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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3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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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심희순의 첩 "임금이 창녀 치맛자락을 잡다니요?...신하와 동서가 되려고 하십니까?"일갈

▶ 신문이 엿새 동안 대서특필한 조선기생의 상소문

1972년. 뮌헨올림픽이 테러로 중단되고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뒤숭숭한 시절에, 한 조간신문이 조선 기생 이야기를 무려 엿새에 걸쳐 실었다. 

헌종 대에 참판과 대사간을 지낸 심희순의 첩이 된 용천기생 초월(楚月, 1832-?)이 그 주인공이다. 이 깜찍한 ‘소녀’는 임금에게 무려 2만1천여 자에 달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신문은 안동김씨 용암(蓉庵) 김병시(1832-1898, 구한말 영의정, 일제 때 중추원 의장을 지냄)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상소문 필사본을 입수해서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정보기관에서 이 자료를 공개한 용암의 방계 자손인 김병호씨(현재 89세, 대전충남 향토사연구연합회장)를 찾아와 상소문을 건네줄 것을 요구한다. 조선시대 기생 상소문을 왜 당시 권력이 급히 챙겨갔을까? 

그 내용이 너무나 신랄하고 통렬해서 ‘조선’의 국정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정부(이 해 시월유신이 선포되었다)의 현실을 비판하는 듯한 착시(錯視)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정권이 불편하게 생각할 만큼 대담한 쓴소리를 내뱉은 기생 초월. 대체 무슨 얘기를 뱉었기에?

 

조선의 15세 기생 초월. 도끼를 옆에 놓고 헌종임금에게 당찬 상소를 올렸다. "거, 연애질 작작하십시오."



▶ 건방지고 오만했다는 평양 용천 기생 출신

나는 초월을 조선 최고의 기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황진이나 매창처럼 심심풀이 야담집이 즐겨 다루지도 않았고 역사적인 언급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여인은,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이다. 그녀는 스스로 15세라고 밝히고 있고, 동암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기로 있던 그녀를 첩으로 삼아 서울로 데려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평양 용천기생이라고 말한다. 평양과 용천은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두 지역을 함께 지칭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용천기였던 그녀를 심희순이 평양 기방에 잠시 머물게 했다가 거기서 다시 빼내온 게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용천이라는 곳은 대대로 걸출한 인물들이 쏟아진 곳이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나, 장기려 박사, 함석헌 선생이 이 지역 출신이다. 대담하고 고집있는 성품은 초월에게도 고스란히 있었던 듯 하다.

상소에서 밝힌 그녀의 이력은 이렇다. 초월은 유복자로 태어났고 생후 1년만에 모친을 잃어 천애의 고아가 된다. 그녀는 외사촌 집에 맡겨져 설움을 당하다가 10여살이 된 뒤에 관기로 입적한다. 그녀는, 천출이라 누구나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路柳墻花)가 되었지만 손님들에게 행실이 건방지고 오만하였다고 말한다. 말이 패악(悖惡)스러웠고 자연을 벗삼아 술을 마시고는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잊어왔다고도 한다. 기개를 지녔으나 그것을 제대로 펴지 못한 어린 기생의 가슴 속에 들끓는 번뇌는, 그녀의 표정에 기묘한 그늘과 알 수 없는 경멸을 드리웠을 것이다. 그것이 평양을 찾은 사내들을 더욱 매료시켰는지 모른다.

그녀의 응어리진 생각과 천재적인 통찰력과 타고난 의기(義氣)는 그러나, 뜻밖의 행운을 맞아 터져나올 기회를 맞는다. 서장관 심희순의 눈에 들어 한양의 대갓집에 어린 마님으로 들어앉은 것이다. 그녀는 달라진 팔자를 이렇게 표현한다. 

▶ 헌종임금이 신하의 첩에게 숙부인 작첩을 내리다

“고대광실에서 살게 되고 붉은 난간과 그림같은 누각 속에 노닐며 비단 옷과 장식을 온몸에 감고 바다와 땅의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거처와 잠자리와 출입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끼던 신하에게 첩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헌종은 그녀에게 숙부인(淑夫人, 정3품 당상관의 적실 아내에게만 내리는 작호) 직첩을 선물한다. 왕이 내린 붉은 패를 받던 날 그녀는 모골이 송연하고 먹고 자는 일이 불안했다고 말한다. 삶이 이렇게 바뀌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런 ‘편법’이 거리낌없이 시행되는 것이 놀라웠다. 그녀는 말한다. 

“법전에는 사족(士族)의 딸에게만 내릴 수 있는 부인 직첩이 천출인 저에게 내린 것은 천번만번 부당하고 불가한 일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노는 계집이었고 나라에 한 치의 공도 없는데 직첩을 내려주시니 어찌 감당하오리까. 전하께서 재삼 생각하시어 이것을 거두어주소서.”

▶ 이게 죄라면 나를 찢어죽여 주소서

2004년 충주의 유림들이 광화문 앞에서 도끼를 올려놓고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수도이전으로 차별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는 시위였는데, 죄가 있다면 목을 쳐달라는 조선시대의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재현한 것이었다. 

초월도 조선 임금 앞에 나아가 도끼상소를 올린 여인이다. 

그녀는 이 지부상소에 한술 더 떠서 거열(車裂)을 요구한다. 

“엎드려 원하노니 신의 죄를 결정지어 네 수레에 팔다리를 매어 찢어죽이는 형벌을 내려 종로 큰 길 위에 조리 돌려 만 사람이 한 마디로 죽여 마땅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한 뒤에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하여 만 사람의 칼머리 아래에 놀란 혼이 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초월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봐야할까. 치기 어린 기생출신의 여인이 부린 만용이라고 봐야할까. 아니면 작심을 하고 그간 보아온 적폐(積弊)를 바로잡으려고 팔걷은, 소녀의 충정으로 봐야할까. 갑자기 들이닥친 호강을 일거에 뒤엎을 이런 말을 내놓은 그녀의 심중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백마 탄 왕자’임에 틀림없었을 남편 심희순에 관해 독설과 야유를 퍼붓는 대목은, 상소문을 읽어내려가던 헌종의 입에 웃음을 자아내게 했음이 틀림 없다. 남편 흉을 보려면 이쯤은 봐야 속이 시원하지 않을까.

“제 남편 희순의 죄를 아뢰겠습니다. 재상의 손자이고 선비의 아들인 그는 사람됨이 미욱하여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단히 타인을 냉대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옛글을 배우는 데에도 힘쓰지 않아서 보리와 콩을 구분하지 못하는 숙맥이요, 고기 어(魚)자와 노나라 노(魯)자도 헷갈릴 만큼 무식합니다. 지각이 없고 소견이 좁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밥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릇에 담긴 밥이 높으면 생일인 줄 겨우 알고 동녘에 해가 뜨면 날이 가는 줄 겨우 알 뿐입니다.

▶ 제 남편은 무식하며 밥통이나 다름없습니다

심희순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 애제자였다. 추사가 심희순을 칭찬한 편지와 곁들여 읽으면 흥미로울 것이다. 

“제자(심희순)가 보내주신 대련 글씨는 결코 압록강 동쪽(우리나라)의 기운과 품격이 아닙니다. 청나라의 김농이나 정섭처럼 하늘의 기세가 흘러 꿈틀거리며 아주 교묘한 솜씨라 할지라도 이를 넘어설 수 없으니, 나(추사)같은 사람은 육십년 동안 전력해서 한 두 가지는 얻은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에도 이것을 보니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알 수 없구려.” 

실로 어마어마한 칭찬이다. 물론 레토릭이라는 것은 느껴지지만 노인 추사가 얼마나 심희순의 재능을 높이 보는지는 짐작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그의 첩인 초월은 1년도 채 같이 살아보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심희순의 다른 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사람을 깔보는 태도에 대한 지적은, 아마도 (그가 이 상소문을 볼 수 있었다면) 희순을 뜨끔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무식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15세 어린 첩의 귀여운 치기가 느껴져서 실소(失笑)했을지도 모르겠다. 초월의 남편 흉보기는 계속된다.

▶ 세상 아픔도 모르고 국록만 축내는 내 남편 만 번 죽여주십시오

“이같은 위인이 마음둔 데는 높아 겨우 20여세에 과거의 등용문에 오르고 1백일도 못 차서 대간과 옥당에 올라 천은이 망극함에도 다만 국록만 탐내고 부모가 길러준 은혜는 돌보지 않으면서 축첩만 일삼아 집안에 음률이 그치지 않고 건달가객과 벗삼아 낭자하게 술판을 벌여 밤낮을 가릴 줄 모릅니다. 콧방귀나 텅텅 뀌고 팔뚝을 쓱쓱 내밀며 큰소리나 치는 호기만 드높아, 옆에는 보이는 사람이 없고, 술잔이나 들면 방자하여 망측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들이에는 준마를 타고, 가벼운 비단옷을 들쳐입어 행색이 휘황찬란하니 거리의 시정배와 천한 백성, 가난한 선비들이 부러워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가락질을 하며 어찌 저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재상 심상규의 손자로 벼슬이 하늘처럼 높으니, 아무도 감히 당해낼 수야 없지만 나라가 위태로운데 세간의 질고(疾苦)도 도무지 모르고, 크고 작고 무겁고 가벼운 일과 옳고 그르고 길고 짧고 모나고 둥글고 굽고 곧고 먼저 해야할 일에 대해 전연 몰지각하니 국록을 축내는 큰 도적이 비단 이 한 사람이 아니고, 온 조정이 다 이같으니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하겠습니까...저의 남편의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하도 커서 어떻게 처치해야 될지 알지 못하와, 천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으며, 천 번 칼로 찌르고 만 번 귀양 보내어도 못다할 듯 하온데 어찌하리까.”

천 번 칼로 찌르고 만 번 귀양을 보내도 못다할 것 같다는 말은 진심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만난지 1년도 되지 않았고 막 사랑이 돋아났을 열다섯 살이 그럴 리 있겠는가. 그녀는 그 뒤에 왕께서 혹여 용서를 하신다면 삭탈 관직해서 시골로 내쳐서 10년을 기한으로 두문불출 책을 읽도록 조치해달라고 말한다. 그 10년의 속셈에는 너무나 잘나고 바빠서 얼굴 뵈기도 어려웠던 낭군을 살뜰히 모실 꿈도 숨겨놓았을 것이다. 상소문의 초두를 극렬한 남편비방으로 잡은 것은, 그 뒤의 살벌한 시폐(時弊) 고발의 비장한 분위기를 높이기 위한 나름의 센스였을 것이다. 그녀의 정확한 현실 인식과 사회 각 방면에 대한 설득력있는 사례들은 이 상소문이 혼자서 쓴 것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조선 말기 매관매직, 환곡, 군포, 송사, 암행어사, 지방비서관들, 교졸의 비리가 적나라하다. 아마도 그녀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지인들에게서 상당한 취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덟 살 때 용천에서 본 흉년의 실상은 아마도 그녀의 기억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이리라.

▶ 왕의 적폐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생질 작작 하소서

“주리고 목마른 것이 뼈에 사무쳐 얼굴이 퉁퉁 붓고 가죽이 누렇게 들떠 염치 불구하고 문전걸식을 하여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가 없습니다. 길에는 굶어죽은 주검이 엎어져있고 들과 구렁에는 송장이 널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때에는 간혹 인심이 순박하고 두터운 곳이 많았는데 요즘은 풍년을 당해도 세태가 각박합니다.” 이 대목에서 초월은 있는 자는 더욱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해지는 빈익빈부익부를 성토하고 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번 글에서는, 초월이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목들을 모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임금의 술버릇을 까발린다. “전하께서는 밤늦게 술을 마셔 눈이 게슴츠레하고 옷고름을 매지 못할 만큼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익선관도 벗어버리고 왼손으로 창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난간에 기대 서서 ‘사대부집 조선 대사마 대장군 여기 있다’라고 노래를 부르시니 전하의 출신이 사대부 집안에서 난 분보다 못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라고 쏘아붙인다.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가 비명(非命)에 간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였던 순조는 왕위에 피로감을 느낀데다 그의 아들 효명의 야심과 지혜를 높이 사서 대리청정을 맡겼다. 효명은 대대적인 왕권강화와 조정 권력 판도의 물갈이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다가 3년여 만에 죽음을 맞는다. 그 뒤 잠깐 순조가 다시 왕위를 맡았다가 돌아가고 여덟 살인 헌종이 등극한다. 그게 1934년이었다. 이런 기억들은 헌종에게, 왕이라는 신분이 지닌 불안과 질곡을 깊이 느끼게 했을 것이다. ‘차라리 사대부가 되어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었으면’ 하고 동경했으리라. 그런 마음이 저 술버릇에 우러난 것이 아닐까. 이런 궁궐내의 소문들은 밖으로 알려져서 왕을 우스개거리로 삼는 빌미가 되었다. 초월은 그걸 감히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 운희 그년과 동침하면 신하 남병철과 동서가 되는 꼴입니다

초월은 술 취해서 왼손으로 부여잡았다는 창녀의 치맛자락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평양기생이었던 운희(雲喜)였다. 초월도 평양에 머물렀던지라 운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를 한 마디로 ‘만고의 요물’이라고 말한다. 봇물같은 욕설이 쏟아진다. “그년은 말이 간악하고 능란해서 겉과 속이 달라 구미호나 다를 바 없고 말쑥한 때깔과 구슬같은 얼굴 향기로운 모습에 살포시 팔자 눈썹을 찡그리고 앵두같은 입술이 반쯤 벌려져 석류같이 이를 내보이며 천태만상의 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자가 경계했던 교언영색(巧言令色, 말 잘하고 예쁜 얼굴) 그대로다. 초월은 평양서 그녀를 만났을 때 훈수를 해줬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지 말고 분수를 지켜 규중에서 자식이나 잘 길러라. 그러지 않으면 비명에 죽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서울의 서방을 만나 떠나는 처지이면서 이런 어드바이스를 하다니...듣는 운희는 콧방귀를 뀌었음직하다. 여하튼 운희는 그 말을 싹 무시하고 뒤에 궁궐로 들어와 헌종의 총애를 듬뿍 받고있는 중이다. 그런데 초월은 여기서 치명적인 말을 내뱉는다. 

“전하는 잘 모르시겠지만 운희는 남병철이 좋아하던 나머지이니 전하와 남병철이 동서가 되는 셈입니다.”

남병철(南秉哲, 1817-1863)이 누구이던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며 아내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이니 당시 안동김씨를 업은 실세였다. 아우 남병길과 함께 반대 정파에 속했던 추사 김정희를 사부로 모셨고 추사의 실사구시론을 학문 영역에 실천하였다. 추사의 완당전집에는 남병철에게 보내는 편지가 5편이 있고, 아우 병길은 완당척독(편지글 모음)의 서문을 썼을 만큼 추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남병철은 규장각에 있으면서 서양의 과학서들을 연구하였고 천문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기생 운희의 전 서방이었고, 헌종이 그 다음 서방이라는 소리다.

▶ 초월의 상소에도 남병철은 별 탈 없었는데

추사가 남병철에게 보낸 편지에는 헌종이 쓴 글씨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마도 남병철이 왕에게서 받은 것을 품평해달라는 뜻으로 추사에게 보냈을 것이다. 추사는 헌종의 글씨를 보고 “열백번 살필 수록 아득히 천년을 뛰어났으니 어찌 한 가닥 압록강 이내에 그치오리까”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추사의 이런 평가를 남병철은 다시 왕에게 전했으리라. 이럴 만큼 헌종과 남병철은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 ‘얄궂은 동서’가 된 셈이라는 이 상소가 남병철을 곤란하게 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소에 붙였을까.

초월은 이어서 왕비의 마음고생에 대해 살피고 왕을 꾸짖는다. “남자는 장가 들고 여자는 시집 가서 정답게 사는 것이 군자나 소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전하께서는 홍 중전(紅 中殿)을 죄없이 홀대하니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중전은 덕행이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임사와 같고, 친정 부모를 떠나 깊은 궁궐로 들어와 전하를 섬기고 아랫사람을 거느림에 예절을 다 갖추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멀리 하십니까...중전은 식음을 전폐하고 어두운 방에 길게 누워 스스로 죽으려 하나 죽지도 못하고 있사옵니다. 부부인(중전의 친정모친) 안씨가 천지신명과 부처님 전에 전하와 중전이 화합해 동궁세자를 탄생하게 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빌고 있는 판이니 어찌 뼛속에 사무치지 않습니까.” 궁궐의 사정에 대해 이토록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항간의 소문을 들은 바도 있었겠지만 심희순에게서 들은 바가 많았기에 가능했으리라. 신하의 첩이 나서서, 왕에게 끼고 있는 기생을 당장 내다버리고 왕비와 합궁하여 세자를 낳으라고 종용하는 판이니 기이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 이번 전쟁게임은 뭐지? 병자호란이야? 임진왜란이야?

헌종은 궁궐 안에서 군기(軍紀)를 세우는 뜻으로 창경궁의 춘당대(春塘臺) 일대에서 병사들의 편을 갈라 모의 전투를 했다. 이 또한 왕권의 불안감이 드러난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조선 초기 이후 문약(文弱)으로 흐른 조정의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은 왕의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궐 바깥으로 사냥을 가거나 하면 대신들이 마치 변고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뜯어말리고 간쟁을 했다. 그러니 아쉬운 대로 궁궐 안에서 전쟁놀이를 펼쳤던 것이다. 초월은 이 일을 잘근잘근 씹는다. 

“몰지각하고 분별없는 풋나기들을 총위영 교졸로 뽑아 한 달에 대여섯 번씩 진 치는 놀이를 하십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대장이 되고 서의순을 부장으로 삼고 이흥식으로 중군을 맡게 해서 깃발과 창검이 휘황찬란하게 번쩍이고 말 달리는 소리와 다투는 소리가 궐문 밖에까지 들립니다.” 이렇게 말하고난 뒤 그녀는 민성(民聲)을 전해준다. 그런데 백성들이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이번엔 전하께서 이기셨다는군. 근데 무슨 전쟁을 한거지? 병자호란이야, 아니면 임진왜란이야?” 왕정시대에 군주에 대한 비웃음을 이토록 신랄하게 왕의 코앞에 들이댄 사례가 또 있을까.

▶ 가난한 여자 둘 있는데 왕이 중매나 좀 써주세요

왕에게 어퍼컷 연타를 날리고 사회 부패상을 사정없이 고발한 이 맹랑한 소녀는, 상소의 말미에, 편지에서 쓰는 것처럼 ‘p.s'를 적는다.

“그런데 남대문 밖 한림원에 두 처녀가 있는데 언니는 나이가 마흔이나 되고 동생은 서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대신 김 아무개의 현손녀인데 조실부모하고 남자 형제나 일가친척, 외가의 겨레붙이도 없어서 무너진 세칸 초가집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 채 살고 있는데 시집도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혼처를 주선하게 해주시면 혼수는 신이 마련해보겠습니다.”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여인이다. 수레로 찢어죽이는 형벌을 각오하고 하는 말들의 끝에, 왕에게 ‘소개팅’을 해달라고 하지 않는가. 이 애교어린 마무리는 앞에서 했던 심각한 발언들을 슬쩍 물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상소문에 들어있는 치열하고 깊이있는 현실 인식과 다양한 취재능력과 생생한 글쓰기 솜씨가, 과연 열다섯살 기생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초월이란 여인에 대한 연구와 상소문 원문에 대한 감정과 고증 작업이 더 필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왕조시대의 언로에 대해 다룬 ‘상소(이전문 역, 도서출판 세기, 1997년)는 두 권에 걸친 다양한 조선 상소문 중에서 초월의 글을 맨 앞에 싣고 있을 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 초월의 상소에도 남편 심희순은…

심희순의 첩 초월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심희순은 상소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이후에도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초월에 대한 후일담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 상소문이 왕에게 접수된 것이었다면, 왕은 그 자리에서 그것을 일소에 붙였을 것이다. 군주의 도량으로 어린 아녀자의 비좁고 격한 의견을 용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나머지 생은 그저 한번의 ‘주의’만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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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 우리 눈 좀 똑바로 뜨고 한반도의 상황을 변증법적 역사관으로 들여다보자. 2 김원일 2017.05.14 154
1043 이 여자가 헬조선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유 김원일 2017.05.14 107
1042 12000 스다디온 1 지경야인 2017.05.14 219
1041 서울의소리 이명박 응징취재...이명박집 '발칵 뒤집다.' 적폐청산 2017.05.14 133
1040 이제부터 시작 로망 2017.05.14 56
1039 요즘 나는 2 소망 2017.05.13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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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다시 불을 지르며-동성애 2 file 김균 2017.05.13 249
1036 근본 신분바로알기 2 하주민 2017.05.13 113
1035 팩트체크 후에도 되풀이된 대선후보의 거짓말 팩트 2017.05.12 102
1034 문재인, 식물 대통령 되는 건 시간문제 5 로망 2017.05.11 302
1033 새정부 대북접촉 첫 승인여부 검토...남북 교류 물꼬 트나 (사)평화교류협의회[CPC] 2017.05.10 53
1032 해금찬양연주 : '목마른 사슴' , '시편 8편'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눈장 2017.05.10 102
1031 류효상의 신문을 통해 알게된 이야기들 (5월 10일) 새날새아침 2017.05.10 83
1030 각종 방송사들 문재인 홍은동 자택으로 이동시작!!!! 안봐도 비데오 2017.05.09 105
1029 '너, 이놈, 계집애들' 막말 준표..그나마의 '격조 보수'도 허무나 깡패들의행진 2017.05.09 102
1028 내일 있을 한국의 대선을 바라보는 시선들 1 김균 2017.05.08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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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홍준표,, 자기 장인에게 "영감탱이 한 푼도 안줘"막말, 26년간 집도못오게해? 자유당 2017.05.08 93
1025 사랑의 찬가 (뜌엣) : [ 손준호&김소현 ] , [ 윤형주&박인희 ] 2 눈장 2017.05.07 99
1024 개헌론자들에 대해 유시민 작가의 일침 한국 2017.05.07 55
1023 제 19대 대통령 선거 예언 향화사 황순연 보살 - 왜 정치인들은 선거철에 점술가를 찾는가 별이 2017.05.07 113
1022 줏어온 글 미래 기별 2017.05.07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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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먹는 거 가려가며 오래 살든, 아무거나 먹다가 일찍 뒈지든 그건 알아서 할 일이고, 어쨌든 심상정 후보를 찍어야 하는 이유. 1 김원일 2017.05.07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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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 [평화의 연찬] 정치와 종교 (김한영 - 평화교류협의회 상생공동대표) (사)평화교류협의회[CPC] 2017.05.05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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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朴, 문화계 겨냥 "진돗개처럼 물면 살점 떨어질 때까지" 언덕에서 2017.05.04 88
1015 ‘노무현에 막말·욕설’ 박근혜도 웃으며 봐놓고… 언덕에서 2017.05.04 84
1014 드라마 '모래시계 작가' 송지나 “‘모래시계 검사’가 홍준표? 불쾌… 그만 써달라” 민낯 2017.05.03 97
1013 [건강한 당신] 늙어서 그런가? 힘도 빠지고 다 귀찮아 … 고기 드시면 좋아져요 행복한삶 2017.05.03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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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장경동 목사, 선거법 위반 벌금 150만 원 so 2017.05.02 224
1010 기독자유당 "홍준표 지지" so 2017.05.02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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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안식일 준수자 전체가 편협하고 광신적인 사람으로 취급받게 하는 사람 무명 2017.05.01 151
1007 피곤한 일요일 교회의 목사 설교 평교인 2017.04.30 220
1006 [소셜라이브 하이라이트] 손석희X박근혜 '레전드인터뷰' 기자 2017.04.29 83
1005 [프레임 전쟁] 3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수사 위기를 채동욱 ‘혼외자식’ 보도로 막아낸 조선일보, 진실 은폐한 ‘내부자들’ 여전히 활개 1 틀거리 2017.04.29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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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세월호 리본 구름은 합성이 아니라 진짜였다 하나님의눈물 2017.04.27 119
1002 이분법에 능한 사람들이 오히려 상대를 이분법으로 논한다 1 file 김균 2017.04.26 260
1001 옛날이야기 한 토막 2 file 김균 2017.04.25 405
1000 돈있고 권력있지만 영혼이 없는 사람들의 횡포 장면 1 켜켜이 2017.04.24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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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음식을 가리지 말고 먹어라~ 내가 십자가로 개혁하여 폐지시켰느니라. 눈장 2017.04.23 144
997 먹는 거 가지고 레위기, 엘렌 어쩌고저쩌고 지지고 볶는 얘기 다음 주부터... 젠장. 1 김원일 2017.04.23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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