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가데스 바네아"를 클릭하면 아래의 글이 등장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급 이후 2년만에 이미 가나안과 인접한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에 도착했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40일간 정탐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게 되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의 접경인 신광야와 바란광야 사이에 있는 곳이다
출애급한지 2년만에 소위 "일련의 사건"으로 40년간 유리하게 되었다는
말을 초등학교식 산수로 계산하면 38년이라고 하는 기간을 유리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처음 2년은 모세와 함께 가나안 입구까지 이르는 정상적인 속도의 여행이었지만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꾼 사건으로 그들은 다시 광야로 돌아가서 38년을
허송세월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신앙인들의 첫남편은 율법이고
두번째 남편이 은혜라면 율법은 행하는 것이 예배이고 은혜는 믿는 것이
예배이다
모세와 함께 광야의 삶은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에 대한 순종 즉 행함의
예배를 드리던 곳이었다
그 광야를 가로질러 가나안 입구에 이른 2년간의 삶은 고라의 사건등 몇가지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모세의 기별과 일치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역할이 광야에서 끝이나고 다시 가나안의 새로운 예배가
시작될 즈음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이라고 하는 시련과
새로운 시금석을 제시 하셨다
"그 땅에는 힘센 장사들이 수두룩하고 사람들의 키가 모두 컸으며
그들에 비해서 우리는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잊은 것 같다"고 슬퍼하는 "믿음없음"
때문에 38년의 고난을 자처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사도 요한은 표상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그리고
매우 심미안적인 표적으로 새로운 예배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한복음을 수없이 읽어가다가 나는 이 풍경을 마치 가나안과 광야의 접경에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혼비백산했던 그 사건이 오버랩하는 것처럼 보았다
속죄양이 들어가는 문곁에 "은혜의 집"이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그 위에는 모세의 숫자인 다섯 (행각)이 있다고 하는 묘한 풍경이다
다섯 행각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고 그 중에는 38년 병자가 있더라고 한다
38년이라고 하는 숫자가 가데스 바네아 말고는 성경 아무곳에도 없다
이 환자가 모세의 행각아래에서는 고침을 받지 못하는데
그곳으로 "속죄 양"이신 구주가 나타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새로운 예배의 주인을 만나야 한다
모세의 행각 다섯안에서 할 수 없었던 일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 예수 안에서
일어난다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하여 우리는 다시
모세의 행각을 뽑아서라도 예수와 나음을 받은 병자를 박해하게 된다
먼저 온 것은 나중 온것을 핍박하게 되는 그 진실이다
가인이 아벨을
에서가 야곱을
레아가 라헬을
루우벤이 요셉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말이다
안식일이 "안식"을 박해하는 이유이다
내가 받는 박해는
"성경을 기분 나는대로 해석하는 또라이!"
"광야에만 머물지 않고 하늘까지 가슴에 품고 가야 할 율법을 폄훼하는
또라이"
"뭐 아는것이 요한복음 밖에 없는 또라이"
또라이는 오늘도 중얼거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