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 이야기가 천국이야기라고 우기는 배경에는 분명
어린시절 부터 쩌들어 있는 예신이 있지만
그 예신이 아슬아슬하게 칼도마위에 있어 보이는 지금 슬거머니
그 배경은 구약에 뿌리를 두거나
구약적 선 글래스로 신약을 바라 본 내용으로 둔갑한다.
순종을 잘 못 이해하면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처럼 이해 될 수 있다.
분명 순종 없는 구원이 불가한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것을 행위로 또 개인적으로 한다고 믿는 것이 싻이 노오란 시도란
말이다.
구약의 모든 것은 구원의 질문일 뿐이다.
이렇게 해야 해! 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렇게 할 수 있어? 라는 질문이란 말이다.
반대로 신약의 모든 것은 구원의 해답이다.
아하! 이렇게 되는구나! 라고 무릎을 치는 명쾌한 해답이란 말이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구름아래서
홍해를 건널 때
홀로 건넌 것이 아니라 모세안에서 함께 건넜다고 하는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모두 광야에서 그 육신들이 죽고 말았다.
육이 죽어야 건널 수 있는 요단강 앞에서
구리뱀 하나 장대에 달아 놓고...
신약 전체는
영적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그 구리뱀 안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요단강을 건넜다고 말한다.
모세에 대한 해답은 구리뱀이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모세의 모든 것 (율법,규례,성소) 이
함께 죽었다.
안식일도 십일조도.
요단강을 건넌 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돈도 시간도.성소도.
아직도 자신의 주머니에서 십분의 일만 끄집어 내어
바치고 어깨가 우쭐하는 자는
요한복음 8장의 그 소경 (날때부터)이다.
"본다고 하니 너희죄가 그저 있느니라" 의
그 죄인이다.
아직도 자신의 시간의 일부만을 쪼개어
창세기에도 없는 ("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제 칠일에는 빠져 있음) 시간 지키느라 애쓰는 자는
이스마엘의 후예이다.
그러고 보니 요단강을 건넌 후의 순종은
정말로 어려워졌다.
차라리 모세에게 순종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나 혼자서 건널 수 없는 홍해 (율법의 바다)
그리고 나 혼자서 건널 수 없는 은혜를 말했을 뿐이다.
율법에 대한 순종도 모세안에서 한 것이고
은혜에 대한 순종도 예수안에서 한 것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지켜진 것으로 간주하는
은혜. 선물. 칭의. 아들 됨. 신부 됨 등등...
십일조 강제로 월급에서 떼고 주는 교회는
하늘나라나 이 땅의 나라에도 빚을 진 교회일 뿐이다.
안식일 안 지키면 졸업이 불가능 한 학교는
천국에 합당한 학교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청지기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그 모양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덩치가 큰 이스마엘 (구약적 인물)이
막 태어난 걸음마 쟁이 이삭(신약적 인물)을 박해하려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