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흥분제와 여자 먹기: 식인종 이야기

by 김원일 posted Apr 29, 2017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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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어떤 메모] 여자를 먹었다는 남성은 식인종인가?

 

<남자들은 모두 미쳤어요>, 윤가현 지음, 나라원, 1993

 

홍준표씨의 ‘돼지 흥분제 사건’으로 나는 두 가지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표를 얻으려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국민 안전을 대국민 협박용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사실과 이 땅에서 오래 살려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간을 비롯 성폭력을 목적으로 여성에게 약물을 먹이는 범죄나 데이트 강간은 흔하지만, 막상 돼지 흥분제라는 단어를 들으니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돼지가 흥분했다는 거야? 남자가 먹고 흥분한다는 거야? 비아그라야?

 

나야말로 흥분했다. 약물 강제 주입은 성폭력을 이른바 ‘화간’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 사망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살인 미수다. 홍준표씨만 문제가 아니다. 오십보조차 ‘소중한 차이’지만, 다른 대선 후보들도 오십보백보라고 본다. 여성 의식도 인권 의식이라면, 남성 정치인 중에서 인권 의식이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김대중 전 대통령 정도? 이 역시 이희호 여사의 역할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는 한국사회의 극심한 성차별보다 차별 현실에 대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인식 격차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이렇게 말했다. “강간 피해 여성이 고통받는 이유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모두 여성은 아니지만, 남성 문화는 강간의 의미를 모른다. 돼지 흥분제에 대한 여성의 분노와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 남성성 연구가 어려운 이유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분석 이전에 득도 수준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남자들은 모두 미쳤어요>는 25년 전 내가 여성학을 처음 공부하고 강의할 때 교재로 사용했는데, 남성의 인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듯하다. 지은이(남성)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아직도 성폭력이란 단어는 남성들에게는 용납하기 힘든 용어다”. 저자는 성심리학 전공으로 <동성애의 심리학>, <정신지체장애와 성> 등 많은 저서를 냈다. 이 책에서는 여든다섯가지 사례를 들어 남성의 성문화를 분석한다. 이 글의 제목, “여자를 먹었다는 남성은 식인종인가?”는 그중 하나다(167쪽).

 

“수많은 남성들이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행위를 ‘여자를 먹는다’고 표현한다. 이는 여성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남성의 일방적인 욕구에 의해 성행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행위를 먹는다, 깃발을 꽂는다, 눕힌다는 승리의 뜻으로 표현한다. 일반인들에게 아주 보편화된 음담패설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후 저자는 거북이의 신혼여행 이야기,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여대생을 과일에 비유하는 에피소드 등을 소개하고 있다.

 

남성 문화에서 돼지 흥분제는 그들이 여성을 ‘먹기 좋게’ 하는 기능제다. 저자는 “여성이 남성에게 먹이처럼 보인다면, 남성은 식인종이든지 야수와 같은 짐승”이라고 남성을 ‘설득’한다. 짐승과 식인종이 야만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만일 지구상에 ‘야만족’이 있다면 홍준표씨를 필두로 한 한국 남성보다 더 야만적인 그룹이 있을까. 사실, 남자들은 미치지 않았다. 성폭력은 추잡하거나 변태 행위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적 규범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권력 행위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홍씨의 사연이 사실이든 아니든, 옛날 얘기든, 용서를 구하든, 속으로 억울해하든, 이 모든 상황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 사건이 ‘정치인 홍준표의 현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책에 썼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사회성이 없는 것이며 스스로를 비인격화하는 행위다. 가난은 나라가 구제할 수 있지만, 무지에는 대책이 없다. 이런 사람이 법조인, 국회의원, 도지사였다는 현실이 몸서리쳐질 뿐이다. 그의 말대로 이런 남자들이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후보 사퇴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영원한 은둔을 권한다. “설거지가 여자의 본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본분은 사회를 떠나는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출처: 한겨레신문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92767.html#csidxff96c56b87cab09bae25e99795fd6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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