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성서해석학 시간에 그룹 토의로 주어진 숙제의 제목이
'바울의 구약 사용과 해석' 이었다.
가끔 그 숙제를 생각해 본다.
바울은 구약을 자유자재로 인용했다.
바울 뿐 아니다. 신약의 기자들이 다 그렇게 했다.
당시 학과 시간에 배운 것은
SDA 의 성서해석(바른 성서해석)은 역사/문자적 해석이라고 했다.
고든 하이드(Gordon Hyde)가 책임 편집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우리 교단 학자들의 해석학 페이퍼들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역사적 문자적으로 해석 사용해야지
우화적 해석, 알레고리즘, 영해...
이런 것들은 배격하라고 했다.
그런데 바울과 신약기자들은
구약을 바로 그렇게
우화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영해하는 방식으로,
한마디로 자유 자재로 쓰고 있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같은, 기독교 교리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말씀들은 물론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는
실천 목회적인 말씀까지
바울은 구약 텍스트의 원래 역사 문자적 의미와는 상관 없이
자유 자재로 그 말씀만을 따 와서 사용했다.
두 언약을 얘기할 때
이삭과 이스마엘을 예로 들면서
아예 이것은 알레고리 (갈 4:24) 라고 할 정도였다.
바울 뿐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구약 '예언' 을 인용한 복음서 기자들도
원래 말씀의 역사적인 문맥, 오리지날 의미와 상관 없이
관심되는 표현이 있는 구절만 뚝 떼어 인용했다.
이에 대해 물었더니
당시 학과를 가르치던 교수님은
'신약의 영감 받은 기자들은 그렇게 해도 되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 는 식으로
대답하신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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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했는가?
한마디로 '자유로움' 이었다.
성경이 기록된 경전으로
마치 일국의 '헌법' 같은
권위 있는 법전으로 받아들여지면
그것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적용하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신약의 사도들과 기자들에게는
헌법 같은 법전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모세에게 이렇게 들었다
나는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하셨다.
교회는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말하며
구약의 율법들도 뒤집었다.
성령이 임하면
이런 자유가 생기는가?
그것은 영감받은 사도들만의 특권이고
그 이후 교회와 교인들
당신과 나는
그러면 안되는가?
사실 우리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과 내가
오늘날도 설교등을 통해 은혜 받을 때 인용되는 말씀들은
역사/문자적 해석과는 상관 없이
엉뚱한 인용이나 알레고리일 때가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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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성경은 말한다'
It is Written
을 모토로 삼고 있는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성경숭배에 빠질 수 있다.
성경은 오직 해석되고 적용만 되어야 하는 법전이 아니라
열린 말씀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그런 오해를 감수할 만큼
강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쓰여졌고
성령께서 성경을 이해하게 하신다면
그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앞으로 올 일' (요 16:13) 다시 말해 새로운 이해, 새로운 계시도 주신다.
기록된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문이다.
하나님은 성경보다 크시다.
그 문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의 내용은
당신들과 내가 다른 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마땅히 그렇게 달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다양하고 예측불가능한 경험들을 서로에게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경은
법전 해석하듯
혹은
도참서 풀듯 푸는 책이 아니다.
성경을 이잡듯 뒤져 읽어 해석해서 맞이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였다면
유대의 랍비들이 메시야를 몰라보고 박해하여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나라를 맞이하는데 이르지 않으면
성경은 죽은 말씀이고
우리를 묶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사경회를 주말로만 진행하다보니
안교 시간도 말씀으로 대신하자고 했지만
오히려 이번 기 전체를 간단하게 요약해 드렸습니다.
1. <성령과 영성> 보다는 <성령과 경건>이 맞다.
2. 수년 전부터 교과는 경건하면서 실천적인 삶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3. 이번 기도 목차에서 보듯이 이론이 아니라 실천 또는 열매가 강조되고 있다.
4. 누가복음 이후로 TMI(모두 참여 함께 나눔)를 정착시키려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5. 이런 맥락에서 중간 지점에 있는 6과 거룩한 삶, 7과 열매, 8과 은사는 매우 적절한 배치이다.
6. 마지막 과에서는 심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면서 벧전 5장 8-9절로 인도한다.
7. 그래서 2기는 베드로의 편지들을 다룬다.
8. 한국 개신교 출판계에서도 최근 베드로 편지들이 엄청 쏟아져 나오고 있다.
9. 이것은 재림교회와 개신교회 모두 비슷한 정황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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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배님!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자유로이 인용했다는 것과 관련해...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나름 이렇게 표현해봅니다.
당시의 여러 상황에서 왜곡된 구약 해석을 오히려 바로 잡았다...
오늘 뉴스앤조이에서는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 서평이 올라왔네요...
"이 책의 저자는 구약이 윤리적이며,
구약에 온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윤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론은,
구약이 율법적인 명령으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서도 풍성한 도덕과 윤리가 내재되어 있어서,
우리가 이상적인 사회를 상상하게 도와준다."
실제로 저자의 글 속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같은 구약 윤리는 현대 서구인들이
흔히 추정하는 것보다 더욱 일관된 체계를 형성한다.
구약의 도덕적 명제와 규범들은
어둠 속에서 아무렇게나 마구 쏘아 대는 난사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통합된 도덕적 프로그램의 일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프로그램은
서구의 도덕 철학에 기대하는 일반화나
원리의 진술 같은 형태로는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구약성경이 비체계적으로 다양한 매개를 통해 도덕을 제시하며,
그중 어느 것도 우리가 윤리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과
비슷하지 않다는 첫인상 때문에
구약성경이 단지 뒤죽박죽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첫인상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도덕적 진리를 전달하는 성경의 방식이
항상 특정하고 구체적인 것을 통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한,
그 첫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
구약의 저자들을 믿을 수 있다면,
인류를 위한 선의 지식은 특정한 것들을 관찰함으로써 펼쳐진다."
-1장 ‘구약 윤리의 생명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