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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말씀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 가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다면 버리시고 그렇지 않다면 차근차근 읽고 되새기셔서 '자유롭게 피어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입니다!

 

1. 성경의 비유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성경 저자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 저자가 과연 21세기의 사고 방식으로 기록했는가?

 

대부분 성경을 볼 때 조직신학이라는 기본적인 안경이 있다. 그런데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변론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조직신학은 이단을 판단하는 하나의 틀로 사용된다. 성경, 신론, 인간론,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교에는 각각의 전문 교수가 따로 있다. 심지어조직신학 실천신학이 따로 있다. 그런데 정말 성경 저자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성경을 기록했을까? 조직신학은 다분히 철학적, 이성적, 과학적이나 성경 저자는 조직신학적 사고로 기술하지 않았다. 성경은 다분히 상징주의 언어를 채택하고 있다. 문자 주의라기보다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그림 언어라는 것은 낯설다. 사실 성경뿐만 아니라 천지 만물이 다 그림 언어다. 그림 언어를 낯설어하는 이유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구속이다. 그래서 성경 전체 틀을 이 세계관으로 본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창조(1-2)-타락(3)-구속(4~계시)으로 해석한다. 가장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창조이다.

 

그렇다면 그 출발인 창세기가 기초가 된다. 그런데 창세기를 과학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다. 창세기를 과학으로 접근하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이 단절되며 약속과 성취구조를 읽을 수 없다. 언약의 근간을 잃어버린다. ‘예수가 약속의 실체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1장은 일종의 창조 그림이다. 그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며 의미가 내포된 그림이다. 그림에는작가의 의도가 있다.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1장이 사건일지라도, 그 사건에 담은 의미를 보아야 한다1장은 과학적 언어로 기술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파충류, 곤충류, 설치류 이렇게 분류하지 않았다. 단순히 모두 보이는 언어인 기는 것들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림 언어를 보이는 언어라 할 수있다. 따라서 그렇게 사고해야 성경에서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을 수가 있다.

 

궁창이라는 단어가 있다. 궁창은 라키아(: ['yqir; 7549)로 원래 뜻은 넓게 펴진 것이라는 뜻이다. 라카( [q'r; 7554)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라카는 망치로 두드려 넓게 편 것을 뜻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두루마리로 표현하기도 한다.

 

34: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현대인들은 궁창을 보면 우주를 생각할지 모르나 성경의 언어는 하늘은 망치로 펴서 펴놓은, 그래서마치 두루마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문자 지향적이지 않고 그림 지향적이다. 성경에는 이미지로 충만하다. 천국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차원이 다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징으로 그릴 수밖에 없다. 성경에는 상징과 이미지가 풍부하다. 그것이 또한 예수께서 모든 것을 비유로 하셨던 이유이다. 그래서 이미지와 상징을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들면 계시록 21장에 언급된 보석으로 치장된 성, 그것이 정말로 천국의 모습일까? 또 복음서에 기록된 지옥의 모습,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리라’(9:48)는 그 모습이 진짜 지옥의 모습인가? 이런 그림, 상징 언어를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고통을 그린 것이다.

 

성경은 쿠텐베르크 이전에 쓰였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책이 귀해서 한 자 한 자가 의미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A-B-B-A, A-B-A-B 이런 정교한 댓구 형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현대 문학은 순서대로 그냥 읽으면 되지만 고대 문학은 이렇게 댓구 형식을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댓구에는 상징들로 가득하다. 상징을 쓰는 이유는 시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아주 적은 단어로 작가의 심오한 수많은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이다. 그런 면에서 만큼 압축적인 것이 없다. 1장도 장르 상 가깝다. 이러한 댓구와 상징, 반복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도 이미지로 가득한 책이. 계시록 당시 주된 당사자는 독자보다는 청자이다. 글을 읽을 줄 아는 한 사람이 글을 몰랐던 청자에게 풍성한 이미지로 복음을 읽어준 것이다. 현대인들처럼 책을 읽지 않았다.

 

성경을 이렇게 그림 언어로 이해하게 되면 삶도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도 그림으로 이해할 수있다. 그때 자연은 더 이상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자연이 하나의 틀 없는 풍경화요, 그 풍경화는 사시사철, 아침과 저녁으로 변하는 그림을 제공한다. 물론 그 그림에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시골 농부가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는 말이 있다. 농사는 구원의 원리를 가장 잘 담아 놓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농사도 아버지가 그려놓은 그림과 같다. 그래서 예수의 언어는 모두 농부 언어였다.

예수는 갈릴리의 평범한 농부에게 농부 언어로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을 전했다. 그림은 말이 없다.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한다.  BMWBible Metaphor Wheel이다. 즉 메타포에 대한 이해가 BMW이다. 그림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을 수레바퀴로 설명한 것이다.

 

1-1. 수레바퀴를 통한 성경이라는 그림의 이해

수레는 Wheel(뼈대), spoke(), axis()로 구성이 되어있다.

Wheel 

대부분 성경을 볼 때,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마무리하는, 시간 순서대로 기술되어 있는 문자적, 역사적 연대기로 본다. 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서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방식도 과연 그러한가?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지 않은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신다. 그것은 묵시이다. 성경은 역사에 나타난 표적을 통해 묵시를 보여주는 책이다. 역사 속에서 묵시를 발견해야 한다. 묵시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선적인 구조가 아니다. 직선의 시간을 수레바퀴처럼 말면 Wheel이다. 그러면 계시록이 창세기보다 앞설 수 있다. 이것을 개혁주의자들은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라고 한다. 이것이 휠의 특성이다.

SPOKE 

수레바퀴와 축을 이어주는 살(spoke)이 있다. 이 살은 성경의 수많은 주제와 상징, 모형들에 해당한다. 창세기, 요한복음, 계시록 등이 살이다. 성경의 많은 인물도 일종의 살이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도 spoke이다. 성경의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또한 spoke이다. , 나무, 구름, 하늘등도 spoke이다. 성경의 수많은 스토리, 표적도 spoke이다. 성경은 다양한 메타포를 담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다. 세상에 나오는 설교집을 보면 같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 다 다르다. 신약학 교수도 그 고민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맞는 해석인가성경은 수많은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경영자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리더십의 원리를 끌어낼 수 있다. 심리학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심리적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 도덕책으로 읽으면 얼마든지 윤리강령으로 읽을 수 있다. 유대주의로 읽으면 얼마든지 유대주의로 읽을 수 있다. 신비주의로 읽으면 얼마든지 신비주의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예수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그런데 그 예수에 대한 이해도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대부분은 예수라는 대상을 믿는다.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의 아들이다. 그런 예수를 믿어야 그 힘으로 나도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도 내 밖에 있고, 하나님도 내 밖에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에게 나의 소원, 신념, 소망, 욕망을 빈다. 그것을 빌 때 예수의 이름으로 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의 어떤 대상으로부터 그 복을 비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그렇게 믿는 예수를 다른 예수라고 하고, 그 다른 예수가 바로 용이요 뱀이요 사탄이다. 성경이 얼마든지 샤머니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목사는 그 샤머니즘의 선봉장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위 양복 입은 무당이다

그러면 이러한 샤머니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축(Axis)이다.

Axis 

이 살은 반드시 그 축(axis)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성경의 축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axis에 해당한다.  

그 증거 구절은 다음과 같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4: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슬이며 꿰는 실이다. 성경을 관통하는 축이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가르친다. 그들은 현대교회처럼 행복론, 심리치료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 / 오순절 설교 )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회심 후 증언 )

이제는 사도들의 방법을 따라 성경에서 진리의 핵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천국의 열쇠이다(16:19).  

같은 성경책을 놓고도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한 다양한 해석들을 존중한다. 왜냐면 성경책은 그림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볼 수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통일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AXIS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이다. 그 그리스도가 참된 믿음으로 인도한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반석 위에 해석된 말씀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반석 외에 다른 것 위에 세워진 집은 무너진다. 그 반석을 휠의 AXIS라고 한다. 바퀴가 굴러가는 축이다. 가장 중심에 있다. 그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살은 그 축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축은 그리스도이다그래서 성경이라는 바퀴는 그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예수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이때 단순히 대상으로서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한 그 말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하며, 그 말씀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진의가 비로소 드러난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는 것이다. 왜냐면 그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그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읽을 때 성경책이 생명책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 책이 되게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읽지 않으면 샤머니즘으로 전락한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2. 바퀴(Wheel)가 굴러가는 목적

 

그렇다면 휠이 돌아가는 이유, 목적은 무엇 때문인가? 즉 성경은 왜 존재하는가?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다.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경배하기 위해 있는 것인가?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고전 3:21-22]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즉 성경은  (보편적 인류) 때문에 기록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이유도  ’  때문이다. 교회 때문이다. 교회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성경의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이 본보기가 되기 위함이다. 성경이 모든 기록은  때문에 기록된 것이다.

 

성경이라는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이유가 바로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를 위한 것이다. 성경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예레미야, 다니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과거 역사가 아니다. 바로 현재의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이다. 즉 그들은 각기 다른 인물들이 아니라 모두 한 생명, 한 존재이다.

 

만약 그들이 모두 다른 이야기이고, 모두 다른 인물들이라면 예수 이전에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단 말인가? 아브라함은 예수 이전의 인물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단 말인가?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모든 인물은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것이다(2:24, 5:32).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므로 아담에게서도, 아브라함에게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아담의 구원, 아브라함의 구원 방법이 모두 다 같다.

 

성경을 분리된 의식으로 읽지 말고 이렇게 한 생명’ ‘한 의식으로 읽어 보자! ‘한 생명’ ‘한 의식혹은 아가페 의식’, 혹은 그리스도 의식’ ‘모노게네스명칭은 각기 다를 수 있으나 아무튼 하나 됨의 눈으로 보면 모든 인물이 연결된다. 성경은 악인 지옥, 선인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악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 그리고 그 모든 성경 인물은 바로  의 자화상이다. 악인은 바로  이다. 성경은 그 악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그 사탄을 천사로, 그 탕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 예수께서 구약을 완성, 사도들에 의해 성경이 기록, 그 모든 것의 마침표는 이다. 구원은 최종적으로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말세를 경계한 사람에게 쓰여진 책이다. 그렇다면 말세란 언제인가? 마지막 날은 언제인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안에 성취되는 날이다. 내가 거짓 성전이면 성경의 모든 인물은 거짓 증거 하게 된다. 왜냐면 그 사람을 내가 믿고 있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부터 말해왔던 그 진리가 나에게 마침표를 찍으면 나를 통해 진리가 말해지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사람은 내 안에서 살아난다.

 

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나 약속을 받지 못한다. 믿음으로 증거는 받았는데 아직 그 약속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 물론 그 약속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아브라함은 진리를 깨닫고 그 날을 멀리서 본다. 그러나 지금은 실체를 본다. 그래서 종말을 사는 것이다.

 

40절에 놀라운 말씀이 등장한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되어있다. 믿음의 조상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마지막 날을 살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자기 시대에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마지막 날은 예수께서 온전히 진리를 넘겨주었기 때문에 진리를 온전히 볼 수 있는 때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 즉 실체는 종말에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은 진리를 깨닫고 그 날을 멀리서 본다. 아브라함이 본 약속의 실체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날에 아브라함도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이라는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 종말을 사는 성도가 진리를 말하지 못하면 진리의 아브라함을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진리의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투사된 아브라함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내게 달려 있다. ? ‘마지막 날을 살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자기 시대에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생명책은 다른 책이 아니다. 그 성경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면 성경책이 생명책이 된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생명책이다(7:12). 성경책이 생명책이 되지 못하면 진리의 아브라함도 없다. 진리인 아브라함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최종 완성 포인트는 이다. 결국, 종말은 나에게서 이루어진다.

 

1-3. 수레는 이동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은 ’  때문에 기록된 것이라면, 그  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수레는 이동을 목적으로 한다. “이동이 수레바퀴의 목적이다. 야곱이 요셉을 만날 때 수레를 타고 간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 수레를 탄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를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전했을까? 서신서는 문제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교회는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수정한 것이 서신서이다. 그렇다면 원형적인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전파한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의 축(axis)이 되어 만물(wheel)이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 수레의 목적이다. 이것이 성경의 목적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열쇠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정의를 만나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하나님 나라에 이동해서 같이 사는 삶]이며 인생은 그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이동하는 것이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복음이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바로 그때(카이로스)이다. 그래서 천국은 가까이 왔다. 어떤 자에게? ‘메타노에오’(메타+누스)된 자에게. 즉 한(메타)+마음(누스) 된 자에게 천국은 가까이 왔다. 그 하나된 삶을 사는 것이 영생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영생을 위함이다.

 

2.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삶이 영생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하늘(heaven)에 계신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은 어디인가? 하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임'이다. '샤마임'이라는(하늘) 단어 자체가 쌍수이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에서 그 하늘은 엄밀히 말하면 하늘 쌍/하늘 짝(샤마임)이다. 그런 하늘 짝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가 성전이라고 한 것이다(고전3:16).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늘 짝의 나라가 하늘나라, 즉 천국이다. 그 하늘 짝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 즉 신랑과 짝 된 신부들이다. 그래서 말씀과 짝 된 말씀 짝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말씀이 말씀 짝을 말씀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다.

 

짝으로 산다는 말은 마치 젓가락과 같이 두 개가 하나로 존재할 때 비로소 젓가락인 삶이다. 마치 부부와 같다. 부부는 한 쌍이다. 돕는 배필이다. 그러므로 독처하는 것이 악이다. ‘샤마임에서 임마누엘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 그리고 나의 존재 방식이 바로 짝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나 없이 살 수 없고 나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 서로를 위해 죽고 죽는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님 없이 나는 존재할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나와 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젓가락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짝으로 사는 것이다. 짝이라는 것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하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둘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이다. 흔히 둘도 없는 사이라고 한다. 부부라는 관계도 남자와 여자가 있지 않으면 단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나라가 장소 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다스림이라는 개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다. 이때의 다스림은 세상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바로 그런 나라에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즉 천국에서의 삶이 바로 영생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경험하는 지금 여기가 천국이다. ? 지금 여기 말씀의 다스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하나로 살기 때문이다. 믿기만 하면 천국을 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그림 언어는 그날에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나에 대해 그리고 있다.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므로 성경의 근본적인 목적은 를 위한 것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을 예수께서 완성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사도들이다. 그런데 그 기록의 목적은 바로 구원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밖의 하나님을 찾게 된다. 성경의 최종 완성 포인트는 이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천국을 간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그림 언어는 그날에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나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 하나 된 나로 사는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가는 곳이 아니라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렇게 애굽(세상나라)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이라고 한다. 성경은 그것을 그림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즉 수많은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가 남자를 만나 하나 되는 것이다. 구원(영생)의 그림은 창세기 11절부터 제시된다. 천지창조라는 그림을 그려준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메시지는 나를 향한 언약이다. 그 그림 속에 그리스도를 통한 나의 구원(영생)이 보이지 않으면 그 그림의 겉만 보는 것이다.

 

성경은 다분히 그림 언어이지 조직신학의 철학적 용어가 아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은 그 그림을 풀어준 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그림 언어이다. 칭의라는 말 대신에 오히려 자연을 이용하여 구원(영생)을 설명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실 때 무엇으로 했는가? 예를들면 마 13장에서 천국을 씨로 비유하였다. 물론 이때의 씨는 말씀을 상징하는데 말씀으로 자라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13:32).

 

구원(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를 살기 위해서 회심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회심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전한 복음이다. 여기에 모든 복음이 담겨있다. 회심은 무엇인가? 메타노에오는 메타와 누스가 결합된 단어인데 그 누스와 함께 하는 것이다. 즉 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살려면 아버지와 한 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 한 의식! 한 마음을 위해 예수께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 한마음이 中心이다. 中心으로 돌아가는 것()回心이다.

 

예수를 대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예수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나도 말씀-육신이 되어야 한다. 나도 예수가 가진 그 진리, 그 말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가 죽은 것처럼 나도 죽어야 한다. 그때 더 이상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2:20).

성경은 모든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나에게서, 내 안에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내가 최종 완성점이다. 이것이 성경 속, 역사라는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이유이다.

 

2-1.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영원을 살게 된다

이렇게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나라를 산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영원을 살게 된다. 영원의 삶이다. 그렇다면 영원의 삶이란 무엇인가?

 

영원의 삶은 초월의 삶이다. 초월은 시간의 초월과 공간의 초월이 있다. 초월이라고 하지만 하나 됨이다. 시간의 하나 됨! 공간의 하나 됨이다. 수레바퀴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시간을 초월하게 되면 성경을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선적인 구조로 보지 않고 영원한 현재!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로 보이게 된다. 공간을 초월하게 되면 아담과 아브라함과 다윗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 타자와 나를 분리하려고 하는 속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초월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래서 영원은 영원한 현재이며, 또한 한 생명이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한 생명이다. 이것이 영원의 관점이다. 이웃사랑 관점이다. 이 영원의 관점으로 읽으면 성경의 인물이 살아난다. 부활한다. 성경의 텍스트에 죽어있던 인물이 말 그대로 살아 일어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경을 영원의 관점으로 읽으면 성경의 모든 사건이 내 사건이 된다.

 

1: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께서 세례(침례)받으실 때 들은 말씀이다. 이 말씀을 text로 연구하게 되면 이것은 단지 다윗,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들려주는 음성으로 들리면 너는 내 아들이라는 바로 나를 향한 음성이다. 이때 나는 나팔소리가 들리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말씀이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 홍해가 갈라진다. 하늘의 음성을 들을 때 성경의 언어는 더 이상 땅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가 된다. 땅의 차원에 있는 영혼을 하늘의 차원으로 끌어 올려준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이다. 더 이상 옛 하늘과 옛땅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영원을 살게 된다. 이 영원이야말로 시간, 공간에 지배받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이다.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부활(20:5)이라고 한다. 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을 영생이다.

 

2-2. So what?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진리를 알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진리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렇게 묻는다면 한마디로 이웃사랑이다.

그 이웃사랑은 세상에서 말하는 단순히 관계를 잘 맺는 것을 넘는다. 이웃사랑을 논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넘은 이웃을 이해할 수 있다. 흔한 말로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진리를 알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에 대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즉 근원적인 이웃은 아버지이다. 근원적인 이웃은 나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를 알아야 이웃사랑이 출발한다.

 

진리란 하나님 자체이다.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아야 자기 자신을 안다. 하나님과 나! 즉 이웃은 서로 분리된 두 관계가 아닌 짝으로서 하나이다. 이렇게 짝으로 살아가는 게 이웃사랑이다. 그전에는 혼자 살았다. 이제 신랑과 함께 산다. 그런데 어떻게 달라지는 게 없단 말인가? 그전에는 내 호흡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아버지의 호흡으로 산다. 그런데 어떻게 달라지는 게 없단 말인가? 겉으로 보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식은 통째로 변해 있다. 내가 아버지의 호흡으로 산다는 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도 어렵다. 그래서 본인만 안다. 그래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진리를 알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통째로 바뀐다. 그래서 삶도 통째로 변한다. 통째로 변화된 삶! 즉 영원의 삶을 살게 된다. 그 영원의 삶이 이웃사랑이다. 따라서 이웃사랑이 이해되려면 영원이 이해되어야 한다. 영원을 쉽게 말하면 시간과 공간의 초월이다. 이웃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삶이다.

 

첫째,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의 관점으로 성경의 인물이 이해되어야 그와 내가 하나 된다.

둘째, 공간에서 벗어나야 나와 다른 사람을 다른 공간에서 사는 다른 개체로 보지 않는다.

 

이렇게 이웃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와 나로 관계된 나 들을 볼 줄 아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 됨을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볼 줄 아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왜 모든 계명을 대표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이웃사랑삶을 사는 것영생이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을 탐구하는 목적이다(5:39). 이웃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근원적 이웃은 하나님이다. 본질적 이웃과 짝으로 하나를 사는 것!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그리고 내 이웃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 즉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그렇게 이웃사랑으로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거듭거듭 말하고 강조하거니와 영생은 죽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다. 천국은 가까이 왔다. 멀리에 있지 않다.

 

이웃사랑? 모든 사람이 한 생명?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말인가? 그래서 인간 의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의식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12:31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카리스마)를 사모하라고 한다. 은사이다. 즉 선물이다. 이것이야말로 선물이다. 방언! 그런 거 사모하지 말고 사랑을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사랑! 이것이야말로 신비한 능력이다. 최고의 선물이다. 가장 좋은 선물이다.

 

예수님은 형식적 율례적 관습적 종교적인 율법을 폐하고(回心) 이웃사랑이라는 새로운 법으로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 율법폐기가 아니라 율법완성이다. 어떻게? 바로 사랑으로 완성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쳤다. 그는 율법 대신 사랑을 택했다. 현대 버전으로 방언 열심히 하는 것보다, 기도 10시간 하는 것보다, 열광적인 찬양하는 것보다, 죽도록 하는 충성보다, 죽도록 노방 전도하는 것보다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라고 하면 또한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으로 사랑하려 한다는게 문제이다. 자기 기준의 사랑이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 그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방식의 사랑을 남에게 강요한다. 그래서 사랑이 또 율법이 된다. 예를들면 사랑을 자꾸 겉으로 보이는 행동! 미소! 친절! 이런 것들로 생각한다. 물론 미소! 친절!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中心은 아니다. 외모일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겉으로는 미소 짓는다 해도 속은 얼마든지 욕할 수 있다.

 

사람의 中心을 보라! 그리고 中心으로 대하라. 물론 그 中心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웃에게 한 것은 하나님에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25:40)라고 한다. 그 형제에게 가장 좋은 것(중심=하나님=성령=사랑)으로 대접하라(7:12). 그것이 그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그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면 이제 그 선물로 대접하라! 그 선물을 주라! 최고의 선물을 그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으로 대접하라! 하나님과 짝 된 삶을 산다면 마땅히 이웃 안에 있는 중심! 즉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이웃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명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하나하나 다 규정해야만 알겠는가? 그래서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한다. 하나님이 짝이듯 이웃도 짝이다. 원수와 이웃이 짝이다.

 

3.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림에 담긴 실체를 아는 것이다

성경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하면 수많은 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즉 아버지 말씀이 진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즉 어떤 행위, 행동, 제사의식 같은 것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 아버지 자체가 진리요 거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은 성경책뿐만 아니라 천지 만물을 통하여 말씀한다. 천지 만물은 진리를 위한 시청각 교재이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준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이다. 그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알면, 그것이 거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영을 알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 보이는 것의 실체가 바로 그 영이신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진리이다. 하나님이 진리요 생명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세상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세상 만물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는 극장이요 그림이다. 그 상징의 정점은 예수이다.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렇게 세상 전체에 자신의 뜻과 소원을 담아 놓았다. 세상 전체가 아버지의 기도이다. 그런데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계시이다. 계시를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602)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포칼립토’(601)에서 왔다. 그래서 아포칼립시스베일을 벗김, 덮개를 제거함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어떤 감추어진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 그때 나는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베일에 쌓인 천막을 벗겨내면 나는 실체를 볼 수 있다. ‘메타포를 배운다는 것은 베일을 벗기는 작업이다. 덮개를 제거하는 작업인 것이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다. 이 법궤를 제거하면 그 안에 실체가 담겨있다. 그 실체가 바로 10 언약이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이다. 십계명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십 언약이다. 그리고 그 언약의 결국은 사랑이다. 아버지의 진심은 사랑이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예뻐해 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진리로 나를 거룩하게 하는데,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이라는 뜻이다. 즉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긴다. 그 나라에서만이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누린다. 그러므로 메타포를 배운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 진심,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다. 세상 만물에 담긴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다.

 

성경은 수많은 메타포가 있다. 이 메타포에는 실체를 담고 있다. 메타포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많은 것을 알고자 함이 아니다. 오직 그 하나를 알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하나를 알면, 그 진리로 인해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런데 그 하나가 너무나 크고 깊고 넓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하나이다.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는 눈마다 결정체가 다 다르다. 수백조 개도 넘는 눈이 모양이 다 다르다. 그러나 눈은 육각형이다. 눈도 메타포이다. 눈 안에 담긴 마음을 보면 이제 눈은 더 이상 눈이 아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다. 말씀이다. 이제 아버지의 속삭임이다. 그 속삭임 안에 나는 춤을 춘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거룩이다. 사랑이다.

 

3-1. 메타포를 이해하면 시인이 된다

진리는 그림에 담긴 실체이다. 그러면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화가의 그림도 그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화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메타포와 패턴이 그것이다.

 

메타포는 직유, 은유, 상징으로 나누는데 이 직유, 은유, 상징을 통틀어 그냥 메타포라고 하자.

A가 원래 표현하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하자. 이것을 문학에서는 원관념이라고 한다. 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이 원관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B라는 보조관념을 사용한다.

보조관념을 통해서 원관념을 표현하는 방법이 직유, 은유, 상징이다.

첫째 직유는 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같이’, ‘처럼’, ‘듯이와 같은 연결어로 결합하여 직접 비유하는 수사법이다. 예로 호수(B/보조관념) 같은 내 마음(A/원관념)이라고 표현할 때 호수가 보조관념이라면 마음이 원관념이다. 호수 같은 내 마음과 바다 같은 내 마음이라고 할 때 두 마음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수와 바다를 떠올릴 것이다. 둘 다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을 호수나 바다로 표현했다. 하지만 호수와 바다 자체가 마음은 아니다.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A)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B) 한 알 같으니

 

천국은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이다. 보이지 않는 천국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겨자씨로 설명을 한다. 이때 겨자씨가 B이고 천국이 A이다. 씨를 들어 천국을 설명했지만. 씨가 천국은 아니다.

 

두 번째 은유법이다. 은유는 (Metaphor)“A=B이다라는 형식으로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직유법은 호수 같은 마음이라고 표현을 했다면 은유법은 내 마음은 호수이다. 이처럼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직유는 말하자면 두 원을 나란히 놓는 개념이라면 은유는 두 원이 교집합으로 겹쳐져 있는 것이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A)은 사랑(B)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다. 왜 그런가? B를 들어 아무리 설명해도 A가 크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다 말해도 표현할 수 없다. 모든 B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상징(symbol)이 있는데 상징은 A가 아예 녹아서 감춰져 있다. 즉 하나의 원(B)만 드러나 있다. 은유는 ‘AB’ 형식이지만 상징은 A를 말하지 않는다. 시간을 표현할 때 돈 같은 시간이라고 표현을 하면 직유법이고, ‘시간은 돈이다그러면 은유법이다. 그런데 상징은 그림에 그냥 시계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명을 하지 않는다. 원관념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수사법이다. 성경에 이런 상징이 많이 사용된다. 예를들면 십자가, , 뱀이라는 단어가 상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시에 상징이 많이 사용된다. 1장의 장르는 무엇일까? 장르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1장은 형식상 지극히 에 가깝다. 1장은 시적 요소인 반복, 댓구, 상징이 가득하다. 1장을 과학 논문으로 읽으려 하지만 사실은 시에 가깝다. 시라는 장르가 가장 압축적이고 풍부하다. 1장의 하나님을 철학적, 이성적으로 자꾸 접근하려고 하지만, 시로 접근하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 즉 원관념 즉, 마음을 알 수 있다.

 

1장은 우주가 어떻게창조되었는가를 말한다기 보다는 왜 창조했는가를 알려준다. 성경은 과학적 언어보다는 상징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징을 이해할 때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겨울나무를 보고 추워서 떠는 노숙자를 생각한다면 그는 노숙자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성경도 이와 같다. 성경의 많은 사건, 상징들이 있다. 그 사건들, 상징들은 북한산의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주려는 메시지가 있다. 지식을 가지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신학을 가지라고 준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작가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다.

 

어린 왕자라는 책에 담긴 내용 중 일부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거든요. 여러분이 새로운 친구에 관해 어른들에게 말하면, 어른들은 본질적인 것은 물어보지 않지요.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떻든?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뭐냐? 그 애도 나비를 채집하니?”

절대로 어른들은 이렇게 묻는 법이 없어요.

그 앤 나이가 몇이냐? 형제들은 몇이나 되니? 몸무게는?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니?”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이와 같다. 1장이라는 그림을 그려주었더니 지구 나이가 몇 년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   

예를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제일 나중에 창조하셨을까?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일까? 1장의 동물들은 왜 나오는걸까? 그리고 창 2장에서 왜? 인간에게 동물과 짐승의 이름을 짓게 했을까?

 

12: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12: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12: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성경은 말한다. 동물들에게 배우라고! 세상의 모든 사물, 동물은 인간의 선생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의인법이 있다. 사람 아닌 것들을 사람처럼 대우해주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다. 어떤 사물을 이해할 때 그 사물보다 한 차원 더 높이 보아야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 차원 더 높은 곳에서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람의 본질을 볼 수 있다. 4차원에서 3차원을 볼 때 3차원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 꿈을 꿀 때 그 꿈속에서 헤매지만, 꿈을 깰 때 그 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에서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내가 지지고 볶고 사는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 삶에 함몰되어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사람을 보아야 한다. 즉 사람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신학의 기본이다.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도장이다. 그 도장을 이해하려면 그 도장을 찍은 원인자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세상을 보라! 나무를 보라! 새를 보라!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모두는 하나의 이다. 하나님의 이다. 를 이해한 이가 詩人이 되어 다음과 같이 탄성을 지른 것이다.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위의 글외에도 하나님을 아는 행복(오직 성경 이야기만 입니다)에로의 삶에 이르는 많은 글이 있답니다. 저는 30여년을 재림신앙으로 살아온 자이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삶이 명확하게 이해하기에 함께 나누고자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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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오케이, 오늘부터 (2014년 12월 1일) 달라지는 이 누리. 김원일 2014.11.30 8151
공지 게시물 올리실 때 유의사항 admin 2013.04.06 38262
공지 스팸 글과 스팸 회원 등록 차단 admin 2013.04.06 54030
공지 필명에 관한 안내 admin 2010.12.05 85882
1617 2021년 주의 잔치. 알고 있는가? 김운혁 2020.11.26 14
1616 배추벌레와 하나님 작은아이 2020.11.24 64
1615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안식일 교단. 김운혁 2020.11.24 37
1614 강도와 하나님 작은아이 2020.11.23 28
1613 창1:1절 file 작은아이 2020.11.22 31
1612 전세계 206개국에 전파할 마지막 경고 : 주의 길을 곧게 하라.(요 1:23). 1 김운혁 2020.11.19 44
1611 십일조에 대하여 작은아이 2020.11.17 118
1610 방언과 기도에 대하여 작은아이 2020.11.16 49
1609 교회와 모임 작은아이 2020.11.16 55
1608 죄, 의, 심판 그리고 사탄에 대하여 file 작은아이 2020.11.15 51
1607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운데서 "3낮3밤"을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 하리라. 김운혁 2020.11.14 15
1606 지옥, 죽음, 그리고 부활 1 작은아이 2020.11.12 134
1605 말씀에 갈한 영에게(5) 1 file 작은아이 2020.11.11 66
1604 말씀에 갈한 분께(4) file 작은아이 2020.11.10 72
1603 마지막 방주= 3낮3밤 땅속에서=주의 길 예비= 방주를 예비 김운혁 2020.11.09 25
1602 말씀에 갈한 영혼에게...(3) 작은아이 2020.11.09 66
1601 말씀에 갈한 분들께(2).. 작은아이 2020.11.08 105
1600 광야의 외침=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주의 길= 3낮3밤 땅속에서. 김운혁 2020.11.07 16
» 말씀에 갈한 영혼들에게... 작은아이 2020.11.06 241
1598 남 탓 내 탓 2 김균 2020.11.05 95
1597 다미 선교회 2 제로미 2020.11.04 75
1596 주의길 "3낮3밤"에 대한 무지= 멸망 김운혁 2020.11.04 17
1595 정도령 = 보혜사 성령= 3낮3밤 땅속에서= 예수의 영=말씀=길 김운혁 2020.11.04 24
1594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양의 피에 죄가 전가 된다?) 예수안에 2020.11.03 43
1593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예수믿음"을 보겠느냐? 1 김운혁 2020.11.02 37
1592 나는 왕실의 아이 무실 2020.10.31 56
1591 다른 복음은 없나니 예수안에 2020.10.28 49
1590 엘리야의 사명 김운혁 2020.10.27 39
1589 미국에 계시는 분들 2 김균 2020.10.25 123
1588 안녕하십니까? 2 fallbaram. 2020.10.25 100
1587 2023년 4월 1일부터 1260일간 비오지 않도록 기도 합시다. 2명의 기도를 응답 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김운혁 2020.10.23 42
1586 예언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라. 김운혁 2020.10.21 33
1585 2021년= 예수님의 잔치의 해. 예수님이 모두를 초청 하십니다. 김운혁 2020.10.18 27
1584 안교공과의 질문과 가능한 대답 들꽃 2020.10.17 36
1583 엘리야와 두 증인이 온다. 김운혁 2020.10.14 28
1582 성경 교사가 필요합니다 들꽃 2020.10.01 67
1581 알듯 모를 듯한 세 천사 기별 1 들꽃 2020.09.18 91
1580 예수님의 이야기 나누기 다 양성 1 들꽃 2020.09.12 96
1579 아침 안개 속에 다가오신 님 김균 2020.09.07 129
1578 안식일(9) 두 안식일 김균 2020.09.07 71
1577 교회 소 그룹 성공과 실패의 원인? 들꽃 2020.09.05 38
1576 지난주 교과 질문 들꽃 2020.09.05 43
1575 예배당 보증금 빼 전 교인 '기본 소득' 주는 교회 1 나부터 2020.08.28 131
1574 이 상구(2) 3 김균 2020.08.27 241
1573 도마도 죽었다 김균 2020.08.27 76
1572 달수님 4 김균 2020.08.21 132
1571 축하 합니다 북미지회 새 총무부장 2 들꽃 2020.08.18 132
1570 말세의 징조인가요 2 들꽃 2020.08.08 132
1569 아무리 생각해도 들꽃 2020.08.08 72
1568 CBS에 고함. 이상구 박사라 부르지 말라. 2 달수 2020.08.06 245
1567 아담에게 드리는 노래. 바이블 2020.08.03 38
1566 켈로그와 이 상구(1) 2 김균 2020.08.02 255
1565 패배주의는 우리의 적입니다 좋은나라에 사는 것에 감사합시다 김균 2020.08.01 54
1564 나는 속죄를 위해서 밤을 새면서 기도해 본 일이 없다 2 김균 2020.07.29 61
1563 Fallbaram 님의 슬픈 소식 듣고 1 들꽃 2020.07.29 128
1562 아! 기독교 1 김균 2020.07.28 77
1561 그의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무실 2020.07.25 35
1560 장강의 눈물-거대 중국의 민낯 김균 2020.07.22 57
1559 여우사냥하는 나라 김균 2020.07.14 94
1558 고로나19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김균 2020.07.11 90
1557 손가락 후문 file 김균 2020.07.09 79
1556 비유 김균 2020.07.09 55
1555 장기적출의 나라 김균 2020.07.09 73
1554 순종할 수 있다고??? 1 fallbaram. 2020.07.07 105
1553 유투브 닥터 김 (김주영 박사) 건강 TV 개설 1 무실 2020.07.03 95
1552 늙고 병들고 고집만 남은 양 3 김균 2020.06.24 114
1551 냉장고에 보관하면 않되는 음식물, 달수 2020.06.24 47
1550 안식교 - 이단2 달수 2020.06.24 94
1549 교리가 진리라는 포장을 거치면 1 김균 2020.06.24 79
1548 오만불손 김균 2020.06.23 66
1547 목구멍을 넓혀라 김균 2020.06.23 35
1546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김균 2020.06.23 35
1545 안식교 이단 달수 2020.06.22 78
1544 카스다에서 어느 목사에게 쓴 글 1 김균 2020.06.22 250
1543 별똥별이라도 되고 싶다 김균 2020.06.2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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