차례를 기다리다가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넓은 벌판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소변을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해서 모두 크게 웃으면서 52번째 신자에게

침례를 준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삼육신학원에서 일하는

임병의씨가 나에게 삼육신학원에서 자동차 운전할 분을

남선 대회에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내가 합회총회 전에 각 교회를 순시하다가 마침 대전서

멀지 않은 금산지역, 지량리라는 곳에 우리교인으로 일본에 가서

자동차, 특히 트럭에 관해서 배우고 해방 후에 한국으로 나온

김동해라는 형제가 생각이 나서 추천했다. 임병의 씨는

내가 추천한 김동해 씨를 불러서 일하게 했고 이 분은

신실히 일하여 운전과 구내발전소등을 책임져서 삼육신학원에서

없으면 안 될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삼육신학원 교회의

장로가 되어 봉사했다. 후에 그의 자녀들도 모두 교회 내에서

신실히 일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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