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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7

(나는 영유 교우들과 별로 오래 사귀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마음속으로 슬프기도 하고 교우들의 사랑이 감사하기도 했다. #6 끝부분입니다)

*(원래 회고록 원고가 "아래하 한글"로 완성이 되었는데 오래된 Version이 되어서 그런지

글을 올리기만 하면 글씨체가 같은 줄에서도 바뀌네요. 제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

제 4 부. 북 간도로 인도하신 하나님

1. 첫 양복

당시에 북간도는 조선합회 직할 선교지였다.

그래서 합회의 특파목사로 1922년경에 최태현 목사님께서 감독으로

북간도 투도구(頭道構-간도에서 투도구라 불렀음)에 계셨는데

대회의 결정을 통고 받으셨는지 나에게 편지하기를

북간도의 수도격인 용정으로 와서 일하도록 초청하니

속히 오라고 하셨다.

나도 이왕이면 속히 가기로 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는 중에 놀란 일은, 내가 반년정도

영유에 있는 동안 많은 손님이 지나 갔는데,

그 때마다 영유의 명물인 냉면을 외상으로 대접하곤 했었다.

이제 떠나면서 외상을 계산해 보니 나의 월급 두 달 분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고 입맛은 썼지만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사실임을 실감했다.

눈물을 흘리며 서운해 하는 영유 교우들을 뒤에 두고

1924년 4월 하순에 북 만주를 향해 떠났다.

어머님을 한 반년이라도 영유에서 모신 것은

흐뭇한 일이었지만, 이제 북간도로 가기 위하여

그간 특별히 기쁘시게 해드린 일도 없이 고향에

모셔드려야 되니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평양에서 일박하며 당시 평양에 오직 하나인

“제일관” 극장구경을 시켜드리려고 하니 어머님 말씀이

“이미 다 구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장건물을

밖에서만 구경 하신 듯하여 강권하여 모시고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을 구경시켜 드렸다.

어머니는 활동사진이 시작되자 너무도 재미가 있으셨는지

극장이 문 닫을 때까지 남아서 보시겠다고 하시지를 않는가?

나는 본래 극장에 별로 취미가 없는데다가 때마침 큰아이가

구토를 하기에 큰 아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먼저 돌아왔다.

어머니와 아내는 두 아이와 함께 같은 영화를 마지막 회가

상영 될 때까지 몇 번을 구경하고 돌아오시더니

평생 그런 구경은 처음이라고 하시면서 흐뭇해하셔서

그나마 마음이 매우 기뻤다.

고향에 돌아와 친척집과 처가댁을 방문하고 나니

이제 정말로 고향을 떠나는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도 “다섯 가족을 한꺼번에 다 떠나보내기가

너무 섭섭하니 큰아이는 두고 가라.”고 하셔서

태혁이를 어머님께 두고 떠났다. 우리가 떠날 때,

모든 친척과 어머니는 우리를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이

눈물을 흘리시기에 우리 역시 눈물을 닦으면서 떠났다.

당시에 평안도에서 함경도로 가려면 서울로 가서

다시 함경도로 가는 기차를 타야만 했다. 나는 두 번째

서울행이지만 서울역에 도착한 시간이 밤이라

방향잡기가 퍽 어려웠다. 그런대로 동대문까지는

전차로 왔는데 여기에서 청량리 행 전차 타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막차를 간신히 타고 청량리에 오니

매우 늦었다. 원래는 떡전거리(회기동 근처)에 사는

권태산 씨의 집으로 가기로 했으나 밤길에 엄두가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청량리역 근방 어떤 여인숙에서 일박하고

이튿날 일찍이 권태산 씨 집으로 가니 내 고향에 온 듯 기뻤다.

이때 나는 무슨 민족주의자나 된 것처럼 한복 위에다

포목 두루마기를 입고 서울에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의 선배인 홍신우 전도사를 만났는데 홍신우 전도사는

순안 의명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뛰어난 사역자였다.

이 분도 북간도로 가라는 지시는 피하셨고

나를 만주로 보내는데 찬성을 하신 모양인데

이 홍신우 선배의 말씀이 “정 전도사!

지금 만주에 선교사로 가면서 한복이 무엇이요?

양복을 사 입고 가시오!”라고 했다.

나는 젊은 나이에 그 말씀이 일리가 있다 생각이 되어

이튿날 아내와 같이 문안에 있는 유명한 백화점인

“정자옥”으로 가서 한참 만에 고른 것이 흑색 사지 양복이었다.

“저..여기 이 양복 한 벌 값이 얼마나 되나요?”

“네. 손님. 이 사지 양복은 한 벌에 55원입니다”

그 때 백화점이라고는 처음 갔는데 점원이

얼마나 친절한지 몰랐다. 그러나 값이 문제였다.

“자. 내 한달 월급이 45원인데 55원씩 주고 양복은

사기가 힘드니 45원에 해 주시오.”

“손님. 여기는 백화점 이예요.

백화점에서는 에누리가 안 됩니다.”

“자. 나는 만주에 선교사로 가는데 양복이 필요하오.

그러나 그리 많은 돈은 낼 수가 없소.”

“좌우간 손님. 바지저고리를 벗고

양복이 맞는지 입어나 보십시오.”

“저...저기 윗 적삼만 입었으니 벗을 수가 없는데...”

“그럼 그냥 옷 입은 채로 서 계시면

제가 대강 재어 보겠습니다. 손님.”

처음 사는 양복인데 입어 보지도 못하고

대강 크기만 재보고 사게 되었다.

“손님. 이 옷이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만주로 선교사로 간다하니 조금 싸게 해 주어

나로서는 거금을 주고 양복을 한 벌 샀다.

“손님! 저쪽 옆에 가시면 양복 안에 입는

와이샤쓰와 넥타이 등을 파니 사시면 됩니다.”

드디어 양복 안에 입는 내복 일습(一襲)을 사기는 샀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넥타이를 매는 일이었다.

합회 본부와 시조사에서 일하시는 여러분에게 물어보아도

모두가 여출일구(如出一口)로 넥타이 멜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양복을 그냥 싸 가지고 일루(一縷)의 희망을 안고

원산으로 왔다. 그 이유는 원산교회 박재경 전도사는

나와 의명학교와 신학과 동기 동창인데 박씨는 선교사와 같이

지난 경험이 있으니 넥타이 매는 것쯤은 알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웬걸! 박 전도사도 넥타이를 맬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낙망이었다. 그때 교인되는 박마리아씨가 경영하는

원산 문화여관에 2일간 묵었는데 수없이 넥타이 매는 연습을

하고 또 하다가 뜻밖에 성공했다.

원산교회에서 안식일설교를 부탁받고 요한복음 5장 39절을 주제로

설교를 하고 다음날 원산서 배로 청진을 향해 떠났다.

상당히 빠르다는 배인데도 원산서 청진까지 19시간이 걸렸다.

이등선실에 탔으나 나와 내 아내는 뱃멀미를 하여 몹시 고생을 했다.

나는 여관에서 성공한 넥타이를 풀었다가 다시 매기가 힘들까보아

안식일은 물론 배에서도 풀지 못하고 있었더니

풀을 잔뜩 먹인 와이셔츠의 칼라에 내 목이 얼마나 쓸렸는지

내 목은 멍이 여기저기 들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난다.

청진은 산을 깎아 만든 항구이라 여관까지 올라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는 인력거를 타고 가긴 했지만

많은 짐과 아이 둘을 데리고 고생을 많이 했다.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여관에 도착해서는 장국밥과 곰탕을

한 그릇씩 시켜 먹었더니 멀미가 곧 없어졌다.

다음날 청진에서 회령까지 가는 회령선 열차를 탔는데

협궤(挾軌)를 이용하는 조그마한 경편열차 이였다.

이 경편열차의 찻간은 아주 비좁아서 두 아이와 아내는

겨우 자리를 얻어 앉히고 나는 손잡이 줄을 붙잡고 서서 갔다.

내 앞에 어떤 점잖은 양복 입은 신사가 서서가고 그 옆에는

굵은 베로 만든 상복을 입은 상주가 서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열차가 매우 심하게 흔들리자 앞에 서있던 상제가

손잡이를 놓치면서 엉겁결에 옆에 있는 신사의 손을 잡았다.

그 상제는 효자노릇 하느라 손톱을 너무 길게 길렀는데

그만 신사의 손을 긁어서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모두 당황하기에 나는 곧 여행 짐에서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던

맨솔리담(안티플라민 종류-편집자주)을 꺼내서 그 신사의

상처에 발라 지혈과 소독을 해 주었더니 두 분이 모두

매우 감사해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과 친해져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 시에는 비상약 등을

가지고 다니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기찻길 오른편은 험한 산이고 왼편은 두만강 물이 흘러

좋은 경치를 보며 회령역까지 왔다. 이 곳에서 두만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건너가기 전에 일본 세관에서 통관하느라고

짐을 다 조사받았다. 두만강 건너면 개산돈이라는 중국 땅이 되는데

거기서 또 중국세관에서 조사를 받느라고 큰 어려움을 당했다.

더구나 국경을 건너본 경험이 없어 더 고생이 심했다.

여기서 최종 목적지인 용정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여기도 경편철도(輕便鐵道)로 아주 작은 열차였다.

세 시간 남짓 여행 후에 북간도 용정에 도착했다.

2. 삼도구

반갑게도 최태현 목사와 용정에 계신 진윤삼 씨라는 분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처음 오는 먼 북간도 땅에서

이렇게 동포이며 교우되는 사람의 영접을 받을 때

그 기쁨과 감사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최태현 목사님은 우리를 북간도 선교본부가 있는

투도구로 인도하셨다. 간도의 명물인 말 네 필인지

여섯 필인지로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났는데 길이 나빠

몹시도 덜컹거렸다. 한 세 시간 가량 걸려 투도구에 도착하니

최 목사님 가족과 간명학교 직원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어 감사했다.

간명학교 직원 중에 나의 의명학교 선배인 강태석 선생과,

나와 동기동창인 여선생 최경신 씨도 계셨다.

모든 교우들이 젊은 우리 내외와 가족을 사랑으로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나의 이삿짐이 오기까지 일주일 동안

최 목사님 댁에서 지내면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밀가루와 그 외의 물품들을 사서

최 목사님 댁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최 목사님 댁에 묵는 동안 하루는 의명학교 선배

강태석 선생의 인도로 조선청년 유지들의 모임에 갔더니,

투도구에서 곧 정구대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그 후원을

동아일보 지사와 조선일보 지사 중에 어디에서

받을 것인가를 놓고 심하게 옥신각신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참석했지만 생각되는 바가 있어 발언권을 받아

“지금 국내에서는 외국에 계시는 여러 분들이 얼마나

단결하여 살고 있는가 하며 주시하고 있는데 비록 작은 일이지만

외지에서 단결한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사이좋게 동아, 조선 두 지국의 후원을 다 받아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그것이 좋겠다.” 해서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어 마음이 흐뭇했다.

며칠 지나 나의 짐을 찾고 보니 조선인의 짐이라 그랬는지

모든 짐을 다 열어 본 것이 확실했다.

짐이 도착하고 나서 최 목사님은 우리를 용정에 있게 하려 했으나

사정상 투도구에서 서북으로 130리가량 더 들어가는

화룡현, 삼도구(三道構-忠信市)로 가게 되었다고 하셨다.

원래 나는 일본인과 한국 사람들의 중심지인

용정에서 목회를 하기로 되어 있었고, 또 최 목사님도

나에게 보내신 서신에 “용정에 와서 사역을 하라”고 하시었는데,

지금 투도구에 온 것도 의아한데, 백리길이 더 되는 벽촌인

삼도구로 가라 하시니 좀 당황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곳 교우들까지도 “용정은 북간도의 수도나 다름이 없지만

삼도구는 본토인들이 살기에도 무서운 곳이라” 하며 문제를

제기하라고 했다. 더구나 투도구 교인 강동댁에 저녁을 초대받아

갔다가 내 편상화(編上靴)를 잃어버려 나의 마음은 간도라는 곳이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삼도구는 여기보다도

사람 살기에 더 무서운 곳이라고 말들을 해대니

어린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사지로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기도하며 내가 교회 일을 시작할 때 “어디를 가든지

지도하시는 분이나 또는 사역자들 사이에 충돌은 피하기”로

결심하였던 일과, 또 이렇게 윗분이 이야기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최 목사님과 웃는 얼굴로 의견을 나누고는 삼도구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곳에는 우리교회 학교인

삼명여학교가 있으며 박윤순 전도사가 주재했던 곳이라 한다.

며칠 후, 나의 가족은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신 최 목사님 가족과

다른 교우들을 떠나게 되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최 목사님 자당께서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연로하신 어머님의 사랑은

“나도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자”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투도구만 해도 연길현에 있는 꽤 큰 도시로 일본 총영사관 분관도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삼도구는 투도구에서 서북쪽으로 130리가량

떨어져 있는 화룡현에 있는 소도시로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상당히 위험하여 당일에 가려면 매우 일찍이 떠나야 했다.

아침 7시경에 중국 사람이 부리는 마차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우리 네 식구는 그 짐 위에 탔다. 이 마차는 말 여섯 필이 끄는데

길이 어찌나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은지 마차가 곧 넘어질 것만 같았다.

거기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중국 사람의 말 모는 소리는 괴상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한참을 달려 “추산자”라는 곳에 있는 주막집에서

점심을 먹자는 것 같았다. 우리 젊은 부부는 무섭기만 해서

점심도 못 먹고 그냥 짐 위에 앉아 있다가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심심산곡(深心山谷)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좌우를 살펴보니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갈라진 홍해를

건너던 길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연상되면서 겁이 났다.

이런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니 벌써 해는 서산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마차꾼은 마차를 사정없이 빨리 몰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겁먹은 채로 중국인이 하는 대로 있을 뿐이었다.

어린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처음 가는 중국 땅,

그것도 무섭다고 알려진 이 산 속 길을 안내자도 없이

말도 안통하고 거칠기만 한 중국 말 몰이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야 하니 어느 듯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하루가 일년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급기야(及其也) 삼도구에

도착하니 벌써 캄캄해 졌는데 의명학교 선배인 장병삼 선생이

학생 몇 명을 데리고 동구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모든 걱정과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장병삼 선생은 우리가 오는 확실한 날짜를 몰라 학생들과

우리 가족을 맞으러 매일 10리 길을 나왔다가 이삼일을 허탕치고,

행여 오는 중간에 무슨 어려움이나 있었는가? 해서 염려를 하면서

다시 마중을 나와 있다가 우리를 만나자 너무도 기뻐했다.

오는 길에 점심을 먹자던 “추산자”부터 이곳까지는 아주 위험한 산속으로,

날이 저물면 태반(殆半)은 마적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 중국 마차꾼이 그렇게도 사정없이 마차를

빨리 몰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렸다.

이삿짐은 삼도구교회 손성철 형제의 집에 풀었는데,

전 가족이 다 교회에 나오는 평신도 집안은 이 가정뿐이었다.

장병삼 선생도 이 댁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이 때가 1924년 5월 중순이었다.

손성칠 형제의 집은 잘 꾸려놓은 집은 아니었지만 언어가 통하는

교우의 집에서 하룻밤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다음날 장 선배는 나에게 우리가 앞으로 이 집에서

함께 살 것이라 하면서 집주인 되는 손 형제는 오래전에

출타하였는데 삼일 후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과연 삼일 만에

손 형제가 돌아 왔는데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분이 모든 일을

기도와 신앙으로 해나가는 매우 신실한 형제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고, 정 전도사님! 여기 오신 것을 정말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손 형제님! 정말 반갑습니다. 주인도 안 계신 집에

이렇게 며칠을 묵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목공 기술로 먹고사는데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무산에 어떤 집을 개축(改築)하다가

정 전도사님 오시기 전에 다 끝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어쩌다가 끝도 못 내고 이렇게 전도사님 오시는 날

제때 출영(出迎)도 못해서 매우 미안하구 만요!.”

나를 환영하려고 일도 끝내지 못하고 오셨다니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뭉클했다.

“손 형제님! 저 때문에 일도 끝을 못 내고 오셨군요.

너무 죄송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일을 하던 중 갑자기

앞을 잘 볼 수가 없게 되어 그랬답니다.”

“아니, 그래 지금은 괜찮으신 가요?”

“네, 지금은 눈이 좋아 졌어요.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십시오.

전도사님 오신다는 날은 되어오는데 일은 안 끝나고

눈은 안보이고....그래서 이왕 늦었으니 눈이 밝아지면

일을 끝내고 가자했는데 눈이 회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눈을 밝게 해 주시면 일은 다음에 할 터이니

집에 가서 전도사를 맞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날 이렇게 눈이 밝아져 하던 일은

그냥 두고 이렇게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감사는 제가해야지요. 좌우간 저희 가족이

손 형제 집에 살아도 되겠습니까?”

“무시게 소리를 그리 하십니까? 물론 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도사님 가족이 지낼 방을 곧 새로 만들 터이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손 형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 가난한 살림에 영양부족으로 잠시 눈이 나빠졌던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분의 순진하고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감사했다.

우리에게 얼마나 잘 해주시는지 “천사인들 이만큼

대접받을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 형제는 그 이튿날부터 우리가 있을 방을 꾸렸는데 1주일 이내로

부엌 한간, 방 두간을 얌전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단한 기술이었고

그 정성에 우리는 너무도 감동을 받았다. 비록 그분 자신의 집을

증축 한 것이라 하시며 극구 사양 하셨지만 나는 너무 감사해서

40원을 사례금으로 드렸다.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이렇게 해서 손 형제의 집에 삼명학교 교사 장병삼 선생 가족과

나의 가족을 합해 세 가족이 살게 되었다.

손 형제 부부는 본래 침례교회에서 개종한 형제인데

아들 셋, 딸 둘, 홀 아버님, 이렇게 여덟 식구가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하면서도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단지 부친이 신앙을 받아들이지를 않아서 퍽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삼도구는 생활수준이 퍽 뒤떨어진 곳이었다.

민가(民家)가 700호 가량 되는데 변소 있는 집이 거의 없어서

아침저녁에 나가보면 그 근처 밭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 대소변 보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곳에 우리교회와 삼명여학교가 있었다. 교회에는

이화배 씨, 김산진 씨, 장병삼 씨, 손성철 제 씨와 그 가족,

그리고 남녀 학생 3-40명이 다였다.

학교의 이름은 삼명여학교인데 학생 태반이 남학생이니

학교이름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이름을

“삼명학교”로 고쳐 부르게 했다. 교사라고는 나의 선배인

장병삼 선생 한 분뿐인데 그분은 7원을 월급으로 받고 있었는데

그것도 정식사역자가 아니어서 학생들 월사금이 들어와야 주는

딱한 형편이었다. 나는 매월 45원을 받는데 나의 선배 장병삼 씨는

월 7원을 받고 그것도 정식 사역자도 아니라니!

나는 이런 형편을 보고 내가 처음 교사 일을 시작했을 때

힘들었던 일이 생각나서 나의 급료에서 거의 일 년 동안 매달

12원씩을 떼어 장 선생께 드렸다. 한편, 교회 본부에

장 선배를 정식 사역자로 채용하도록 요청했다.

거의 일 년이 되자 장병삼 씨는 정식 사역자가 되었고

월급도 매월 35원씩 받게 되어 그분은 물론 나도 그분을 위해

탄원한 일이 이루어져 매우 기뻤다. 장병삼 씨는 3.1운동 피의자로

간도로 피신했다가 동창인 박윤선 전도사를 만나 삼명여학교를 설립했다.

삼도구에서 서쪽으로 30리쯤 가면 조선독립군과 일본군이

격렬한 전쟁을 치른 청산리가 있다. 삼도구에는

일본영사관에서 보조하는 “명신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의 조선인교사 대부분은 동족을 괴롭히는

스파이의 역할을 하면서 특히 교회활동을 감시하기에

전도사는 항상 이 사람들을 조심해야 했다. 이런 형편이니

주민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냉담했다. 그러나 노력 끝에

두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으나 새 교인 한 집이 화재를 당하게 되자

“교인이 되더니 그렇게 되었다.”라고 주위에서 많은 조소와

핍박을 해서 전도는 더욱 힘들어 졌다. 얼마 후, 투도구에 있는

간명학교에서 일하던 강태석 선생이 고국으로 전근되자

나에게 삼도구 교회일과 투도구의 간명학교일을 함께 보라는

지침이 내려와 4개월 동안 간명학교 일도 도왔다.

간명학교의 일을 성의껏 도와 학부형과 학생들이 감사해했지만

거리가 먼 관계로 삼도구 교회는 손해를 많이 본 셈이다.

내가 간도로 올 때 먼저 일하던 박연순 전도사는

“간도의 좋은 점은 곡식 값이 싼 것이다.”라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부임해온 그해에 간도에는

몇 십 년 내에 처음 보는 대 흉년이 들었다.

35전 하던 콩 한 되가 열 배 가까운 3원 20전까지 하게 되니

생활고가 심했다. 내가 이곳으로 온 이듬해 3월경에 내 둘째 딸

충실이가 태어났는데 투도구에 임시 전도부인으로 수고하던

최마르다 씨가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 이곳 이름이

삼도구 충신장이어서 “충” 자를 넣어서 “충실”이라고 지었다.

흉년으로 모두 고생을 했다.

이곳에 온 다음해 즉 1925년 5월에

한국 연합회총회에 참석한 후에 서울 종로양복점에서

여름양복을 한 벌 맞추었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어머님과 지내던 큰 아이

태혁이를 데리고 삼도구로 돌아왔다. 비록 벽촌이지만

이곳의 사정도 알만하게 되고 전도하는 일도 자리가

잡힐 듯 해 가는데 북간도의 수도격인 용정으로

전근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925년 8월경이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8

(북간도의 수도격인 용정으로 전근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925 8월경이었다. 연재 #7의 끝 부분입니다.)

3. 용정 선교- 1

산설고 물선 삼도구였지만 2년여를 지나며 정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니 우리 모두의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용정은 수도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우리 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전도를 했어도

교인을 한 명도 얻어내지 못한 곳이 용정이었다.

그나마 용정서 정석영 씨라는 분이 우리 교리를 조금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이분을 통해 교회를 시작하려고

조선 돈 40원을 맡겨 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분이 사정이 급했는지 그 돈을 사용을 하고는

내어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새로 부임하는 나에게

그분이 빚진 돈 대신에 그분의 집을 차압하여 들어가

살라는 것이었다. 우리교인이 한 명도 없는 용정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든데, 교리를 공부하던

유일한 사람의 집을 차압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라니

너무 마음이 아파 재고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이미

결정이 된 일이라 하여 할 수없이 1925 9월경에

정석영 씨가 있던 집을 차압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용정으로 전근하던 날이 화요일이었는데, 우리 젊은 부부는

이 마음 아픈 일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며 예배드리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집에서 거의 2년을 살았다.

용정은 정말 전도하기가 힘든 지역이었다.

간도에는 이미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반기독교 사상이 충만해서 복음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음을 바꾸어 우선 사람들을 먼저 사귀자는 생각에

다른 교파 사람들이나 다른 기독교 단체들을 심방해 보았다.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처럼 간도에서도 안식일 교인이라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해서 사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러니 반기독교 사상이 가득 찬 일반 단체들이야

사귀기가 더욱 힘들었다. 더구나 사회단체 사람들을 방문하면

“아직 청년인데 그래 해먹을 것이 없어서 전도사라고 하는

간판을 가지고 서울서 여기까지 나다니는 거요?”하고

빈정거릴 때는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정하고 듣던지 안 듣던지 겸손히

우리 도리를 계속 증거 하자, 차츰 감동이 되었는지

비방하는 말들이 줄어들고, “안식일교회의 도리도

한번 알아보아야 되겠다.”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생겨서 간도 선교지 본부가 있는 투도구에 가서

현재 상황들을 보고하고 우리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 드리곤 했다.

그러나 사단은 가만있지를 않고 방해를 했다.

기도요청을 위해 제출한 나의 보고(報告)를 간도 지방의 교우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와 이 곳 교회 지도자들을 비교하여

정 전도사는 이곳 지도자들 중에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느니 하면서 지도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형편을 감지(感知)하고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지도하시는 분과 조금이라도 마찰이 안 생기도록 힘쓰며,

심지어는 투도구 방문도 삼갔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소문은 계속되어 우리를 괴롭혔다.

나는 용정의 선교를 위해서 지도자들의 도움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 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의 확산을 피하가 위해서는

보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의 자녀들은,

교회 일에 있어서, 어떤 지도자는 행정에, 어떤 분은 전도에,

어떤 분은 가르치는 일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도자들을 비교하여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좋은 점들과

뛰어난 점들을 찾아 칭찬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지도자들도 인간인지라 이런 소문을

듣기가 거북하였던지 교회의 장로이던 이준래 씨에게

“아무쪼록 교인들로 하여금 정전도사가 지도자들보다 낫다고 하는

그런 소문과 비난을 퍼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준래 장로는 성격이 급하신 분이라 일언지하에

“목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도에 들어오는 전도사가

당신 네 보다 나은 사람들이 오면 안 된단 말씀입니까?”하면서

오히려 면박을 드린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는 이러한 이야기를

이 장로께서 직접 나에게 말하여 주는데 그때 거북했던 심정은

표현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이 장로님께

“나는 용정지역에만 몰두하여 열심히 전도하다보니

조금씩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이지 결코 다른

지도자들보다 잘하는 것이 아니니 제발 교인들이 사역자를

비교하여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힘써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사역자 사이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사단의 방해를 받아 전도사업에 타격을 받게 되니

교인들은 기도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로 의논을 해가며

문제를 삼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재삼 부탁 드렸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지역을 방문 다니는 일이나,

다른 곳에서 개최되는 전도 집회에 다른 곳의 사역자를 불러오면

불러왔지 나는 언제나 제외되었다. 물론 용정 전도사업을 위한 도움도

거의 얻을 수가 없었다. 교인들의 엉뚱한 행동과 말로 인해서 생긴

오해 때문에 모든 일에서 나를 제외시키는 지도자들의 태도를

이해는 하면서도 매우 마음이 상했다. 용기가 많이 꺾였지만

우리부부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눈물로 기도드리면서

더욱 조심해서 나아갔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거늘 조심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든 일들이

더 많이 생기겠는가?

간도지방의 수도격인 용정의 선교사업은 이렇게 엉뚱한 방향에서

사단의 방해를 받게 된 것이었다.

1926년 초 여름이다. 투도구에 계신 최태현 목사님께서

의논하실 일이 있다 하시며 부르시기에 갔다.

최 목사님은 내가 간도 지역에서 처음 사역했던

삼도구 예배소에 나오게 된 성씨라는 분에 관한 일을 설명하셨다.

삼도구 예배소에 성씨 가족이 점점 많이 나와 지금은 예배소의 주요 직분도 성씨 가족이 대부분 맡아 일하고 있기에 예배소가 성씨가족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성씨의 아들과

이 지방의 유지이며 재력가인 영씨라는 분의 무남독녀가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삼명학교 졸업생이었다.

“남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는가?”마는 당시에는

상당히 나이가 많은 남녀가 연애를 해도 큰 문제로 취급을 했는데

성군과 영양은 나이도 별로 많지 않았으니 소문도 크게 나고 그만

이 지역에서 큰 문제로 부각(浮刻)이 되었다.

더구나 반기독교 사상이 만연한 간도지역에서 두 사람이 다

안식일교회 학교인 삼명학교 출신이라 하여 교회의 이름이

연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더구나 처녀의 아버지는 이 지역의 재력가요, 세력가로서

교회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처녀의 아버지의 요구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최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일이 이 지역 재력가요, 시력가인

영씨의 심한 방해를 받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삼도구에 가서

성군의 부친을 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해임하고 책벌(責罰)하에

있게 하였다. 그러자 성선생은 문제를 일으킨 아들의 아버지로써

책벌은 달게 받기는 하되 이제부터 교회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 버린 것이었다.

교회발전에 지장이 될까하여 고심한 끝에 부득이 교회직분을

해임하고 책벌 하에 두었는데 그 문제에 마음이 상하였는지

본인은 물론 그의 많은 가족이 전부 교회출석을 거부하게 되니

잘하려고 한 일이 오히려 난관에 봉착하게 되어 버리고

교회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도 출석하지 않는 성씨와 대화의 길까지 막힌 상태에서

최 목사님은 나른 불러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으시니

나도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었다. 최 목사님은 나에게

“그 지역에 살면서 성씨와 가까이 지내었을 터이니

그 분을 찾아가 설득해 보라”고 말씀 하셨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난처했지만, 젊은 나를 믿고 보내시는

최 목사님의 말씀이 감사하기도 하고 또 윗사람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자는 것이 나의 결심이었기에 용정서 170리 나 되는

먼 길을 가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이 길은

언제 화적을 만날지 모르는 위험한 길이라 화요일 일찍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상황은 어색했지만 한 지역에서

사이좋게 살던 사이라 기쁘게 만나, 성선생에게 최 목사님도

고심한 끝에 내린 힘든 결정이었음을 설명 드리고,

기도와 사랑으로 성경 말씀을 펴서 간곡히 권면 했더니

이날 저녁예배에 성선생의 모든 가족이 다 출석하였다.

며칠을 지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말씀으로 권면 드렸더니

안식일예배에도 성선생과 그의 온 가족이 다 출석을 했다.

온 가족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지도자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모두 이렇게 교회에 남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된다.

그런데 1926 7월경에 일이 생겼다.

성선생의 가족이 교회에는 나왔지만 이 지역 세력가인 영씨가 성군의

연애문제를 받아드리기는커녕 더욱 심하게 반대를 하였다.

심한 반대에 부딪친 두 남녀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도피해 버렸다.

그러자 처녀의 아버지 영씨는 화가 날대로 나서 성군의 아버지 성선생을

감금해 버린 것이었다. 당시 만주에서는 세력만 있으면 자기가

원한을 품은 자를 감금하는 일이 보통으로 있었다.

일종의 사형(私刑)이었고 법()도 이런 일에 눈을 감곤 했었다.

그런데 이 처녀의 아버지 영씨는 간도 화룡현 현장(弦長)이며

또 화룡현에 있는 “명신사”의 사장이니 재력가이며 세력가이었으니

이 사람들이 성씨를 감금하는 것은 별로 큰일도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성씨 가족은 앞으로의 일이 두려워서

산지사방(散之四方)하는 난처한 형편에 이르렀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성선생의 부인이 나를 찾아와서 자기 집을

처분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곳 현장(弦長)에게

밉게 보인 집을 처분하러 다시 삼도구로 간다는 것은

호랑이의 굴에 들어가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분에게 맡겨 보라고 하기도 난처한 일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돌봐주기로 승낙을 하고 또 기도드리면서

170리나 되는 삼도구를 다시 찾아가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와 맘 놓고 의논할 수도 없었다.

또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드리고 나니 마침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기명이라는 나의 고향친구가 생각나

그 친구를 찾아가 성선생의 딱함을 설명하고 여러 번 부탁을 하자

자기가 그 집을 사주겠다고 하며 가옥대금도 미루지 않고

그 이튿날로 주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을 돌보려고 힘쓰는 때에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보고, 다시 믿고, 감사했다.

그 집 대금을 받아들며 기뻐하던 그 가족들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26 3월초에 있던 일이다.

투도구 교회에서 연초 사경회를 열었는데 강사로 초빙되어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들리는 소식에 용정에 있는 몇 장로교회가

합동으로 당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장로교 중앙교회에서 대 사경회를 열었는데 용정내 사회단체들이

크게 반발하여 방해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직 젊은 나이라

흥미가 많아 투도구 사경회를 마치자마자 용정으로 와서

장로교 중앙교회를 찾아갔다.

무려 1000여명이 참석했는데 앞줄에는 무수한 환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강단에는 김익두 목사를 보호한다고

중국순경들이 서있는데 그것도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장로교회 책임자들이 너무도 지혜 없이 무모하게 일을

진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가 폭행을 당할까봐

검을 빼어든 경관을 강단 앞에 세우다니!

그 유명하다는 김 목사는 설교 중에 자기의 과거 일을 고백하며

어떤 기생집에 다니던 이야기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군중 속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김 목사에게 퍼부으며

찬송가를 집어던지고 돌을 던져 그 좋은 등들을 깨버리는 등,

방해를 하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러자 검을 빼어든 경관들이

주동자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앞에 병자들이

사람들에게 밟혀 뼈가 부러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간 나는 여러 단체들을 방문했던 관계로 난동을 피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집회가 어수선하게 끝난 후에

찬송가를 찢던 사람, 기도를 방해한 사람들을 만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나는 이 교회와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한일은 너무 무질서하고 민족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이런 집회가 좋지 않게 생각되거든 반종교 강연회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나는 비록 타 교파에서 하는 일이지만 이런 비합리적인 일들이

기독교 전체에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장로교회 책임자를 만나 “검을 빼어 든 경관을 강단에 세운 것은

비 신앙적이며 비난받을 일이라”했더니 그 이튿날부터 시정 되었다.

다음날 거리에는 반종교 대강연회가 있다는 광고가 크게 나붙었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서 그 강연을 금지했고 장로교 대 사경회도

다소 질서가 잡혀 그럭저럭 끝났다.

다음날 장로교기관지 “기독신보”를 본즉, 이번 난동 중에

병자들이 밟혀 뼈가 부러지는 난리가 있었는데도, 수십 명의 병자가

회복되는 성공적인 사경회라 자찬하는 보도가 실렸다.

나는 기독신보 책임자를 찾아 “그런 허위보도를 하니 당신네

교회위신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반기독교 사상이 생기지 않겠는가?

했더니 “그 기사를 취소하는 정정 보도를 하겠다.”했다.

나는 아직은 젊은 기독교인 중 한 사람으로 의분에 차서

그리했던 것인데 다행히 타 교파교인인 내 말을 이해하고

고치는 태도를 보면서, 느낀 점도 많고 감사했다.

나는 이번 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지

순경의 칼이 아님을 배웠다.

용정으로 전근된 지 1년이 되어 오는데 교회는커녕 완전히 개종한

교우 한 명도 제대로 얻지를 못하니 마음만 답답했다.

여러 날을 생각한 후에 투도구로 최태현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용정은 안식일 교인이라면 상종도 아니 하니

이제는 광고를 크게 내어 대 전도회를 개최해 보는 길이

최선인 듯 합니다. 오랜 기간 생각한 것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정 전도사! 이곳 용정지역에는 안식일교회만 배척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에 대한 반 기독운동이 심한 곳이니 소용없을 것이오!

“목사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 전도회를 해서

다른 교파 사람이라도 많이 모여야 우리교리를 알리지 않겠습니까?

한번 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나 장로교회도 전도회를 하다가

사고가 날 뻔 하지 않았소? 큰일이 생길 수 있으니 고려합시다!

“목사님!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 않습니까?

“정 전도사! 만약 전도회를 시작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 질 수가 있겠소?

이 말씀은 나에게, 사고가 생길 수 있으니 대 전도회를 포기하라는

경험 많으신 분의 말씀이신데 이 때 내 나이 30전후로

피 끓는 시기인지라 다른 길이 보이지를 않았다.

“목사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런다고 말씀 드렸다. 다른 길이 없었다.

나를 말릴 길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억지로 허락을 해 주셨다.

“그럼 정 전도사가 집회장소와, 중국, 일본 당국의

집회허가까지 책임지고 얻으시오!

젊은 전도사의 무모한 요청을 들어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당시에 큰 건물도 없거니와 작은 건물도 기독교 행사를 위해

빌릴 수가 없어 대부분 장막 전도회를 주로 했다.

그 때부터 나는 장소와 경비를 위해 눈물로 기도드렸다.

얼마 후에 용정 중앙지역에 넓은 곳을 찾아내어

관리인을 만나보니 일본인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겸손하게 했더니

그 분은 “그렇게 공공을 위한 일을 계획하는데 무임으로 빌려주었으면

좋겠지만 지주가 무엇이라 할 듯하니 1개월 사용료로

4 50전을 내라”고했다. 그야말로 거저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용기백배 되었다.

일본과 중국, 양 경찰 당국에 집회계(集會計)를 제출했더니

일본 측에서는 “요즘 민중의 사상이 반기독교 적으로 나가고 있으니

매우 조심하라!”는 조건으로 양해가 되고 중국 측에서는 장로교집회를

거론하며 전도회 기간동안 정복경관을 임석 시키겠다면 허락을 한다했다.

겸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여

결국 허락을 받았다. 불가능 해 보이던 일들이 해결됨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심을 감사했다.

장막은 대, , 소 세 가지 크기가 있는데 900명에서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 천막을 가설했다.

이번 전도회에 최태현 목사를 위시하여, 청진의 전도사 정붕상 씨,

함북 길주의 전도사 정관신 씨, 간도주재 임시전도부인 최마르다 씨,

용정주재 전도사 정동심 제씨등이 활동하게 되었다.

정붕상, 정관신 두 분은 전도회 10여일 전부터 용정에 와서

천막 치는 일에 수고를 많이 했다.

천막 안에 임시 강단과 900여명이 앉을 의자를 만들었다.

1926 8, 전도회가 시작되었다.

집회 시작이 저녁 8시라고 광고를 했는데 한 시간 전인

7시경에 집회장소는 이미 초만원이 되었다. 그것도 여자나 노인은

거의 없고 청장년만 가득 들어앉았다.

나는 우리교회의 전도 집회에서 청장년만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이 전에는 물론 이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나의 사회로 전도회는 시작이 되었고 첫날에

최태현 목사께서 “오늘의 기독교 현상” 이라는 문제로

전도강연을 시작하셨는데 시작한지 5분도 안되어

젊은이들이 일어나 야유를 하면서 좌석을 발로 밟아

부수는 것이 아닌가? 형편이 이렇게 되자 최 목사님은

설교를 아예 포기하시고는 사회자인 나를 돌아다보시는 것이었다.

이 순간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가 느껴졌다.

장로교단에서 하던 전도회가 난장판이 될 때는 내가 사리판단이

되었는데 막상 내가 주장해서 하는 전도회가 이 지경이 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 청중을 향해

“오늘 전도회는 이렇게 소란스러우니 이것으로 폐회한다.”고 선언했다.

최 목사님을 뵈올 면목도 없고 다른 전도사들은 보기도 민망했다.

그렇다고 하루 만에 전도회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더구나 최 목사님은 이튿날 설교는 나보고 하라고 하시니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밤새 기도를 드리고 나는 당시에 예언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루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세계의 역사와 예언” 이라는 문제로

설교를 시작했다. 역시 전날과 같이 설교를 시작하자

곧 야유가 일어나며 청년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바로 그때 무엇인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간도에 있는 청년들이 처음 듣는 강연회에 와서는,

아무리 훌륭한 연사가 강연을 해도 그 연사를 시험해 보느라고

야유를 하며 발을 구르는 폐풍(弊風)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청중의 야유나 발을 구르는 것을

불문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 열을 내서 성심 성의껏 설교를 했다.

그러자 청중 중에서 “그놈 꽤 비위가 좋은 놈이네!”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마치 청년들의 시험에

통과된 듯 용기가 나서 당시 신문에 실린 세계정세를 예를 들어가며

열심히 예언의 설교를 끝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기 전에 천막위로 돌들이 날라 왔다.

설교가 끝나자 내 뒤로 어떤 이가 와서 나의 옷자락을

잡아 다니며 자기 집으로 피신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단에서 내려가 몇몇 아는 청중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그 중에는 반기독교 운동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이 내게 “참 수고 많이 했소!”라고 인사를 했다.

곧 나는 “자기 집으로 피신하라”고 하던 그 분의 집으로 갔다.

그 사람은 감리교에 다니는 분으로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한

김하선 선생이었는데 내 설교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여

나를 자기 집으로 피신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당시 용정에 있는 기독교 교인이나 지도자들 중에 건전한 자들은

“이 험악한 지방에서 전도회를 하는데 부디 좋은 결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초 교파적인 귀하고도 감사한 일들이 있었는데,

이 분도 우리교단의 전도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분 중에

한 분이었다. 사실 일본의 탄압과 공산주의 이념으로 어려운 그때에,

생각이 있는 신앙인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서로 도우려 애썼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이런 귀한 일들은 간과되고,

그 당시에 어려웠던 일들을 가지고 같은 교단 안에서

서로 헐뜯는 우를 범하고 있음은 마음 앞은 일이라 하겠다.

내가 이날 설교한 요지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힘과 지식으로

이상적 국가를 설계하려고 힘쓰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알려진 소비에트를 보시오.

정말 이상적인 나라라면 왜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있는 도로츠키를

추방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때가 이르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건설해 주시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도저히 아름다운 평화국가,

이상국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역설했다.

처음에는 이 지방 관습대로 나를 시험해 보려고 방해를 했으나,

나중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젖은 수백 명의 군중이 실제로

나의 설교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돌들을 던졌다는 사실을

김하선 선생이 알고 나를 피신시킨 것이었다.

군중들은 내가 피신한 김 선생의 집을 알아내어 찾아 와서는

“오늘 저녁에 강연한 놈 내 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집주인인 김씨는 ”그 손님은 내 집에 있소. 하지만 내 집에

온 손님이니 내놓지 못합니다!”라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한참동안 ”그놈! 내 놓아라!, “못 내 놓는다!”하며 옥신각신 하더니

급기야는 ”당신이 그 놈을 안내어놓으면 당장 이집을 부순다!”는

위협까지 나왔다.

나는 더 험악하게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주인을 끌어들이고

“내가 바로 저녁에 전도 강연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랬더니 군중들은 “네가 전도하면 전도했지 왜 이상적인

사회주의 나라 소비에트를 비방하느냐?”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그놈 죽여라!”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공손히 말하기를 “여러분이 나의 말을

자세히 들은 후에 나를 죽이겠으면 죽이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군중이 약간 조용해 졌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명확하게 말을 했다.

“여러분! 나의 말을 자세히 들으시오. 저녁에 전도회를 시작할 때에

여러분에게 전도설교에 관해서 물을 말이 있거든 강사들이 이런

주소에 있으니 그리 오셔서 물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늘저녁 설교 중에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시사에 대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 직접 만드신 요즘의 신문에 연일 보도되는 것을

그대로 말한 것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이 쓰신 글을 이용한 것이

잘 못 한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신문이 잘못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군중이 더욱 잠잠해졌다. 나는 용기가 생겨 더 힘차게 말했다.

“금방 그놈 죽여라! 소리 치셨는데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여기서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일이 있다면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러자 군중 속에서 “옳소! 그렇소!”하는 말도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은 정동심이오! 나를 죽인다 해도 제 2,

3의 정동심이 나와서 이 기별을 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돌아가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기회를 타서 나는 “여러분 중에 학생들도 많은데

안녕히 가셔서 공부하고 내일 다시 뵙시다.”했더니

“고만 갑시다!”하는 말이 들리더니 풀려서 돌아갔다.

당시 용정지역 내 조선인 사회는 대개가 중학생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동우중학교,

유교를 배경으로 하는 대성중학교, 예수교선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은진중학교, 한인예수교인이 경영하는 영신중학교,

일반인이 경영하는 광명중학교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

동흥중학교 학생들이 반 기독교운동의 선봉자(先鋒者)들이었다.

두 번이나 밤 집회에 난리를 겪고 나니, 이 전도회를

중학생들이 참석할 수 있는 밤에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최태현 목사님께 의논을 드리니

최 목사님도 첫날 고생을 하신 지라 나의 의견을 들으신 후에는

시간변경신청을 하라 하셨다. 일단 문제가 생긴 후에 변경신청을 하면

이왕 주었던 허가까지도 취소되기가 십상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변경신청을 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빌립보 4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말씀에서 용기를 얻곤 했다.

혼자서 중국과 일본경찰 당국을 찾아갔다.

중국경찰에 가서는 처음에 사고를 대비하여

경관을 임석(臨席)하게 한다는 것을 사양했던 차라

다소 미안하고 어색했지만 시간변경의 허락을 받았다.

일본경찰은 우리가 시간을 변경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다가

셋째날 밤에도 무리한 난동이 생겼다면 지난 이틀 동안

소란을 피운 사람들까지 다 체포하려던 차에 이렇게

시간 변경을 하니 참 잘한 일이라 하며 허락해 주었다.

전도회 시간을 낮으로 변경하니 참석하는 학생들이 없어서

조용했다. 비록 낮 시간으로 시간을 변경하여 집회를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삼사백 명이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전도회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장, 감리교인, 천주교인

및 성결교인등도 많이 참석해서 우리집회를 위하여

격려의 말과 기도를 해 주다가 우리진리에 공감하여

십여 명 가량이 개종을 했다. 그 중에 용정에서 동북쪽으로

120리가량 떨어진 “훈출라자”라는 곳에 사는

김한웅 씨라는 분이 참석하여 개종한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우리 진리를 전한 결과 약 70여명의 교인이 우리교회로

개종을 하여 교회가 생기는 아름다운 결과를 보았다.

용정 장막전도회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려워 보이는 일도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일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전도회를 끝내고 방문하는 일로 매우 바빴다.

한 금요일에는 우리교회 전도사로 다년간 수고하다가 사직하고

만주에 오신 김성재 씨가 방문 와서 “정 선생 얼굴이 역시

환 하구만!”하고 말을 하기에 “그것이 무슨 말씀이냐”고 물은즉

“자기가 시내 어떤 잡화상에 갔더니 그 주인이 내일 안식일에

우리 예배당에 오겠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김성재 씨는 만주 땅에서 우리교회로 한 사람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에 그런 말을 듣고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면서 나에게 말씀을 전해 주신 것이다.

그 이튿날 안식일에 과연 그 잡화상 주인이 일찍 우리 예배당을

찾아 왔는데 얼마나 기쁘고 흥분되었던지

아직도 말로 표현하기가 힘 든다.

우리는 기쁨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 분은 감리교인으로

당시 훌륭한 애국자이신 남궁억 선생의 지도를 받은 청년으로

사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잡화상을 한다면 매우 바쁘실 텐데 이렇게

토요일에 저희교회를 나오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감리교회 교인이랍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이렇게 나오시면 감리교 목사님도

많이 말리셨을 것 같은데...

“아. 사실은 당신 교회의 전도회를 참석해 보고

예언에 관심이 생겨서 우리 교회 목사님에게

묵시록 공부 좀 하자고 하니까 묵시록은

안식교에서 잘 가르친다고 하셔서 이렇게 나왔답니다.

참 정직한 감리교 목사님도 계시는 구나 생각되었다.

“그러시면 저하고 묵시록 공부를 하셔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우리 목사님과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여길 나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요?

“만일 묵시록 공부를 하다가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다시는 안 올 것입니다”

“아. 약속하지요. 그럼 언제부터 공부 시작하시겠습니까?

“내일부터 매 일요일 오후마다 시작합시다.

그 후 매 일요일 오후에 묵시록을 공부하였다.

묵시록 2장까지 공부할 때는 내가 시작기도를 드렸는데,

3장을 끝내는 날은 그 분의 안색이 아주 딴 빛이 나기에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얼마나 감동적으로 울면서 기도를 드리는지 우리 두 사람은

한참동안 함께 울었다. 정말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 준 것이 없이 이 분은 이날 우리 교회로 개종하였고

일요일에 감리교회 나가는 것을 중단했다.

그 다음 안식일, "이분이 다니던 교회에서 틀림없이

방문 왔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오후에 그분 댁을 심방 하니

정말 감리교회 목사 두 분과 전도부인이 와 있었다.

이 세 분은 개종한 이 교인에게 안식일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열심히 권면 하고 있는데 내가 들어섰다.

감리교 목사는 나에게 "왜 남의 교인을 도적질해 갔느냐"

따지고 들었다. 나는 논쟁도 피할 겸 간단한 대답을 했다.

“도적질을 했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분이 무슨 보리자루나 호박덩어리입니까?

이분이 도적질 당해 끌려 왔다 하시면 이분의 인권을

너무 무시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목사로써 성경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전해서 이분들이 선택하시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말을 했더니 그 세분은 대답대신 "그만 가자!"하고 떠났다.

이 분이 개종을 했다 하지만 적당한 시간에 뒤처리를 위해

방문을 하지 않았다면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개종하신 분이 김완식 선생이신데 정말 안식일에 관하여

말 한마디 아니하고 묵시록만을 공부하여 진리를 깨닫고 개종하였다.

이 분은 이후에 문서전도로 활동하다가 우리 신학을 전공한 후에

훌륭한 사역자로 활동하다가 목사가 되어 일하셨다. 이 분은 내가

남선 대회장이 된 후에 다시 극적으로 만나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용정 선교 제 2부는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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