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가슴을 도려낸 하느님
마지막으로 홍수로 세상을 멸절한 야훼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자. 궁금하지 않은가? 다행히 설화자는 미세하지만 그걸 엿볼수 있는 실마리 하나를 남겨 놨다. 홍수가 끝난 후 야훼는 노아가 바친 제물 향기를 맡고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나는 처음 이 구절을 제대로 읽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왜냐고? 그 엄청난 사건이 끝나고 모든 게 처음 있던 대로 돌아갔다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야기 서두에 야훼가 온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는 뭐라고 말했나.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사람 지은 걸 후회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물로 심판하기로 했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심판한 후에, 그러니까 사람과 짐승을 모두 몰살시킨 다음에 하는 말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라고? 앞에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어서 심판해야겠다더니 나중엔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니, 이게 대체 뭔 말인가? 홍수 전후에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 똑같진 않지만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그런데 앞에선 ‘그래서’ 심판해야겠다더니 뒤에선 ‘그래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니, 이게 말이 되냐는 거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타고난 성격은 고치기 힘들다고 했다. 대개 공감할 것이다. 흔한 말로 은혜 받았다고 해서 사람 성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인격은 변하기가 참 어렵다. 노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악한 성질은 심판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홍수 후에 사람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었다. 이때 맺어진 언약이 ‘새로운’ 언약이라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그걸 ‘새롭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홍수 사건은 야훼가 ‘부분수술’로는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수술’을 감행한 사건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고친 수술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대수술 후에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악할 뿐,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홍수 심판 후에도 사람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뿐, 야훼가 변하는 것뿐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라 ‘우리 하느님이 달라졌어요!’라는 거다. 야훼는 새 언약을 세우면서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다. 야훼는 다시는 이런 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거다. 야훼의 마음이 변했다! 야훼가 사람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거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이 변한 것밖엔 없다. 달리 해석할 수는 없지 않나.
이것을 우린 ‘은총’이라고 부른다. 싸구려 은총 아닌 비싼 은총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은총 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변해서 심판 대신 은총을 준다니까 이를 ‘공짜’라고, 횡재했다고 좋아라 날뛰는 사람은 ‘은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을 게다. 은총은 하느님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일었던 풍랑의 결과니까. 사람에게 은총을 주기 위해 하느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가 말이다. 하느님은 홍수라는 수술 칼로 사람의 환부를 도려내려 고 했지만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자신의 가슴을 도려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분 가슴의 상처에 손을 얹어 느끼는 걸 뜻하고 다시 그 손을 자기 가슴에 얹어 하느님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을 의미할 게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곽건용 목사 저 <알 수 없는 분> 중에서 (pp. 85-87). 꽃자리, 2016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가장 인간적인 표현이다.
전능하신 신에게는 후회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후회하는 신이라면 아마 이미 신이기를 포기한 신일지도 모른다
후회하는 신이라면 전능하신 신이라는 호칭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을 신은 몰랐을까 ?
이 사실에 대한 합리적인 명분과 변명이 있다. 우린 이것을 인간의 자유 의지라고 부른다
인간이 언제부터 자유 의지라는 것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탐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 투성이다
신은 인간이 연구하고 넘 볼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연구하고 탐문하고 탐색할 수준의 존재라면 이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아 홍수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영원히 숙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펼치지 마시라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이고 신은 신일 뿐이다
두 존재의 간극은 그 어떤 명제로도 논리로도 좁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단지 하나님의 사건일 뿐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독단적이고 고발적인 사건이다
인간의 동의나 양해나 이해를 구하지 않는 사건이다
신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동의나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
신은 신으로 그 존재의 의미를 늘 항변하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의 하나님과 그 당시 멸망한 그 수많은 인간들
우리에게도 곧 이러한 끔직한 사건을 한번 더 목도할 날이 이를 것이다
노아 홍수 -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이루시고 개입하시고 심판하신 영역이었다
그곳에 인간의 영역은 애시당초 존재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이러한 불확실한 근거에 인간적인 논리를 대입시키지 말라
함부로 하나님을 폄하지 말라
신은 인간에게 그 어떤 평가도 빋지 않으신다
노아 홍수의 분노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일 뿐이다
신은 절대로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신다 그래야 신이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이치로 이해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 표현이라는 말이다
신의 언어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신적 존재 앞에 인간은 언제나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다
불 한 통에 한 방울의 물방울도 아니다
모래 사장에 모래 하나도 비유하기에는 모자람일 뿐이다
신 앞에 서는 인간은 언제나 신적 권위에 굴복하여야만 한다
어느 한 순간도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빈 틈의 여지는 전혀 없다.
윗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의 비애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많음에 절규한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가 ? 되 묻고 싶을 뿐이다
과연누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단어가 실존하는가 말이다.
신의 변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변덕일 뿐이다.
신은 절대로 변덕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변덕을 부린다 왜냐하면 인간이가 때문이다
쓸데없이 죄없는 타자만 두드리고 앉아있는 내 모습이 한스럽다 못해 불쌍하다
신은 과연 인간을 사랑하실까 ?
신은 과연 인간을 구원하실까 ?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는 이 인간도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할까 ?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모름이 정답일 것이다.
무지가 바로 답이라고 오래전에 배웠다
인간의 무지는 신이 들어오는 출입구라고 배웠다
인간의 무지를 통해 역사하시는 신의 섭리만이 우리의 희망이고 구원이다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절대적인 신 앞에 인간의 무지 - 논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사실앞에 말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기에 항상 절망감속에서 빛을 찾아 구한다
변덕스런 신은 난 믿지 않는다
지유 의지를 논하는 신은 난 믿지 않는다
후회하는 신은 더더욱 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신은 변덕스런 허접한 신이 절대 아니다
내가 믿는 신은 절대 후회라는 것은 모른다
고로 나는 오늘도 내일도 내가 믿는 신이 내 곁에 존재하기에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