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게도 날마다 기도력을 카톡으로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
지난 몇주 내용이 하늘 지성소와 예수님의 중보 이야기다.
"...습니다" 체로 번역된 화잇의 말씀이다.
예수는 지성소에 계신다고 한다.
우리는 이 땅에 있다.
예수는 지성소에서 홀로 우리 죄의 도말을 위해 중보하느라 애쓰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정결하여지고 죄 없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한다.
솔직이 나는
구속이 십자가에서 완성되느냐 뭐 이후 다른 과정을 통해 완성되느냐
뭐 이런 조직신학적 내용에 대해서는
안식일교회 신학과 세미나리를 다녀 봐서
알 만큼 다 알지만, 아니 알 만큼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신학적 논쟁에 보탤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가르쳐온 (혹은 가르치지도 않아 온) 조사심판이라는 것이
비복음 반복음 반성서적인 정도는
신학이 아니더라도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내가 읽는 성경은 밝히 말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을 밝히 열어 놓으셨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점이다.
워치만 니가 에베소서를 극명하게 요약한대로
좌 (Sit)
행 (Walk)
참 (Stand against)
이것이 바른 순서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와 있다.
하늘이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그것 아닌가?
요한복음 3장에 말씀하신
'거듭남' 도
바른 번역은
'위로부터 남' 이다
gennethe anothen 이라는 희랍어에서
anothen 은 '위' 라는 뜻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졌다 (마 27장) 했을 때 그 top 이 anothen 이다.
요한 3:31절에 예수께서 위로부터 (anothen) 오셨듯이
우리도 위로부터 난다.
이것이 신자의 삶의 시작이다.
누가 우리를 예수와 분리시키는가?
우리의 자리가 바로 예수가 계신 곳이고
우리의 근원이
우리의 소속이 하늘인데
누가 어째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
예수는 지성소에,
우리의 죄가 벗겨지고 정결해져야
비로소 그 자리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가?
주님은 하늘 지성소에서 애쓰고
우리는 이 땅에서 애쓰고
그 결별의 아픔 속에
서로 떨어져서 애쓰고
이 땅의 성도 우리는 하늘 가기 위해
오매불망 그 날만 바라고 살라는 것은
신파다.
복음이 아니고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이다.
성경을 무슨 안경을 쓰고 읽어야
그런 신학을 복음의 완성이라 가르칠 수 있는가?
성경이 밝히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계시를 무시하고
그림자 구약에 총천연색 색칠을 해 가며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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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한 카톡으로 오는 기도력 말고
또 매일 다른 묵상의 말씀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
다른 교단의 목사다.
그의 신앙과 삶은
매일 지금 여기서 예수와 함께 일하는
기쁨과 자신감과 긍정으로 충만하다.
거침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능력이 따른다.
어떤 기도력을 읽든
즉
예수가 지성소에 계시다고 믿든
여기 지금 나와 함께 보좌에 앉아 계시다고 믿든
'무엇을 읽고 믿느냐' 보다는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가 더 중요하다.
하늘만 바라보며 존절히 내가 정결해지기만 애쓰는 삶보다
나는 지금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그의 나라를 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충만한 삶을 산지
오래 되었다.
나의 자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앉은 자리다.
하늘은, 하나님 나라는
나의 신앙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예수는
지성소에서 끙끙거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며
이 땅에서
당신과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맹렬하고 활발하게 일하신다.
조사심판 아니라 그 무슨 희한한 신학적 유희로도 이것을 곡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지난 172년 동안
예수를 하늘 한 귀퉁이에 모셔 놓고
우리를 이 땅에 고아처럼 두려워하며 살라고 한 세월이
아직도 부족해서
얼마나 더 그렇게 가르치려 하시는가?
주 예수 이름 높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