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1 님, 율법주의가 어때서 - 네번째 방 재림교회 구원론

by 계명을 posted Sep 09, 2016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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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1 님이 토해내시는 그동안 재림교회의 구원론의 문제점들에

저도 많은 부분에 동의가 된다.

 

재림교회의 근본 교리가 틀렸다는 것에 동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림교회가 가진 특수한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가르친 지도자들과

그 밑에서 잘못 배운 목사들과 평신도들의 우왕 좌왕 해온 과거 역사에 동의가 된다는 말이다.

 

님도 그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피해자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선 님은 이 지구상에 모든 종교가 말하는 구원은 아래 셋 중에 하나로 분류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세가지의 구원론의 유형을 말했다.

 

1) 상향적 구원론

2) 인신협동 구원론

3) 하향적 구원론

 

님은 3)의 구원론이 참 구원론이라고 정의하고,

재림교회는 3)을 주장하지만 실제는 2)의 구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님은 잘못 배웠다.

재림교회의 진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재림교회의 구원론은 전혀 위의 세가지 유형에 속해 있지 않다.

 

님이 제시한 도표와 같이 재림교회의 구원론을 도표로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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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의 구원론은 네번째 방이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은 은혜로 계명도 주셨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하향적으로 구원도 주시고 계명도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계명하면 자꾸 상향적으로만 생각을 한다.

계명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결코 아니다.

계명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며 은혜다.

 

믿는자에게 선물로 구원도 주시고 계명도 주신다.

인간은 그 은혜를 누리기 만 하면 된다.

 

계명 행함은 이행득의(以行得義)가 아니고 이행득이(以行得利) 다.

다시말하면 계명은 우리가 지키는 것 만큼 이득을 가져다 준다.

내가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이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계명을 지키면 지키는 자에게 이득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행득이(以行得利)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율법주의다.

 

내가 건강법칙을 잘 지키면 지키는 것 만큼 나에게 유익을 준다.

매일 한 시간을 걸으면 걸은 만큼 나의 건강은 좋아진다.

매일 두 시간을 걸으면 더 건강이 좋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건강법칙은 잘 지키면 잘 지킬 수록 나에게 이(利)를 준다.

 

계명도 마찬가지다.

네 온 정성을 다해 목숨을 다해 지키라 한것은

지키는 자에게 정성을 다 한 만큼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세번째 방의 문제점은 이미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다.

중세기는 천주교가 둘째 방으로 장사를 잘했다.

천국과 지옥을 빙자로 교회도 키우고 돈도 벌었다.

 

중세기 후에는 세번째 방으로 개혁교회들이 칼뱅주의로 교회도 키우고 돈도 벌었다.

은혜로 천국행 티켓은 따 놓았으니...

교회나 개인이나 탐욕에 몰두하여 오늘날 사회를 탐욕의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님의 계명은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탐욕은 그 끝을 모르고 1%가 99%를 노예로 만들고도 그 끝을 모르고 있다.

계명을 버리고 교회가 탐욕-은혜주의에 만 메달려 있었던 결과다.

교회가 그러니 일반사회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세기의 실험이 끝난 칼뱅주의에 뒤늦게 목을 메달고 있는 근자의 이곳 스다민초들은

무엇들하는 인생들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세번째 방의 문제는 더 심각한 곳에 있다.

민초1 님의 도표에도 나와 있듯이,

“하향적 구원론”의 조건은 “인간이 죽었다”이다.

즉 “나”가 죽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위에서 주시는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나”가 버등버등 살아서는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면 조건이다.

 

십자가 상의 두 강도의 다름이 바로 이것이였다.

한 강도는 “나”가 죽고 예수를 받아 드렸을 때 구원이 이르렀다.

다른 강도는 “나”가 살아있었다 그에게는 멸망뿐이였다.

 

그래서 세째방에서 하향적 구원을 얻으려면 “내가 죽어야한다".

인간이 무슨 방법으로 스스로 “내가 죽어야 된다"는 깨달음이 올까?

그것이 바로 계명의 역할이 아닌가?

 

인간이 계명이 없이 스스로 “오호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깨달음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들의 행태를 보면 그 은혜를 얻기위해,

계명없이 죽어야 할 “나”를 깨닫기 위해 또 다른 정성을 드리는 것이

오늘날 새벽기도회요 온 갖 교회 부흥회 모임들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불교와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째방은 첫째 방 그리고 둘째 방과 같이

또 하나의 사단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계명을 버리고 어떻게 인간이 죄인임을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이 단순한 원리를 어찌 이리 모르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인간에게 은혜로 주셨다.

 

믿음이란 어떤 정체된 상태가 아니다.

믿음이란 살아있는 생물이다.

생물은 계속 돌보아야 한다.

생명의 법칙으로 돌보아야 한다.

 

간음한 여인에게 구원을 주시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계명을 주셨다.

 

계명을 은혜로 아는 자는 장사하여 이문을 남기지 만,

계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주인만 의식하다 망한다.

그것이 달란트의 비유다.

 

인간의 마지막 바닥 양심 마져 마비 시키는 탐욕-칼뱅주의에 목 메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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