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 욥기를 처음 시작할 때
첫 안식일, 교사가 한 질문이다.
"욥기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는 얼마나 의로웠을까요?
사람이 얼마나 의로울 수 있습니까?
얼마나 완전할 수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런 질문은 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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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righteousness 라는 단어 만큼이나
기독교에서 신학적으로 무겁고, 켜켜이 쌓여 있고, 마르고 닳도록 가르쳐지고,
오/남용 된 단어가 없을 것이다
아마 루터로부터 ( 지난 10월 31일이 그가 95개조를 발표한 499주년 기념일이었다. 내년 이맘때면 500년이다)
시작해서
"의" 라는 단어에 기독교가 목을 맨 것 같다.
로마서를, 아니 온 바울을 그렇게 읽고
그것이 마치 구원과 복음의 진수인 것으로 알고 가르쳤다.
안식일교회마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를
마치 고차원적 세천사의 기별인 것처럼 가르친다.
로마서와 바울을
원죄 칭의 성화 의 공식으로 읽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바울을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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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칭의 성화 어쩌고 하기 오래 오래 전
수천년 전에 욥기가 있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여호와께서 자랑할 만한.
그게 다다.
성경은 그의 원죄여부나 본성의 어떠함,
그의 완전이 어떤 완전이냐에 전혀 흥미가 없다.
성경을 어떤 렌즈로 읽느냐가 중요한데
개신교적 "의" 의 신학
혹은 안식일교회적 "의"와 품성변화/완전의 렌즈로 읽으면
속칭 하는 말대로 텍스트를 작살낼 수 있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열을 내고 설을 세울 수 있다.
그러는 와중에 성경을 감동하신 하나님의 영은 없고
우리는 살아있는 성경을 죽은 문자로 만드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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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도대체 얼마나 의로웠나?
이번 기에 욥기를 여러번 읽고 듣고 있는데
그런 일에 관심과 흥미를 가전 이들이 있긴 있었다.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욥기의 흐름을 보니
그의 친구들은 사탄의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쓴 대로
사탄의 본업은 참소하는 것이다.
fault finder, prosecutor
잘못을 찾아 지적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하던 욥의 친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는 말을
만고의 진리인것 처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전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개신교인들이나
사람이 얼마나 완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어떻게 대쟁투에서 하나님이 옹호되시는가
그걸 가르치려는 우리나
거기서 거기다.
진리를 세우고
바른 것을 가르치려고 열을 낸다지만
사탄의 선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마저
조사심판의 재판장으로 삼은 우리는
하나님마저 사탄의 일을 하도록 해 왔다.
이것이었다.
교회가 이렇게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팍팍하고 율법적이고
자기보존을 지상의 과제로 허덕이며
힘이 없고 지지부진한 것
어쩌면 하나님을 사탄과 같은 분으로 정반대로 그려 놓은
그 잘못된 그림 때문에 그런 것 같은 생각이다.
욥기를 읽으면서 느낀 것이다.
아마 나는 게으럼을 자주 피울 겁니다
그냥 제목만 읽고서 총의 강의하거든요
욥의 의인화는 노아의 의인화와 같고
그게 우리들이라는 개념을 정착 시킬 수 있습니다
의인 별 거 아니지요
괜히 그 할머니가 어렵게 설명해서 책을 많이 파신 것 뿐입니다
대쟁투가 아무리 치열해도
인간은 거기서 할 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입혀 주시는 의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날 살려 줍쇼 하는 것 이외는 없더군요
요즘 저는 의인의 반열에 서서
재미있게 삽니다
다들 죄인이라고 읊조리는 것 보면
우리 목사들 잘못 가르쳐도 한참 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번에 올릴 글은 1888년 입니다
위대한 것으로 가르치던 분들 기분 좀 상할 겁니다
욥기는 오늘 우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에 쓰신 글 우리 반생들에게 읽어줬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반신반의하더군요
한참 설명을 했네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