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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3

(그런데 우리 일행은 시간을 맞추어 배에 잘 탔는데

다른 목사 몇 명이 하와이와 일본의 시간이 다른 것을

몰라 배를 놓치고 말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 분들은

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다. 연재#22 끝부분)

 

1. 세계 대총회 참석과 육이오 동란-제 2 부

 

샌프란시스코까지 오는데 배로 13일이 걸렸다.

배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아름다웠다.

설명을 들으니 샌프란시스코를 화잇칸투리(White Country)라 하여

집집마다 흰 빛깔을 칠해서 너무 보기가 좋았다.

촌계관청격(村鷄官廳格-촌닭이 큰 관청건물을 놀램)도 분수가 있지,

일본 요꼬하마 항구를 보고 그 규모에 놀랐었는데 상항은

몇 배가 더 큰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관 검사를 위해

사람들은 짐을 찾느라 야단 법석 이었다. 알고 보니

영어로 자기 성(姓)을 따라 가야 했다. 그러니 박창욱 씨는 P로,

나는 C로 가야했고 다른 분들도 자기 이름을 따라 갔다.

영어를 모르는 나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다니던 경험이 있어 내 명함을

영어로 만들어 왔는데, 영어를 못하는 나는 명함을 내주니

“당신 목사냐”고 묻기에 “Yes!"하고 대답을 했다.

“대총회에 오는가?” 묻기에 또 “Yes!" 했더니 조사는커녕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고 분필로 찍 긋고 내주어

세관 검사는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세관을 먼저 나온 나는 이제 “이 복잡한 항구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닥터 루가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다른 전도부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아직 한 분도 보이지도 않는데 닥터 루는

우리가 걱정 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렇게 선창까지

나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우리의 양복까지

마련해 준 것도 나의 심금을 울렸는데 상항 항구에서 보여준

이 분의 배려는 “앞으로 나도 이 분의 정신으로 사역을 하고

교인들을 섬겨야 하겠다!”는 생각과 결심을 갖게 했다.

닥터 루는 나에게 “정 목사, 영어를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아주 잘 하시는 모양입니다!”라고 하기에 그 이유를 물은즉

“영어를 꽤 하시는 박창욱 씨도 아직 못나왔는데

이렇게 세관검사를 빨리하고 나온 것을 보니 영어를

잘 하시는 모양이지요?”하면서 농담을 했다. 박창욱 씨는

가방을 다 검사받느라 한 시간정도나 걸렸다. 박창욱 씨는

“자기도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영어를 모르는 정 목사는

얼마나 오래 걸릴까?”하고 걱정을 했다가 내가 이미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기에 설명을 해 주었더니

“역시 경험이 중요하군요!”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일본압박 밑에서 고생을 하던 나는, 성직자를 대하는

이 사람들의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닥터 루의 자상함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다른 나라대표들은 호텔방을 찾느라고 야단인데

닥터 루는 우리를 이미 예약해둔 30층 되는 “낸시”라는

고급호텔 5층으로 인도했다. 역시 의사라 고급으로 행동한다고

생각 되었으나, 알고 보니 대총회규정에 의해 대표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으로 고급스러운 호텔을 좋은 가격에

미리예약을 해 두어서 감사했다.

호텔비는 하룻밤에 3불 20전이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대총회장소까지 걸어 다니기에 알 맞는 거리에 있었다.

자비(自費)로 간 방례두 씨는 값이 조금 싼 여관에 들었는데

하룻밤에 70전씩 한다고 했다. 나는 방례두 씨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 분이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까지 와서, 같이 온 사람들이

고급호텔에 들면 자기도 휩쓸려서 그렇게 할 것 같은데,

기분에 의해 낭비를 하지 않는 그분의 절약정신에 존경심이 갔다.

닥터 루는 우리를 호텔 직원들과 호텔 보이(Hotel Boy)에게

일일이 소개하고 호텔규칙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또 우리를 데리고 대총회 장소까지 한번 걸어가면서 우리가

왕래할 길에 있는 중요한 표식들을 일일이 지적해 주어서

길을 잊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목사인 나도 교우들에게

이렇게 자상하게 하지는 못했었다. 많은 것을 나는 이 분에게서 배웠다.

 

나는 박창욱 씨와 “내일부터 대총회가 시작을 한다하니

그전에 상항영사관을 찾아가 한국소식을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의논하여 영사관을 찾아 갔다.

총영사는 주영한 씨라는 사람인데 이승만대통령과

친하신 분으로 국제결혼을 하신 분이었다. 우리를

아주 환영하면서 전해주는 고국 소식은 뜻밖에도

한국 전체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을 고국에 두고 온 우리는 마음이 답답하고 걱정만 앞섰다.

우리의 답답해하는 모습을 본 주 영사는 “내일부터 총회가

시작한다니 오신 김에 가까운 공원에 가서 기분 좀 푸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하며 자기 차에 우리를 태우고

그리 멀지 않은 공원으로 갔다. 공원 들어가는 길에

차 소리가 나자 길 좌우편에서 수십 마리의 다람쥐가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주 영사는 준비해간 다람쥐 음식을 뿌려주니

다람쥐는 두려움도 없이 양식을 받아먹었다.

고국에서는 볼 수도 없는 진풍경이었다. 공원내부도 얼마나

정돈이 잘되고 깨끗한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도 빨리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바람이

나도 모르게 일어났다. 어떤 큰 나무는 그 수한(壽限)이

3천 몇 백 년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노아 홍수를

연상케 했다. 돌아오는 길에 주 영사에게 신문을 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일본사람이 발행하는 “나부신보”라는 것을

사서 주었다. 그 신문에 한국전쟁 소식이 꽤 자세히 실려 있었다.

그림도 그려져 있는데 북쪽군사가 내려오는 것은 검은 줄로,

남한의 방어선은 흰 줄로 표시가 되어있었는데 북쪽 군이

벌써 수원을 지나 천안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천안 다음이 대전이니 대전에 살고 있는 식구들의

안부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대총회에서 받아야할

은혜를 놓치지 않고 다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제 47기 안식일교회 세계총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어떤 공회당 같은 곳에서 개최되었는데 공회당의 크기는

나의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얼마나 커 보였던지!

첫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듣기에는

약 2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대단한 모임이었다.

불원하여 허다한 무리가 구원 얻을 때는 얼마나 그 규모가

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층에 올라와 내려다보니

마치 꽃밭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생겼다.

1950년이니까 약 40여 년 전인데, 당시에 유행을 따라

여자들이 모자를 썼는데 빨강, 파랑, 흰색, 검은색 등

각종 색깔에다가 모자에 각종 색깔의 깃털을 달았으니

커다란 꽃밭에 온 듯했다. 시작을 하는 모든 순서도

이해는 잘 못하겠지만 그 모습만 보아도 은혜를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상항주재 우리나라의 총영사가

축사를 해준 것도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답답한 것은 통역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박창욱 씨가

통역을 좀 해주면 좋겠는데 별로 말이 없었다. 내가 보아도

성경말씀 보다는 예언의신을 많이 인용하는 것 같아 통역하기에

매우 힘 들것이라 생각은 되었다. 그래도 기다리다가 할 수없이

“박 선생! 통역 좀 해 주시오”라고 부탁을 했더니 원래 정직한 분이라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영어를 좀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미국본토인들이 영어를 하는 것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고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 답답하여 대총회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한 곳에서 반갑게도 일본말을 하는 것이 들리기에

그리로 가니 일본사람들이 약 100명가량 모여 있는데

일본사람들도 영어를 모르니까 노자끼라는 일본인목사가

통역도 하고 따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나는 대총회 전 기간동안 이곳에 합류하여 여러 가지로

은혜를 받았다. 몇 번 참석을 하자 노자끼 목사는

내가 한국 목사이지만 일본말이 통하자 매우 반가워하며

자기 집으로 초청을 했다. 그래서 박창욱 씨와 같이 갔는데

노자끼 목사는 미국 온지도 오래되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

자녀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 댁에 가니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타고 온 김상칠 씨의 아들 김영욱 씨도

초대되어 와 있었다. 우리가 대총회에 참석하는 동안

이 댁에 몇 번 청함을 받았다. 일본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런 경험을 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했다.

 

한 번은 주 영사의 집에도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주 영사의

서양인 아내가 동양인인 우리들을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는지

매우 감명을 받았다. 주영사의 말이 “한국동란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북한이 너무 빨리 내려와서

현재로는 승패를 말할 수 없다”는 섭섭한 말을 듣고

걱정이 많이 되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 되었다. 그런데 주 영사의 부인되는 서양 여자 분이

우리가 방문한 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고국 분들 중에 당신네처럼

미국풍속을 잘 아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칭찬하는 말 같아서 감사하기는 한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지금까지 고국에서 저희 집에 오신 손님 중에 우리 집 변소에서

대소변을 보고 나서 변기의 물을 틀어 대 소변을

내려가게 한 사람은 당신네가 처음이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나 우리는 곧

무슨 뜻인지 깨닫고 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시조사나 또는 선교사 사택이

모두 수세식 변소로 되어 있어 습관이 되어있었으나

고국에서 온 사람들은 수세식 변소에 처음 들어가

대소변을 보고 그냥 나오곤 한 듯 하다. 영사의 관저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대소변을 보았을 것이며

그 중 한 명도 물을 틀지 않고 그냥 나갔으니 그간 얼마나

이 서양 부인이 고생을 했을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대총회가 끝날 즈음에 나에게 잠시 설교를 하라고 해서

나는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말씀을 가지고 잠시 설교를

한 후에 한국동란을 위하여 잊지 말고 특별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마 한국동란을 생각하여

한국대표로 참석한 나에게 시간을 배려해 준 것 같았다.

대총회 폐회순서로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다 자기나라

풍습을 보여주는 순서가 있었다. 약 200여 나라의

대표자들이 자기나라의 고유한 의복이나 풍물을 가지고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순서를 진행하였다. 우리도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이미 그 얘기를 듣고 준비하여 왔기에 한복을 입고

방례두 씨 등과 함께 장고와 태극기를 가지고 나갔고

원륜상 목사도 장구를 치면서 함께 등단하여

다 같이 아리랑을 불렀다. 가사를 조금 바꾸어 “복음을 전하다가

가버리면 십리도 못 가서 발 병나네!”라는 가사 내용으로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총회선거를 통하여 대총회장이

바뀌었는데 우리는 전 대총회장에게 선물로 준비해간

유기를 전하니까 신문기자들이 와서 전 대총회장이

선물 받는 것은 특이한 일로 감동적이라 하며

느끼는 바가 커서 신문에 낸다며 사진을 찍는 등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한국대표만 전임 대총회장에게

선물을 주는 순서를 가졌으니 말이다.

 

대총회가 끝나자마자 주 영사는 우리가 한국대표로 왔다고

다시 식사에 초대를 했다. 식사 후에, 주영사가 우리를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제 대총회도 끝났으니 가시기전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구경이나 좀 하십시다.”하면서 자기부인에게

“이분들이 한국으로 곧 돌아 갈 지도 모르니 드라이브나

시켜드리면 어떠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주 영사의 부인이 참 감동적인 대답을 했다.

“지금 고국에서는 전쟁이 나서 죽는다, 산다 하면서

전쟁이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드라이브를

즐길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이 서양부인이

한국 사람에게 시집을 와서 한국백성과 나라를

저만큼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동포들은 그동안 서로

다툼이나 일삼다가 지금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하고 있으니

참 부끄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우리도 주 영사의

부인에게 한국전쟁의 형편이 많이 좋아 지면

그때 드라이브를 하자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나는 대총회 기간동안 계속 일본신문을 구해서 보는데 거기에

한국 소식이 실리곤 했다. 신문을 통해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보면서 계속 걱정을 하니, 하루는 닥터루가 묻기를 “대전 이전에

강이 있느냐”고 묻기에 “금강이라는 강이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걱정을 하지 말라. 강만 잘 지키면 더 이상 북한이

진격하여 못 들어 갈 것이라”하기에 나도 동감이 되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신문을 보니 7월 20일 대전이

함락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아차! 이제는 내 아내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걱정을 하니 닥터 루는 “당신이 왜 아이를

그리 많이 나서 걱정을 하느냐”고 해서 씁쓸히 웃어넘겼다.

 

2. 미국 겉핥기

대총회가 끝나자 미국구경을 못한 외국대표들은 미국시찰을

시켜준다고 했다.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인도하는데 우리일행은

나와 박창욱 씨와 확스라는 인도네시아 사람 등 몇 명이고

인도자는 인도네시아 합회장으로, 이름은 엠미니시라는

미국사람 부부이었다. 두 차로 나누어 가는데 오레곤주(州)로 해서

와싱톤주를 경유하여 중부지방인 시카고를 거쳐

뉴욕과 와싱톤디씨까지 여행하도록 예정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동란을 당하고 있는 식구를 생각하니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듯한 생각만 들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별로 많지는 않다. 운전은

미국인 엠미니시 부부가 한 차씩 맡아서 했는데,

이상하게도 어떤 때는 남편이 앞서 가던가 아니면

아내가 한참 앞서 가다가 어떤 갈림길에서는 서로

앞서간 차를 놓치고는 찾느라고 한참씩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길이 어긋나서 기다려도 다른 차가

오지를 않았다. 영어를 하는 박창욱 씨는 운전수와

다른 차를 찾으러 되돌아가면서 나보고 내려서 기다리다가

헤어졌던 차가 오면 세워서 기다리라고 했다.

내 땅도 아닌 곳에서 영어도 모르면서 그네들이

오기를 기다린 다는 것이 얼마나 걱정이 되는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혼자 서있으면서 “알지도 못하는 미국사람이 와서 여기서

무엇 하는가 물으면 뭐라고 하지?” 하는 걱정에서부터

“소변이 마려우면 어떻게 하지?” 하는 별의별 걱정을 하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땀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다른 차를 찾아 돌아왔다. 눈치를 보니 여행비는

대총회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식사는 가는 곳마다

교우들이 대접해주어 매우 감사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한 가족 삼아주신

기이한 섭리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이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고역이었다.

그래도 서부지역은 가는 곳 마다 일본신문을

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신문을 보니 부산지역

한 귀퉁이를 빼고는 모두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것 같아

몹시도 답답했다. 공산군이 낙동강을 넘지 못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다행히 낙동강은

넘지를 못하고 전투가 치열한데 미군 비행기들이 이 지역

공산군에게 얼마나 폭격을 많이 했는지 수없이 죽은 시체와

불타는 시체를 사진으로 보여 주는데 비록 공산군이지만

너무 처참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낙동강 전선에서 공산군이 더 내려가지를 못한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와싱톤주 시애틀에 도착을 했다.

여행 떠난 지 며칠 안 되었으나 우리는 한국사람이 몹시 그리웠다.

갑자기 박창욱 씨가 “목사님, 여기 씨애틀에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간난“이라는 여자 분이 와서 산다는데 한번 찾아봅시다.”라고 했다.

놀랍게도 그 분은 “간난”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성씨(姓氏)는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 분은 우리교회학교인

동명학교를 나오고 당시로는 최고명문인 이화대학까지 나와서

이곳에 있는 분과 결혼을 하여 시애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박창욱 씨와는 옛날에 이웃에서 사셨다 한다.

“간난” 여사를 만나니 우리보다 이분이 얼마나 우리를

더 반가워하는지 마치 “천국에 가면 이렇게 반가워하겠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대접해 주고,

떠날 때는 눈물까지 흘리고 섭섭해 하면서

여행 중에 사용하라며 약간의 금전도 손이 쥐어 주었다.

지금도 그분의 환대를 잊을 수가 없다.


 

오레곤주와 와싱톤주 몇 곳을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보고

미국 큰 도시 중에 하나인 시카고까지 왔다. 시카고에서

동양인 두 명이 우리와 합류하여 여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 미국인 합회장은 안식일인데도 계속 여행을 하기에

“교회라도 좀 찾아보자.”고 했더니 이분은 정말 우리를

어느 교회 문 앞에까지 데리고 가서는 “여기가 OOOO교회요!”하고

교회이름만 영어로 알려 주고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겠다.”했다. 예배를 드리고 싶어 “교회라도 좀 보자” 했더니

정말 교회 건물만 보여 주고는 떠나는 것이었다.

인도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시간에 나는 인도네시아 교우에게

“내가 재림 교인이 된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안식일을

지내는 것은 처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니 인도네시아 사람

확스씨도 “이런 안식일은 처음이라며 미국 사람의 안식일은

이런가 보다.”라고 해서 생각되는 바가 많았다.

확스씨는 “내가 그간 미국 총회에 여러 번 참석하려고

신청했으나 이 인도자가 못 가게 하였다.”하며 “이렇게

미국식 안식일 지키는 것을 안 보여주려고 그랬던 모양.”이라고

해서 우리 모두 웃었다.

 

한 가지 잊을 수가 없는 일은 뉴올린즈에서 보게 된

옛날 흑인들을 사고팔던 노예시장이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흑인 노예들을 붙들어 매던 쇠사슬과 노예시장의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보기에도 처참하고

몸이 으스스했다. 노예들의 생활모습과 노역을 하던

기구들이 그대로 다 있었는데, 곡식을 찧던 절구 비슷한

기구들과 또 우리나라의 맷돌 비슷한 기구를 보여주며

젊은 흑인노예여자들이 아이를 업은 채로 일하던

기구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가면 아내들을

노예취급 하지 말자.”하며 맷돌이나 절구로 곡식을 갈던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기계들을 하나씩 샀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을 보아야 자신에 대해

생각도 하고 결심도 하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럭저럭 와싱톤 디씨까지 왔다. 제일보고 싶은 것이

화잇 부인의 원고를 보관한 곳과 미국 대통령이 살고 있는

백악관이었는데 날자가 잘 맞지를 않아서 아무 것도 못 보고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 이곳에 원동지회 서기 쏘렌슨 목사

(후에 원동지회장이 됨)도 대총회에 참석했다가 와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빨리 떠나라고 했다. 나는 박창욱 씨에게

통역을 하라고 해서 “지금 이곳에 와서는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으니 한 이틀간 더 머물러 화잇 여사의 서적보관소와

백악관을 보고 가겠노라!”고 했더니 이분이 한다는 말씀이

“나도 당신 네 나라를 여러 번 방문했으나 제대로 구경을

못했다”하면서 빨리 떠나가라고 재촉이었다.

전쟁 중이라 고국으로 당장 갈 수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재촉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 분은 운동선수처럼

목이 굵어서 우리는 “그 양반, 생긴 모양대로 꽤나

고집이 센 양반이구만!”하고는 할 수없이 뉴욕도 잠간 들려

엠파이어스테이트 건물과 나이아가라 폭포를 급하게 구경하고는

서부로 다시 돌아왔다.

 

서부로 떠나기 전, 쏘렌슨 목사는 우리에게 “아직은 한국으로

돌아 갈수가 없으니 박창욱 씨는 어디 가서 공부를 좀 하고

정동심 목사는 하와이로 가서 교회목사 일을 좀 하라”고 했다.

나는 “하와이에서 교회목사로 일을 하면 한국전쟁이 끝나도

곧 돌아가기가 힘들겠다.”라고 생각이 되어 “언어가 좀

문제이기는 하지만 나도 박창욱 씨와 함께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우선 서부로 가있다가 다시 의논하자.”고 하며 서부까지

기차를 타고 떠나라 했다. 기차를 타고 서부까지 오는데

약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다른 것은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럭키산맥을 굽이굽이 돌아가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기차로 도착한 곳이 칼리포니아 주,

나성(羅城-로스안젤레스)이었는데 처음 온 우리는 어디로 갈까

하다가 일본말로 이름이 써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나성이 미국 내에서 나쁜 도시 중 한 곳이라

했었기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일본말로

의사가 통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룻밤을 지내보니

기차역 옆에 있는 이 호텔은 안전해 보이지가 않아 나성중심가에

여관을 다시 잡고 박 창욱 씨와 함께 길을 물어

화잇 메모리얼병원(White Memorial Hospital)을 찾아갔다.

그들은 처음 보는 우리를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는지

그 친절함을 꼭 배우고 가야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분들은 “닥터 루로부터 우리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며

닥터 루도 며칠 있으면 나성으로 올 것.”이라고 말해주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1950년도, 나성에는 한국사람 보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런데 병원직원 한 분이 이 병원에 한국인여의사 한사람이 있다고

전해 주면서 안내를 해서 만나게 해 주었다. 그 여의사는

다른 교파에 속한 신도로서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이병원이 좋다고 해서 지금

견습하러 왔는데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우지만 너무도 친절해서

이국(異國)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난 것을

매우 기뻐하며 병원을 칭찬했다. 워낙 한국 사람이 귀할 때라

우리도 동포를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비록 미국이라 하나 우리 교회 병원이 다른 교파 사람에게도

문을 열고 받아 드리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4


(비록 미국이라 하나 우리 교회 병원이

다른 교파 사람에게도 문을 열고 받아 드리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연재#23 끝부분)


3. 강봉호 선배


나는 35년 전에 헤어진 의명학교 선배 강봉호 씨를 찾고 싶어

박창욱 씨에게 부탁을 했다. “순안 의명학교 동창선배인

강봉호 씨가 나성 지역에 산다는데 어떻게 찾을 수 없겠소?”

“아이고 목사님, 이 넓은 나성에서 어찌

아무 연락처도 없이 찾겠습니까?”

하기야 연락처는 고사하고 영어 이름도 모르고 왔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참 후에 나는,

“박 선생, 당신이 영어를 잘하니 전화번호 책을 한 번 보고 찾아봅시다.”

과연 박창욱 씨는 영어 이름을 몇 번 바꾸어 찾아보더니

강봉호 씨의 이름을 찾아내어 그분 댁에 전화를 해서 강봉호 씨의

직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강봉호 씨는 1913년에서 1914년 3월까지

일년 동안 순안 의명 학교에서 재학한, 인정 있는 사람으로

나의 선배동창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기쁨을

기대하면서 그의 직장을 찾아가니 마침 돌아서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하도 반가운 김에 뒤에서 내 두 손으로

감봉호 씨의 두 눈을 가렸더니 영어로 “누구시오?”하고 물었다.

나는 “봉호 형님, 저 정동심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니

도무지 몰라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총회를 위해 떠나면서 강봉호 씨가 나성지역에 산다는

말만 듣고 은수저 한 벌까지 준비해 찾아왔는데

전혀 알아보지를 못하니 난감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분을 마지막 본 것이 1914년인데

지금이 1950년이니 36년 만에 연락 한마디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 몰라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어

순안 의명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살던 이야기를 하니까

한순간 “아! 바로 당신이 그 정동심이란 말이오?”하고

알아보고는 어찌나 기뻐하는지, 기쁨이 배가되는 기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강봉호 씨는 우리가 이미 방문했던

화잇부인 기념병원 옆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보고

자기 집에서 유하자고 권했다. 우리가 호텔에 머문다고 하니

좌우간 저녁식사는 자기 집에서 하자며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부인도 크게 반가워했다.

강봉호 씨를 위해 한국에서 준비한 은수저를 선물로 주었더니

더욱 고마워하며 내일 저녁에 정식으로 다시 초대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저녁에 다시 그 집을 가니 어찌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미국에 와서 이런 만찬은 처음이었다. 누구보다도 박창욱 씨는

연속해서 푸짐한 저녁상에 감탄사를 발했다. 식탁에는

내가 선물한 은수저가 놓여있었다. 강봉호 씨의 부인은

“마침 오늘이 강봉호 씨의 생일인데 무엇을 선물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정 선생님이 이걸 가져와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며 “생일선물로 받은 은수저로

식사를 하니 더 의미가 깊다.”고 하며 재삼 감사를 표했다.

강봉호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샘톨이라는 곳에서

출생한 나의 동향인(同鄕人)으로 성격이 아주 다정다감한 분이다.

1914년 3월에 순안 의명학교를 졸업하고 순안병원에 근무하면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며 지내다가

춘원 이광수 씨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광수 씨는

상해 임시정부를 시찰하고 그곳에 정직한 경리가 필요함을 알고

강봉호 선생을 추천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그 후에 의명학교 졸업생 김병모 씨도 강봉호 씨를 따라갔다.

강봉호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일을 해 보니 자기는

도저히 그곳에 맞지가 않는다고 느껴져서 김병모 씨와 함께

불란서 파리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들어왔다.

강봉호 선생은 교회계통에 일한 경험이 있는 고로

미국에 머물게 되고 김병모 씨는 멕시코로 갔다.

강봉호 선생은 불란서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불란서 파리에 있으면서

의명학교 학생일동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불란서에 우리 재림교인이 많지는 않은데 화요일이나

금요일이나 안식일에 교회 참석하는 숫자가 거의

비슷하다면서 고국에 있는 우리 교인들도 이러한 신앙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서신이었다.

이런 정신을 가진 강봉호 선생은 미국에 와서도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훌륭한 실업가가 되었고 교회에서도

회계집사로 여러 해 봉사 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백성은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영육 간에

성공이 있음을 이 분을 통하여 보았다.

닥터 루를 다시 반갑게 만났는데 지난번엔 대전 지역에

무슨 강이 있는가 묻더니 이번에는 “대전은 이미 북한군에게

함락 당하고 현재 북한군이 대구로 내려가고 있는데 대구에는

무슨 강이 없는가?” 물었다. 이미 일본신문을 통해 대강

사정을 알고 있지만 닥터 루에게 “낙동강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이번에는 그 강에서나 막을 수 있을까”하며 더 이상

확신하는 말을 아니 하시기에 “미국군인은 강밖에는 북한군을

막을 다른 계획도 없는가?”해서 더욱 가족과 나라가 걱정이 되었다.

그 후 닥터 루의 권유로 화잇 부인 기념 병원에서 대변 검사를

해 보았더니 나에게 십이지장충이 있다고 해서 그 치료를 위해

몇 번 더 병원을 드나들면서 강봉호 씨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했다.

안식일이 되자 박창욱 씨는 곧 한국으로 갈지도 모르니 큰 교회와

그 찬양대도 구경해야 되겠다고 해서 화잇 부인 기념병원교회로 가고

나는 그 옆에 있는 멕시코인교회로 갔다.

강봉호 씨도 나와 함께 멕시코인의 예배당으로 갔는데 전에

보지 못한 동양인이 찾아오자 나더러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강봉호 씨를 통해 나는 “대총회에 한국인 대표로 왔다가

전쟁 통에 발이 묶여서 이 교회까지 방문하게 되었다”하니

즉석에서 한 10분 동안이라도 말씀을 좀 해 달라 했다.

그 분들이 강봉호 씨에게 통역을 부탁하자 강봉호 씨는

“이 분이 한국에서 통역을 데리고 왔는데 바로 옆에 있는

병원교회에 있다”고 하자 곧 어떤 사람이 가서 박창욱 씨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내가 말하면 박창욱 씨는 영어로

통역을 하고 또 다시 이 교회의 교우는 멕시코말로 통역을 했다.

그야말로 2중으로 통역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하고 그동안

일제하에 겪었던 교회의 어려웠던 시간과 지금은 전쟁을 통해

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특별히 한국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자 모두 큰소리로 “아멘!!”을 해 주었다.

2중 통역을 통해 세 나라 방언으로 이야기를 했으니

내 뜻이 제대로 전해 졌는지는 모르나 모두 감동을 받은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한다. 세계만방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한 방언으로 예배할 날이 기다려졌다.


하루는 모처럼 닥터 루가 자기 차로 우리를 데리고

시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먼지가 풀썩풀썩 나는

포장되지 않은 산길로 한참 들어가니 그곳에는 배 밭이 있었고

어떤 미국 여자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여자는

닥터 루에게 “어떻게 소식도 없이 이렇게 왔는가?

미리 온다고 알려 주었으면 손님들을 위해 터키라도

한 마리 잡아 요리를 했을 텐데” 하며 말했다.

알고 보니 이 배 과수원은 닥터루가 안식년으로 귀국했을 때

만들어 놓았던 것이었다. 우리는 선교사들이 안식년 하면

그냥 놀고 지난다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들의 또 다른 면을

보는 듯 했다. 관리하기가 힘이 들어 이 여자 분에게 팔았지만

생각이 나면 가끔 이렇게 들려 본다고 했다.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미국에 온지도 몇 달이 지났다.

어떤 일요일에 강봉호 씨는 어떤 큰 호텔 회의실을

채플(Chapel)로 쓰고 있는 “낙스”라는 재림교인

평신도에게 데리고 갔다. 낙스씨는 이 장소를 세내어서

상설기관으로 정하고 일요일마다 전도 집회로 모이고 있었다.

다른 교파에서는 연금을 거두지 않아도 이런 집회에

사람이 별로 참석치를 않는데 낙스 씨의 이 집회에는

매주 연금을 거두는데도 사람이 많이 온다고 했다.

백 명이 넘는 대단한 모임이었다. 낙스 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로 돕고, 낙스 씨의 아들은 이 집회의 사회를 하고 있었다.

낙스 씨는 활동사진과 슬라이드도 보여주면서 설교를 하고

좋은 노래도 준비해서 들려주거나 함께 부르기도 했다.

낙스 씨도 아주 감명 깊게 설교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모습이 매우 부러웠다.

때가 때이니 만큼 “다음 일요일에는 한국사정을 더 잘 알기 위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갔던 닥터 럿셀이라는 의사의 말씀이 있겠으니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광고를 했다. 나는 강봉호 씨에게

“내가 북한사람으로 한국에서 대총회 참석차 왔으니

다음 집회 때에 시간을 주면 잠시라도 말할 마음이 있다”고

알아 보라고 했더니 예배를 끝내면서 낙스 씨는 “오는 일요일에는

한국에서 온 정동심이라는 사람이 북한사정과 한국교회의 사정을

이야기 할 마음이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은 즉

만장일치로 좋다고 해서 그리 하기로 했다.

그 다음 일요일에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하며 그 곳에 갔더니

설교자 럿셀 씨는 과연 한국에서 내게 침례를 주었던

선교사 노설 의사이었다. 노설 의사는 순안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1913년 8월에 나에게 침례를 베푼 의사이며 목사였던 분이다.

나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랐다.

나에게 침례 준 목사와 함께 미국에서 만나 같이 설교단에

서게 된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이 만나 인사하고 노설 목사가 이야기 한 후에

내가 북한사정을 포함하여 설교를 잠시 했다.

낙스 씨의 말로는 사람이 평상시보다 삼분의 일정도

더 모였다고 했다. 족히 백 오십 명이 넘어 보였다.

집회 후에 그곳을 떠나려 하는데 누가 한국말로 우리를 불렀다.

“여보! 여보! 여보시오!”

한국말로 우리를 부르기에 너무 반가워 뒤를 돌아보니

60대쯤 되어 보이는 한국 사람이 젊은 미국 백인여자와

우리를 부르며 쫓아와 말했다.

“아, 나는 오늘 당신의 설교를 들은 사람인데 너무 반갑고

감개무량해서 그냥 보낼 수가 없어 두 분을 모시고

점심 대접을 했으면 하니 같이 가십시다.”

“예,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이 집회에 오기 전에 점심을 했는데요.”

“아, 점심을 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너무 반가워서 그러니 같이 갑시다.”

그래서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사실 저는 오늘 참석하기 위해서 6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한 시간 넘게 이렇게 왔소.”

“아니 그렇게 먼 곳에 사시면서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습니까?”

“아, 신문광고를 보니 오늘 한국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왔지요.”

나는 다시 놀랐다. 내가 요청을 하니까 마지못해 그냥

잠시 이야기하도록 시간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듣게 하기 위하여 신문에 광고까지 한 것이다. 뭔가 달랐다.

“사실 나는 교인은 아니지만 신문에 한국 사람이 이야기한다고

광고해서 오긴 했지요, 광고를 볼 때는 틀림없이 이놈들이

한국에 갔던 사람을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내려고 광고를 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와 보니 선생님 같은 유명한 대표자들을

모시고 설교를 해 주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감사해서

식사라도 대접할 맘이 있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 분 말씀이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다른 교단의 광고를 보고

반가워서 가보면 한국에 선교사라고 나갔다가 한국 사람을

쿡(Cook)이나 하인처럼 데리고 있다가 미국에 데리고 들어와서는

광고를 하여 사람들이 모이면 돈을 모금하는 아니꼬운 일들이

많았다 한다. 이번에도 또 그런 광고일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한국 사람이 그리워서 불원천리하고 찾아 왔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기에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청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소개와, 또 함께 온 젊은 미국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미국에서 우리 교회만 돌아 다녔고 만난 사람들도

다 교인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교인이 아닌 이 부부를 만나

담화 하면서 미국인의 가정, 미국인의 사회와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게 된 것이다. 이 분은 개성 사람으로 오래전에 미국에 왔다고 했다.

“저는 예순 한 살이 넘었지만 같이 온 젊은 이 백인 여자는

스무 살이 조금 넘었는데 저와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는 길안내하려고 온 어린 미국여성인줄 알았다가 너무도 놀랐다.

우선 황인종과 백인의 결혼이 그랬고 나이를 보니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는 족히 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리 젊은 여성과 결혼해서 살고 계십니까?”

나는 이 남자의 설명을 들으며 너무 놀랐다. 이 분은 이미

결혼하여 부인도 있고 가정도 꽤 부유한 측에 속했다.

딸도 낳아서 잘 자라고 있었다. 이웃과도 사이가 좋아서

백인 처자가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옆집 딸은 이 집 딸과

친구로 지내면서 자주 놀러 왔다. 하루는 뜻밖에도

이 백인 처녀가 이 집 딸에게 “내가 너희 아버지와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그런 심한 농담은

하지 말라!”고 하고는 묵살을 해 버렸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 옆집 백인 처녀가 “너희 아버지께 말을 해 달라.”고 해서

묵살하다가 할 수 없이 하루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이 한국분도 “별 이상한 처녀가 다 있군.”하면서

그 이야기를 무시했다. 허나 몇 번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 부인에게 말을 하자 뜻밖에도 부인도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라.”고 남편에게 이 문제를 일임을 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이 남편도 “이게 어떻게 된 사회인가?”하고

심사숙고 하다가 결국 그 백인처녀의 부모를 찾아가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백인

처녀의 부모는 “당사자인 남녀가 원한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며 선선히 허락을 해 버렸다는 것이다.

“저도 젊은 여자와 살아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다.”생각이 되어

30세도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서로 잘 타협하면서 가정적으로는 큰 문제없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삼강오륜을 중요시하는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지금은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나로서는

이 분의 이야기를 수긍도, 이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미국사회를 “개방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타락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잘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한국남자나 그 젊은 여성이

몰몬 교회에 속했던 사람이 아닌가 생각도 되지만 당시에는

“참 미국이라는 곳이 이상하고 이해 못할 일도 많다”라고 생각을 했다.

4. 우국화 목사

한국전쟁이 속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동지회에서

우리에게 나성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세인트헬레나(St. Helena)라는 곳으로

가라고 지시가 왔다. 지회의 지시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위생병원과 패시픽 유니온대학, 그리고 화잇 부인이 지내던

집도 있던 조용한 시골이었다. 또 한국에 선교사로 계시던

우국화 목사의 사위와 한국 위생병원에서 근무하던 볼드윈이라는

의사도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원동지회의 말로는 이곳에서 한국동란이 끝날 때 까지

머물게 될 것이라 했다. 세인트헬레나 병원에서는 기숙사 같지만

매우 크고 깨끗한 방을 제공해 주어 박 창욱 씨와 같이 있게 되었다.

처음 미국에 오면서 박창욱 씨는 나에게 “저는 선교사들과

종종 서양음식도 먹어보고 해서 괜찮겠지만 목사님은

서양음식도 잡숴 본적이 없어서 고생을 좀 하실 것이고

특히 침대생활이 힘 들것이라.”하며 걱정을 많이 해 주었다.

그런데 도리어 박창욱 씨는 서양음식이 먹기 싫어 고생을 했고

나는 서양음식을 무엇이나 잘 먹고 지내고 있었다.

그나마 나성에서 한국음식을 가끔 먹다가 이제 이

세인트헬레나 병원에 와서 매끼 병원에서 양식을 먹게 되니

박창욱 씨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박창욱 씨는

“침대에서 도저히 그냥 잠을 잘 수가 없다.”하여 병원에서는

침대 아래에 두꺼운 판자를 넣어 잘 수 있게 해주고,

선교사들에게 부탁을 하여 식사를 못하고 고생하는 박창욱 씨에게

한국음식을 제공하려고 갖은 애들을 다써주었다.

그런데 박창욱 씨는 영어를 아니까 자주 나가시지만

나는 영어도 못하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방에 남아 있곤 했다.

처음에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좀 지루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스파일” 목사의

경험담 설교가 생각이 나서 나도 용기를 내어 성경을 읽기 시작해서

한 달 만에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그야말로 재미있게 정독을 했다.

스파일 목사는 “자기가 한 번은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러시아의 어떤 항구에 들려 2주쯤 머문 다기에 내리려 했더니

갑자기 짐도 압수하고 사람도 배에서 내리도록 허가가 안나오고

다만 손에 들었던 성경만 가지고 배 안에서 2주를 지내면서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성경과

이야기를 했다”고 말 하여 감동을 받았었는데 나도

성경과 이야기하는 심정으로 정말 실감나게 성경을 읽었다.

한국의 사정은 어려워 보이고 전쟁은 끝날 것 같지가 않은지

원동지회에서는 다시 지시가 왔다. 박창욱 씨는 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고 정동심은 하와이로 가서 목회를 시작해 보는 일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자니 영어도 모르고,

목회를 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힘들 것이고...

그래서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모르지만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따라갈 수 있으니 박창욱 씨가 공부하러 가면

나도 공부하러 가겠다.”고 내 마음으로는 거의 결정을 하고

그리 답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은 우국화 목사의 사위가 자기 딸 두 명과 같이 우리를

찾아 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몇이나 되냐?”고 물으니

“다섯이나 된다.”고 하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한 표정을

하기에 나는 “다섯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열 하나의

아이들을 키웠다.”고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었다.

얼마 후에 세인트헬레나병원 근방에 사시는 우국화 목사가

하룻밤 자기 집에서 지내자고 우리를 초대를 해서

우국화 목사의 사위가 우리를 데리러 왔는데 그 집 부부와

아이 다섯이 함께 왔다. 그 차에 아홉 명이 타게 되어

나는 웃으면서 “너희가 아이들이 많아서 차가 좁구나!”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우국화 목사의 어린 외손녀가 “당신은

아이가 열 하나나 된다고 하고서는 왜 우리보고 애가

많다고 하느냐?”하며 당돌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귀엽기도 하고 당돌해서 나는 한국 아이들과

비교해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국화 목사의 집에 당도하니 한국 화전민들처럼

큰 나무를 잘라서 대패질도 안하고 만든 통나무집이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겉모양과는 달리 집안에는

회를 잘 바르고 칠도 잘해서 모양이 좋았다.

우리는 금요일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안식일

예배를 통나무집에서 드리게 되었는데 약 30명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 중 의사의 가정이 한 너 댓 가족

된다고 하는데 아직 교회를 준비하지 못했다 한다.

예배를 필하면서 우국화 목사의 말씀이 “우리가 지금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50불을 예금해 놨다.”고 말했다.

그때 50불이 많은 돈인지 적은 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힘이 들어도 목표를 세워 놓고 한 가지씩 욕심 내지 않고

열심히 해 나가는 모양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우국화 목사는 우리 한국교회사업에 어느 선교사보다

공이 많으시고 수고도 많이 하신 분이다. 한국 시조사 편집국장,

서선대회장 및 한국연합회장등으로 폭이 넓게 일하신 분이시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고 자기 사위가 일하고 있는 세인트헬레나

위생병원 근처에서 살고 계셨다. 이 분이 한국에

선교사로 있다가 미국에 들어와 현재는 은퇴를 하고 계시지만

그간 한국교회에서 한 일에 대해 미국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고

계신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한국에서 함께 일하면서 만났던

우국화 목사와, 그분이 하신 몇 가지 일들을 보면서 갖게 되었던

나의 생각과 느낌을 좀 쓰려고 한다. 이 분에 대한 평가는

후일에 교회사를 쓰는 분들이 내릴 것이며 내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 목사 부부는 한마디로 성품이 후덕하고 인후(仁厚)한 어른들이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생활하려고 노력하신

분들이었다. 우 목사가 서선대회장이나 한국연합회장직을 맡아

일을 보실 때에 어느 누구와도 간격이나 충돌 없이 지나신 것을 보면

이 분이 얼마나 원만한 성격을 가졌었는지 넉넉히 알 수가 있다.

우국화 목사가 시조사 편집부 주필로 계실 때에

우 목사가 쓰신 글은 누구나 다 실감나고 감명 깊게 읽곤 했다.

조선말을 배우려고 꽤 열심이셨고 후에 춘향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춘향전을 영문으로 번역을 해 내었다.

당시에 이 사건은 많은 목사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또 잊혀지지 않는 일중에 하나는, 이 분이 누구에게

조선말을 배웠는지는 모르나 누구하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끝을 “OO나이다!”라고 하셨다. “식사를 하셨나요?”하고 물으면

“네, 식사를 잘 하였나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모든 대화에 “이렇게 해 주시면 감사 하겠나이다!”,

“오늘은 누구의 기도로 끝나겠나이다.”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가까운 사람들이 “목사님, 말씀 끝에 ‘OO나이다’ 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하고 부탁을 했더니 “네, 다시는 안

그러겠사옵나이다!”하고 대답을 하셨다. 조선말을 배우기가

힘든 것이었는지, “어른 되어 생긴 버릇도 평생을 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말 습관을 고치기에 퍽 힘들어하시던 생각이 난다.

우리 한국 풍속에 음력 5월 초가 되면 각 지방에서 각희(角戱-씨름)

대회가 있었다. 우국화 목사가 서선대회장으로 계실 때,

순안에서도 각희대회가 있었다. 그 때에 순안 의명학교 학생들도

그 씨름판에 상당한 숫자가 나갔다. 그런데 이 씨름판에

서양청년이 나와서 한판을 거들게 되어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리고 “저 서양청년이 누군가?” 하는 수군거림과 호기심이

온 씨름판에 나 돌았다. 결국 의명학교 이야기가 나오고

우국화 라는 안식일교회목사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안식일교회와 우국화 목사의 이름이 한동안 순안시내의

화제가 되었다. 씨름판에 나온 우 목사의 아들 덕분에

안식일 교회의 이름이 순안 구석구석까지 알려진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 본토인 청소년과

씨름판에서 씨름을 한 사람은 우 목사의 아들을 빼고는

전무후무 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우 목사는 단지 한국 미풍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 속에서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같이 즐거워한다.”는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신 분이다.

1930 년경인가?

우리 시조사가 이유를 알 수 없이 화재로 전소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부 사역자들이 그 원인을

우국화 목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우 목사가 세상적인 춘향전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시조사에서

인쇄를 하였기에,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우 목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말이 한입 두입 건너 퍼져

교인들에게도 퍼져 나가서 우 목사는 입장이 참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그런 사람들과 마찰이나 다툼이 없이 침착하게,

한결같이 교회 일을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으로 감탄을 했다.

1935년 또는 1936년경이라 생각이 된다.

일본이 최후 발악의 행동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사참배라는

엉뚱한 일을 강제하가 시작했다. 내 기억에 그 일을

평안남도에서부터 시작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때 우국화 목사가 서선대회장이었는지 합회장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가 않는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반 사회에서는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기독교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일본 관리들이 주최하는

어떤 회의에 참석했던 기독교 지도자 몇 명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자

일본은 이것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국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회유해 보려 했으나 이 분들이 거절 하였다.

이때에 일본 위정자들은 교세가 약해 보이는 안식일교회

책임자이신 우국화 목사를 불러서 회유와 공갈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여 우 목사를 매우 힘들게 한 모양이다.

하나님의 십계명을 강력히 주장하는 안식일 교회에서

이 문제가 받아드려 진다면 일본은 이 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회들을 회유하는데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문제가 회의에서 토론되어 대 부분 반대를 하였으나

회의 장소에 참석하여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의 압력 때문인지

아니면 교인들이 이일로 너무 고생을 할까 염려가 되었는지

이 회의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라 애국사상 고취의

행사로 수용한다고 결정이 되었다. 이 일로 우 목사는

전국 각지에서 교우들에게 힐난(詰難)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간 그 분이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우리 한국 교회에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지금 15년이나 지나서 미국에서 이 분의 집에 초대되어

하룻밤을 지나자니 모든 일들이 생각났다. 비록 이제는

은퇴를 하셨지만 앞으로 큰 영적인 성공이 있기를 기도드렸다.

나는 세인트헬레나 병원에 와서도 나성에서 발행하는

나부신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그 신문에 의하면

북한은 대전(大田)을 지나 대구로 내려와서 지금은

낙동강 상류로 해서 저 왜관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도에 표시된 것을 보니

남한 땅이라고는 제주도를 빼고는 부산 지역만이

콩알만큼 남아 있었다. 걱정과 실망뿐이었다.

현실이 그러하니까 가족걱정과 나라걱정으로 생각이 복잡해서

머리만 아파 왔다. 그런데 하루는 신문에 미군이 인천에서

120 해리밖에 있는 덕적도에 상륙한다는 짧은 기사가 있었다.

나는 박창욱 씨에게 “이제는 무엇이 되어 가는 것 같고

희망이 보인다.”고 하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신문 기사를 보여주면서 “이 덕적도라는 섬은

우리가 지리 공부할 때는 알지도 못하던 작은 섬 같은데

인천 가까이 있는 섬이니 이 섬에 미군이 상륙하는 것은

아마도 인천으로 뚫고 들어갈 계획인 것 같다”고 말을 하니

박창욱 씨도 신문을 보고는 “글세,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너무도 좋겠습니다!”하면서 나의 기대에 동감을 표했다.

과연 일주일가량 지나니까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해

들어간다고 해서 이제는 우리가 한국으로 가게 되는구나

하며 기뻐했다. 미국신문에는 한국사정에 대하여

더 자세히 나왔는지 병원직원들도 우리가 곧

귀국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축하의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이 날부터 감사하게도 우리가 귀국하기 전에

미국풍습을 다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하며 여기 저기

우리를 안내하였다. 장례식도 보고 배운 것이 많았다.

활동사진관(영화관)도 가자해서 병원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이나 되는 곳에 갔다. 원래 활동사진에는

취미가 없었고 영어도 모르니 별로 마음이 당기지 않았으나

이일도 경험이라 생각하고 갔다. 영화의 내용 중에

생각이 나는 것은 침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는 것이었는데

성경과는 달리 침례 요한과 헤로디아의 딸이 연애하는 내용이었다.

또 하루는 미국사람의 결혼식에 우리를 데리고 같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결혼이지만 믿는 사람들의 결혼식이나

비슷했다. 결혼식 후에 피로연이라고 하는 것이

결혼식장 문밖에 향기로운 나뭇잎을 넣은 레몬주스를 내어놓고

그 옆에는 신랑신부가 서서 손님들이 나오게 되면 인사를 하고

그 레몬주스 한잔씩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미국식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은 누구나 신부와 키스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신부는 손수건을 꺼내 들고 축하객과 키스를 한 후 손수건으로

입을 씻곤 했다. 축하객들이 결혼을 축하 한다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줄을 서서 신부에게 키스를 하는데 이런 일이 처음인

우리는 참 난처했다. 우리를 인도한 사람이 줄에 서 있으니

빠져나갈 수도 없이 줄에 서서 점점 앞으로 갔다.

박창욱 씨가 앞서고 내가 뒤에 따라가는데 그 신부는

동양 사람인 우리와 키스하기가 싫었는지 박창욱 씨에게

“내가 당신과 키스했으면 좋겠지만 내가 여러 사람과 키스해서

내 입술이 더러워졌으니 안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나는 박창욱 씨 뒤에 서서 어떻게 이일을 피하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피하게 된

우스운 일도 있었다. 박창욱 씨는 “키스도 인종차별을 해가며

하는 모양입니다.”라고 말해서 한참 웃었다.

가장 감명 깊게 방문한 것은 화잇 부인이 사셨던 집이다.

그곳 이름이 “엠스헤이븐”인가 그랬는데 병원 근처에 있었다.

집은 별로 크지 않았는데 이 집 담 너머로 천사가 종종

화잇 부인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많은 계시를

화잇 여사에게 주셔서, 우리의 미래에 갈 길들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비록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한 여인이지만

그 분을 선택하사, 귀한 기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그 분의 손길이 거쳐 간 이 집을 방문하며 많은 감격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의 치과의사로 나왔던 볼드윈 의사는

자기 집에 여러 번 우리를 대접 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네가 한국음식을 먹고 싶겠으나 우리가 한국음식을

잘 만들지를 못하니까 여기 쌀도 있고 채소도 있으니

한국음식을 직접 만들어 잡수시라”고 끝까지 친절을 베풀었다.

정말 변함이 없는 그들의 친절은 배울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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