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복음을 깨닫고 영생과 구원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성경을 가지고 논하는 자리에서 그 성경으로가 아닌,
자신의 인간적 편견이나 감정에 근거하거나 기초하여
어떤 특정인과 그 단체(조직, 그룹, 교회 등)을 실명과 더불어
제목이나 글에 걸어 놓고 인신공격하는 행위는
저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예수와 전혀 상관도 없으며
저들이 주야장천 외쳐대는 성경의 복음과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십자가, 오직 사랑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폭거이며 일종의 폭력이다.
과연 누가 현대판 바리새주의로 염색된 자들인지는 이제 자명해졌다.
'나는 과연 바리새주의로 염색된 율법주의자인가?'에 대해
다음 글로 다시 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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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갈렙, 여호수아인가?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13:5) 가나안에는
그 수많은 이스라엘의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민 14:29) 중,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민 14:30)였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들은 어떻게 다른 10명의
정탐군들은 물론 그 수많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없었던 그런 영광과 특권과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약속한
하늘 가나안 땅에 우리 중 누가 과연,
아낙 자손들을 "능히 이기고" 들어 갈 수 있는가?
갈렙과 여호수의 생애와 믿음에 확실한 답이 들어 있다.
우리가 하늘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이기는 유일의 방법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서 이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 안에서"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롭다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
‘우리가 죄를 한번도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믿는 것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이 아니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는 믿음이
그들의 넉넉히 이기게 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애 속에서 육신이 약하여 짓는 크고 작은 죄들이
우리의 원수이거나 가나안 땅의 아낙 자손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영적 자만심이
우리의 원수이고 아낙 자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소망인 거룩함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결단코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열명의 정탐군들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정복한다는 믿음을 상실하고
‘그들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낙 자손을 무섭게 본 것이고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갈렙은 “여호와께서 ...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14:8)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의 근거는 “오직 여호와”(민14:9)였다.
그래서 갈렙은 10명의 정탐군들이 두려워 떨던 아낙 자손에 대해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 14:9)고
크게 외치며 “ 백성을 안돈시켰”(민 13:30)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가 [완전](完全)을 이야기할 때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재림교회 안에 완전론자들의 그동안의 논리는 분명하다.
그들은
첫째, 성경에 온전하라고 했다.
둘째, 예언의 신 곳곳에 우리는 생각까지 죄 짓지 않을 수 있다고 했고
예수님과 같은 죄짓지 않는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셋째, 이것은 가나안을 주리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과 같다.
넷째, 그런데도 우리가 죄짓지 않는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열명의 정탐군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다.
완전론주의자들은 위와 같이 믿고 주장하고 설교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죄 지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을
신신학에 물든 세속적인 사람으로 단정짓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나안에 땅의 아낙 자손은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마주치고 어쩔 수 없어서 묻혀지는
죄의 흙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노력‘인 것이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오직 예수로 말미암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이것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
소위 인간의 행위 중심의 완전론이야말로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없는 아낙 자손인 것이다.
그래서 완전론자들은 그들의 영적 중심이 '믿음'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으며, 어떤 이들은 시골생활, 채식과 같은 행위적인
것들이 믿음의 표준이 되고 때로는 그것들이 '자기 의'가 되어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가졌던 동일한 믿음을 행사하여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를 통하여’
나의 죄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나를 위해 지금도 간원하시는
대언자, 중보자 예수를 믿는 믿음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이
바로 가나안을 능히 정복할 수 있고
아낙 자손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이다.
다음의 성경절들이
그러한 우리의 믿음을 명명백백히 드러내 주고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우리의 영적 생애에서 우리의 촛점이 [예수]가 되지 않고
[죄]가 되면 우린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완전론주의자들의 말처럼 [죄] 자체를 아낙자손으로 보고
그것에 온 주의력을 빼앗기면 위험천만하다.
아니 절대 이길 수 없어 “악평하여 가로되”(민 13:32)
우리는 죄 앞에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민 13:33)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영적 삶의 중심이 "오직 예수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행위'와 '선행' '행함'이 되어 버리면
우리가 매일 당면하는 '죄들'은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 13:31)고 하는 '악평'이 되고 만다.
"오직 예수 안에서"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를 주장하는 것이
완전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높은 표준'을 무너 뜨리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의 최종적 푯대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그것이 우리의 영적 삶의 최종적인 목적지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소망하면서 달려가고 있는 [부름의 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무흠하거나
전혀 죄짓지 않는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죄없는 생애를 닮아가고 모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애를 살수 있다고 스스로 속여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 인간이 전혀 죄짓지 않는 생애를 살 수 있었다면
전능하신 여호와가 인간이 되어 [예수]가 될 필요가 없었다.
영존하신 아버지가 아들이 되실 필요가 없으셨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이 종이 되실 필요가 없으셨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가 감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이시며
"죄가 없으시고"(요일3:5)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벧전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고후 5:21) 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죄 없는 삶을 산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시 40:12)다고 고백했으며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4)라고 토설했다.
밧세바를 범하여 죽을 죄를 지었을 때에도
그의 죄를 단호하게 지적하고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시 51:3)라고 하면서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라고 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훗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행 13:22)고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완전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도 없는 산 속에 운둔하면서
아무리 1년동안 행위적으로 한번도 죄짓지 않고
실수하지 않았더라도 그 다음날 죄 지으면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의 [완전]과 [안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서이지
불신에 빠졌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그들 스스로의 힘'과 '행위'를 의지하거나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빌 3:15)이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도
자신이 긍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표점과 닮아야 할 표본은
죄없고 죄도 범치 않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면서
죄에서 승리하시고 흠없는 생애를 사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하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좇아가노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했고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사단과 상관 없는"(요14:30 참조) 생애를 사신
그리스도의 무흠하고 죄없고 죄짓는 않으신 온전한 생애는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가 닮고 모방해야할
끊없는 목표점이요 긍극적 도달점이며
그것을 향해 오늘도 달려 가야할 푯대인 것이다.
그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과 죗됨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16:24)
갈렙과 여호수와 처럼 "함께 하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아낙 자손을 능히 이기고 가나안을 정복하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딤전6:12)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오직 믿음으로' 얻은
그 '성화' 중에 자라나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참 그리스도인이며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롬 8:37)는 자들이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요일 5:4)임을
당당히 보여 주는 자들인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잠시 후에
그 대제사장의 예복을 왕의 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오직 여호와" "오직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사단과 죄들을 향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히 9:28)실 것이다.
수다스럽네.
Naver도 보면 댓글다는 남여 비율
보면 항상 남자가 높다.
그게 어떤 내용의 뉴스든...
여기도 남자들 판이네.
글투 보면 안다.
남자들이여 그만 수다 떨고
현실에서 열심히 일하여 애새끼들
먹여살려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