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롤 두 개가 나라와 여성을 구원했다.

by 공동체 posted Mar 16, 2017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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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롤 두 개가 나라와 여성을 구원했다)

 

이 시점에 꼭 써야 할 글이기에 쓴다. 탄핵심판 선고의 날, 나라를 구원한 것은 “재판관 전원 일치로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로 마감한 21분의 명징하고 깔끔한 선고문만이 아니었다. 그 날 바삐 출근하던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윗머리에 꽂혀 있던 헤어롤 두 개였다.

헌법재판소가 광장에서 일어난 세계에 유례없는 평화적 촛불혁명을 명예혁명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함으로써 국정 농단으로 추락된 국격과 흔들리던 국민 자존감을 확실하게 올려 줬다면, 그 헤어롤 두 개는 여성 대통령 박근혜 때문에 추락된 모든 여성의 자존심과 모든 일하는 여성의 자부심을 확실하게 회복시켜 줬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나는 아침에 그 사진을 보자마자 찡해졌다. 일하는 여성이라면 다 한 번쯤 해 봤을 실수다. ‘아차’ 하고 출근길이나 중요한 회의 가는 길에서 머리에 남은 헤어롤을 알아채는 건 일하는 여성의 일상 풍경 중 하나다. 오죽하면 나는 일부러 까만 색 헤어롤을 마련해 두고 사용할까. 혹시 머리에 남아 있더라도 너무 이상하게 보이진 않도록 말이다. 이정미 재판관은 그 흔하디 흔한 ‘분홍색’ 헤어롤을 썼다.

눈에 띄는 그 분홍색 헤어롤 두 개의 ‘OO’ 모양 덕분에 금방 패러디들이 올라왔다. ‘8 : 0’의 예언, ‘인용’의 예고라는 해석과 함께 말이다. 나는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간절하면, 얼마나 현명하면 이런 패러디를 할까? 조롱은 일체 없었다. 국민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해외 언론까지 박수를 보냈다. ‘그 헤어롤은 이 시대, 성실하게 일하는 여성의 상징’이라면서.

다음 날 광장에는 헤어롤 두 개를 머리에 만 사람들로 가득 찼다. 웃음보가 터졌다. 여성들만이 아니었다. 남성들도 기꺼이 헤어롤 두 개를 말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호쾌하게 웃었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가방에서 주섬주섬 헤어롤을 꺼내서 다 같이 두 개씩 말고 인증 사진을 찍는다. “이 헤어롤 두 개는 우리가 한 일이에요. 우리가 지켜낸 가치예요, 앞으로도 지킬 약속의 상징이에요” 하면서 말이다.

헌법재판소는 이정미 재판관이 했던 그 헤어롤을 역사 유물로 보관하겠다고 한다. 그것도 좋다. 앞으로 3월 10일을 헌법 수호의 날로 정하고 광장에서 모두 헤어롤 두 개를 머리에 마는 상징적 행사를, 대를 이어 가며 하면 어떨까? 딸에게, 아들에게, 손주들에게 “이게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 일이란다. 헌법을 지키는 건 그렇게 중요하단다. 헌법의 정신은 우리 모두의 것이란다. 선조들은 그렇게 명예롭게 헌법의 정신을 지켰단다” 하면서 말이다.

다시 일하는 여성으로 돌아오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일하는 여성을 모욕했고 지금도 모욕하고 있다. SNS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다시 여성 대통령이 나오려면 백 년은 더 걸릴 거다”라는 말이 심심찮게 돌고, 안 그래도 극렬해지는 ‘여성혐오’ 현상을 부추기는 빌미로 쓰이기도 한다. 스스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고 했던 박근혜가 최순실과 함께 여성의 수치가 되고 일하는 여성의 치욕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박근혜는 진정 일하는 여성이었던 적이 없다. 피부 가꾸고 주름 없애고 머리 윤기 내고 화장발 올리고 색깔 맞춘 의상 준비하는데 쓴 그의 시간이 부끄러울 뿐이다. 일하는 여성도 물론 아름다울 권리, 젊어 보일 권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자기가 벌지 않은 돈으로, 더구나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서 그럴 수는 절대로 없다.

이제부터라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 여성으로서 스스로 헤어롤을 말아 보기를 나는 바란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해내기 어려운 그 올림머리 스타일을 걷어차기 바란다.

똑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려면 차라리 가발을 쓰라. 5분이면 가발 쓰고 사건의 현장에 나타날 수 있다. 세월호 일곱 시간의 비밀 같은 게 있을 이유도 없고, 파면되어 돌아간 전 대통령의 자택 첫 손님이 전속 미용사일 이유도 없다. 이 시대가 무슨 로코코 시대냐?

박근혜는 일하는 여성의 명예를 실추시켰지만, 그 헤어롤 두 개는 일하는 여성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여기에서 그칠 수 없다. 모든 일하는 여성의 건투를 바란다!
 

[김진애의 "이 시대 리더십",전 국회의원, 도시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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