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by 김균 posted Sep 25, 2017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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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주후 30년 어느 날

가버나움 회당에 서신 예수께서는

이사야서를 읽으셨다

 

눅 4:18, 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그분이 맨 처음 하신 일이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가올데 없는 불쌍한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다

 

가난한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

그게 예수 당시의 기적이었다

38년 혈루병 든 여인

이젠 가진 것이라고는 병든 몸뚱이 하나 뿐인 여인

그 여인에게 다가가신 예수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가난한 자들이 가지는 자긍심은

바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었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모임이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부자가 바로 바나바 이야기이다

먹는 일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행 4:36, 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공동체이다

가난한 자가 가난함을 자랑으로 여기는 곳이다

부자는 가진 것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헌신 하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는 일종의 공산주의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협동조합이론인데 그게 바로 공상적 사회주의이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타난 악하고 게으른 종의 이야기는

돈벌이 이야기가 아니다

게을러서 부자가 못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핑계한다

마 25:24, 25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기독교는 부자의 종교가 아니다

초대교회는 지독히 가난했고

중세기 교회는 지극히 부자였다

유대교는 부자가 하늘의 복을 받았고

가난한 자나 병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이 중세기 기독교에 들어왔고

그런데 정작 부자가 된 것은 귀족이나 특수층이었고

교회자체가 부자였고 가난한 것은 교회전답을 붙이고 있는 교인들이었다

 

교회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고 잔소리 한 마디 신부의 귀에 들어가면

그날로 붙어먹던 전답마저 빼앗기고 빈들에서 산 속에서 거지 생활을 해야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이란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

 

재림교회가 한국에 정착하는데 100년 세월 걸렸다

내가 젊었을 때 우리 교회는 100명이 넘은 교인이 있었지만

남자라고는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여자와 학생들인 우리들이었다.

안식일 지킨다고 교회 나오는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짝 믿음 가진 부부 중의 여 집사들은 큰 소리치고 살았다

교회 짓는데 교회 선교하는데 필요한 돈은 거의가 그런 분들 몫이었고

목사님의 관심은 절로 거기로 갔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졌다

그게 바로 돈의 힘이었다

 

지금은 바나바처럼 가진 것 팔아내고 같이 빈손이 되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돈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나타낸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대부분 가난했다는 것이다

부자의 토색질에 당하고

왕권에 대항하다가 죽어나가고

상아침대에 누운 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했다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십일금 시비를 건 것은

백성들이 성전으로 오지 않으니 성전 금궤가 고갈되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급료를 주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유다는 궤사를 행하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이 성행하고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겠다 하셨다

그들의 행위가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신다 하셨다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라고 반문한다

 

말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희의 배만 채우고

자식들의 안위만 걱정하고

나라가 망하든지 하나님이 경멸을 당하든지 관심조차 없어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해서 성전 운영도 안 된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밥을 굶는다

그러니 저주를 받을 수밖에 더 있느냐 하셨다

 

우리는 십일금을 강조하면서 말3장10절을 강조한다

그것 강조하는 것 맞다

그러나 그 강조가 왜 있어야 하는지를 잊었다

나라는 양분되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태어나서도 제사제도가 어려움을 당하자

말라기는 분연히 외쳤다

하나님의 사업이 이렇게 버림받아서 되겠느냐

그게 바로 너희들이 새 땅을 얻을 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서였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약속이란 기업을 얻지 못한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를

그들이 하나님을 잊으므로 내지 않아 그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것은 안 내어도 십일금 내면 복 받는다 하는

그런 식으로 오늘 변질 된 것이다

 

중세기에 와서는 가난한 자를 교회가 돌보지 않았다

교회는 부를 통해서 교인들을 지배하고 정죄하고 죽였다

그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 바로 페스트라는 염병 때문이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자 봉건영주나 교권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부자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물질의 시대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식 민주주의 하에서

자유는 가진 자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교회에서도 가진 자가 복 받은 자로

못 가진 자는 저주 받은 자로 낙인찍힌다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나귀를 타셨고

한 벌 옷으로 사시면서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셨는데

오늘 교회는 외부치장에 힘을 쏟고 가진 자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거대한 교회를 짓는데 시골교회가 십시일반하는 경우까지 간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던 시대가 가고

가진 자가 헌신하던 시대도 갔다

부는 하나님의 복이란 사상이 넘치고

그런데도 60-70년대를 어렵게 살던 무리들은 평생을 고생하면서

그들의 신앙 하나만 악착같이 쥐고 있다

교회는 언제부터인지 부자의 복에 대하여 강조하게 되고

물질적인 축복이 평범한 사실로 자리 매김을 한다

왜 목사가 이런 사상을 전할까?

지질이도 못 살았던 과거의 추억 때문일까?

유대인이 가졌던 선민사상 때문일까?

무슨 연금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고 거기에 복을 붙이는가?

 

나는 오늘도 그 어려웠던 시절을 신앙 하나로 버틴 용사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이 교단을 이끌고 왔었던 그 시대를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지조를 기억하고 있다

설교시간에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떠들면서 속으로는

좋은 집 외제차를 좋아하는 무리를 나는 경멸한다

 

기독교는 신앙공동체이다

가난해도 좋았고 돈이 있어도 좋았다

가진 자는 가진 것으로 봉사하고 없는 자는 몸으로 때웠다.

그게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상부상조였다

그런데 그 사실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닌데 은근히 죄로 여기고 복을 받지 못한 자로 여긴다

이런 사상은 교회를 반분 시키고 신앙을 재력으로 감정하게 한다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봐라

욥을 봐라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것 보기 전에 먼저 볼 것은

렙돈을 내는 과부를 봐야 하고 고아를 봐야 한다

그게 교회와 공동체나 지역사회에서 해야 할 일이다

지도자는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한 무리는 나귀를 타고 가는데

한 무리는 번쩍이는 순금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간다

그것은 중세기 교회를 비판하던 시절의 연극 장면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는 것은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광수님이 쓴 소설 가운데 안빈낙도를 행사하던 안빈을

재림교인이 모델이라 가르치던 목사들 다 가고

이제는 부자를 존경하던 중세기로 돌아가고 있다

 

물론 가난이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사에 가난이 존재하고 부자도 존재한다

그런데 하나 기억할 것은

부자는 하늘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보다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곡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부자가 나눔을 실천하지 않을 때 낙타의 바늘귀가 되는 것이다

오늘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이 계속되는 형태이다

그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 교인들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새벽 5시 반에 나가서 저녁 예배시간에 저녁밥도 못 먹고 교회 온다.

그런다고 부자 되는 것 아닌 세상이다

다들 잘 알지 않는가?

자본주의사회에서 부자 되는 길은 잘 알지 않는가?

그런데 가난하던 사람에게 돈 몇 푼 벌어지면

그게 전부인양 떠든다

내가 아는 한 사람 돈 좀 가지고 있는데

그것 매우 많은 것 같았지만 서울 큰 빌라 한 채 값도 안 되었다

생활에서 예수를 발견하면 가난도 죄가 안 된다

생활에서 나눔을 발견하면 부도 죄가 안 된다

션이란 가수와 그 부인 탈렌트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라

집 한 칸 없어도 일 년에 수억을 벌어서 가난한 어린이를 돕는다

많이 벌면 많이 내고 적게 벌면 적게 낸다

그런다고 모두들 그리 살아라 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탐욕과 이기심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

동업을 해보니 욕심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경우가 달랐다

이기심 없는 사람 있다면 추천해 줘 봐라

자기 욕심 없는 사람 하늘 별 따기 일 것이다

나는 안다 모두가 하와의 선악과를 선호한다는 것을

어짜피 죽을 몸 큰 죄 한 번 짓고 한 번 회개하면 끝날 일이라 생각한다

다윗을 보라 이런 자도 구원 받는단다 한다

그래서 돈에 눈먼 사람들 좀 있다

그러다가 몇 푼 가지면 그게 축복의 독차지인양 의기 양양한다

 

사람들은 조금 가지면 못 가진 자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단정한다

그래서 못 가진 자를 비웃는다

하나님이 과부와 고아를 두신 것은 교회가 봉사할 기회를 주심이라하셨다

내가 처한 고통이 모든 고통의 근원도 아니요

내가 가진 부요가 모든 부요의 끝도 아니다

정말 많이 가진 자는 지극히 겸손하다

자기 재산 전부 사회에 환원하는 분들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한국교회에 자기 재산 신탁한 분 몇이나 될까?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 없다 욕심이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유대인 식의 부요가 마음에 들 것이다

아직은 나도 그렇고 님들도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목사님들에게 돈에 대한 부요함에 기죽지 않게 하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부요함이 넘치게 하자

목사가 돈으로 교인들을 평가하지 않도록 좀 교회다운 교회 만들자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가 기록된 대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주후31년 이 땅에서 왕이 안 됨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는데

말장난 좋아하는 분들이 새겨듣기 싫어서 딴지를 건다.

그건 자유다

그분은 기록된 대로 가셨다

이 세상 나라가 내 나라라면 열두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건만

그분은 조용히 십자가를 참으셨다

 

1844년과 31년은 차원이 다르다

주를 훼방하는 언어는 그 좋아하는 조사심판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혹시 아나 불벼락을 맞을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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