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전과 후 신의 변덕을 어떤 목사는 이렇게 풀었다.

by 김원일 posted Feb 19, 2017 Replie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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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슴을 도려낸 하느님

 

마지막으로 홍수로 세상을 멸절한 야훼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자. 궁금하지 않은가? 다행히 설화자는 미세하지만 그걸 엿볼수 있는 실마리 하나를 남겨 놨다. 홍수가 끝난 후 야훼는 노아가 바친 제물 향기를 맡고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나는 처음 이 구절을 제대로 읽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왜냐고? 그 엄청난 사건이 끝나고 모든 게 처음 있던 대로 돌아갔다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야기 서두에 야훼가 온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는 뭐라고 말했나.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사람 지은 걸 후회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물로 심판하기로 했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심판한 후에, 그러니까 사람과 짐승을 모두 몰살시킨 다음에 하는 말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라고? 앞에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어서 심판해야겠다더니 나중엔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니, 이게 대체 뭔 말인가? 홍수 전후에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 똑같진 않지만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그런데 앞에선 ‘그래서’ 심판해야겠다더니 뒤에선 ‘그래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니, 이게 말이 되냐는 거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타고난 성격은 고치기 힘들다고 했다. 대개 공감할 것이다. 흔한 말로 은혜 받았다고 해서 사람 성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인격은 변하기가 참 어렵다. 노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악한 성질은 심판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홍수 후에 사람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었다. 이때 맺어진 언약이 ‘새로운’ 언약이라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그걸 ‘새롭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홍수 사건은 야훼가 ‘부분수술’로는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수술’을 감행한 사건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고친 수술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대수술 후에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악할 뿐,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홍수 심판 후에도 사람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뿐, 야훼가 변하는 것뿐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라 ‘우리 하느님이 달라졌어요!’라는 거다. 야훼는 새 언약을 세우면서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다. 야훼는 다시는 이런 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거다. 야훼의 마음이 변했다! 야훼가 사람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거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이 변한 것밖엔 없다. 달리 해석할 수는 없지 않나.

 

이것을 우린 ‘은총’이라고 부른다. 싸구려 은총 아닌 비싼 은총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은총 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변해서 심판 대신 은총을 준다니까 이를 ‘공짜’라고, 횡재했다고 좋아라 날뛰는 사람은 ‘은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을 게다. 은총은 하느님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일었던 풍랑의 결과니까. 사람에게 은총을 주기 위해 하느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가 말이다. 하느님은 홍수라는 수술 칼로 사람의 환부를 도려내려 고 했지만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자신의 가슴을 도려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분 가슴의 상처에 손을 얹어 느끼는 걸 뜻하고 다시 그 손을 자기 가슴에 얹어 하느님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을 의미할 게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곽건용 목사 저 <알 수 없는 분> 중에서 (pp. 85-87). 꽃자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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