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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 03:56

교회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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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러한가로 고민하시고 성경의 일관된 촛점으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고민과 분투가 당신에게 '과연 그러하도다'로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히기만을 바라며...

 

1.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를 건물이나 공동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나 공동체를 넘는다. 또 천국과 지옥이 그렇듯이 교회도 존재이다.

 

1577 ( ejkklhsiva   ekklesia  {ek-klay-see'-ah})

1537의 합성어와 2564의 파생어에서 유래 ;불러냄 , (구상명사)대중 회합, 특히 종교적 회중 (유대 회당, 혹은 세상에서 기독교인, 사회구성원이나 하늘의 성도, 혹은 둘 다), 집회, 교회 <16:18; 1:22; 1:2> 여명. assembly;

 

명사 에클레시아에크’(ejk 1537: 로부터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 call)에서 유래되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 '불러낸 자들(의 전체)'이라는 의미이다. 에클레시아는 어디 어디로부터 불러낸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불러낸 자인가? 교회를 예수 이후의 산물이라고 생각을 많이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부터 이미 광야 교회로 표현하고 있다.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불러 내어진 존재들이다. 에클레시아가 영어로 assembly인데 집합체라는 뜻이다.

 

9: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이때 총회가 카할이라는 히브리어가 총회로 번역되어 있는데, 회중이라는 뜻이다. 이 카할이 에클레시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이미 시내 산 가운데서도 있었다.

 

6951  lh;q;  qahal   {kaw-hawl'}

6950 에서 유래 ;회중 (대체로 구상적으로 ):-집회, 회중, 무리 (대중 )

 

대상 28:8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여호와의 회중의 보는 데와 우리 하나님의 들으시는 데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을 야웨의 회중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야웨의 카할’,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한다 카할/엑클레시아는 부름을 듣고 이를 따르는 자들에게 쓰인 단어이다. 언약 백성에게만 쓰인 단어이다. 엑클레시아/카할은 언약과,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바벨론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바로 에클레시아이다.

 

33:4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야곱의 총회라고 부른다. 카할이 70인 역본에서 엑클레시아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있었다. 하나님은 늘 밖으로 불러냈고, 지금도 부르고 계시다.

 

 

1-1.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그리고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도 아니다. 교회는 단순히 인간의 모임을 뜻하지 않는다.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교회는 반석, 즉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다. 교회는 내(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목사의 교회가 아니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고 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하여진 존재이다. ‘완료 수동태이다. ‘이미 거룩의 존재이다. 그런 존재를 하기오스라고 부른다. ‘하기오스가 바로 거룩이라는 뜻이다. 교회가 곧 성도이다.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거룩한 자여! 라고 부르는 것이다.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한 몸이다. 한 생명이다. 이것이 이웃사랑의 근본이다.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지혜를 알게 하신다.

 

 

1: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리스도는 말씀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그의 충만을 이루어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은 늘 교회와 함께한다. 내가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데 하나님 계신 곳에 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계신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또한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몸과 머리는 따로 뗄 수 없는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머리다. 머리는 보이지 않는 몸이고 몸은 보이는 머리이다. 보이지 않는 인 머리가 보이는 인 몸의 진정한 주인이다. 보이는 몸이 인 것 같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머리가 . 몸의 일부인 눈이 보는 것 같지만 실은 머리가 보는 것이다. 내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가 내가 보는 것, 곧 시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머리가 하나님이어야만 보이는 나라다. '그리스도가 머리인 그 몸'을 교회라고 하는 결정적 이유다. 오늘 나의 문제는 그 머리가 나인가 그리스도인가에 달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전이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포함하나 교회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보이는 실체이다. 성도들이 바로 그 교회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곧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천국의 현재이다. 보이지 않는 천국의 현실화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이다.

 

 

1-2. 회사와 교회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결혼 관계로 설명한다. 창세기의 남자 여자의 창조는 바로 이것을 비유로 보여준다. 창조에 이어 결혼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 절정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결혼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구원의 비밀이다. 곧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것이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뼈와 살이다. 보이지 않는 말씀이 육신과 하나 되는 놀라운 관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놀란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감탄하고 있다.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래서 교회는 머리(그리스도)가 몸(성도)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온전히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됨이 없으면 인간이 머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회사처럼 변할 수가 있다. 그래서 목사가 마치 회사를 경영하는 것처럼 교회를 관리해 나갈 수 있다. 목회 또한 조직관리처럼 전개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지 않으면 목사가 머리가 된다. 그래서 때로는 그리스도보다 목사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사원처럼 변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사원과 같이 모여 종교 행사하는 곳이 되어 버린다. 또 사원과 같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빈다.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기도하고, 신랑의 승진을 위해서, 등등.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비나이다’ ‘비나이다의 자기 소원이다. 그래서 교회나 절이나 기도제목이 똑같아진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뼈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즉 그리스도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나가는 현장이 교회이다. 하나님 사역의 현장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복잡한 행사가 필요하지 않다. 오늘날 교회는 항상 다양한 행사를 위해 고민이 많다. 마치 기업에서 다양한 마케팅 행사를 기획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교회가 쉼이 없다그래서 그리스도가 머리 된 교회는 큰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산에 올라가 그곳에서 말씀하시면 그 산 위가 바로 교회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가정에서 모여 소박한 예배로 함께 했다. 그들이 먹는 떡과 포도주가 성찬이 되었다. 즉 식사 자체가 성찬이 되었다. 얼마나 소박한가!

 

그러나 현대교회는 계속해서 교회 건물 짓기에 바쁘다.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어 가고 있다. 자녀들의 교육, 그리고 자기의 사업을 위해서라도 점점 대형교회를 찾고 있다. 선거철이 되면 작은 교회를 떠나 대형교회로 등록하는 시의원도 있다. 정치를 위해서라도 대형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노회에서도 입지가 크다. 교회가 크면 이단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숫자가 많으면 힘이 있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시스템이 얼마나 정밀한지 하나님이 관여할 틈도 전혀 없다. 큰 회사가 시장점유율을 독식하듯이 대형교회가 소형교회를 잡아먹고 있다. 소형교회도 또한 대형교회를 꿈꾸며 목회를 한다. 이로 인해 교회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때 말하는 건물은 빌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곧 성전이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건물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교회는 살아있는 천국이다. 교회는 세상 경영철학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이다. 그 생명체는 누구도 규정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머리가 되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이 생명체이어야 한다. 내가 조직을 규정할 수 없다.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levgw-3004)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nou'"-3563)과 같은 뜻(gnwvmh-1106)으로 온전히 합하라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다. 따라서 말씀이 전부이다. 100%이다. 99%도 아니다. 100%이다. 말씀 가지고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다른 것을 생각한다. 행사를 만들고 절기를 만든다. 계속해서 동기부여를 하려고 한다. 말씀 가지고 안되기 때문에 자꾸 행사를 만들고, 조직화하는 것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즉 그리스도 안에 숨 쉬는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장소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들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뼈와 살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체이다.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존재이다. 본질은 행사(행위)가 아니라 존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생명이다.

 

 

1-3.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교회인데, 왜 모여야 하는가? 종교적인 제도교회에서 탈피한 사람들은 진리를 품은 내가 교회인데 굳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교회에 꼭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진리를 알았다면 굳이 모임에 오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혹은 인터넷만 들어도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배란 설교 잘 들으면 되는가? 혹은 단순히 성경공부만을 말하는 것일까? 왜 모여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 없이 당연히 모였으니 모인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어쩌면 당연한 질문인 것 같다.

 

갈만한 교회가 없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흔히 가나안 교인이다. 안나가 를 거꾸로 한 말이다. 가나안 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 무용론까지 주장한다. 정말 교회는 무용한가? 진리를 알았다면 아예 모이지 않아도 될까? 그러나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에크 카 레오 -ejkklevw]불러내어 모으다라는 뜻이다. 단어 자체에 모임(assembly-19:32, 41)이라는 뜻이 있다. 교회 모인다는 말보다는 교회 모인다는 말이다. 성도가 교회 자체이다. 그리고 그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서신서에 보면 ~에 있는 교회 , 이렇게 말한다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사서 모인 모임이다. 사실 그래서  나를 교회로 모은 것도 하나님이다. 내가 모인 것 같지만, 모은 것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 생명 들이 고동치는 것이다. 그 고백이 찬양이다. 음악에도 솔로라는 것이 있고 합창이라는 것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이다. 그리고 모은 이유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예배는 곧 결혼잔치이다. 결혼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곧 예배이다. 모이는 이유도 바로 이 잔치 때문이다.

 

<예배란 과연 무엇일까?> 

예배하면 대부분 종교적인 행사, 제의 등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배도 하나님의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 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4352  proskunevw   proskuneo  {pros-koo-neh'-o}

4314와 아마 2965(의미는 키스하다,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에서 유래 ;아첨하다,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굽실 굽실거리다 경의의 표시로 부복하다 (존경하다 ,공경하다 ), 예배드리다 <4:9; 13:4> . to worship;

 

신약에는 주로 경배하다. 절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예배하다로 번역된 곳은 요한복음 4장이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ω)를 향하여의 뜻을 가진 프로스’(πρς)와 아마도‘(기본적으로는 라는 뜻이지만 그 가 주인의 손을 핥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키스하다라는 뜻으로 퀴온’(κων)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존경의 표시로써 손에 입 맞춤을 하다, (문자적, 상징적으로) 굽실 굽실거리다, (경의의 표시로)부족하다, (동양, 특히 페르시아에서) 깊은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대다, (신약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림으로 존경하다 또는 순종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그리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가 경배자, 예배자의 뜻을 가진 프로스퀴네테스’(προσκυνητς)가 있다.

 

신약에서 예배라는 명사가 쓰이지 않고 대부분 동사를 쓰고 있다. 즉 예배 자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외로, 신약성경에 예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룬 구절은 두 군데 밖에 없다. 바로 요한복음 4장과 롬 12:1이다. 나머지는 예배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경배하다, 절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1-4.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예배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가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일 처음 던졌던 질문이 예배에 관한 것이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수가성 여인이 가장 궁금했던 주제에 관하여 묻는다. 바로 예배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이 물었던 질문은 바로 예배의 장소의 문제다. 그녀는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인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고 한다. 이산은 수가성 남쪽에 위치한 그리심 산을 뜻한다. 유다 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것을 주장하였고(12:5; 16:2),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때문에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릴 것을 주장한다(14:18; 22:2).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으로 알려져 있다.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께서 여인에게 내 말을 믿으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성전이 없이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을 믿으라! 그러므로 내 말을 믿으라고 한 것이다. 그리심 산도,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하신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신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건물 없이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빚을 내더라도 우선 건물부터 짓는다. 그러나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었다. 예수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아들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성전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알지 못하고 예배를 하는 교회가 너무나 많다. 구원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예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리심 산에 있는 산은 축복의 산이다. 그 장소에 가면 축복받는다고 생각한다.

 

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떤 성전에 거한다는 말인가?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

 

 

교회는 옛 성전을 대신하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여기에서 두 번째 중요한 원리를알 수 있다. 예배는 알고 하는 것이고, 그 앎은 그리스도로 부터 나온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 ‘호라임박한 때”  “임박한 시간” “임박한 심판에 사용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하고 고 이 때라고 한다. 바로 지금’(nu'n-3568)이라고 한다. 지금은 언제란 말인가? 사마리아 여인이 진정한 남편인 성령을 만났을 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고 예배를 했다. 그러나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알고 하는 예배이다. 즉 예배라고 다 예배가 아니다. 아버지가 그런 예배자를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없다.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은 믿는 자들을 그와 같이 만드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배자(4353 proskunhthv")를 찾아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ω)가 말하는 예배하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종교에서)신이나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을 행하다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성경은 인간을 향하여서 허물과 죄로 죽은  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런 인간이 초월적 존재를 향하여 경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배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을 향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입맞춤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고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과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서 예배드렸다(προσκυνω)고 말할 수 있다.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원역/ 영이신 그 하나님. 그리고 영과 진리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반드시 예배한다. 영이신 그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그 하나님이)반드시 예배한다.

 

하나님은 영이란 의미는 육인 인간의 대조적 개념이기도 하다. 그 말은 육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소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또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다. 영은 영으로 통하는 것이다. 본문은 영과 진리를 함께 놓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화려한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외쳐도 그 안에 진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예배의 핵심을 가르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란 말이 무엇인가? 이 말을 모르면 예배란 말도 모르는 것이고 신령과 진정이란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주님은 예배를 말씀하면서 알지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과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했다. 또 예배에도 때가 있음을, 때에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아버지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하나님은 영이란 의미는 인간은 육신이란 말의 반대적 의미로 그분은 나와는 전혀 다르다는 강조다. 예배는 인간이 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 종교 행위와는 다른 그분에 의한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참으로 예배하려는 자는 하나님과 영과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최소한의 그 예배를 할 수 있을지를 비로소 안다.

 

기독교의 예배는  누구나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그런 일반 종교의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예배는 그분을 앎이고 나눔이며 사귐이고 누림이기에 그분의 섬김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예배의 그때를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섬김이 오늘 예배하게 한다. 예배는 그분이 영이시기에 내가 그 영으로가 아니면 할 수 없으며 신령 곧 그 영으로 또 진리로만 할 수 있다. 영과 진리는 하나임을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그것은 복음, 진리, 말씀으로 앎으로만 가능하다.

 

예배는 내가 그 말씀을 알 때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그 마음 눈을 열 때 비로소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하나로 가능하다. 오늘 나는 그때를 살면서 예배 할 수 있는자, 곧 그 말씀을 아는 자로 그 말씀으로 그분을 알고 대면하는 자인가?

 

기독교의 예배는 누구나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그런 일반 종교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예배는 그분이 영이시기에 내가 그 영으로가 아니면 할 수 없으며 영과 진리로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섬김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예배는 의식이 아니며, 영과 진리로만 가능하다.

 

원어에 보면 예배하는 자들은 복수로 되어 있고, 반드시 예배한다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예배하는 자들이 주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배한다의 주어는 호 데오스가 된다. 4:24은 분명히 하나님이 예배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예배 >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에서 정의하는 예배란 신이나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 또는 그런 의식을 행함이다. 보통 예배를 인간이 신을 섬기는 제의, 예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전능한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쳐서 나의 풍요, 평안, 혹은 꿈을 이루는 것이다. 더욱 고상하게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구원조차도 욕망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이다. 종교와 진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다.

 

예배는 영어로 worship이다. worship은 흠모, 열렬한 사랑이란 뜻이다. 단순히 의식이 아니라 이처럼 예배란 열렬한 사랑을 뜻한다. 열렬히 사랑하기 때문에 절도하고, 경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예배하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열렬히 돈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돈에게 예배하고 절을 하게 된다. 인간은 돈, 즉 보이는 것을 사랑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네크로스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 ,

 

1: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성도가 받은 것이다.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것[섬김]이라고 한다.

 

 

1-5. 로마서에서 말하는 예배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qusiva)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logikov") 예배(latreiva)니라  

 

latreiva (2999, 라트레이아 )

'하나님의 사역', '예배', (신적인)봉사 <9:4;9:6>여명. worship;

1)고용되어 하는 봉사 2)율법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3)거룩한 예배를 거행하다

 

 

명사 라트레이아(2999)는 라트류오(latreuvw 3000: 섬기다, 봉사하다 )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는 service, 즉 섬김이라고도 한다. 예배를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신학적 용어로 Opus Dei라고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관계로 보자. 엄마가 아이를 섬길까? 아이가 엄마를 섬길까? 엄마가 아이의 기저귀를 다 채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준다.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들은 하루에도 사표 몇 번 던지고 싶어도 참는 것은 이쁜 자기 자식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해주심으로 인간을 섬긴다. 노예였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에서 만나로 먹여주심으로 섬기신다. 그 만나가 하늘의 양식이다. 자녀들은 그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이다. 그 양식이 바로 진리이다.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오히려 예배 때 하늘의 만나인 예수님을 먹고, 배불리 먹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의 섬김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23)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기쁨이 넘쳐나는 혼인 잔치가 예배이다(2). 포도주가 넘쳐나는 축제이다. 그래서 감사의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예배이다. 하늘의 양식을 먹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배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예배는 이렇게 자녀들에게 말씀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섬김이다. 그래서 예배는 바로 그 진리를 받아먹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감사가 찬송이다. 그렇게 서로 소통하는 시간이 예배이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시간은 하나님의 기도시간이다. 물론 사람을 사용하신다.

 

성막, 성전은 모두 영과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진리의 알맹이는 보지 못하고 종교 껍데기에 빠졌다.

 

16:2에도 라트레이아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유대인들이 제자를 죽이고,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즉 예배라고 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다이러한 제의적 예배에 빠진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Opus Dei)는 무엇인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분이 섬기려 오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섬기신다. 십자가에서 최고의 섬김을 보여주신다. 신이 인간을 섬긴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최고의 예배(하나님의 사역).

 

예배란 그러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예배란 에고(우상)의 죽음과 그리스도(실체)의 부활을 경험하는 현장이다. 우상이 죽고 실체가 부활하는 현실을 경험하는 장이다. 자신이라는 무덤으로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것을 목도하는 시간이다.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모두 그리스도(신성)를 발견하며,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경험을 하는 시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는 시간이다. 문자에 담긴 실체를 호라오 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하는 장이 예배이다. 단순한 제의나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 자체가 신비이다. 교회로,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하나님의) 예배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qusiva) 드리라

 

짐승의 희생제물의 실체가 드러났다. 나의 몸이 희생제물이다. 이제 내가 죽어야 한다. 그 말이다. 과거에는 짐승이 제물이 되었는데, 이제 그리스도가 선물로 주어져 내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제물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머리 됨이다. 이것이 곧 예배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이다. 예배는 열매(그리스도)로 드리는 것이다. 열매는 그리스도이다. 아들이다. 알곡이다. 그 알곡을 곳간에 저장하는 것이 수장절이다. 그렇게 예배는 아버지가 주신 선물, 열매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그 기쁨을 드림이다. 그분을 앎이다. 그리고 그 열매를 나눔이며 사귐이다. 축제이다. 그래서 절기가 축제 용어이다. 모든 것에 아버지의 섬김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이다.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qusiva-2378)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짐승으로 표상된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다. 자신을 드렸다. 그렇다면 내가 드릴 제물은 무엇인가? 거룩한 산 제물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다. 내가 드릴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십의 대표 십일조이다. 그리스도가 십계명을 대표하는 십일조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물은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로기코스의 latreiva (라스튜오-하나님의 사역 )이다. 즉 말이 되는 예배이다. 말이 되는 예배란 무엇인가?

 

logikov"(3050,로기코스) 말씀의, 이성적인, 영적인

 

로고스=예수그리스도, 말이 되는, 하나님과 말이 되는 ,

로기코스라는 말은 로고스에서 왔는데, 로고스( lovgo")+OS 되면 그런 존재를 뜻한다. 로고스의 존재라는 뜻을 가진다. 영적 예배라고 번역된 로기코스 라트레이아는 <로고스의 존재들의 하나님의 사역>이 예배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역이기도 하다. 그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2절 이하이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누스)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는 머리(그리스도)의 몸이고, 몸에는 각 지체 들을 가지고 있다. 12장은 교회를 생물체로 묘사하고 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결합 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생물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은사가 다양하다.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그래서 건물이, 조직이 공동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전부 다 동일한 포멧을 가지고 있다. 은사와 상관없이, 성경학교, 성가대, 전도기관 등이 한결같이 똑같다. 성도들의 은사와는 상관이 없다. 교회는 은사 실현의 장이 되어야 한다. 진리를 알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섬기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은사는 너무나 다양하다. 은사가 다양하다고 하니 또 다양한 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존재 자체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교회이다.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특별히 성령의 교제라는 말을 주목하길 원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성령의 교제가 있는 곳이다. 코이노이아 프뉴마이다. 진리의 나눔, 진리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혼자 신앙생활을 할 경우 바로 이런 코이노이아가 실현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코이노이아의 장이 필요하며 자신의 존재에 가장 합당한 섬김의 장이 필요한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본인도, 코이노이아 프뉴마를 통하여 말씀의 풍성함을 공유한다. 함께 말씀을 같이 보면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진리를 나눌까로 같이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서 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코이노이아 프뉴마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싸움밖에 나지 않는다.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새로운 가족이다.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알고 예배해야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 즉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교회는 모임을 전제로 한 단어이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모임을 폐할 수는 없다. 또 진리는 끊임없이 코이노이아 프뉴마 할 필요가 있다. 세포는 혼자 살지 못한다. 생물체는 연결되어 사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인터넷으로 혼자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사도 바울도 진리를 만나고 홀로 외로이 아라비안 광야에서 지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영원히 광야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와 진리의 나눔, 코이노이아 프뉴마를 가졌다.

 

지금 홀로 외로이 인터넷으로 듣고 있다면 광야 생활로 생각하자! 그리고 진리로 바로 세워질 것을 기도하자! 진리로 바로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빌립 집사에게 내시를 붙여준 것처럼 나에게도 귀한 영혼을 보내주실 것이다. 그때 코이노이아 프뉴마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은 우주적 교회는 자라나서, 결국 플레로마가될 것이다. 아들 즉 교회로 인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찰 것이다.

 

2. 은혜의 방편 성찬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은 것이다. ? 예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의 출발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예배도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에 모이는 중요한 이유가 성찬이다. 성찬은 결혼잔치이다. 세상에서 가장 바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민족이 있었다. 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직접 받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율법을 형상화 하여 성전을 세웠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들은 성전(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종교에 갇혀 버린 것이다. 예수는 그 성전을 파괴하고 자신이 성전임을 알려주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종교를 깨고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가셨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도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다를 바 없게 된다. 하나님을 철학과 신학으로 체계적으로 구성해 나간다. 탈무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래서 기독교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종교가 생겨난다. 기독교가 종교가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유아세례, 재세례 문제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것이 과연 진리일까? 유아세례와 침례문제로 죽은 사람이 12, 13세기 두 세기 동안만 하더라도 무려 50,000,000명 이상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세계 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세례문제로 죽었다. 그 종교에서 탈피한 것이 신교인데, 신교 또한 마찬가지로 교리문제로 재 세례파를 죽였다. 과연 하나님이 이러한 세례를 원할까?

 

세례를 받고 세례증을 준다. 그 증을 받으면 부모는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믿음으로 그 세례를 받았을까? 세례가 일종의 자격증인가? 그것이 진짜 세례인가?

 

성찬은 어떠한가? 성찬에 대하여 카톨릭은 화체설을 취하고 있다. 즉 빵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로 변화되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고 주장한다. 루터교회는 공재설을 따른다. 즉 성찬식 때 떡은 떡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만, 한순간에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과 곁과 밑에 현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영적 임재설,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취하고 있다.

 

몇 번을 해야 옳은 것일까? 대부분 교회는 1년에 2-4번 정도 한다. 칼빈을 따르는 개혁교회는 1년에 2번 정도 성찬식을 행한다. 사실상 쯔빙글리의 의견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다. 사실 사도행전에 보면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 그렇다면 매주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찬식을 매주 하는 교회가 있다. 어떻게 하면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할 수 있을까?

 

성례는 표징이다. 표징이라는 것은 사진이요 상징이다. 표지판이다. 성례를 통하여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 표지판에만 머문다면 그것이 곧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 쓰이게 된다. 성례라는 것은 원래 눈에 보이게 설명하는, 일종의 보이는 설교이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근본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교육인 것이다. 그것이 곧 성전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례의 본질은 말씀에 있다. 그리고 기도의 본질도 말씀에 있다.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말씀, 성례, 기도가 사실 한 가지이다.

 

 

2-1. 오병이어 표적은 곧 성찬이었다 

2168  eujcaristevw   eucharisteo   {yoo-khar-is-teh'-o}

2170 에서 유래 ;감사하다 , (능동태 )감사를 표현하다 (~에게 ), 특히 식사에 대한 은혜를 말하다 , 감사 (드리다 ) <14:6>. to give thanks;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6: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eujcaristevw)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7: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고전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유카리스튜오'는 그래서 성찬용어인데 [감사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찬이라는 것은 감사이다. 초대교회 때는 모였을 때 항상 떡을 떼었다. 그것은 성찬이었 . 예배시 항상 성찬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감사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사하는 것이 성찬이다. 신약성경에서 감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이다. 무엇을 감사하는가?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한다(eujcaristevw). 유카리스테오! 이것은 성찬 용어이다. 그래서 오병이어 사건은 성찬을 알려주고자 하는 표적이다. 성찬식은 표적의 양식을 실체의 양식으로 먹여주는 것이다. 모든 말씀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먹여주는 것이다. 형식적인 제의 행사가 아니다. 지금도 성찬식 때 표적으로 먹고 마시며 죽는 이들이 많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피와 살을 먹는 것이다.

 

이 포도주는 천국 음료이다. 성찬은 이렇게 천국 음료,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떡이요 포도주이다. 그래서 말씀을 생명으로 먹으며 성찬식을 하는 것이다. 단순히 외적 행사가 아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일 뿐이다.

 

성경에서 먹을 것! 즉 음식을 통해 참 하늘 양식을 알려준다. 대표적인 예가 만나의 표적이다. 만나를 보여준 것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8:3). 그리고 오병이어 표적도 축사, 즉 성찬을 통한 영생의 양식을 알려주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말씀에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나서 계속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시고 (6:26-27)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 것이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6: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지금도 떡을 주는데, 그 떡이 바로 나다!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에는 자신을 나는 ~이다. 즉 에고 에이미가 7번 나오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구절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아버지가 지금도 참 떡을 주는데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는 아들이다. 그 아들을 통해 생명을 준다. 이것이 만나의 실체이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오병이어 사건이 있는 것이다. , 오병이어는 나다! 나를 먹는 자는 살리라!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이니라 하시니라

 

 

이제 그 떡의 실체를 말한다. 자기 자신이 하늘에서 온 살아있는 떡이라는 것이다. 만나의 실체는 예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줄 떡은 이라고 말한다. 내가 줄 것은 내 살이다. 내 살이 바로 떡이다.

 

6: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식인종도 아닌데 어떻게 자기 살을 준다고 하지? 유대인들은 살을 육체의 살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피가 새롭게 추가된다. 살과 피이다. 그것도 인자의 살과 피이다. 예수께서 인자라고 표현할 때는 십자가 죽음이 담겨있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맥락에서 꼭 인자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다니엘 7장의 예언 성취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는 인자가 왕권을 받는 장면인데(7:13~14), 그 왕권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성찬식을 의미한다. 떡은 살이요, 포도주는 피에 해당한다. 떡과 포도주는 말하자면 음식이다. 음식은 생명을 준다. 유월절 최후에 만찬 때 예수는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셨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이 생명을 준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는 것이다.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14: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14: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는 많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언약의 피에 의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언약은 왕-백성, 목자양 떼, 신랑-신부, 남자-여자, 농부-포도원 등 다양한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다양한 그림을 통해 언약의 목적을 설명해 준다.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언약의 목적은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 됨이다. 그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먹고 마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로 먹으면, 그 진리의 말씀이 나의 피와 살이 된다는 말이다. 본문은 이 살과 피를 생명이라고 한다. 예수의 말씀을 나의 살과 피로써 먹고 마신다는 뜻이다. 그럴 때 당연히 예수가 내속에 거한다.

 

6:54 내 살을 먹고 (trwvgw)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에코/현재형)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아니스테미 /미래형)

 

54절 이전에는 파고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 반면 54절부터는 트로고가 주로 쓰인다(54, 56, 57, 58).

5176  trwvgw   trogo {tro'-go}

아마 침식이나 마모의 개념으로서 51345147의 어간의 방계강세형; 혹은 아마 긁히는 소리라는 개념으로 51675149의 어간의 강세형;갉아먹다 ,씹다, (소유격)먹다 <6:54>. to eat;

 

'갉아 먹다, 바삭바삭 깨물거나 씹다, 먹다'를 의미한다. 왜 이렇게 먹는 것을 강조할까? 이것은 성만찬을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다. 성찬식에서 부서지는 빵을 염두에 두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살과 피는 십자가에서 부스러진 몸과 흘린 피이다. 즉 성경의 말씀은 십자가를 통과할 때 살과 피가 된다. 그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부스러진 그의 살과 흘려진 그의 피가 나에게는 영생을 주는 하늘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 살과 피를 마시는 자는, 즉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 자는 영생을 현재소유하고 있고, 마지막 날에, 7욤에 위의 것으로 똑바로 세워질 것이다. 즉 죽음을 통해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

 

6:55 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알레데스( ajlhqhv" 227)로 음식과 음료를 수식하고 있다. 그냥 음식과 음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음식, 진리의 음료를 말하는 것이다. 레위기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마시라고 한다. 진리의 피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그 피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따라서 표적으로서 피는 먹지 말되, 실체의 피는 먹어야 한다.

 

6:56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6:54, 55, 56은 살과 피로 댓구 되어 있다. 56절은 54절과 댓구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리스도에 거하는 것! 이것이 곧 영생이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이 곧 성찬의 개념이다. 이것은 바울의 코이노이아(교제) 개념과 유사하다.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게 그리스도를 먹는 성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와 같다. 아들은 아버지를 통하여(디아) 사는 것 같이 성도는 그리스도(말씀)를 통하여 사는 것이다.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8절은 31절에 대한 답이다.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말씀에 답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제 나를 먹으라는 것이다. 즉 성찬을 말하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pneu'ma)이니 육 (savrx)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 (rJh'ma)은 영이요 생명 (zwh)이라 (6:63)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 육의 양식을 통하여 생명의 양식을 말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재물을 섬기면 육에 온통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는 주님이다. 제자들은 주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자가 없었다. 그 말은 주님의 모습이 생전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무어라 말하는가? “와서 조반을 먹으라

 

709  ajristavw   aristao {ar-is-tah'-o}

712 에서 유래 ;정찬을 들다 , 식사하다 <21:12>. to break fast;

 

아침에 먹는 식사이다. 날이 새어갈 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 있다. 이제 처음 식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아니다. 예수께서 준비한 떡과 생선이다. 예수 자신이다. 예수께서 떡과 생선을 먹는가? 누가 먹는가? 제자들이 먹는다. 예수께서 먹었다는 말은 없다. 그들이 생선을 먹었지만, 사실은 예수를 먹은 것이다. 익투스 예수를 양식으로 삼은 것이다. 떡과 물고기로 이루어진 식사는 성만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찬이라는 것은 예수 자체를 먹는 행위이며, 참된 양식을 먹는 것이다.

 

21:13 예수께서 가셔서 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그래서 본문이 요한복음 6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배경도 디베랴 호수이고, 또 똑같이 떡과 생선이 등장한다. 이제 제자들은 떡과 생선을 제대로 먹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표적으로 먹은 오병이어와 달리 참 오병이어를 먹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진정한 어부가 되었다. 즉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다. 베드로가 바다에서 빠졌으나 이제 바다에 빠진 장면도 없다. 그도 물 위를 걸었다. 어둠은 물러갔다. 이제 밤이 되니 아침이 되었다. 새로운 식사이다.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을 달라 하면 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면 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아버지는 좋은 것으로 준다는 비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것이 떡과 생선이다. 아들이 떡과 생선을 요구하는데 돌과 뱀을 줄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떡과 생선은 무엇을 뜻할까? 떡과 생선이 병행이며, 돌과 뱀이 병행이다. 그래서 떡과 생선이 같은 의미이며, 돌과 뱀이 병행이다. 떡과 생선은 오병이어를 뜻한다. 오병이어는 육신의 배를 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좋은 것을 주려고 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11절에 나오는 아가도스(18-ajgaqov")이다. 11절의 병행 구절,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다. 즉 진리의 말씀이다. 오병이어를 통해서 진리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만나 사건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그 말씀이 나의 생명이 된다. 가장 좋은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 그래서 감사하게 된다.

 

 

2.2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날은 출애굽의 날을 의미한다. 출애굽을 기념하라! 기념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 그 이상이다. 기념한다는 것은 사건의 실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은 과거가 아니다. 현재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다. 그 과거와 연결해주는 것이 야웨의 절기이다. 그래서 예전이라는 것은 예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념함으로 출애굽이 현실화 되는 것이다. 그날이 바로 이날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나에게 이루어진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라는 것은 유월절의 근본적인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유월절 절기가 지켜졌다고 하는 기록이 7번 나온다. 그 첫 번째가 위 본문이고, 두 번째가 광야(민수기 9)이고, 세 번째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이다(5). 네 번째는 히스기야 왕 때(대하 30)이고, 다섯 번째는 요시아 왕이 다스릴 때(대하 35)이다. 구약에는 그래서 여섯 번 등장한다. 그렇다면 완성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일곱 번째는 성만찬에서 등장한다.  이 유월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찬을 베풀었다.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떡을 떼어로 되어 있는데 클라오(2806-: klavw)는 부수다라는 뜻이다. 제자들과 함께 떡을 나누시고, 그 떡을 부수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는 내 몸이라고 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부수어 내어 주게 될 것임을 의미 하였던 것이다.  

 

2146  @/rk]zI   zikrown  {zik-rone'}

2142 에서 유래 ;기념물 (혹은, 기억 할 수 있는 물건, , 또는 기록) :- 기념물, 기록

 

2142  rk'z:   zakar   {zaw-kar'}

기본어근 ; 본래 의미는 (알아보기 위하여)표하다, 기억하다 ; 힘축적으로 언급하다 또한 (2145에서 유래한 명사 유래어로서)남성이 되다 :- ×태우다향을 , ×진지하게, 수컷이다, ~들어 언급(하다), 마음에 품다, 상세히 말하다, 기록()하다기억하다, 기억되게 하다, 생각 (나게 하다, 기억을 되살리다, 기억하고 있다, 상기시키다), ×아직까지, 회상하다, ×

 

기념하라(2146)는 자카르(2142)에서 온 말이다. 자칼은 남자를 뜻한다. 여자는 남자를 기억해야 하는것이다. 성찬은 유월절의 완성이다. 성찬도 그렇고 유월절도 그렇고 기억하기 위함이다. 유월절 어린 양을 기억하고, 그 양의 죽음으로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절기는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성찬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을 위함이다. 흔히 성찬은 보이는 말씀이라고 한다. 왜냐면 성찬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주는 포도알이 으깨어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살이 찢겼다. 그리고 그의 몸은 으깨어져 피를 흘렸다. 빵은 주님의 몸이요, 포도주는 주님의 피이다. 그러므로 내가 빵과 포도주를 마실 때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한 안의 밀이 가루로 부셔져야 한다. 죽음이다. 그러나 부서진 밀가루에 물이 부어진다. 흩어진 밀가루는 하나가 된다. 이 하나 된 밀가루 반죽은 불에 구워진다. 이제 밀가루는 죽고 빵으로 부활한다. 떡과 포도주에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다 담겨있다. 특별히 포도주는 그래서 천국 음료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러한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다.

 

 

2-3. 성찬은 모일 때마다 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날마다 떡을 떼며 기도했다. 그것은 성찬 용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은 모일 때마다 하여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제사 의식으로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매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날마다 떡을 떼며 기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매일 매일 성찬을 할 수 있을까?

 

떡과 포도주는 그들의 일상의 음식이었다. 따라서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념해야 한다. 모여서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성찬이 되어야 한다. 먹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먹는 것은 예배의 일부이다. 온전의 개념은 전체이다. 음식도 부분으로 존재하면 안된다. 예배는 전체가 되어야 하는데 음식도 전체로 기여해야 한다. 예배 따로 음식 따로가 아니다. 같이 먹는 것도 그래서 예배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화목제의 중요한 문제도 먹는 것이었다.

 

매주 모일 때마다 함께 식사한다. 이러한 식사가 성찬이 되어야 한다. 따로 떡과 포도주를 나누지 않더라도 밥과 국이 이제는 성찬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무엇보다도 우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성찬식이다. 성찬을 의식으로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모일 때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라는 말이다. 이것이 교회에서 해야 할 유일한 그 하나의 일!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비 내리는 이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 성찬이다. 지금도 성찬식, 즉 말씀을 통해서 죽었던 자가 살아난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본 것처럼 그의 영광을 본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에도 재현된다.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24: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24: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았다. 그리고 먹고 마셨다. 말하자면 함께 식사를 한 것이다. 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먹기를 그렇게 원하시는 것이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에서는 화목제가 있다. 그런데 이 화목제는 동물이 죽는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같이 먹는 것! 그것이 화목이다. 동물의 죽음은 곧 자기 죽음을 뜻한다. 기가 죽을 때 오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구약에 많은 희생 제사가 있다. 이때 제사장들이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았다는 표현으로 향기로운 냄새를 흠향했다고 하는 것이다.

 

26:31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하지 아니하고

 

1:13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 드릴 때 여호와께서 그 연기를 어떻게 흠향했을까? 그들이 흠향 한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실제로 하나님은 어떻게 그 연기를 흠향할까? 영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냄새를 맡을까? 엘로힘이라는 단어에 이미 답이 있다. 엘로힘은 호흡()과 짝(/쌍수)인 엘(어근)이라는 뜻이다. 엘로힘 안에 이미 임마누엘이 담겨있다. 그래서 함께 호흡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내가 울 때 함께 울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한다. 그는 나로 인하여 기뻐한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을 느끼며 살듯이 아버지 또한 아들을 통해서 느끼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더불어 먹음의 비밀이다. 나를 통해 그가 먹는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이다.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와 아들의 더불어 먹음이다. 이것이 잔치이다. 일요일에 왜 모이는가? 바로 이 성찬 때문이다. 바로 결혼잔치 때문이다. 천국을 그래서 결혼잔치로 묘사한다. 그래서 결혼잔치에 초대한다.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이런 식탁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찬이다. 그래서 성찬은 잔치이다. 결혼잔치이다. 그리고 감사의 식사이다. 예수는 결혼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그전에는 기쁨이 없는 잔치였다. 포도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참 포도주가 주어졌다. 그전에는 의식으로만 성찬식을 했다. 그러나 이제 참 포도주로 성찬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청명한 하늘아래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먹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예배드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또 말씀을 듣기 위해 오는 것도 아니다. 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작업이 아니다. 성찬은 말씀을 먹는 것이다. 한번 들으면 끝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밥을 한 번 먹으면 끝나지 않듯이 영혼은 말씀으로 살기 때문이다. 을 매일 매일 새로 해서 먹는 것처럼 말씀 또한 매일 새롭게 먹는 것이다. 내 존재 자체가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배우고 묵상하고 먹는 것이다. 피는 곧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곧 생명이다. 그가 나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진정한 성찬이다.

 

그리고 이러한 더불어 먹음이 되면 모일 때 먹는 식사가 잔치가 된다. 성찬이 되고 감사가 된다. 이렇게 모일 때마다 떡을 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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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정도령 = 보혜사 성령= 3낮3밤 땅속에서= 예수의 영=말씀=길 김운혁 2020.11.04 24
1594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양의 피에 죄가 전가 된다?) 예수안에 2020.11.03 43
1593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예수믿음"을 보겠느냐? 1 김운혁 2020.11.02 37
1592 나는 왕실의 아이 무실 2020.10.31 56
1591 다른 복음은 없나니 예수안에 2020.10.28 49
1590 엘리야의 사명 김운혁 2020.10.27 39
1589 미국에 계시는 분들 2 김균 2020.10.25 123
1588 안녕하십니까? 2 fallbaram. 2020.10.25 100
1587 2023년 4월 1일부터 1260일간 비오지 않도록 기도 합시다. 2명의 기도를 응답 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김운혁 2020.10.23 42
1586 예언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라. 김운혁 2020.10.21 33
1585 2021년= 예수님의 잔치의 해. 예수님이 모두를 초청 하십니다. 김운혁 2020.10.18 27
1584 안교공과의 질문과 가능한 대답 들꽃 2020.10.17 36
1583 엘리야와 두 증인이 온다. 김운혁 2020.10.14 28
1582 성경 교사가 필요합니다 들꽃 2020.10.01 67
1581 알듯 모를 듯한 세 천사 기별 1 들꽃 2020.09.18 91
1580 예수님의 이야기 나누기 다 양성 1 들꽃 2020.09.12 96
1579 아침 안개 속에 다가오신 님 김균 2020.09.07 129
1578 안식일(9) 두 안식일 김균 2020.09.07 71
1577 교회 소 그룹 성공과 실패의 원인? 들꽃 2020.09.05 38
1576 지난주 교과 질문 들꽃 2020.09.05 43
1575 예배당 보증금 빼 전 교인 '기본 소득' 주는 교회 1 나부터 2020.08.28 131
1574 이 상구(2) 3 김균 2020.08.27 241
1573 도마도 죽었다 김균 2020.08.27 76
1572 달수님 4 김균 2020.08.21 132
1571 축하 합니다 북미지회 새 총무부장 2 들꽃 2020.08.18 132
1570 말세의 징조인가요 2 들꽃 2020.08.08 132
1569 아무리 생각해도 들꽃 2020.08.08 72
1568 CBS에 고함. 이상구 박사라 부르지 말라. 2 달수 2020.08.06 245
1567 아담에게 드리는 노래. 바이블 2020.08.03 38
1566 켈로그와 이 상구(1) 2 김균 2020.08.02 255
1565 패배주의는 우리의 적입니다 좋은나라에 사는 것에 감사합시다 김균 2020.08.01 54
1564 나는 속죄를 위해서 밤을 새면서 기도해 본 일이 없다 2 김균 2020.07.29 61
1563 Fallbaram 님의 슬픈 소식 듣고 1 들꽃 2020.07.29 128
1562 아! 기독교 1 김균 2020.07.28 77
1561 그의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무실 2020.07.25 35
1560 장강의 눈물-거대 중국의 민낯 김균 2020.07.22 57
1559 여우사냥하는 나라 김균 2020.07.14 94
1558 고로나19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김균 2020.07.11 90
1557 손가락 후문 file 김균 2020.07.09 79
1556 비유 김균 2020.07.09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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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 유투브 닥터 김 (김주영 박사) 건강 TV 개설 1 무실 2020.07.03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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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 카스다에서 어느 목사에게 쓴 글 1 김균 2020.06.22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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