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개새끼...(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by 눈팅 posted Jun 26, 2017 Replies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개새끼-박열

 

나는 개 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朴烈)-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

 

목차

 

  1.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현해탄을 건너다
  2.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3. 투쟁의 시대, 불령사
  4. 간토대지진,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다
  5. 세기의 연인, 죽음으로 헤어지다
  6. 해방 이후의 활동

인용문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1926년 2월 27일, 박열과 함께 대역죄 및 폭발물단속벌칙 위반혐의로 재판정에 섰던 가네코 후미코가 낭독한 ‘26일 밤’이라는 수기의 한 구절이다. 이처럼 일본인 아내로부터 강철 같은 믿음과 사랑을 받았던 박열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독특한 빛깔을 띠고 있는 인물이다.

박열(朴烈)

박열(朴烈)

국내 최초로 무정부단체인 '흑도회'를 창립

박열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도쿄에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사상단체를 이끌다 1923년에 일어난 간토대지진 당시 일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해방될 때까지 무려 2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석방된 그는 통상 민단으로 일컬어지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아 재일교포들을 이끌었다. 1949년 영구 귀국했지만 이듬해 일어난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고 군비 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를 추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현해탄을 건너다

박열은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서 아버지 박지수와 어머니 정선동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초명은 혁식(赫植), 호적에는 준식(準植)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어려서부터 열(烈)이라 불렸다. 그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경술국치 이후 가세가 기울어 매우 궁핍하게 살았다.

 

7세 때인 1908년부터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익혔고, 10세 때부터 4년제인 함창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이었던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치욕이라며 학교를 뛰쳐나왔다.

 

고향 문경으로 돌아온 박열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그는 적지 한가운데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신념을 품고 1919년 10월 현해탄을 건넜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신문배달, 공장 직공,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등 궂은일을 전전하면서 고학을 시작했다. 틈틈이 단기어학전문학원인 세이소쿠영어학원에 나가 영어도 익혔다.

 

얼마 후 박열은 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반제국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하고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토시히코, 이와사 사쿠타로 등과 교류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물론 본래의 목적이었던 항일투쟁도 게을리 하지 않고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친일파들에게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박열에게는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있었다. 본토인과 식민지 주민으로서 이전에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두 남녀가 도쿄에서 만나 생사를 함께 하게 된 사연은 드라마틱하면서도 비극적이다.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요코하마 출신의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7년 동안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에 살면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모진 학대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런 부조리한 상황을 야기한 제국주의 일본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 후미코는 도쿄에서 여학교 졸업검정시험을 치른 다음 여자의전에 진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금전에 눈이 먼 아버지가 자신을 외삼촌에게 팔아넘기려 하자 집을 뛰쳐나와 도쿄에서 신문판매대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학원에 다녔다.

 

1920년 11월, 박열은 조선인 고학생, 노동자들과 함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창립했다. 간부는 그를 비롯하여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 임택룡 등이었고 회원 수는 200명이 넘었다. 그해 12월 9일 일본사회주의동맹이 결성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인 1921년 11월 29일 박열은 원종린, 김약수, 황석우, 백무, 손봉원, 정태성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망라한 흑도회를 결성하여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했다.

 

그 무렵 이와사키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 히라사와 다케노스케와 아나키스트 다카오 헤이베에 등 노동사 멤버들과 교류했고, 그들의 소개로 조선인 아나키스트 원종린, 공산주의자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을 만났다. 당시 사회주의 잡지를 즐겨 읽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2월, 정우영이 보여준 《청년조선》 교정쇄에서 박열이 지은 ‘개새끼’란 시를 읽고 전율을 느낀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개새끼>

이 시에 대한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네코 후미코는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박열을 만났다. 그 무렵 박열은 반일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소수의 권력자가 국가사회를 강제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실망한 나머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운동가들의 배신과 변절에 염증을 느낀 박열은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 관계가 우주의 대원칙’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사물에 반역 복수함으로써 만물을 멸하는 것이 위대한 자연에 대한 합리적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거기에는 약자인 조선을 학대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렇듯 철저한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박열에게 깊은 신뢰와 사랑을 느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 초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4월 하순부터 두 사람은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의 데이지리에서 신발가게를 하는 아이카와 신사쿠의 이층 방을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1922년 7월 10일,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창간하고 항일 세력 규합과 선전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을 강조하는 박열과 대중적인 전위정당을 추구하던 김약수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유 등은 흑우회를 세움으로써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흑도》를 폐간하고 역설적인 제호인 《뻔뻔스러운 조선인》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1923년 3월에 발간된 3호부터 《현사회》로 제호를 바꾸어 4호까지 발간했다. 그 무렵 두 사람은 불령선인의 지도자급을 가리키는 ‘요시찰 조선인 갑호 해당자’로서 일본경찰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렸고 무려 50여회에 달하는 예비검속을 당했다. 

투쟁의 시대, 불령사

1923년 4월, 박열은 기존의 흑우회와는 별도로 김철, 육홍균, 홍진유, 정태성, 서동성, 나가타 게이자부로, 오가와 다케시, 최규종, 이필현, 서상경, 하일 등 조선인 15명,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을 회원으로 하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불령사의 결성 취지는 민중과 호흡하는 사회운동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자유의지를 구속하지 않는 상태에서 권력에 반항하고 파괴하는 작업을 각자 알아서 결행하기로 선언했다. 이후 불령사 멤버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하는 기자들을 폭행하는 등 직접적인 반일활동에 나섰다.

 

최초로 보도한 요미우리신문에 의하면 니가타 현 나카오우누마군 아키시로촌에 있는 시나에쓰전력주식회사의 발전소 건설을 하청받은 오바야시조합과 니혼토목주식회사의 공사현장에서 연일 조선인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현지에서 일하는 1208명의 노동자들 가운데 절반인 600명 정도가 조선인이었는데 새벽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광차 밀기, 땅파기, 암석파괴, 토목, 재목 나르기 등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견디다 못한 조선인들이 도망치다가 경비원들에게 잡혀 잔혹하게 살해된 다음 나카쓰 강변에 버려졌던 것이다.

 

새삼 일본인들의 만행에 분개한 박열은 백무와 함께 현지의 노동자로 잠입한 다음 현장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상세하게 취재했다. 그해 9월 두 사람은 미토시로쵸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수천 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자본가들의 횡포와 그들과 결탁한 순사들의 비행을 고발했다. 이어서 두 사람은 서울로 건너와 경운동의 천도교 교당에서 조선인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 와중에 박열은 의열단원 김한과 함께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비상수단을 논의한 끝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경성과 도쿄에서 테러를 기획하고 있었던 의열단장 김원봉은 폭탄을 요구하는 박열의 요구를 수락했다. 하지만 이 득의의 계획은 폭탄 운반자들이 국경 근처에서 중국 군벌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폭탄을 빼앗기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박열은 포기하지 않고 불령사 멤버인 김중한과 함께 황족이나 외국대사 등에 대한 테러를 계획했지만 대상이나 시기에서 의견이 엇갈린 데다 폭탄 구입 자금도 마련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간토대지진,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의 간토 지방에 대지진이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도쿄와 요코하마 등지에서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그러자 구조활동을 위해 출동한 일본군이 경찰,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더니 급기야 잔인한 살상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폭도들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조선인들을 끌어내 닥치는 대로 일본도와 죽창을 휘둘렀다. 그 결과 도쿄에서만 1,798명, 전국을 통틀어 6,618명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일본의 군관민이 합세하여 벌인 이 조선인 대학살 사태가 외국 언론들에 의해 알려지자 세계인들은 새삼 일본인들의 잔인하고 비정한 심성에 고개를 저었다. 일본 정부는 연일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지자 적화된 일본인과 조선인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희생양으로 지목된 조직이 그 동안 감시하고 있던 불령사 멤버들이었다.

 

지진 발생 이틀 뒤인 9월 3일, 일본군 제1사단 병참 제1대대 하사관 스즈키 가메오는 도미카야에 있는 이시카와 목장의 숲속에서 박열과 후미코 등 조선인 세 사람을 보호검속 명목으로 체포하여 세타가야 경찰서에 억류했고, 그들의 집에서 각종 서적과 선전삐라 등을 압수했다. 이어서 10월 중순까지 김중한, 정태성, 장상중, 최규종, 홍진유, 니야마 하쓰요 등 불령사 멤버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입수계획을 탐지한 검사는 간토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의 빌미를 조작하려 했다. 10월 20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멤버 16명이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오사카아사히신문은 ‘진재 중의 혼란을 틈타 제도에서 대관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의 비밀결사 대검거’란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금년 가을에 있을 황태자 전하의 혼례식 때에 고관대작들이 모이는 것을 기회로 폭탄을 투척하여 암살한다는 대음모를 기도하고 동지와 함께 준비에 분주하던 일당이, 대진재가 발발하자 급히 예정을 바꾸어 도쿄에 사는 소수의 동지들과 약속하고 제국의 도시 도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대사를 결행하기로 한 사실이 발각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조선인 학살사건을 정당화하는 데 실로 안성맞춤인 기사였다. 공판 초기에 묵비권을 행사하던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 멤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단독으로 폭탄 구입과 테러 계획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중한이 폭탄입수계획에 자신도 가담했음을 자백했고,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이 황태자의 성혼식에 맞추어 도련님께 폭탄을 헌상할 방법을 박열과 논의했다고 자백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그 결과 1925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당시 대역죄는 천황,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황태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죄목으로 대심원의 심리가 1심으로 종결되는 중죄였다.

세기의 연인, 죽음으로 헤어지다

마침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를 담당하는 단심의 최고특별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박열은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 주노라!’·‘나의 선언’·‘음모론’·‘일하지 않고 먹어치우는 자들’ 등 4편의 선언문을 발표한 다음 변호를 자임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를 통하여 법정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인용문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 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박열이 이처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건에 여론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열의 요구사항을 들고 재판부와 담판에 나선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첫째, 둘째 조건을 제한적으로 허용 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공판 당일 조선의 혼례복 차림으로 등장한 박열은 검사와 변호사의 질문에 한국어로 대답했다.

 

1926년 3월 25일 대심의 마키노 재판장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형법 제73조 대역죄와 및 폭발물단속벌칙 제3조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자 박열은 미소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중얼거렸고, 가네코 후미코는 웃으면서 ‘만세’라고 소리쳤다.

 

사형판결이 내린 뒤 검사총장 고야마 마쓰키치는 사법대신 에기 다스쿠에게 두 사람의 사면을 요구했다. 테러의 동기가 권력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고 계획 자체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가네코 후미코는 종범으로 정상참작의 여유가 있는데, 그녀만 감형한다면 조선인들의 반발이 예상되므로 주범인 박열에게도 은사를 내려 황실의 자애로움을 보여주자고 주장했다.

 

그해 4월 5일 두 사람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이치가야형무소장 아키야마는 박열에게 감형장을 가져다주었다. 그때 박열은 아키야마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받아두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감형장을 받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튿날인 4월 6일,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옮겨졌다.

 

그때부터 박열은 단식으로 자살을 기도했지만 형무소 측의 강제급식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가네코 후미코 역시 일본 정부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에 분개하면서 끊임없이 자살을 기도했다. 죽음만이 그들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 그해 7월 23일 후미코는 마닐라 삼으로 짠 노끈으로 목을 매어 목적을 달성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은 그해 11월 5일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팔령산 기슭에 묻혔다. 그러자 총독부 관리들은 역적이란 이유로 묘를 높이 쌓지 못하게 하고, 박씨 집안사람들의 성묘도 금지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되어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야당 의원들은 정부가 대역범죄자들을 우대했다며 와카쓰키 내각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로 인해 사흘 동안 의회가 정지되는 촌극을 빚어졌고, 결국 그녀의 사건을 담당했던 다테마쓰 예심판사가 법복을 벗기에 이르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옥중에서 찍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그 후 일제는 박열에게 꾸준히 전향을 요구했다. 그들은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박열이 전향선언을 했다고 발표했지만 그들이 내놓은 박열의 전향서에는 일관성이 없고 일본식 문투가 가득했으므로 조작임이 분명했다.

해방 이후의 활동

1945년 10월 27일, 박열은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 21세에 투옥되었던 그가 무려 22년 2개월 만에 자유를 되찾은 것이었다. 일제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석방이 늦어진 것은 일본 정부가 그를 정치사범이 아니라 대역사범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풀려나자 도쿄에서 대대적인 석방환영대회가 열렸다. 이때 아키다형무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가 수천 명의 조선인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바치고 이름도 박정진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박수갈채를 받았다.

 

복역하는 동안 무정부주의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박열은 공개적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천명한 다음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10월 3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하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와 통합하여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한 다음 단장에 취임했다. 현재까지 민단으로 통칭되는 이 단체는 1948년 8월 15일에 성립한 한국정부로부터 재일교포 유일의 민주단체로 공인받았다.

 

1949년 5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된 후 행적이 묘연했다. 훗날 확인된 바로는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했다는 것뿐이었다. 이 단체는 그와 함께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지사들이 남북한 정권에게 자주적 평화통일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평양방송에 따르면 그는 1974년 1월 17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젊은 날 일제와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해방 후에는 조국통일을 염원했던 그는 끝내 얼어붙은 남북의 거리를 녹이지 못하고 치열한 투쟁의 기록만을 남긴 채 사라졌던 것이다.


Articles

3 4 5 6 7 8 9 10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