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1 님,
님은 계속 원숭이가 백두산이 되는 논리의 비약을 한다.
중학교에 나오는 두 삼각형이 합동이 되는 세가지 조건이 있다.
그 중 하나를 예를 들어보면,
두변이 서로 같고 두변의 사이에 낀 각이 같으면,
천지가 깨어져도 이 두삼각형은 합동 즉 똑 같은 삼각형이다.
어떤 두 전제가 같다 고 하려면 적어도 논리의 조건이 필요 충분이 되야
두 논리가 맞다라고 할 수 있다.
님은 계속 논리가 비약할 뿐 만 아니라 필요 충분하지 도 않다.
1)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확신과 안심이 뭐가 다르냐고 했는데
그럼 묻겠다. 대답하시라." 라고 님은 말했다.
나는 안심이 같기 때문에 두 전제가 같다 라고 하지 않았다.
두 결과가 같다고 말 한 것 뿐이다.
본인도 그 점을 주의 깊게 보았다면 다행이다.
안심이 같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안심"은 면죄부라고 하는 논리는
님이 하고 있다.
나는 두 전제가 다 같이 "계명"을 무시하고 사거나 얻었기 때문에
같은 면죄부라고 말하였다.
2)
님은 "율법의 한계와 골짜기를 철저히 (무시 반대) 유시하고 얻은 구원이다."
라고 하였다.
먼저 고쳐야 할 것이 있다.
율법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인 님의 한계를 절감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메달리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님은 드디어 고백했다.
구원을 얻는 데 "율법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 했다"라고.
바울이 말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7:24)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로7:9) 라고...
내가 죽는 경험 즉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을 계명 없이 할 수 있나요?
온갖 정성을 드리고 산속에서 수십년 도를 닥아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될까요?
이러한 계명의 역할을 님은 어느 순간부터 필요없게 되었나요?
나는 이제는 좀 자신이 있으니 은혜를 달라고 언제 부터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계명없이 은혜를 구할 자신 있나요?
언제는 계명 유시, 언제는 계명 무시 하게 되나요?
계명을 철저히 무시하는 칼뱅주의도 어느 순간에는 계명을 필요로 할 때가 있나요?
계명의 역할이 절대 필요한 님도 결국 네째 방이네요.
"나의 한계를 무시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 라는 것을
깨달음이 참 깨달음이라는 것을 님과 나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