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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손 놓은 곳은 아직도 적대적 분위기.

 

 

지난 6월4일 오후 서촌의 조용한 카페에서 구수정씨를 만났다.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베트남전 사죄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던 그는 “학살의 기억을 가진 분들이 이제 몇 안 남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들의 고통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6월4일 오후 서촌의 조용한 카페에서 구수정씨를 만났다.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베트남전 사죄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던 그는 “학살의 기억을 가진 분들이 이제 몇 안 남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들의 고통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차라리 총을 쏴서 깨끗하게 죽이지, 차라리 날 선 칼날로 심장을 찔러 한 방에 죽였으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한국군 총검은 날이 무뎠다오. 그러니 네살배기 나는 아홉 방을 찔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흘 밤낮을 피를 흘리면서도 물 한 방울 못 먹고, 고통으로 온몸을 뒹굴면서 그렇게 죽어갔다고요.”(구수정의 페이스북, 베트남 푸옌성에서 만난 생존자 ‘크엉’의 구술기록)

 

 

구수정(48)이 전하는 베트남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고 섬뜩하다. 박영한이나 안정효, 황석영처럼 소설을 통해 월남(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려온 이들이 대개 월남전 경험이 있는 남성이어서일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지레짐작해온 내가 머쓱해졌다. 경복궁 담장이 마주 보이는 서촌의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구수정의 첫인상은 수더분하고 차분했다. 15년 전, <한겨레21>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양민학살 사건을 최초로 발굴 취재했을 때 그는 호찌민대 역사학과 석사과정 학생이었다.

 

2008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베트남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전쟁과 살육의 광기를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왜 잊혀져 가는 과거사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다니는 걸까? 아픈 상처를 헤집어 그가 굳이 찾아내고자 하는 진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베트남전 참전 50주년이 되는 올해, 그에게 베트남이란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었다.

 

 

“거긴 아직 전쟁 중 아니냐?” 
어머니의 단식 만류 뒤로하고 
대책 없이 향한 베트남에서 찾은 
베트남전쟁의 숨겨진 이야기 
한국사회 사죄운동 단초가 되다 

피맺힌 그들의 증언 수집할 때 
열명 넘게 죽은 유족 앞에서 
차마 이야기 못 꺼내던 할머니 
“난 한명… 내 유일한 아이가…” 
그들의 울음 꾸역꾸역 삼키다

 

 

‘불멸의 불꽃처럼 살아’에 매료되어…

 

-한국엔 자주 오시나?

 

“일년에 한번 정도? 보통 이맘때쯤 나온다. 겨울엔 엄두가 안 나고.”

 

-겨울엔 왜?

 

“난 추운 게 제일 싫다.(웃음)”

 

-계속 베트남에 머물 생각인가?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없나?

 

“2008년 박사논문 끝났을 때 잠깐 생각한 적 있고, 그 이후로 한국 와서 살까 하는 생각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엔 어째서?

 

“지난 17년간 뭔가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피해자 얘기도 많이 듣고 이런저런 사업도 많이 벌이고…. 그런데 막상 (학살피해 현장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이 사는 걸 보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리고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지난 1999년도에 처음 취재할 때 만났던 분들 대부분이 지금은 돌아가셨고 학살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이제 몇 안 남았는데, 내가 그분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의 고통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걸 보면서 한계를 많이 느낀다.”

 

그가 느끼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구수정의 글이 베트남과 한국 사회 양쪽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의 기사로 말미암아 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사죄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이 열기는 평화박물관과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등 평화운동단체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베트남의 유력 언론 <뚜오이째> 등이 그의 기사를 받아 대서특필하면서 구수정은 ‘한국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고, 지금까지 한국과 베트남 간 민간교류의 중요한 다리 구실을 맡아왔다. 2000년 베트남 외무장관 응우옌지니엔은 구수정의 “아름답고 존경받을 만한 행동”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우리가 베트남전의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의 절반은 구수정 박사한테서 나온 것”이란 얘길 들었다. 베트남에 관한 독보적 전문가로 꼽히는데 비결이 뭔가?

 

“모르겠다. 비즈니스나 학계 쪽은 따로 전문가가 계실 테고 나는 자신을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 테두리 안에서 베트남 사람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은 일정 부분 구수정이라는 개인을 하나의 ‘통로’로 믿고 있는 것 같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전달해주는 통로.”

 

구수정이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만 스물일곱살 때였다. 한신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진보적 학술잡지 <사회평론>에서 일하다가, 선배를 따라 김대중 선거캠프에 잠시 몸담았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한 번도 디제이가 최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막상 선거에서 지니 “차선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사는 게 문득 역겨워졌다. 베트남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거기 아직 전쟁 중인 나라 아니냐”며 단식까지 하고 만류하셨지만 구수정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90년대 초반, 러시아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붐이었다. 왜 베트남을 택했나?

 

“왜 베트남을 고집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야지 생각할 때 머리에 떠오른 게 베트남뿐이었다.”

 

-평소 베트남에 관심이 많았나?

 

“베트남어도 할 줄 모르고 아무 연고도 없었다. 다만 학교 다닐 때 베트남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이 <사이공의 흰옷>과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라는 소설책이었다. 특히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원제: 그대처럼 살리라)는 항미전사 응우옌반쪼이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었는데 그 표지사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총살을 당하면서도 ‘눈가리개를 벗겨라. 내 조국의 청명한 하늘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마지막 구호를 외치며 죽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사회주의 베트남에서, 정치적 폐쇄성이 강한 역사학과에 외국인 신분으로 입학한 건 구수정이 최초였다. 당시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구수정은 석사과정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도 당국의 입학허가를 얻지 못해 여덟번이나 하노이 교육부를 찾아가 장관 면담을 했다고 한다. 대학원에 들어간 지 2년8개월이 지나 뒤늦게 공식 입학허가를 얻은 데는, 그의 뛰어난 학업 성적도 한몫을 했다. 베트남 민속학 시험에서 역사학과 개설 이후 최초로 10.0 만점을 받아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구수정은 베트남 학생보다 뛰어난 베트남사 연구자였다.

 

 

구수정을 만든 시간들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구수정을 만든 시간들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믿지 못했던 이야기

 

-언제부터 한국군 민간인학살을 연구하게 되었나?

 

“처음엔 민간인 학살을 가지고 논문을 쓰게 될 줄 몰랐다. 1997년에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관한 논문을 쓰려고 백방으로 자료를 찾다가 하노이 외무부 국가문서보관센터에서 어렵사리 문건 하나를 입수했다. 제목이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인데 일부러 출처가 적힌 부분도 찢어버리고 여러번 복사를 했는지, 판독도 어려운 40쪽짜리 문건이었다.”

 

-입수 경로가 불투명한, 출처 불명의 자료라면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출처 확인을 여러번 했는데, 1980년대 초반 베트남 정치국에서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만들어진 자료일 거다, 이 정도로 확인이 되었다. 어쨌든 베트남 국가 차원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최초의 조사였고 통계까지 나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 자료를 읽으면서도 그 내용을 믿지 못했다.”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반신반의했단 얘긴가?

 

“반신반의가 아니고… 아예 믿지를 않았다.”

 

문건의 내용을 의심하며 일년쯤 묵혀만 두고 있었는데, 1998년 일본의 피스보트를 타고 우연히 한국군 학살지역을 둘러보게 된 작가 강제숙, 김현아가 큰 충격을 받고 구수정에게 달려왔다. 구수정은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자료를 처음 내보이며 “나도 믿기진 않지만 사실 확인이라도 해보자”고 다짐했다. 한달 뒤, 봉고차 한 대를 빌려서 자료 하나 달랑 들고 문헌에 나온 옛 지명을 찾아 탐사를 시작했다. 45일간 새벽 네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혼자서 하루 세 마을 이상 도는 강행군이었다. 관광지도 아닌 곳에 외국인이 나타나 인터뷰를 하고 다니니 공안에 잡히기도 여러 차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수차례 거듭했다.

 

-마을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

 

“학살 이후 30년 만에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니, 쫙 소문이 돌아 가지고 내가 가면 마을마다 100여명이 달려 나왔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손을 들고 ‘카이, 카이!’ 하면서… ‘카이’는 ‘진술한다’는 뜻인데 좀 공식적인 의미가 있다.”

 

수십년간 묻어두었던 피맺힌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간인 학살과 강간, 영아 살해와 방화, 암매장…. 카인호아성에서 시작해서 푸옌성을 거쳐 꽝남성까지 한국군 주둔지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수천명의 끔찍한 학살담을 듣고 또 듣다 보니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고 주저앉고 싶을 정도에 이르렀다.

 

-정서적으로 감당이 안 되었겠다.

 

“시간이 없으니 한 사람당 5분에서 10분씩 듣는 건데 그 시간 동안 들을 수 있는 얘기가 빤하지 않나. 한국군들이 토끼몰이를 했어, 다연발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서 다 죽였어, 그래서 내 가족이 몇 명 죽었어…. 이 얘기를 수천번 반복해 듣다 보니 결국 모든 이가 똑같은 말을 되뇌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서적으로뿐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정말 감당이 안 되었다.”

 

빈딘성 박물관에서 한국군 관련 아카이브를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채록하고자 했던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희생자 명단과 학살의 동선까지 기록된 자료를 보고 나니 “사람이 약아져서” 꾀가 났다. 이후부터는 마을에 가면 노트부터 나눠주고 각자 거기 학살피해를 써내라고 했다. 문맹이 태반인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비뚤비뚤 진술서를 썼다.

 

-그래서 수고를 좀 덜었나?

 

“그래도 한두 사례는 들어야 하겠어서 ‘내게 두 분만 얘기를 해주시오’ 했더니 또 카이, 카이 하는데, 어떤 이가 ‘내 식구는 여섯명 죽었어요’ 하니까 여기저기서 ‘나는 열세명’, ‘열일곱’… 막 이렇게 소릴 지르는 거다. 그때 나도 모르게 ‘아, 열일곱? 그럼 이야기해 보세요’ 했다. 그렇게 얘길 듣는데, 맨 앞에서 계속 나랑 눈을 마주치려는 할머니가 하나 있었다. 너무너무 말씀을 하고 싶은 눈빛이었는데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나는 이제 시내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게 인사를 하곤 마을을 떠났다. 그러곤 한참 떨어진 차도까지 걸어 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계속 날 쫓아오는 거다. 나는 또 붙들려서 얘기를 들을 수가 없는데…. 내가 뛰어가면 할머니도 뛰어오고 내가 멈추면 할머니도 멈추고, 그래도 나는 내 길을 가고 싶었다. 봉고차에 올라 문을 쾅 닫고 출발하는데 그 늙은 할머니가 차 뒤에서 따라 뛰는 게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할 수 없이 차를 멈추고 할머니한테 물었다. ‘뭐요? 도대체 왜요?’ 그러면 또 암말이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다시 출발하면 또 따라오고, 멈추면 입을 닫고….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나중엔 너무 화가 나서 차에서 뛰어내려가 나도 모르게 할머니 멱살을 흔들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해요. 너무 늦었고 난 피곤한데…’ 그랬더니 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뭐라고 하시던가?

 

“‘난 한명만 죽었는데….’ 그 한명이 할머니의 유일한 아이 하나였다.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울먹) 또 할머니한테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한텐 그 하나가 전부인데… 왜 말을 못해? 왜!’”

 

-…….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나도 모르게 신발짝을 벗어서 땅을 치면서 엉엉….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는데 옆엘 보니 할머니도 나랑 나란히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치며 울고 계셨다. 그때 할머니한테 말했다. ‘할머니,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말했다.

 

‘아가! 내가 다 안다. 갈 길이 먼데 이제 가라.’ 그렇게 돌아왔다. 그때 생각했다. 아, 내가 석사 하고 박사 하고 교수 하면 정말 이 이야기가 더는 안 들리겠구나. 공부를 멈춰야겠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해야겠다.”

 

구수정은 이후 한국의 대학에서 오라는 제안도 뿌리쳤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는 학살 피해자들의 폐부에 쌓인 고통스런 기억을 듣고 또 듣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있다. 듣는 일은 힘겹다. 380명이 학살당한 고자이 마을에서 채 이름도 짓지 못한 채 죽은 영아가 50여명이란 얘기를 들으며,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딸아이를 찾아 두 다리가 잘린 채 무릎으로 기어 다닌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구수정은 그들의 울음을 꾸역꾸역 자기 안으로 삼킨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무병이라도 앓듯 몸이 아프다. 먹으면 토하고 열이 오르고 오한이 들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다 쑤신다. 이야기를 토해낸 그들도 아프고, 그 이야기를 받아낸 나도 아프다.”(구수정 페이스북, 2014. 5.14.)

 

 

둘이서 함께 연주하는 ‘아맙’처럼

 

-1999년, 당신의 글로 촉발되어 <한겨레21>이 피해자를 위한 모금운동과 함께 연재하기 시작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기사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가 보도에 격분해서 한겨레 사옥에 난입한 일도 있었고, 2000년 제주인권학술회의에 당신이 발표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나?

 

“한겨레 난입이 있던 날, 한국의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난리가 났다’고. 집 주변 동네에 온통 빨간 칠을 하고 집 앞에 염산을 드럼통으로 세 통이나 놓고 갔다고 했다. 집 식구들은 오랫동안 고생들 하셨다. 나도 베트남에 있으면서 그 무렵엔 6개월 단위로 거처도 옮기고 한국인 거주 지역엔 가지도 못했다. 지금은 좀 바뀐 것 같다.”

 

-지만원 박사 같은 사람은 당신 이름을 거론하며 이렇게 반문한다. “베트남 사람들도 들추려 하지 않는 주제, 국익에 역행하는 주제를 왜 제기하고 나서는가?” 당신은 뭐라고 답할 텐가?

 

“베트남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소설 <머나먼 쏭바강>의 배경지가 되었던 푸옌성에 76년 두 개의 증오비가 들어섰다. 우리 전쟁 직후를 떠올려보라. 피죽도 못 먹는 상황인데. 그 긴 전쟁 치르고 나서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군이 마을에 와서 어떻게 학살을 했는지 그림이나 글, 도표로 꼼꼼히 기록해두는 일. 베트남 정부도 이 일에 시멘트를 지원했다. 베트남 정부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자고 말하지만, 이렇게 증오비, 위령비가 세워지는 일을 막은 적은 없다. 실제로 민간인 학살 자료는 아카이브 자료로 남아 있다. 공식적 기억으로 간직하는 거다.”

 

-우리의 치부를 들춰내 국익에 역행한다는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한국의 ‘나와 우리’라는 단체가 호찌민대 한국어학과 청년들 모임인 ‘굿윌’과 함께 지난 10년간 베트남 학살지역에 들어가 꾸준히 마을을 돕는 일을 해왔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길을 내고…. 그런 지역은 한국인이 가도 마을 사람들이 다 튀어나온다. 서로 자기 집으로 끌면서 밥 먹고 가라고. 반면에 아무 작업도 못 했던 지역은 여전히 적대적이다. 동네 아이에게 사탕을 쥐여주어도 한국 사람이 준 거라며 뿌리친다. 최근 베트남에서 반중 시위가 나서 21명이 죽었다. 우리 기업을 중국 기업이라고 오해해서 피해가 컸다고 하는데, 현장의 분위기는 이 김에 그동안 쌓였던 (한국에 대한) 감정을 분출한 것이란 말도 있다.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억누르면 억누르려 할수록 반감은 더 커진다.”

 

구수정은 2011년 지인들과 함께 한국-베트남 간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위한 기업, 아맙(AMAP)을 설립했다. 아맙은 베트남 민속악기로, 아맙나무 대롱을 잘라 양쪽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을 맞춰야 비로소 소리가 난다. 구수정에게 베트남이란, 우리가 외면했던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마주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함께 만들어야 할 아맙의 파트너다. 그는 스스로 아맙의 대롱이 되려 한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643349.html#csidx839a026585a8650bc604caee8f8d826 onebyone.gif?action_id=839a026585a8650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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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w6614 2017.06.24 01:20

    제주 강정마을에 세워진 베트남 피에타 상. (사진출처-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선생님은 1993년에 베트남에 유학가서 1999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현장 답사를 통한 연속 기사를 한겨레21에 썼다.  그 기사가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해서, 지금도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대해 자료를 찾아본 사람은 구수정이란 이름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작년 11월에 베트남 평화기행을 가서 구수정 선생님의 안내를 받고 크게 감명받았고, 한번 벼르던 인터뷰를 얼마 전에야 했다. 한베평화재단이 '베트남 피에타' 상을 제주 강정마을에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베트남 피에타 상은 일명 '베트남의 마지막 자장가'라고도 한다. 한국군에 살해당한 아기와 엄마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한베평화재단은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통해 화해로 나아가자는 취지에서 2015년 9월에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고 2017년 2월에 재단 설립 인가를 얻었다. 정식 출범은 올해 가을로 예정되어 있다.  구수정 선생님은 베트남에 20년 넘게 머물며 베트남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회적 기업 ‘아맙’의 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최근 귀국했다. 아래는 인터뷰 기사를 축약한 내용이다.  

    2016년 12월 2일 베트남 빈호아 학살 50주년에 평화기행팀이 빈호아를 방문했다. 학살 당시 생후 6개월 아기였던 생존자 도안 응이아 씨(가운데 남성)과 기행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수정 박사(마이크 든 사람). 평화기행팀은 베트남 피에타의 모형을 도안 응이아씨에게 선물했다.

     - 1999년부터 제기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반향을 일으켰다. 구수정 이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신이 베트남에 가게 된 계기와 민간인 학살 문제 조사에 뛰어든 과정에 대해 알고 싶다.


    1993년에 베트남 유학을 떠났다.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초에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무너진 일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의 대안이라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공황을 겪었다. 이때 80년대 학번들이 사회주의의 실체를 보겠다며 유학을 많이 떠났다. 당시 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그게 가능해졌다. 또 하나는 보다 직접적인 계기인데, 1992년 대선에 나는 디제이(김대중) 캠프에서 일했다. 나는 디제이를 한 번도 최선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선거에 지니까 이 나라에서는 차선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떠올린 나라가 베트남이었다. 베트남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한국군 참전 문제였다. 한국과 베트남이 1992년에 수교했지만 베트남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유학을 결심하고 책을 찾는데 가이드북 한 권이 없더라. 우여곡절 끝에 어학 코스를 밟은 후 호찌민 대학 석사 과정에 지원했다. 

    - 그 당시에 베트남 한국인 유학생이 있기는 했나.
    하노이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좀 있었는데 호찌민 대학에는 외국 학생이 들어온 전례가 없어서 아예 관련 규정 자체가 없었다. 호찌민 대학에서는 나보고 일단 시험을 보라고 했다. 베트남 친구들하고 똑같이 시험 봤는데 수석으로 입학했다. 책을 통째로 외웠다. 합격하고 학점 이수하고 2년 과정 수료한 후에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입학 처리가 안 되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교육부가 있는 하노이에 여덟 번 날아갔다. 사회주의 사회는 관료주의가 심해서 서류 하나하나를 따진다. 온갖 증빙서류를 챙겨서 간신히 입학 처리를 끝냈다. 대학원 다 수료한 뒤에 말이다. 


    그러면서 논문 준비를 했는데, 논문 주제도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내 주제는 ‘한국의 베트남 개입’인데 연구 허가가 나지 않았다. 한국-베트남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논문 주제 허가를 받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주변에서는 주제를 바꿔 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유학 올 때부터 이 주제가 아니면 논문 쓸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하노이를 오가면서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찾았는데, 1997년에 어렵게 자료 하나를 만났다.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40여 쪽의 문서였다. 
      
    - 제목부터 강렬하다. 어떻게 입수하게 된 건가?
    매수했다. 하하하. 당시 베트남에서는 온갖 게 극비였다. 예를 들면 마을 지도도 극비 문서였다. 지도가 그 정도니 중요한 자료에, 그것도 외국인이 접근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국군 관련 자료를 찾느라 국방부 도서관이나 국립문서보관센터 이용을 요청하려면 우선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오만가지였다. 대학 재학증명서, 외국인 증명서, 교수 추천서, 범법 사실이 없다는 증명서 등등. 그런데도 내가 자료를 찾는다는 소문이 나니까 어느 날 외무부 직원 하나가 왔다. ‘내가 자료를 구해주면 사겠냐’고 그가 제안해서 ‘한국군 관련 자료라면 뭐든지 사겠다’고 했다. 그렇게 입수한 자료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자료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만 해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몰랐다. 
      
    - 베트남 유학을 떠날 때에도 민간인 학살 문제는 몰랐나. 
    상상도 못했다. 한국군의 참전 배경이나 작전 수행에 관심을 가졌지 한국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 역사책에도 한국군의 병력 규모 따위를 소개하면서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했다고 쓰여 있을 뿐 한국군의 학살은 언급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시각에서 한국군은 미군의 일부이지 독립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과서에서 한국군 관련 비중이 적었다.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을 건네받고 보니 복사를 여러 번 거쳤는지 나는 도저히 판독할 수가 없었다. 베트남 친구에게 필사를 맡겼다. 베트남 친구가 필사하다가 그만하고 싶다고 하더라. 어떤 내용인데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했다. 필사한 자료를 읽다가 놀라서 책상 서랍에 넣어버렸다. ‘산 채로 사람을 태워 죽였다’, ‘아이를 찢어 죽였다’... 믿기가 힘들었다.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베트남 인민군 정치국에서 1980년대 중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는 ‘미국의 남베트남 침략전쟁’에서 ‘남조선 박정희 파벌’이 한국군을 미국의 용병으로 보냈다고 서술하면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지역, 인원수,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다음은 문서의 일부이다. 

    ‘1965년 12월 22일에 뚜이 프억현 프억 호아싸 떤쩡 마을에서 남조선군은 야만적인 소탕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12세 이하의 아이 22명, 여성 22명(그중 3명이 임산부) 그리고 70세 이상 노인이 포함된 50명의 양민을 죽였다. ...롱 씨는 출산한 지 이틀이 되었는데 총에 맞아 죽었고 아기도 구타당해 죽었으며 아기의 시체는 엄마의 피웅덩이에 버려졌다. ...응우엔 티 짠 씨는 한 살 아기를 품은 채 총에 맞아 죽었다. 그들은 아기의 목을 잘라 덤불에 던졌고 몸을 찢었다.’

      - 그 문서가 민간인 학살 문제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나. 
    책상 서랍에 문서를 넣고 뒀는데, 1999년 봄에는 더 이상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이 20세기에 일어났는데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 덮어두어도 되나. 결국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마음먹고 그해 4월부터 학살 현장을 찾아 나섰다. 


    길을 떠나려고 결심은 했는데 막상 학살 피해자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빈손으로 가면 안 될 거 같았다. 서울 경동시장에 가서 인삼차를 한 트럭 샀다.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만날지 몰라서. 인삼차가 100포에 1900원인가 했다. 당시에 베트남에서 인삼차는 무척 귀한 선물이었다. 봉고차에 인삼차를 가득 싣고 운전사와 같이 출발했다. 또 다른 고민은 ‘학살 현장과 피해자를 찾을 수 있을까’였다. 자료 하나 들고 가는데 이 자료가 사실인지도 모르겠고 지명도 종전 이후에 다 바뀌었고. 
    호찌민 시에 출발해 중부로 올라가면서 백마부대가 주둔한 카인호아성·푸옌성, 맹호부대가 주둔한 빈딘성, 청룡부대가 주둔한 꽝아이성·꽝남성 순서로 다녔다. 학살을 찾는 건 허무하리만큼 쉬웠다. 한국군 주둔지 근처에 가면 만나는 사람이 죄다 이정표였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어디로 가 보라고 하는데, 그리 가면 위령비가 있거나 학살 피해 마을이 있었다. 처음에는 귀신이 도와주나보다 했는데, 실은 학살이 지천이었던 거다. 

    빈호아 학살 현장에 서 있는 '한국군 증오비(BIA CAM TUO).'는 전쟁이 끝나고 생존자들은 쌀과 돈을 거두어 이 증오비를 맨먼저 세웠다고 한다. 증오비에는 "하늘에 이른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라는 제목 아래 한국군이 430명의 민간인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최근 증오비에 도색을 새로 하여 글자가 선명하다.

    - 그 당시만 해도 학살이 일어나고 30년이나 세월이 지났는데, 놀랍다. 
    45일 동안 하루에 3개 마을씩 들어갔다. 학살 흔적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바빠져 어디든 학살이 있었다고 하면 최대한 가려고 했다. 차로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 거의 없었다. 길이 끊긴 곳도 많았다. 성도(베트남 행정구역상 ‘성’의 주도)의 호텔에 묵으면서 새벽 4시에 출발해 오전 5시 반쯤 마을 근처에 도착하면 거기서 걸어 들어갔다. 베트남의 4월은 체감 온도가 50도쯤 되는데, 인삼차가 든 배낭을 세 개나 메고서.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학살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최초의 한국인이니까, 내 출현 자체가 마을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우리가 과거에 북한 사람을 도깨비처럼 생각했듯 이들은 한국인이 어떻게 생긴 괴물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한국군 학살에 대해 물어보면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카이, 카이’하고 외치기 시작한다. 베트남 말로 진술하겠다는 뜻이다. 베트남 방언은 제주 방언보다도 알아듣기 힘들다. 그런 사투리로 수십 명이 내 코앞에서 손을 흔들며 카이를 외쳐댔다. 지금도 가끔 가위에 눌린다. 
      
    -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랬을까 싶다. 
    원통하고 답답한 이야기를 30년 동안 참았던 거다.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라서 이빨도 빠진 분들이 울면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가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이야기를 받아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받아내면서 울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울면 저분들이 이야기를 못할 테니까. 그렇게 이십여 일을 듣고 나니까 정말 귀가 안 들렸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듣다가는 내 머리가 터지거나 귀에서 뭔가 쏟아질 거 같았다. 그래서 노트를 가득 샀다. 노트에 적게 하려고. 
    마을에 들어갔더니 또 사람들이 카이 카이하고 외치기에 내가 소리를 쳤다. ‘저는 더 이상 못 듣겠어요. 이렇게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들을 수가 없어요’라고. 베트남 사람들이 참 순박하다. 내가 화를 내니까 그분들이 놀라서 토끼눈을 뜨더라. 노트를 나눠주고 거기에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으라고 했다. 가족 중에 누가 죽었고, 죽은 사람의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인지. 그런데 이분들 상당수가 글을 모른다. 노트를 한 권씩 들고 누구는 나무 그늘에 누구는 툇마루에 엎드려서 서로 글자를 물어가며 쓰는데, 얼마나 꾹꾹 눌러 썼는지 노트가 많이 찢어졌다. 
    노트를 건네받은 다음 청했다. ‘한꺼번에 모두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몇 명이 죽었다는 사실만 듣다가 시간이 다 가더라. 한두 분만 좀 길게 이야기를 해 달라. 그러면 학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내가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그렇게 양해를 구했건만 또 카이 카이가 시작됐다. 카이는 그만하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여기 열여섯 명이요’ ‘여기 일곱이요’ ‘여기 다섯이요’ 하고 죽은 가족 숫자를 소리치는 거다. 기막힌 노릇이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가족이 많이 죽은 분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드렸다. 


    그런데 머리에 수건을 두른 한 할머니가 앞에 앉아서 자꾸 나하고 눈을 맞추려고 했다. 눈 마주치면 이야기하겠다고 할까봐 시선을 피했다. 한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 인삼차를 다 나눠드리니 한밤중이었다. 빨리 떠나고 싶었다. 봉고차가 있는 곳까지 걷는데 머릿수건 할머니가 따라왔다. 외면하고 빨리 걸었다. 차에 타서 운전사 아저씨한테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운전사 아저씨가 출발하다가 뒤를 보더니 할머니가 따라온다는 거다. ‘그냥 가세요’ 했는데 운전사가 마음이 여려서 가질 못한다. 차가 멈추면 할머니도 서고, 차가 출발하면 할머니가 또 따라오고. 내가 화가 나서 차에서 내려 할머니한테 갔다. 왜요 할머니. 할머니가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차를 타고 출발하는데 또 따라왔다. 
    화가 너무 나서 할머니를 잡고 막 흔들었다. 할머니 나한테 왜 그러냐. 그때 내 안에 화가 많이 쌓여 있었다. 학살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으면서 화가 이만큼 차올랐는데 그게 할머니한테 폭발했다. 내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데, 할머니가 이러는 거다. ‘난 한 명밖에 안 죽었는데 말해도 돼?’ 
      
    - 한 명밖에... 
    그 전에 ‘열여섯 명이요’ ‘열세 명이요’ 하는 상황에서 말을 못 꺼낸 이 할머니가 나한테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 한명이 할머니의 유일한 자식이라는 말에 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한명이 당신한테 전부인데 왜 말을 못해.’ 20일간 참은 울음이 터졌다.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치면서 울었다. 그런데 울다가 옆을 보니까 할머니도 신발을 벗어 땅을 치면서 울고 있는 거야. 그게 너무 웃긴 거지. 나중에는 서로 마주보고 깔깔 웃었다. 내가 할머니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은데, 할머니가 ‘아가, 내가 다 안다. 내가 알아’ 그러더라. 그 할머니가 잊히지 않는다. 
      
    - 구 박사가 직접 몸으로 받아낸 증언들이어서 당시 한국 사회에 울림을 줬던 것 같다. 
    <한겨레21>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 기사를 쓰고 나서 하루에 천 통 가까이 메일을 받았다. 지금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였는데도. 사람들은 참전 군인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와서 난동부린 사건을 주로 기억하지만, 그건 당시 사회의 반응 가운데 아주 일부였을 뿐이다. 내게 오는 메일에 답장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많아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분은 직접 편지를 써서 베트남에 보냈다. 한겨레신문사에는 전국에서 성금이 모였다.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한겨레가 미리 기획해서 한 게 아니다. 성금이 시간이 지나도 끊이지 않고 매일 오니까 이걸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 시작한 게 그 캠페인이다. 
      
    -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이제 한베 평화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99년부터 기사가 나가고, 곧이어 베트남 평화기행과 의사 단체의 진료 활동이 시작되면서 2000년대 초반에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그 뒤로 불씨를 이어왔다. 4월 26일에 제주 강정에 베트남 피에타 제막식을 한다. 그리고 가을에 재단이 정식 출범한다. 재단 출범과 함께 이어온 불씨가 다시 타올랐으면 한다.

    구수정 박사가 하미 마을 학살 위령비에 대해 평화기행팀에게 설명하고 있다.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 마을에서 1968년 2월 22일 한국군 청룡부대가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하미 마을에는 2000년에 한국의 월남참전군인복지회와 지역 주민이 함께 위령비를 세우기로 했는데 한국측에서 위령비 뒷편 비문 내용을 문제 삼았다. 그 비문에는 한국군의 학살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비문을 고칠 수 없다고 항의했으나 양국 관계의 부담이 커지자 비문을 고치느니 차라리 덮겠다며 주민들이 현재의 연꽃 문양으로 비문을 덮었다.

    [출처] 구수정 박사 인터뷰_"베트남 학살 피해자의 이야기, 몸으로 받아냈다"|작성자 J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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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w6614 2017.06.24 01:25

     

    그들이 세운 ‘증오비’를 아십니까
     

     

    2000년 참전군인 단체 지원으로 세운 하미학살 위령비. 희생자 135명 명단 중엔 당시 돌도 지나지 않은 1967년생과 1968년생이 적지 않다. 사진가 이재갑

    2000년 참전군인 단체 지원으로 세운 하미학살 위령비. 희생자 135명 명단 중엔 당시 돌도 지나지 않은 1967년생과 1968년생이 적지 않다.

    사진가 이재갑

     

    [토요판] 커버스토리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업보

    1930년대엔 만주에서
    1950년대엔 지리산에서
    1960년대엔 베트남에서…
    게릴라 접촉 기회 없앤다며
    마을 깡그리 태우는 경우 많아

     

    위안부 할머니 성금으로 세운
    평화박물관이 장학사업 앞장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진료활동
    페이스북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모임도 적극적 후원활동

     

     

    “우리는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 한국군이 되자, 우리는 월남인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따이한이 되자…”(주월한국군 참전 3훈5계 중)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군은 낯선 행성에 착륙한 우주비행사 같았다. 정글에선 희미한 길을 찾다 방향을 잃고, 마을에선 비밀 보급품 저장소를 찾기 위해 쌀항아리와 솥단지를 더듬어야 했다. 땅속에 미로처럼 파놓은 땅굴을 발견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1965년 한국군이 첫 전투부대를 파견했을 때부터 이미 남베트남에 거점을 둔 게릴라단체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처럼 한국군 또한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기란 힘들었다. 경계는 때론 모호했고 주민들은 표변했다.

     

    민간인 학살이 집중된 시기 중 하나는 1968년 1~2월 이른바 ‘구정 대공세’ 직후다. 지난 6월16일 세상을 떠난 팜티호아 할머니가 한국군의 공격으로 두 다리가 잘린 시점도 이때다. 1월31일 북베트남(월맹)과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쪽은 ‘휴전 기간’인 구정 때 14개 성의 주요 도시에서 대공세를 벌였다. 미군과 한국군은 곧바로 반격했지만 많은 희생자가 나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커지고 전쟁의 주도권은 북베트남으로 넘어간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해서는 게릴라의 활동무대를 없애는 방식으로 전술이 바뀐다. 게릴라와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고자 주민들을 자연취락에서 소개해 재정착촌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방침은 이미 1966년 주월한국군사령부가 펴낸 전훈집에 드러나 있었다. 부락은 “모든 적 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이며, 베트콩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라고 규정했다.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마을 주민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 방식은 무참했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근현대사를 통과한 우리 국민에게 ‘극우반공주의’가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전후 형성된 분단체제와 내외부의 격한 대립 속에서 ‘빨갱이 처단’의 심리적 기제가 싹텄다. 잔혹한 일을 벌이면서도 죄의식은 중화될 수 있었다. 한 교수는 “특히 한국군이 공격당할 경우 보복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던 위령비 뒤쪽 비문 자리.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가 비문 내용을 문제 삼고 베트남 정부가 압력을 가하자 연꽃 그림으로 가렸다. 사진가 이재갑

    “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던 위령비 뒤쪽 비문 자리.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가 비문 내용을 문제 삼고 베트남 정부가 압력을 가하자 연꽃 그림으로 가렸다. 사진가 이재갑

     

    ‘전선 없는 전쟁’에서 ‘내부의 적’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미 한반도와 주변에서 실행된 적이 있다. 1930년대 일본군의 만주 항일무장투쟁 소탕작전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베트남인 학살이 벌어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지리산에서는 빨치산과 연계된 산간마을 주민을 소개해 보급로를 차단한 뒤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1970년 미국 <뉴욕 타임스>에 관련 기사가 실린 적도 있지만, 국내에서 우리 군의 민간인 살상을 언급하는 일은 금기였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듬해인 1999년에야 <한겨레21>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당시 베트남에 머물던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은 베트남 정부의 문서를 토대로 한국군이 베트콩 수색·토벌작전을 벌였던 중부 5개 성(카인호아, 빈딘, 푸옌, 꽝응아이, 꽝남)의 마을들을 돌며 증언을 수집한다. 베트남 정부 추산 희생자만 5000명이었다. 이듬해 전쟁에 참여한 김기태 예비역 중령의 증언이 나온다. 2002년 6월에는 퐁니·퐁넛 마을(1968년 2월12일), 호앙쩌우 마을(68년 10월22일), 프억미 마을(69년 4월15일)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이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난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한국을 방문한 쩐득르엉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힌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에둘러 사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튿날 개인 명의의 성명을 내어 “(대통령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사과는 양국의 외교협상에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다. 1992년 두 나라의 수교 때 전쟁배상 문제가 제외된 이래 전쟁 문제는 애초부터 두 나라의 현안이 아니었다. 베트남이 전쟁을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로 간주한데다 승전국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양국은 민간인 학살 조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불완전한 진실’에 가깝다.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한 곳은 시민단체였다. 1999년부터 베트남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 베트남 진실위원회,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평화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전쟁 피해자인 군대위안부 출신 고 문명금 할머니의 성금을 종잣돈으로 설립된 평화박물관은 200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에서 어린이도서관 건립, 장학금 지원 등의 사업을 벌였다. 치과의사와 한의사들로 구성된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매년 베트남을 방문해 진료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인터넷 페이스북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은 피해 마을의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모금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시작한 평화운동은 일상으로 확장됐다.

     

    “아이들이 팜티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마지막에 만난 한국인이었어요. 35년 전 일을 들은 아이들이 울었지요.”

     

    여행 대안학교인 ‘로드스꼴라’의 김현아 대표교사가 3일 말했다. 아이들은 매년 한달 베트남을 여행한다. 그때 빠지지 않는 것이 민간인 학살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지난 4월엔 학생 13명이 하미 마을을 찾았다.

     

    아이들은 베트남에서 ‘증오비’도 목도했다. 한국군의 살상이 벌어진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베트남 전역에 약 50~60개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바다 건너 한국에는 베트남전 참전탑이 세워진다. 참전군인 단체 등에서는 2000년대 들어 ‘월남 참전탑’ 설립 붐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앞을 비롯해 충남 부여, 강원도 홍천, 전북 전주와 정읍 등에 참전탑이 있다.

     

    베트남전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야 할까? 베트남 정부도 한국 정부도 이 일을 들추길 꺼린다. 평화박물관은 호찌민의 베트남전쟁기념관과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의 베트남전 참전기념탑과 베트남의 증오비 사진을 모아 전시하는 것이다. 두 나라는 같은 사건을 여전히 다르게 기억한다. 두 기억은 어떻게 접점을 찾을까.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617.html#csidx486aca9e62387f9be4b0d39addd8227 onebyone.gif?action_id=486aca9e62387f9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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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w6614 2017.06.24 01:28

     

    참전기념비와 위령비, 그리고 부끄러움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2>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

     

    세계가 반전물결로 뒤덮일 때
    남한은 전시체제를 확립했다
    인도차이나에서 공산군 탱크가
    사이공·프놈펜에 가까워질수록
    유신정권은 이성을 잃어갔다

     

    미군 대신 5천명이 죽었지만
    그 와중에 일부는 부를 쌓았고
    참전군인 전두환은 정권을 잡았다
    이후 두 나라는 수교를 맺고
    전쟁은 빠르게 잊혀졌다
    그러나 베트남 어느 마을에선
    여전히 학살의 상처를 안고 산다

     

     

     

    1973년 3월20일 서울운동장에서는 파월개선장병환영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주월군부대 복귀 및 해체에 대한 국방부 일반행정명령 제143호’가 낭독된 뒤 주월한국군 사령관 이세호는 육사 동기인 대통령 박정희에게 주월한국군사령부기를 반납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 귀국신고식 및 해체식을 겸한 이날 대회에는 오색의 애드벌룬에 매달린 “월남에서 싸운 전공 총력안보 초석 되자” “이기고 돌아왔다”는 등의 펼침막이 나부꼈다.

     

    한성여고생들은 주월한국군의 전투 장면과 대민 진료 모습을 카드섹션으로 선보였다. 박정희는 “어제의 평화십자군이 오늘의 유신십자군, 구국의 십자군이 되게 하자”고 당부했다. 귀국한 파월장병들은 환영대회를 마치고 비가 오는 가운데 서울 도심 4㎞를 도보로 행진했다. 그로부터 2년 1개월이 지난 1975년 4월30일, 공산군의 탱크는 남부월남의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진입했고, 남부월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마침내 30년 전쟁이 끝난 것이고, 베트남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던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는 ‘월남 패망’의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수천개의 김일성 허수아비가 불타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고 공산군이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이나 프놈펜에 몇 ㎞까지 육박했다는 보도가 거의 매일 신문에 실리던 1975년 초반은 한국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다. 베트남뿐 아니라 크메르(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에서 공산군의 탱크가 사이공이나 프놈펜에 가까워질수록 유신정권은 이성을 잃어갔다. 4월8일에는 전날 격렬한 데모가 있었던 고려대학 한 학교만을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휴교령을 내리고 군대를 진주시켰다.

     

    대법원은 이날 인혁당 사건 등 관련자 38명에 대한 상고심 판결에서 도예종 등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4월8일치 기사 바로 밑에는 공산군이 ‘사이공 11㎞ 육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형 확정 18시간 만인 새벽 4시부터 사법의 탈을 쓴 그 새벽의 연쇄살인을 시작했다.

     

    4월17일 크메르 정부는 공산 크메르 루주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4월30일 사이공이 함락되자 이웃 라오스의 좌우 연립정부에서 우파는 사실상 몰락했다.(인민공화국 정식 수립은 12월3일) 인도차이나에서 도미노 이론이 현실로 나타나는 가운데 박정희는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반대를 금지했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자행할 때는 결코 위기상황이라 할 수 없었지만, 1975년은 분명 분단 한국에 치명적인 위기상황이 존재했다. 없는 위기도 만들어 악용해온 박정희는 이런 위기상황을 자신의 권력강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에 ‘전시체제’가 수립되었던 것처럼, 1975년의 한국에도 전시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유신정권은 전시체제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사회안전법안> <민방위기본법안> <방위세법안> <교육공무원법개정안> <전파관리법개정안> 등 이른바 5대 전시입법안을 강행처리했다.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해 살아남은 박정희의 비전향자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이 강하게 반영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마쳤어도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을 재판 없이 계속 가둬두는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또 박정희는 1975년 6월7일 ‘자주국방과 총력안보’의 기치 아래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공포하여 전국 대학과 고등학교의 학생회를 해체했다. 학원에 수립된 전시체제를 상징하는 학도호국단의 사단장 생도나 연대장 생도는 학생들이 뽑는 것이 아니라 총장이나 교장이 임명했다.

     

    1975년 5월과 6월 한국 사회에서는-심지어 휴강중인 대학가에서도- 안보궐기대회와 김일성 화형식이 도처에서 열렸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소리 높이 외치는 가운데 전국에서 아마도 수천개의 김일성 허수아비가 불에 탔을 것이다. 이러한 안보궐기대회의 절정은 5월10일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린 ‘총력안보 서울시민 궐기대회’였다. 무려 140만명(고등학생이었던 나도 물론 동원되었다)이 참가한 이 궐기대회에서는 남녀 20여명이 단상으로 나와 “김일성 야욕 분쇄하자”는 등의 혈서를 썼다.

     

    이런 안보궐기대회 열풍을 문제 삼은 것은 남장 여자로 유명했던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이었다. 김옥선은 10월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전쟁심리 조성, 사이비민주주의 제도, 안정에 대한 약속 등이 강권통치의 특징이라는 독일의 정치학자 프란츠 노이만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최근의 안보궐기대회를 관제 데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국을 뒤흔든 각종 안보궐기대회, 민방위대 편성, 학도호국단의 조직, 군가 보급, 부단한 전쟁 위협 경고 발언,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등은 국가안전 보장을 빙자한 정권 연장의 수단”일 뿐이라며 박정희의 1인 통치를 정면 비판하자 국회에는 난리가 났다.

     

    공화당과 유정회가 김옥선의 제명을 추진하자 김영삼은 김옥선을 보호하지 않고 사퇴를 종용했다. 남장 여걸 김옥선이 눈물을 머금고 사퇴하자 신민당에는 예리한 면도날을 담은 항의 편지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잠시 주춤했던 장발단속은 ‘월남 패망’과 더불어 급격히 강화되었다. 문무 양쪽에서 일본식 황민화 교육을 제대로 받은 박정희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사고방식을 아주 못마땅해했다. 유신시대 국민의 외모와 사상은 당연히 국가의 통제 대상이었다. 유신공주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처음 다룬 안건이 경범죄처벌법 시행령이라는 사실은 오늘에까지 드리운 유신의 짙은 그림자를 절감하게 한다.

     

    과다노출을 단속하겠다는 것이 꼭 유신시대의 미니스커트 단속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고, 국내외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 대통령이 되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국민에 대한 통제였을까? 그 점에 관한 한 정녕 유신의 적통을 이은 정권임에 틀림없다. 주월한국군이 유신의 십자군, 구국의 십자군이 되라는 박정희의 말을 받아 최태민이 구국십자군을 만들었고, 십자군 알바단은 박근혜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니, 십자군 원정은 참 오래 계속되고 있다.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왜 비문이 없나

     

    베트남 파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한국 사회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베트남 파병은 이남보다 이북에 더 극단적인 변화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1967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이북의 유일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이나 울진 삼척에 대규모 무장공작원을 파견한 무모한 공세는 김일성판 베트남 파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쿠바를 떠나기 전 체 게바라는 “둘, 셋, 보다 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를 베트남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김일성은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외교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미군을 대신하여 5000명의 젊은이를 머나먼 이국땅에서 희생시켰지만, 한-미 관계는 베트남 파병을 거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전세계가 반전평화의 물결로 뒤덮였던 1968년을 한국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냈다. 제3세계에서, 아니 제3세계뿐만 아니라 미국의회에서조차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이 ‘용병’ 소리를 들어야 했던 상황에서 이른바 비동맹국가와의 관계 또한 파탄을 면할 수 없었다. 1975년 8월의 비동맹 외상 회의에서 남북이 같이 비동맹회원국으로 가입을 신청했다가 북의 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남의 신청은 거부당한 일은 한국 외교 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노태우·정호용·황영시·유학성·장세동·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었더라면 국민배우 안성기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아역배우 생활을 청산한 안성기는 열심히 공부하여 그 당시 잘나간다던 외국어대 월남어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가 군복무를 마쳤을 때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갈데없는 처지가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영화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에 다녀왔지만, 집권 후 군 출신들의 단체를 재향군인회로 통합하면서 월남참전전우회 등 38개 단체를 해체했다.

     

    한때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의 흥겨운 가락과 같이 선망의 대상이던 베트남 참전군인들은 국가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빠르게 잊혀졌다. 한국군의 철수 당시 한 신문은 “우리 사상 최초의 해외파병을 기록한 주월국군의 승전보는 전화에 시달린 베트남인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십자군의 신화로 남을 것”이라고 했지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남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오랫동안 베트남에서도 ‘잊힌 전쟁’이 되고 말았다.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이 미국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그 ‘용병’이었던 한국군의 존재는 무시하거나 아예 알지 못하고 있다.

     

    단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중부지방은 사정이 다르다. 그곳 사람들에게 거의 50년 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여전히 살아있는 고통과 슬픔을 주고 있다. 바로 지난 3월5일 청룡부대에 의해 135명이 학살당한 하미마을의 45주년 위령제에 참석한 필자는 학살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는 50년의 세월도 어림없게 짧은 기간이란 것만 절감했다. 하미마을에는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라는 단체가 돈을 내어 만든 비문 없는 위령비가 서 있다. 비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쓴 비문을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 쪽에서 문제 삼아 갖가지 압력을 가해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주민들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베트남 정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비문 자체는 수정할 수 없다면서 비문을 커다란 연꽃무늬 돌로 덮어 버렸다. 진실은 또다시 묻혔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진실은 마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어떻게 그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죠?”

     

    일부는 베트남에서 돈도 벌고 출세도 했지만, 훨씬 더 많은 참전군인들은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 뮤지컬 <블루사이공>에는 김병장이 월남에서 쏜 총알은 그의 일생을 꿰뚫었다라는 기막힌 대사가 나온다. 비단 고엽제가 남긴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참혹했던 전쟁의 섬광 같은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이 들어가는 마음을 후벼놓는다. 1999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거의 매주 <한겨레21>에 실린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그의 대한 사죄운동인 ‘미안해요 베트남’에 관한 기사는 참전군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용병과 학살이라는 비난에 맞서 그들은 자신들의 베트남 참전을 정당화하는 기념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지원받아 전국 곳곳에 100개가 넘는 참전기념비가 최근 5~6년 사이에 들어섰다. 희생된 병사들을 기리는 추모비나 위령비가 아니라 베트남 참전 자체를 ‘평화의 십자군’이자 국위선양이요 조국번영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찬양하는 거대한 기념물을 곳곳에 세운 것이다. 그 결정판은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훈련을 받았던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건립된 베트남 참전용사 만남의 장이다. 이곳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베트남 해방전사들이 사용했던 구치터널을 관광자원이라고 재현해놓은 곳이다.

     

    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한국군이 베트콩으로 보이는 두 명의 베트남 사람들을 무릎 꿇려 놓고 총을 겨누고 있는 실물 크기의 인형을 세워놓았다. 이 인형들은 그 후 누군가가 부숴버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입장을 바꿔놓고 일본이 과거 조선에 출병한 병사들의 훈련지에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기념관을 짓고 오늘의 일본의 번영을 가져온 초석이 된 사건이라고 찬양하면서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인에게 총이나 칼을 겨누고 있는 일본군을 세워 놓았다면 우리의 심경은 어떨까?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은 참 가난한 나라였다. 그 무렵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유창순(나중에 전경련 회장과 국무총리를 역임)은 <사상계> 좌담에서 파병을 하면 다리도 놓을 수 있고, 항만도 건설하고, 뭐 좀 생기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민망해하면서 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돈을 버는 일은 미래의 전경련 회장에게도 차마 할 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이 아주 부자나라가 되어 다시 이라크 파병을 논할 때, 국익이란 말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직후에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는 하늘에 닿을 한국군의 죄악을 천대에 걸쳐 기록하리라는 ‘증오비’가 섰다. 조금 세월이 지나며 베트남 사람들은 증오비 대신 위령비를 세웠다. 베트남과 한국은 1992년 수교를 했고, 지금 수많은 베트남 새댁이 한국에 와 살고 있지만, 한국과 베트남의 거리는 참전군인들이 한국에 세운 기념비와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참사의 현장에 세운 위령비만큼이나 먼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살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부모도 잃고 두 눈도 잃은 어느 피해자의 삶을 다큐로 찍고 있던 베트남의 한 기자는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한국 사람들은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가 있냐고, 그러면서 베트남과 한국이 친구가 될 수 있겠냐고! 일본도 A급 전범 기시의 손자를 수상으로 뽑지 않았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정말 미안해요 베트남.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281.html#csidx1f4f251473cc51d96a690f9f8afaf7a onebyone.gif?action_id=1f4f251473cc51d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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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9 유시민이 살면서 가장 분노한 두가지 "이명박과 세월호" 크리스찬 2017.06.10 76
1078 하나 되게 하옵소서. 하주민 2017.06.09 92
1077 6년 전 민주당 도청의혹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전모 2017.06.08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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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 최고의 감동 추념식 시선강탈.. 장사익 공연과 이보영 추모시 낭송 [제62회 현충일 추념식] 상주 2017.06.06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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