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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0 18:17

말씀에 갈한 분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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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말씀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 가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다면 버리시고 그렇지 않다면 차근차근 읽고 되새기셔서 '자유롭게 피어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입니다! 더불어 '구원'이란 '인격의 발전'이 아닌 '신격의 발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그의 믿음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이말은 우리를 '품성이 훌륭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 품성이 완전합니다. 개인마다 다 다른 품성의 기준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자체가 '선'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글을 읽는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하나이구요. 그것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이 '복음'을 자기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 곧 영접입니다.

 

 

1. 종교에서 복음으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인류-의 삶(Live)과 관련되어 있고 생명(Life)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이 진짜 복음인가?’ 기독교는 다름 아닌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한 대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의 믿음인가? 잘못 알고 있지는 않은가? 인류는 정말 복음에서 진리를 향유하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정말로 진리로 자유를 얻었는가? 이 질문에 한국교회를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2,000년 전 주님께서 꾸짖던 바로 그 모습 아닌가? 그렇다면 는 왜 이렇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배운다. 그리고 그 조직신학의 눈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하고 있던 일들이 있다.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조직신학도 일종의 전통이다. 그 조직신학이 정말로 예수의 말씀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사도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종교 생활에 열심이다. 이단 사냥에 나섰던 그가 어느 날 진리의 빛을 본다. 그러자 그가 가진 비진리의 비늘이 벗겨진다. 그가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의 신학이 비늘임을 깨닫는다. 그는 그 비늘이 벗겨지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종교 생활에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으로 변화된 것이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비늘이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 비늘이 벗겨진다면 무엇이 보일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오해의 비늘들은 무엇일까?

 

복음은 무엇인가복음‘ (eujaggevlion 2098)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소식이란 것인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생(Life), (life)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한다.

 

 

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살며,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하며 사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며, 어떻게 되며, 세상은 왜 이 모양이며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든가?.... 그래서 철학책을 읽기도 하고, 문학책을 읽기도 하고, 명상을 하지만 궁극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을 추구한다.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지혜가 쌓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해답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정말 해답을 주는가? 정말 죽음에 대한 답을 주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진정한 답이 되는가? 오히려 종교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지는 않는가? 종교가 권력의 시녀 노릇은 하지 않는가? 종교가 오히려 세상을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닌가? 종교는 못살게 굴지만, 복음은 삶을 살게 한다.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정말 는 복음을 듣고 있는가? 정말 기쁜 소식을 듣고 있는가? 기독교가 수고와 멍에만을 준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정말 복음은 무엇일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마찬가지로 믿음그리스도의'믿음'이다. 그러나 대부분 예수 리스도를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많은 기독인이 생각하는 믿음은 예수라는 대상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의 아들이다. 그런 예수를 믿어야 그 힘으로 나도 구원을 받는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도 내 밖에 있고, 하나님도 내 밖에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에게 나의 소원, 신념, 소망, 욕망을 빈다. 그것을 빌 때 예수의 이름으로 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다 더 큰 능력의 어떤 대상에게 그 복을 비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그래서 사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샤머니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목사는 무당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른다그리스도의 믿음이 없으면 성경은 수많은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심리학, 성공학, 만트라, 뉴에이지, 신비주의, 자기계발, 마케팅등등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경영자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리더십의 원리를 끌어낼 수 있다. 긍정의 힘으로 보면 얼마든지 긍정의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 심리학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심리적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 도덕책으로 읽으면 얼마든지 윤리강령으로 읽을 수 있다. 성경책이 도덕책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착하게 살면 천국 갈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는 착하게 살면 (미래에) 천국 간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무엇이라 했는가?  

 

 

 

1-1. 예수의 복음-천국은 가까이 있다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것이 복음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전한 메시지인 동시에 모든 메시지의 대표 메시지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으로 말하고 있다.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하면 대부분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로 생각한다. 대부분 종교에서 이 땅에서 착하게 살면 천국으로 가고, 못되게 살면 지옥을 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방 종교 개념이다. 예수가 말한 메시지가 아니다. 후대에 섞인 개념이다. 사실 착하게 살아,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 논리는 착하게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감옥간다는 말과도 같다. 즉 정치적인 논리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왕인 나한테 까불지 말고 말 잘 들어야 해!‘ 그런 논리인 것이다기독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기본 모토이다. 지하철을 타면 불편하게 하는 목소리를 가끔 듣는다. 일명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신자가 들어도 불편한데 불신자가 들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런데 불편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는 이 간단한 명제에 사실은 수많은 담론이 들어가 있다.

 

먼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도하는 자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요라고 물으면 ",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그 사실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단순히 믿으면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회심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가까이 왔다는 미래가 아니다. 완료 능동태이다. ’이미 왔다‘. 그것도 가까이 왔다라는 말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엥기조의 의미는 가깝다라는 의미이다. 천국은 이미 가까이 있다! 이것이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전한 메시지가 회심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다! 천국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산상수훈에서 자세하게 풀어준 것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주제는 한 마디로 [회심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다]이다. 회심‘(메타노에오)하라는 것은 누스‘(마음)함께‘(메타)하라는 것이다. 누스‘(本心 ,中心)와 연합해라! 하나되라! 그러기 위해 네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바꿔라 그 말이다. 너의 마음, 생각이 바뀌면 [천국이 이미 (시간/공간적으로)가까이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말이다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가치관의 전면적인 방향전환을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회심을 말한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회심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나의 신념, 나의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기존에 율법적 가치관을 가진 제자들에게 완전한 가치관 전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 말씀은 도전적이며 혁명적인 메시지이다.

 

산상수훈은 십자가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회심으로 인도한다. 회심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요 자기 죽음이다. 대속이라는 말은 나의 죽음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나의 죽음과 연합한 죽음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똑같은 죽음에의 동참이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천국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안에라는 말도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이미 존재하는 나라인 것이다.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류-가운데 있다. 이것이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다그런데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 한다. 길거리 전도자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내세를 위한 준비인가?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금욕하고 경건(진짜가 아닌)을 추구한다. 진짜 신비를 모르니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또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샤머니즘에 물들어 복을 빈다. 도대체 그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이렇게 믿는 예수는 우상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불상을 섬기는 불교 인들을 조롱한다. 그러나 싯달타 붓다해탈자‘(물질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자)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육신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금기였고 不敬이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일체의 형상이 없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하면서 싯달타를 희랍신화 중의 한 인물처럼 생각하였고 그를 제우스나 아폴로처럼 생긴 한 미남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집안 정원의 조각 장식품으로 만들었다. 헬레니즘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초기불교의 금기를 깨고 인도 전역으로 '불상조각품'이 열병처럼 번져나간 것이다. 사람의 심리라는게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다. 불교도 후대에 변질된 것이다.

 

불교만 그런가? 기독교는 예외인가? 예수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수도 변질되어 불상처럼 믿는 이들이 많다. 지난 2,000년간 기독교는 서양화가들이 그린 파란 눈의 키 크고 잘 생기고 온화한 예수의 초상화에 물들여 있다. 형상은 없다고 하지만 내면에 그 이미지가 살아있다. 그들의 내면에는 예수라는 불상이 꽈리를 틀고 있다. 그것이 불상과 무엇이 다른가? 사탄은 천사를 가장한다. 그리고 그 예수에게 자신이 이루길 소원하는 것을 빈다. 알라딘 램프! 램프를 문지르면 전능한 종, 지니가 등장한다. 주인님 무엇을 원합니까? 마찬가지로 전능한 종 예수에게 기도한다. 주인님 무엇을 원합니까? 예수는 불상이 되어 버렸다. 신성화 되었다. 그리고 우주 저 밖으로 내몰아 버렸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있다. 곧 오신다는 그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 늘 주장한다. 자기 시대에 예수께서 몇 월 몇 일에 오신다구. 그런데 그 예언은 항상 틀린다. 설사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자신이 전한 말씀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면 말이다. ​​예수는 180도 다르게 말한다. 천국이 가까이 있다.

 

종교는 늘 이 땅에서 금욕해서 죽어서 가는 천국을 약속한다. 종교는 늘 이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천국을 약속한다. 종교는 늘 이 땅에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는, 그런 가르침으로서 정작 이 땅에서 지옥을 살게 하는 것이 종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성경은 죽어서 가는 천당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가?

 

 

2. 하나님은 누구인가?

 

천국은 가까이 있다라는 것에서 천국하나님 나라가 정확하다. ’천국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함부로 기록도 부르지도 못했다. 그들은 야웨라는 이름 대신에 아도나이로 불렀다. 그래서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마태복음은 하나님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늘나라가 되었다. 그것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 天國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이 소유한(소유격)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면 우선 하나님을 이해해야 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있어야 인간도 있다. 하나님을 이해해야 인류-도 이해가 된다.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복음이란 어떤 면에서 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평생 던지는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것이 모든 철학자들이 던진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나는 의사다! 나는 가수다! 이렇게 자기 직업으로 말한다. 혹은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아내이다. 즉 역할로 자기를 규정한다. 그러나 직업, 역할 그것으로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한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대답은 하나님 없이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라는 존재는 하나님 없이 규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덮어놓고 믿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 정의는 알고 믿어야 할 것 아닌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고민하지 않고 믿는다. 하나님에 해당하는 단어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나라 말로 옮긴 것이다. 하나님이란 하나밖에 없는 신을 강조하기 위해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은 우리나라 고유 민족 신의 이름이었다. 이미 사용된 이름이다. 하나님을 막연히 믿는다면 우리 조상들이 막연히 믿었던 그 하나님과 무엇이 다른가!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을 믿는다. ‘하늘에 계신 신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 하느님! 어떤 것이 맞는가?

 

한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존 로스가 번역한 최초의 한국어 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이다. 로스 목사는 당시의 선교 보고서에서, “하늘”(heaven)”(prince)의 합성어인 하느님이 가장 적합한 번역어일 것이라고 보고했다. 한편 언더우드는 처음엔 "샹뎨"(上帝)를 사용했고, 나중에 "하나님"을 사용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이 고구려 시대 "하나님"이라 불리는 '위대하고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한국에서 쓰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하늘님에서 왔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하나”, 유일하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의미까지 담아서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라는 숫자를 나타내는 수 관형사에 을 붙인 것은 아니다. 초기 개신교에서는 상제, 천주, 하느님, 하나님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했으나 개역 성서를 번역하여 펴내는 과정에서 아래아(·)를 홀소리 ''로 일괄적으로 변경하면서 '하나님'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래서 유일한 님이라기 보다는 하늘님이라는 뜻이 더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사실은 천주교의 하느님과 다를 바 없다.

 

19921111일에 특이한 재판 사건이 있었다. 강원도의 정근철이라는 사람이 기독교 측을 피고로 '하나님 이름 도용에 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한민족 하나님 도용 죄"라는 죄목으로, 기독교에서 허락 없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무단으로 써왔으므로 보상금으로 1억을 내라고 재판을 신청하였다. 재판부는 이 소송을 기각했는데, 재판부는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보통명사로 보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보통명사이므로 피고 측인 기독교가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원고패소로 끝났다. 하나님이 기독교의 것이어서 승소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용하는 보통명사이므로 승소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토속신 이름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하나님 사상이 투철해서 이 이름으로 쓴 것이다.

 

대한민국은 하나님 사상이 투철함으로 이를 수용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부르기로 성경 공동 번역위원회에서 결의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여호와로 인식 되어지고 있다 -카톨릭대사전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에 있는 대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엘로힘과 여호와를 어떻게 기록하면 좋겠는가? 신이 어떻겠소? 좀 막연하지 않나요? 절대자 야훼가 가진 유일신의 개념이 담겨야 되지 않겠소? 상재, 천주가 좋을 듯 하오. 조선인들이 모시는 하느님이 좋지 않겠소? 전능하신 하늘님! 유교, 도교를 믿던 사람도 거부감이 덜하지 않겠소?”

 

미국에 돌아간 후 Gale 선교사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정말 큰 죄악을 저질렀다. 우리는 엘로힘 여호와를 마치 그들이 믿어오던 신인 하나님인 양 둔갑시켜 속여서 전도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전한 엘로힘과 그들이 믿던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성경을 믿기 시작하였다. 나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란 이름을 물어보면 정말 막연하다. 막연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은 야웨에 대해서, 그리고 엘로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독교인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 우리 조상들이 믿었던 하나님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 엘로힘은 누구인가 ?

 

그렇다면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은 어떤 뜻일까? 엘로힘이 창 1장에만 26번 나온다. 구약에 엘로힘이 2,245번 나온다.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보았는가?

 

430  !yhil¿a>   'elohiym  {el-o-heem'}

433 의 복수형 ; 통상적인 의미에서 신들 ;그러나   특별히 지존하신 하나님 에 대하여   (복수로특히 관사와 함께 ) 사용됨 ; 가끔 높은 관리 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으로   적용됨 ;어떤 때는최상급으로 :- 천사들 , x 뛰어난 , 하나님 (신들 )(같은 ), (매우 ) 위대한 , 재판장들 , 능한

 

433  H'wOla>   'elowahh  {el-o'-ah   rarely   (shortened) 'eloahh   {el-o'-ah}

드물게 (짧게는 )   eloahh,  에로하 ;   아마 410 에서 유래한 (강세적 ) 연장형 ;신성 :- 하나님 ,. 430 을 보라

 

410  lae   'el   {ale}

352에서 온 압축형 ;형용사로서 힘센; 특히 전능자(그러나또한 어떤 신성에도 사용됨 ) :- 하나님(), x 훌륭한, x 위대한, 우상, (센 자), 능력, 강한, - 이 있는 이름과 비교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엘로힘’(430  !yhil¿a>)강함, 전능자, 을 의미하는 에서 나왔다. 엘로힘의 어근은 ’(410  lae )이다. 이것은 전능하신 분이란 것이다.

 

이 가장 나오는 구절은 창 14장이다. ‘멜기세덱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19:1 하늘이 하나님 (la)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3 언어 (rm²a)도 없고 말씀 (rb;D)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편에는 하나님을 로 표현한다. 그런데 아마르도 없고 다바르도 없다. 즉 말이 없다. 그러나 천하가 그 영광을 선포한다. ‘은 아버지라 보면 된다. ‘은 창조주이다. 그런데 창조를 그리고 있는 창 1장은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엘로힘의 관계는 무엇인가?

 

(//) 단수이고 엘로힘(//) 복수이다. 엘로힘은 성경 용례 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나인의 신들에게도 사용된다. 심지어는 재판장들에게도 사용된다. 말하자면 엘로힘일반명사이다. 꼭 하나님에게만 적용된 언어는 아니다. ‘야웨는 다르다. ‘야웨는 고유명사이다. 그래서 성//격이 없다.

 

엘로힘의 어미는 ’(!y)이다. ‘엘로힘엘로하’(433  H'wOla>)의 복수이다. ‘은 쌍수를 만드는 어미이다. 그래서 엘로힘의 의미는 엘로하(하나님/단수)의 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엘로힘이 복수이기도 한 것은 쌍수들을 신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엘로힘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즉 아들과 짝이 되어 사는 아버지의 개념을 담은 것이 엘로힘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홀로 계시지 않고 아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임마누엘의 의미가 엘로힘 안에 담겨 있다.  엘로힘을 신약으로 말하면 14:20이다.

 

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죽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즉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다.

너희가 내 안에, 즉 아들들은 아들 안에 있다.

내가 너희 안에, 즉 아들은 아들들 안에 있다.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은 따로 따로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엘로힘안에 엘로힘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 개념이 짝이다.

 

아마르도 없고 다바르도 없는 이 내 안에 있어 아마르, ‘다바르로 말하는 것이다. 자기표현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고 하면 무조건 밖에 있는 최고의 신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천국은 가까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은 하나님은 가까이 있다! 이미 있다! 그것도 너희와 가깝게그런 말이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너희와 짝으로 함께 있다. 그 말이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크다.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광이다. 아버지는 말도 언어도 없다. 그러나 천하를 움직인다. 아들은 로고스. 아버지의 나타남!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세상이 모든 언어를 다 합쳐도 표현할 수 없는 전체이다. 전부(All)이다. 아버지가 전부이다. 온전이다. 완전이다. 아들은 부분이다. 나는 그 개체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부분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날에는 온전히 알리라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엘로힘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인류-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엘로힘 안에는 나도 짝으로 함께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givnomai1096) 사람들을 이라 하셨거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말씀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된’(기노마이) 자들을 데오스’(복수/엘로힘)라고 한다.  

본문은 다른 말로, 말씀들이 곧 신들이다. 엘로힘이다. 즉 엘로힘은 그래서 말씀들이다.

 

엘로힘은 사이에 가 있다. 히브리어 호흡이라는 뜻이다(숫자 5 참조). 엘이 함께 호흡한다. 엘이 인류-나로 호흡한다. 그래서 엘이 호흡하는 존재를 엘로힘이라고 한다. 엘이 말씀으로 호흡하는 존재들을 엘로힘이라고 한다.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로 연합된 존재들! 말씀으로 연합된 말씀들! 그들이 엘로힘이다. 그 말씀들을 통해 천지창조 사역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없이 존재하지 않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로힘 안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 짝으로 일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다스림! 개념이 다 담겨 있다.

 

엘로힘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이다. 엘로힘이 되면 의 말을 할 수 있다. ‘은 그렇게 나를 엘로힘을 만들기 원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끊임없이 엘로힘을 섬기는 대상으로 여긴다. 엘로힘을 마치 섬겨야 할 위대한 왕으로 섬기는 것이 종교적 하나님이다. 사실 엘로힘 안에 그 짝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하늘들의 나라이다. 즉 엘로힘이라는 이름 안에 이미 임마누엘의 복음이 담겨 있다.

 

 

2-2. 야웨 그리고 나

 

성경에 엘로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야웨라는 이름도 나온다. 도대체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엘로힘이 일반명사인 것과 달리 야웨는 고유명사이다. 그리고 엘로힘은 복수이며 야웨는 단수이다. 왜 엘로힘은 복수이고 야웨는 단수인가?

 

 

엘로힘은 창 1장에 나오는데 야웨는 창 2장에 등장을 한다. 1장의 주어는 엘로힘이다. 그런데 그 엘로힘은 복수이며 엘로힘의 어근은 단수의 하나님 이다. 그런데 은 보이지도 않고 다바르아마르도 없다. 보이지 않는 ’, ‘다바르로도 표현할 수 없는 ’, 이 존재에 나타나면 그것을 영광이라고 한다. 나타남이 영광이다. 그 영광이 표현된 이름이 야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등장할 때 신명은 항상 야웨라는 신명을 쓴다. 야웨는 출 3:14로부터 온 이름이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나는 나다할 때 하야라는 동사와 관계대명사를 뜻하는 아쉐르가 결합 된 말이다. ‘하야 아쉐르 하야이다. 여기에서 여호와라는 말이 나왔다. 개역 개정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사실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야웨가 가까울 것이다. 유대인이 야웨의 이름을 너무나 거룩하게 여겨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시대가 지나 그 모음을 잃어버려 오늘날 여호와라고 부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발음을 잃어버렸다.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도 뜻이 있지 않겠는가? 이름조차도 부를 수 없게 만든 섭리라고 본다. 그래서 야웨의 이름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이름이 하나님 아니던가?

 

하나님은 왜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을까?

나는 나다!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질문했는데 나는 나다!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황당할 것이다. 나는 나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뭐라고 답하는가? 나는 나다! 무슨 말인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은 그 이름으로 갇힌다. 이집트에서 신들의 이름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보면 수많은 신의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신들의 이야기를 보면 결국 인간의 희로애락, 즉 인간을 다루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무슨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형상을 만드는 순간 그 형상으로 고착된다. 이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나다라고 답변을 하셨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사람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어떤 명사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대명사 ‘I’로 쓴다. 자기는 대문자로 쓰고 다른 사람은 소문자로 쓴다. 그러나 진정한 대문자 아이는 아버지이다. 그 대문자 아이에 세상 모든 이름이 다 담겨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다.

 

3. 야웨에 담긴 임마누엘 복음

 

그런데 이 야웨라는 이름도 엘로힘과 마찬가지로 임마누엘의 복음이 담겨 있다. ?

 

3068  h/:hyÒ  ?Y@hovah  {yeh-ho-vaw'}

1961 에서 유래 ;자존자 , 또는 영원한 자 유다 민족의 하나님의   명칭 여호와 :- 여호와 ,주님 , 3050, 3069 와 비교

 

여호와요드’(y)+‘하야’(hy:h;)이다. 여호와는 하야동사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하야동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61  hy:h;   hayah   {haw-yaw}

기본어근1933 과 바교;존재하다 ,이다 , 혹은 되다 ,발생하다 (늘 강조적으로 그러나 순전한 접속사나 조동사는 아님 ) :- 봉화 , ×전적으로, 있다 (되다, 달성되다, 위탁되다, 같다 ),부수다, 되게하다, 발생 (하다 ), 계속하다, 하다, 기진하다, 떨어지다 , +따르다, 생기다 , ×가지다, 지속하다 물러나다 (스스로 ). 요구하다 . × 사용하다

 

하야는 헬라어로는 에이미영어로는 ‘be’이다. ‘이다/되다/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앞에 요드가 붙어서 된 이름이 야웨이다.

 

요드는 단어 앞에 붙을 때는 ‘~일 것이다’(미완료).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이 끌고 갈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손잡고 끌고 간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뜻한다.

 

 

요드가 단어 첫 자음 뒤에 접두 되었을 때 : ~하고 있는 존재,

요드가 단어의 둘째 자음 뒤에 접두 되었을 때 : ~하게 한 (사역)

요드가 단어의 셋째 단어 뒤에 접두 되었을 때 : ~(소유)

 

창조 2일부터 전부 요드가 붙어 나온다. 첫째 날은 하나님의 수로 기수이기 때문에 요드가 없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전부 요드가 붙어 있어 소유를 말한다. 전부 서수로 되어있다. 모두가 하나다라는 것을 시사한다. 모두 요드로 연결되어 있다. 호흡()요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존재이다.

 

여호와라는 신명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하야요드와 결합되어 있다. ‘요드가 존재를 이끌고 가고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한다일 때 하야동사는 미 완료동사이다. ‘미 완료라는 것은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I AM WHO I AM”“I WILL BE WHAT I WILL BE” 둘 다 되는 것이다.

너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다.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이다. 그 말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지금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불’ ‘떨기나무애굽으로 보내는 것이다. ‘인류-가 누구이기에? 그렇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불이 함께하기에, ‘인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인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를 통해 생수의 물이 흘러난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입이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입이다. 또 이 시대에 의 입을 통해 그가 말할 것이다. ‘를 짝으로 그가 말할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짝으로, 쌍으로 존재한다. 엘로힘은 나와 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아버지 ’(일반명사)이 존재로 나타난 고유명사가 야웨이다. ‘야웨는 고유명사이다. ‘의 이름이다. 사실은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다. ‘가까이 있는 아버지이다.

 

 

3-1. 나는 누구인가? 

구약 당시 감히 야웨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도나이로 사용했다. 왜냐면 그들은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나먼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천국은 가까이 있다. 너희 안에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짝이다. 그 짝을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은 또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을 알고, 사람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만물의 근원이요 시작이다. 아버지는 형상 없는 의식이며, 본질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형상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두 부분은 물체와 공간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실체가 아버지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좋은 비유가 있다. 하늘에 구름이 있다. 구름은 늘 변화무쌍하다. 양떼구름, 깃털 구름. 이 변화무쌍한 구름 뒤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때로는 비가 오고, 때로는 눈이 온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늘이다. 하늘은 공간, 그 자체이다.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하늘로 비유한다. 하늘은 일종의 공간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모든 것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 배경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소 편재하다. 어디에나 계신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하나님은 나는 나다’(3:14)라고 하신다. 다른 말로 나는 being이다’. 존재다. 하야에서 야웨가 나왔다. 따라서 야웨는 존재의 개념을 담고 있다. 그런데 하야미 완료이다. 이것의 의미는 인류-너가 있는 곳에 항상 내가 있다’. ‘나는 하늘이다. 너가 구름이라면 난 하늘이다.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 내가 있다’. 그것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다.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의식이 나타나면 아들이라고 한다. 1장은 현상계의 사역이다. 소리도 없고, 말씀도 없는 아버지가 현상계에서 사역할 때는 말씀(엘로힘)으로 사역한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말씀(호 로고스)을 아들이라고 한다. 1장이 또한 구속 사역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엘로힘의 사역이다. 당연히 현상계에 사역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현상계를 초월한다. 아버지는 말씀조차도 없는 근본이다. 그 아버지가 현상계에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나타나면 그것을 그리스도(’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말씀 육신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의식과 연결하는 메신저(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그가 메시야(그리스도)이며 진리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인류-에게 임했다. 그 결과 인류-에게 아버지의 의식이 있다. 이 의식이 우주의 본질이다. 아버지 의식을 영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은 하나이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듯, 아들 된 인류-도 아버지와 하나이다. ? 그 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영으로써 하나이다. 개체는 달라 보이나 영으로서 하나이다.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dj;a²) 여호와이시니

 

유일한이라고 되어 있지만, ‘하나라는 뜻이다. ‘에하드의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에 혼동이 올 수 있다. 그 이유는 3위 일체를 수평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성부(구약)-성자-성령 이렇게 시대적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창 1:1부터 한 분으로서 항상 사역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항상 하나로서 함께 존재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 아들 안에 성령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도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도 영인데 왜 성령을 붙였을까? holy를 붙였을까? ‘성령이 있다는 것은 악령도 있다는 것이다. 더러운 말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악령이 아닌 하나님의 영이 아들 안에 있을 때, 그 하나님의 영을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이 항상 함께 하나로 존재하며 아버지가 그의 사역을 아들을 통해서 하고 있다. 이제 답하라! ‘인류-는 누구인가?

 

 

3-2. Human Being

 

3:14에서 ‘I am that I am’이라고 했을 때 ‘I am’이 바로 존재(being)’이다. 이 말은 난 존재(being)!’ ‘내가 진짜 존재(being)!’ ‘나만이 존재이다라는 뜻이다. ‘인류-가시나무에 불과하다. 그러나 는 그 떨기나무에 붙은 이다. 그래서 그 떨기나무가 영광이 되는 것이다. 너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관계를 ‘Human being’으로 생각한다

우주는 아버지 의식의 표현이다. 마음 대신 의식이라고 쓰는 이유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할 때 이 단어를 쓰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런데 이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은 그의 형상인 것이다.

 

‘human being’‘being’을 포함한 ‘human’이다. 본질(being)을 담고 있는 형상(human)이 인간(human being)이다. ‘human’형상이다. 이에 비해 ‘being’존재이다. 존재는 형상을 초월한 의식이다. 인간은 이렇게 형상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26에서는 인간을 체렘데무트로 설명하고 있다. ‘체렘은 우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보이는 형상을 뜻한다면 데무트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닮음이다. 즉 의식에 해당한다.

 

인간(human)은 아버지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아버지 의식이 존재(being)’이며 시간을 초월한 있음(being)’이다. 그 본질(being)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그러나 형상으로서는 수도 없이 많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형상(human)은 이원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형상을 초월하면 일원성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 형상들안에 있으며, 동시에 그 형상을 초월한 한 생명이다.

 

‘Human being’ 자체가 말씀(being) 육신(human)이란 뜻을 함의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부른다. 아들은 아버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인격개발을 말하지 않는다. ‘신격의 발견을 말한다. 신격의 표현하나님의 아들이다. ‘자신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곧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것이 곧 참된 나이다.

 

참된 나가 있다는 것은 거짓된 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이 라고 생각하는 그 는 생각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한 옛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그 (옛사람)의 부인이다. ‘거짓 나’(ego/自我)는 죽고 참 나’(眞我 /靈我)로 돌아오는 것이 탕자비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옛사람)부활’(새사람)의 가르침이다.

 

아버지는 穩全(온전)이시고 完全(완전)이시다. 이때 은 전체를 뜻한다. 아버지는 전체이다. 전체가 영어로 ‘’All‘이다. ’All‘이라는 영어는 부사로 쓰일 때는 전체를 뜻하고, 형용사로 쓰일 때는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All‘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부를 때 쓴 아람어 ’El‘과 같다. 이슬람은 하느님을 ’Allah‘로 부른다.  

 

프뉴마를 순수 우리말로 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도 올(All)과 같은 말이다. ‘All’은 세계 공통어이다. ‘All’하나이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라고 동시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데 몸인 나를 줄여서 몸나라고 하자. 그리고 프뉴마인 나를 줄여서 얼나라고 하자. ’몸나의 부인이 자기 부인이다. 그래서 몸나는 죽고 얼나로 연합하는 것이 회심이다. 아버지와 한 마음(누스)되는 것이다. 전체와 연합되는 것이다. ‘인류-의 마음은 부분적인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것(All)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하여진다. 당연하다.

 

부분적인 인류-를 보지 말고 전체의 나를 본다. 그것이 얼나이다. ‘인류-는 바로 얼나이다. 얼나만이 영원한 생명이다. ‘얼나는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이 정체성이다. ‘얼나로서 자신을 발견하면 로서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류-의 얼굴은 얼꼴이다. ‘그 얼담은 몸인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볼 때 얼굴이 아닌 얼꼴을 보는 의식을 되찾자. ‘얼꼴에서 을 보자! 인류가 얼나로 보인다.

 

 

3-3. 섬기는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의 님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 하나님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나와 하나로 있다. 그 사실을 알면 섬기는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아버지는 나의 하나의 님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님이다. 인류-나에게 하나님은 님이다. ‘하나-‘All-이다. ‘전체이다. 아버지(All/전체)는 아들(부분)보다 크다. 그러나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인류-속에는 빛이 있다. ‘인류-는 작은 빛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은 전체 빛이다. ()이신 아버지와 아들은 영()으로 하나이다. 아들은 하나’(아버지)에서 나와서 그 하나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하나에 온 우주가 연결되어 존재한다. 먼지를 보자! 먼지 한 톨에도 생명이 춤춘다. 먼지 한 톨 속의 원자가 그들의 전자(-전하)더불어(+전하 )1초에 28.9Km나 원무(圓舞)를 춘다. 이 원무는 별들이 원무를 추는 것과 닮아있다.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가?

 

 

인류-의 정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있어 정신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우주 만물 속에 자신을 나타낸다. ‘데스몬드 모리스접촉이라는 책에서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를 1분에 72회 들으면서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고, 자궁의 양수에서 유영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성령을 숨 쉬는 존재이다. 이 우주에는 절대 意識이 있다. 아들은 이 의식(누스)을 매일 깨닫는다. 아버지는 내 속에 끝임없이 영()을 보내주시어 그 의식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아들은 생명의 율동을 느낀다. 이 우주에서 생명의 고동을 느낀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부분적인 지식이요 앎이다. 그래서 온전한(All) 아버지를 그리워한다(고전 13:12).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성경에서 이것을 기도라고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할지, 예수님께 할지, 아님 성령님께 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을 인류-와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분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 또한 섬기는 하나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성령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런 귀신의 반대개념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인류-의 육체를 형상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말을 하는 존재이다. ‘인류-를 통해 느끼며, 호흡하며 존재하시는 분이다. 나도 아버지를 느끼듯이, 아버지도 아들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가 나로 호흡하고, 나는 그 맥박을 느끼는 것이다. 우주에서 아버지의 심장박동을 느낀다. 이러한 들음이 곧 기도이다. 내가 그로 호흡하고, 그가 나로 호흡한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이 인류-를 섬기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잠잘 때도 그가 호흡한다. 천국은 가까이 있다.

 

 

4. 사람과 동물

 

사람과 동물의 같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동물들에게도 혼은 있는가? 동물들에도 혼은 있다. 그러나 동물들의 혼은 의식이라고 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본능으로 행할 뿐이다. 그들도 기뻐하고 슬퍼하고 심지어 생각도 한다. 일본의 과학자는 원숭이와 사람의 차이를 연구했는데, 연구결과 원숭이는 생각하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즉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은 의식이다. 짐승은 생각하는 에고’(ego)를 관찰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생각하는 자신을 관찰하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이 아버지 의식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이 의식이 우주를 펼쳐왔으며, 그 의식을 발견할 때, 그때 나의 에고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나의 에고는 각종 형상(물질)과 동일화된 우상’(ei[dwlon)에 불과하다. 이 우상은 인류 탄생 이후 계속해서 축척 되어오던 것이다. 이 우상 안에 갇혀 산다면 짐승과 같다. 짐승도 희로애락을 다 경험하며 산다. 그래서 전도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동물들은 의식이 아니라 본능, 즉 마음이 있다. 동물들은 영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들은 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이라 번역되었는데 푸쉬케이다. ‘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혼의 구원이다. 사람에겐 영혼이 있고, 동물에겐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모든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혼은 각각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에는 죽어있는 혼이 있고, ‘살아있는 혼이 있다. 그러나 은 나눌 수도 없고 안도 없고 밖도 없다. ‘하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4:24), 하나님은 하나이다(6:4). 그러나 혼은 그렇지 않다. 혼은 하나가 아니라 사람 숫자만큼 많다. 심지어 동물들도 혼은 있다. 그런데 혼의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죽어있는 혼이 살아있는 혼으로 즉 생혼’(네페쉬하이)이 되는 것이다. ‘은 살아있다 죽었다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은 혼이다. 하나님이 영이시니, 이 혼을 살려서 영혼이 되는 것이다. (being)과 혼(human)이 하나 되는 것이다. 이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다. 혼은 각각의 혼이다. 그러나 영(프뉴마)은 단일하다.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영은 하나인데 영으로 말미암아 죽어있는 혼이 살아있는 혼이 되어 영원한 영과 하나 된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이 혼(푸쉬케)의 구원이다. 살아있는 혼만 영과 교통할 수 있다. 그럴 때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러한 의식이며, ‘인류-의 구별은 바로 이 의식에 있다. 아버지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아닌 본래의 인류-’, 본래의 존재를 뜻한다. 본래의 인류-아버지 의식이다. ‘으로 인해 살아있는 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영혼이라 하고, ‘그 영혼이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이다. 아들에게는 아버지 의식이 있다. 그리고 그 의식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동물과 그리고 아들이 아닌 자들과의 차이이다. ‘차원이 다른 의식!’ 그 의식은 영원하다. 결단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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