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노력으로 율법을 복음보다 더 옹호하려하는
군상들이 강조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타락"이라는 말이다
더 이해하기 힘든것은 "완전하게 지었는데"
죄를 범하고 타락을 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결국 십자가는 그 우발적인 죄와 타락 때문에
세워진 보상적 계획으로 전락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들 예수가 드리는 기도속에서
"창세 전에" 라고 하는 단어가 처음으로 소개되기 전에는
성경 또한 타락이라고 한 선악과의 사건을 우발적
사고 또는 인간의 연약함으로만 이해되고 있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5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6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9절)
이상의 내용들 속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시작이
마지막 부분으로 흐르면서 사뭇 달라지는 내용을
보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분의 마지막 기도속에서 그 논조가 바뀐다
"세상을 사랑하사" 가 아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라고 하는 예정적 발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화" 또는 "영광"이라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그렇게 말한다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즉 영화로운 십자가의 청사진을 이제 실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 내용을 사도바울이 다시 예베소서의 시작 부분에서 강조하면서
그 예정적 논조는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장 3-5절)
예수님의 기도속에는 예정된 대상이 "그들"이고
사도 바울의 서신 속에는 예정된 대상이 "우리"이다
그리고 그 예정이라는 도구가 곧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 타락도 선물이고
사망도 선물이구나!"를 깨달아야 한다
한편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를 통해서
창세 전 부터 십자가가 예정된 것은 확실하나
"그들"이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정되었다는 그 숫자 속에 내가 있는지 알고싶어도
알 길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십자가라고 하는 광주리 속에 들어있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직 십자가"를 굳게 믿는가?
가 관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정되었음을 확신하는 유일한 증거는
"믿음"이다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