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지 않는 자’가 가장 잘 속는다

by 김원일 posted Oct 03, 202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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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않는 자’가 가장 잘 속는다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ㅣ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오늘날은 엄숙한 공적 공간, 자크 라캉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의 권위가 점차 쇠퇴하고 있는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다. 백신 접종을 인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보면 향수 어린 마음으로 레닌주의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민주적 사회주의에서는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지만, 결정이 내려지면 모두 그에 복종해야 했다. 이는 계몽에 대한 칸트의 정식과 일맥상통한다. ‘복종하지 말고, 사고하라!’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 사고를 자유롭게 말하되, 결정에 복종하라!’의 태도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결속이 맺는 관계를 볼 수 있다. 백신을 접종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자유지만, 백신 접종을 거부한 개인은 실질적으로는 타인의 자유뿐 아니라 자신의 자유까지 제한하고 만다. 백신을 맞아야만 다른 사람과 일상적인 방식으로 어울릴 수 있는 자유를 훨씬 높은 정도로 행사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가 실질적인 자유가 되려면 규칙의 규제를 받는 사회적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이 문명화된 방식으로 행동하고, 나를 공격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처벌받을 것이라는 합리적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을 바꿔야 하는 시기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규칙의 영역이 있기에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헤겔은 추상적 자유와 구체적 자유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구체적 자유가 아닌 추상적 자유는 실제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하며 자유가 아닌 그 무엇으로 변한다. 소통의 자유를 생각해 보자. 타인과 말하고 소통할 자유를 누리고자 할 때, 정해져 있는 언어의 규칙에 복종하지 않고는 타인과 소통할 수 없다. 언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편견의 산물이며, 특정한 사고를 표현하는 데는 부적절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고가 언제나 언어 안에서 언어와 함께 발생하는 한, 진정으로 사고하고 타인과 소통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규칙에 복종해야 한다.

 

공적 공간의 붕괴가 가장 심각한 곳은 미국이다. 유럽에서는 건물의 지반이 되는 층을 0층으로 셈하고, 그 위층을 1층이라고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1층부터 세기 시작한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유럽에서는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는 지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반면, 근대 이전의 역사적 전통이 부재하는 미국에서는 과거를 삭제한 채 모든 것을 자신들이 직접 제정한 자유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 0부터 세는 법을 배우면 문제가 해결될까? 문제는 0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재된 적대와 모순이 가로지르는 이념적 헤게모니의 공유 공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지반을 무시하면 더 강력한 형태의 대타자가 등장하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혼동할 수 있다.

 

어떤 라캉주의 지식인들은 ‘가짜 뉴스’의 시대에는 대타자가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대타자가 더 강력한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과거에는 외설의 공간과 공적 공간이 나뉘었다. 그리고 외설의 공간과 구분되는 엄숙한 공적 공간이 대타자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제 공적 공간은 외설의 공간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가짜 뉴스와 루머와 음모이론이 유통되고 교환되는 바로 그 외설의 공간이 지금의 ‘공적’ 영역이 되었고, 새로운 대타자가 되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다. 과거에는 뻔뻔한 공적 외설이 전복으로 기능하며, 주인의 지배를 약화시켰다. 대안 우파들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외설이 공적 영역에서 폭발하고 있는 오늘날, 외설은 주인의 지배가 약화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형상이 의미하는 것은 다시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는 주인의 지배다.

 

번역 김박수연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3686.html#csidx8ae93897b11703a8e31956a1bab47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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